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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 마커스워십 – 갈릴리 바닷가에서 (소진영 인도) By The Sea Of Galilee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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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ERS WORSHIP
마커스 목요예배 실황 [20.07.23]–
\” 갈릴리 바닷가에서 (By the Sea of Galilee) \”

Arranged by 권미성

| Worship Leader 소진영 |
| Inst. |
Piano 권미성 | Aux Keys 이민영 | A.Guitar 한새별
E.Guitar 임선호 | B.Guitar 곽노연 | Drums 김현성
| Vocal |
Sop 김진영 김가영 | Alto 박은미 이예지 | Tenor 김이환 곽현승
| FOH Engineer 박유기 |
─────────────────────
목요예배 안내 / 초청사역 문의 / 재정후원 신청
마커스워십。 www.markersworship.com
─────────────────────
Worship at 맑은샘광천교회 www.kwangchun.or.kr
─────────────────────
#MARKERS #KWO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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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나무위키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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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amu.wiki

Date Published: 9/21/2022

View: 5774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 뉴스앤조이

말을 풀어 보자면,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는데, 아니 부탁할 일이 있는데 그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는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www.newsnjoy.or.kr

Date Published: 11/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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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의 해석의 문제 – 리폼드뉴스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의 해석의 문제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언어적 유희가 아니다 필자가 신학교 시절에 교수님들에게 들었던 요한복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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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reformednews.co.kr

Date Published: 9/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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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7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수요예배 20130410)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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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4669101.tistory.com

Date Published: 4/6/2022

View: 875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소망의샘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예수님은 미리 준비하신 떡과 생선으로 아침 식탁을 차려 주시고, 식사 후 베드로를 향해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kcjlogos.org

Date Published: 12/14/2022

View: 5844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설교자료실 | 기독정보넷(cjob)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성권목사 [성경본문] 요21:15-19 15절/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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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job.co.kr

Date Published: 9/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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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와신학연구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1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19 정원진 목사 (서울제일교회).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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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cumenian.com

Date Published: 5/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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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25) – 회복하시는 은혜 41 (12 …

그런데 이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질문과 “나를 따르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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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kpccoh.org

Date Published: 1/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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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커스워십 - 갈릴리 바닷가에서 (소진영 인도) By the Sea of Galilee
마커스워십 – 갈릴리 바닷가에서 (소진영 인도) By the Sea of Galilee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네가 나를 사랑 하느냐

  • Author: MARKERS WORSHIP
  • Views: 조회수 166,309회
  • Likes: 709689 Like
  • Date Published: 2020. 8. 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njNwZjfR-Q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5~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 보이셨는데 오늘 본문은 세 번째 나타나신 기록입니다.

14절에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했습니다.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아침을 드신 다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을 걸어오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시면서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할 때마다 한 가지씩을 당부하셨는데 첫 번째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셨고 두 번째는 “내 양을 치라” 하셨고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질문하신 내용을 살펴봅시다.

△15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6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7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세 번을 물으셨는데, 요지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이런 질문을 한 번만 하시고 지나갔으면 그냥 그러려니 할 터인데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고 그것도 매번 질문할 때마다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는 것은 그 질문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일을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으므로 예수님이 세 번 사랑하느냐 물으심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다독거려 준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걸리는 데가 있습니다. 17절,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라는 말이 그런 해석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근심하여 라는 말 대신에 ‘베드로가 안심하여 가로되’ 라든가 ‘베드로가 희색이 만면하여’라고 해야만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마음을 다독거렸다는 해석이 맞는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사랑이라는 말이 원어, 희랍어에서 다른 단어로 쓰인 것을 가지고 무언가 찾아내려고 시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을 때 사용한 단어는 ‘아가파오’였는데, 베드로는 ‘필로’를 사용하여 대답하였다. 흔히 전자는 하나님의 사랑, 신적인 사랑, 숭고하고 헌신적인 사랑,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며 후자는 인간적인 사랑, 조건적인 사랑, 친근하고 우정에 가까운 사랑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물었는데 비해 베드로는 자신이 실패한 경험도 있고 해서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 없었고 단지 그보다는 다소 차원이 낮은 사랑 즉 인간적인 우정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대답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따르자면, 베드로가 예수의 물음에 대해 ‘그러하외다’라고 대답함으로써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이의를 달지 않고 있다는 점이 걸립니다.

따라서 이런 두 가지 해석은 모두 다 흡족할 만한 해석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각도로 이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의 실제 생활에서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다. 부부 간의 대화를 예로 들어 봅시다.

아내가 남편에게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럼, 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다시 아내가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남편이 대답합니다. 그럼 사랑하지, 사랑한다니까. 다시 아내가 세 번째로 묻습니다. 당신 나 사랑하지? 이렇게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냥 지나가는 질문이 아니라, 무언가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는 무언가를 생각해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인이 세 번째 같은 질문한 것에 대하여 남편이 대답합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니까? 이때 남편은 혹시 아내가 자기 사랑을 의심할 만한 어떤 것을 느꼈을까 봐 걱정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째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하여 가로되”라고 했습니다.

‘근심하여’라는 말은 ‘고통을 느끼다, 서운하다’의 뜻으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같은 말을 자꾸 물어오면 나를 믿지 못해 그런가 하며 서운해 하기도 하고 혹은 나의 행동이 부족하지는 않았는가 하며 근심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렇게 베드로가 근심할 만큼 철저하게 베드로의 마음을 확인하시고자 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을 집요하게 확인하는 다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니라 그 다음에 어떤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보다 중요한 어떤 말을 하기 위한 전 단계인 것입니다.

말을 풀어 보자면,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는데, 아니 부탁할 일이 있는데 그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만일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확실하다면 너에게 부탁을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굳이 입 아프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런 뜻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신 다음에 하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을 세 번 하셨는데, 요약하자면 ‘내 양을 먹이고 보살피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부탁을 해 가면서 그렇게 양을 먹이고 보살피게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양을 맡기면서 베드로에게 하신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만 양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목숨까지도 바치며 사랑하는 양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겠는데 자기를 사랑하는 자라야만 안심하고 맡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양이 있는데 그 양을 누구에게 맡길까? 그렇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내 양을 사랑해 줄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 자기의 양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는 그 이유와 원인은 어떤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억지로가 아니라 바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이렇게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15~16절).” 그리고 세 번째 대답인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려면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저는 베드로가 그 해변 가에서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실 때 얼마나 처절하고 비참한 심정으로 벌벌 떨면서 대답을 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내 양을 먹이고 보살피라는 부탁의 말씀을 하실 때에 얼마나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들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이런 공식이 성립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야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보살피게 된다. 그러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양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보살피지 못한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자면, 예수님의 양들을 먹이고 보살피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면 어떤 말로도 변명하지 못할 정도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됩니다. 또한 목회자가 성도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보살피지 못했다면 그것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목회자가 아무리 입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수없이 고백하여도 성도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요즈음 우리 교계를 돌아보면서,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처럼 우리들이 그렇게 대답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아니, 입으로는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한복음 강해 76)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수요예배 20130410)

성경본문: 요한복음 21:15~25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설교말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 번의 질문이 헬라어로는 첫 번째는 아가페의 사랑을 물어보시고, 두 번째도 아가페라는 단어를 쓰시고, 세 번째는, ‘필로스’ ‘필레오’라는 동사에서 나온 친구들 간의 우정의 사랑을 말하는 단어를 사용해서 물어보십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써서 물어보신 겁니다.

아가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또 전적으로 이타적이거나 완전히 헌신적인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 필로스의 사랑을 하느냐, 세 번 반복합니까? 또 단어를 바꿔가면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 사랑은 이렇게 아가페, 아가페, 필로스, 세 겹으로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면 예수님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15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께서 첫 번째, ‘네가 나를 아가파오 하느냐?’ 물어보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필레오 한다고 대답합니다. 자, 이 첫 번째 사랑은 어떤 사랑을 말하는 것일까요? 주님이 이렇게 단서를 붙이십니다,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요 21:15) 여기서 ‘이 사람들’은 헬라어 원어를 보면 ‘이것들보다’라고도 또는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네 마음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더 크냐, 작냐?’ 이렇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린 흔히 이렇게 생각해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더 크냐?’ 이런 뜻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 뜻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이 글을 쓴 사도요한이 섞여 있었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을 사랑하는 베드로의 사랑보다 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더 적다는 말입니까? 그건 있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맡은 일은 다를 수 있지만, 베드로가 맡은 일이 수제자의 자리일 수는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도마나 사도요한이나 다른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뒤질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게 더 크냐?’ 이렇게 물어보신 게 아니라는 겁니다.

이 말씀의 전후 상황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바닷가에 나가서 고기 잡다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뭐라고 물어보시느냐 하면, ‘베드로야!’ 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렇게 부르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베드로의 인생에서 예수님을 빼버리면 무엇이 그의 인생의 전부였을까요? 그 남는 인생 중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고기잡이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기 전 먹고살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기술이라고는 어부로서 물고기 잡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한 마리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지시하시니 고기를 가득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이라는 것은 고기 잡는 배, 만선을 이룬 상태, 그리고 동네에서 같이 고기 잡으면서 잔뼈가 굵은 죽마고우들, 또 예수님을 좇으면서 제자로서 함께 동료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업과 가족배경을 생각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호적상, 베드로는 요한이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호적상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제까지 너의 삶의 내용을 채웠는데, 그 너의 인생내용 전체와 나, 둘을 놓고 사랑한다면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묻고 계시는 겁니다.

이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하겠다고 주저하지 않고 답합니다.

이 말은, 그러므로 이 첫 번째 아가페의 사랑은 베드로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가치를 무엇에 두어야 하는가였습니다. 그동안 경력, 인맥, 배경들 가운데서 살아왔고 책임져야할 사람들도 있지만, 베드로는 그것보다는 예수님을 먼저 생각하며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모든 것의 우선이 예수님이 될 때, 베드로의 모든 것 자체가 예수님 중심으로 될 때,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주님이 죽으신 십자가로부터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베드로는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까지 마음이 쫓아가게 돼서 마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국 안에 머물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제야 제자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십니다.

16절의 말씀입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두 번째, 예수님의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아가페오 하느냐?”입니다. 이 말은 “네가 나를 너의 인생의 목적, 주인으로 선택했으면, 이제 너의 인생 가운데 나를 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느냐?”

당연한 일입니다.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말하니, 이제 예수님께서 물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바로, 살면서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일어날 때도, 잠을 잘 때도, 일을 할 때도 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목적은 바로 주님때문인 것입니다.

예전에 전쟁 통에, 많은 어머니들이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많은 자식들은 이 어머니의 사랑으로 살았습니다.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아이들을 살리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억척스럽고 용감하게 세상과 맞서며 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낫 갈릴리 바다에서 사는 요한의 아들로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주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주를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인 사명을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나의 양을 돌보고, 먹이고, 다스리라는 말입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첫 번째 아가페는 예수님 자신이 베드로의 인생에서 가장 우선이 되겠느냐를 물으시는 거고, 두 번째 아가페는 “나를 위해서 사느냐”를 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세 번째로 “사랑하느냐?”라는 말의 뜻은 첫 번째와 두 번째에 비해서 수평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을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첫 번째, 두 번째 질문에서 나타내었다면, 세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어디든지 가는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첫 번째, 두 번째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헬라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고, 세 번째에는 “필레오”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여기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은 “네가 무엇을 하든지 나와 함께 하겠느냐? 나와 같이 바라보겠느냐?”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기쁨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사명을 가지고 한다하더라도 혼자 뛰지 말고, 어떠한 순간에도 주되신 예수님께 묻고, 예수님의 의견을 구하고, 예수님을 의식하고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정리하여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당시 물어보았던 베드로에게 또 지금 우리에게 주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며 친밀함을 유지하면서 늘 함께사는 삶을 살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진심과 열정을 아시는데도 왜 확인하려고 물어보십니까?라는 식의 대답을 우리가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베드로의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베드로의 진심을 알고, 그 사랑의 확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18~1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해 집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계셔서 아주 좋았습니다. 또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한 자신을 용서하시고, 사랑의 관계에서 사명을 주심도 정말 감사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하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였습니다. 그래서 젊어서는 베드로의 뜻대로 자유롭게 다녔으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말씀을 듣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이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뜻이라고 하면 우리가 가장 귀히 여기는 것이라도 내어 놓을 수 있는 믿음이 생기며, 그럴 때 신령한 행복이 넘치게 됩니다. 빌립보서 3:8-9절에서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베드로가 후에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교의 자리에 갈 수 있었던 것도, 주님의 뜻대로 따를려고 결심하니 남모르는 기쁨이 넘쳤기 때문입니다.(요 21:18).

오늘 우리도 주의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옛 생활이 다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속의 것을 다 끄집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 ‘나’ 라는 자존심… 이런 것들을 다 뽑아 낼 때,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게 되고 남모르는 기쁨과 행복감이 넘치게 됩니다.

‘별세의 지도자’라는 책을 쓴 이중표 목사님이 고백하기를, 자기를 괴롭히는 교인이 한 사람 있어서 하나님 앞에 새벽마다 기도하며 “내가 도저히 괴로워서 못살겠습니다. 내가 가든지 그 사람을 보내시든지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음성이 들이는데, “사랑하는 종아, 그 사람을 꼭 내 보내야 되겠느냐?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곳에 갈 곳이 없다. 다른 교회에 가도 그 버릇은 못 고친다. 내가 너를 인정하기에 맡기니 그를 잘 보살피도록 해라”하고 말씀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라면 기다리고, 참고, 죽겠습니다.” 하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니 주님의 사랑의 손길이 다가오면서 “내가 너를 위하여 면류관을 준비하고, 열 고을 다스릴 권세를 예비했다”하고 말씀하시므로 그는 넘치는 기쁨과 행복감에 감격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사람들은 세계사에 밝고 빛나는 위대한 장을 남겼습니다.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 베드로 등등…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던 믿음의 선조들도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므로 역사적인 위대한 장을 남겼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였고, 그러한 순종의 삶속에 남모르는 기쁨과 희락이 넘쳤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세 번 물어보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을 3중으로 3겹으로 하는 이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네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보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내 모든 정욕과 죄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고 거기서 나 자신을 내려놓고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행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의 전부가 되시어서 주님자체가 우리 삶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어떤 것도 우리를 괴롭히지 못하게됩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우리의 의미가 되시기에 다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이러한 인생으로 살게 되면, 사업을 하든, 장사를 하든, 아이를 키우든, 목회와 전도의 자리에 있든, 주님께서 사명을 맡기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 믿는 것이 어렵다 말하십니까?

예수님을 한겹으로 아니고 세 겹으로 사랑해보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주 예수님께 맞추어 살아가보십시오. 그러면 주님과 함께함이 우리에게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줄 수도 없는 평안과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끊임없이 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어느 때든지 어디서든지 고백하게 하옵소서. 이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한 3겹의 사랑이 우리에게서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진짜로 나타나게 해주시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주님과 함께 수행해나가는 복된 삶을 살게 하여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와 늘 함께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죽어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하인들이 “당신도 예수와 한패 아니냐?”하고 다그치자, “나는 모르는 사람이라.”면서 세 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몸부림치며 통회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차례나 뵈옵기도 했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죄의식과 낭패감에 젖은 채 갈릴리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밤새 수고했으나 고기는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 호숫가에 나타난 어떤 사람의 말대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졌더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제야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물로 뛰어내려 뭍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준비하신 떡과 생선으로 아침 식탁을 차려 주시고, 식사 후 베드로를 향해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꼭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연거푸 던지셨습니다. 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하셨을까요?

“사랑하느냐?” “정말 사랑하느냐?” “정말 진짜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를 미덥지 않게 여기신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재삼 다짐받고 확인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 번 물으신 참 목적은, 주님을 세 번씩 부인하고 뼈저린 회개를 했지만 여전히 의기소침해 있는 베드로의 영적 상처를 치유하고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주님은 베드로의 단 한 번의 대답이 필요하셨을 뿐입니다. 첫 대답을 들으신 후 곧장 “내 양을 먹이라.”고 사명을 주신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즉 첫 질문과 첫 대답으로 합격 판정과 함께, 베드로에게 예수신학교 졸업장 곧 목양 자격증을 수여하신 것입니다.

헬라어 본문은 “사랑”을 의미하는 두 가지 다른 낱말을 쓰고 있습니다. 처음 두 차례는 예수님이 “agapao”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phileo”로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는 예수님도 “phileo”로 물으시고 베드로도 “phileo” 로 대답합니다.

영어성경(NIV)은 “Do you truly love me?”로 되어 있습니다. “agapao”를 “truly love”로 번역했습니다. “agapao”는 성경에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쓰인 낱말입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과, 요한복음 13장 34,35절 말씀에 나오는 “사랑”이 모두 “agapao”입니다.“truly love”는 “agapao”의 탁월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agapao”로 물으실 때 베드로가 “phileo”로 대답하는데, “phileo”는 친구간의 우정을 표현할 때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두 단어를 교차해 가며 쓰는 것을 당시 헬라어 대화법의 관행으로 보기도 하고, 베드로가 “agapao” 수준의 사랑에 자신이 없어서 보다 낮은 수준의 사랑인“phileo”로 답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한편 베드로의 대답에서 좀 더 흥미 있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 모두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안다”는 말도 헬라어 본문에는 두 가지 낱말로 나옵니다. 처음 두 차례는 “oida”이고 세 번째는 “ginosko”입니다.“oida”는 사실을 단순히 지적으로 안다는 뜻이고, “ginosko”는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 고백을 즉시 받아주시고 목양의 사명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다시 물으실 때, 베드로는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점점 확실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이 “oida”에서 “ginosko” 로 발전하는 변화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죄의식과 자격지심에서 벗어나 영적 치유와 회복을 통해 자신 있게 사명에 나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세 번의 물음을 통해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가까이 가셨습니다. “agapao”의 사랑을 물으시다가 베드로의 수준에 맞추어 “phileo”의 사랑으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세 번의 물음을 통해 베드로는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나갔습니다. “oida,”아시는 주님에서 나아가 “ginosko”즉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라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또는 여러 가지 수준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명자의 자격을 얻게 하는 사랑은 직접 경험해 보고 알았기 때문에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 “주님을 진실로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주님 사랑을 매일의 삶으로 그리고 사명에 충성함으로 입증하길 바랍니다.

[목회와신학연구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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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21:1-19

정원진 목사 (서울제일교회)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 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 두 가지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가지를 들라면 그것은 아마도 죄를 짓지 않는 일과 용서하는 일일 것입니다. 인간이 육신을 지니고 있는 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흙으로 빚어졌기에 쉽사리 부서지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는 고해성사라는 것이 있어서,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해를 받는 신부님은 고해하는 신자들에게 “다시는죄 짓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는 않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은 용서하는 일입니다. 내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는 사람, 나를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 나에게 원수가 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입니다.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런 잘못을 저지른 자기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또 그런 자기 자신에게 크게 실망해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단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려고 해도 우리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용서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베드로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주님은 벌써 두 번씩이나 제자들과 만났습니다. 그 두 자리 모두에 베드로도 함께 있었습니다. 첫 번째 만남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수난과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지 못한 제자들의 실패를 상기시키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잘못을 질책하거나 꾸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는 따스한 평화의 인사로 제자들을 포용해 주셨고, 나아가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시며 주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던 일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하지만 수제자 베드로를 비롯한 주님의 제자들은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따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이미 제자들을 용서했지만, 제자들은, 특히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식이나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는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용서 못한 베드로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베드로는 “나는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함께 있던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며 그를 따라나섭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는 말은 주님을 만나기 전의 직업, 즉 과거의 자기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낙향해서, 이제부터는 주님의 제자이기를 포기하고, 그저 평범한 갈릴리 어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분명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지만 아직까지 베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이 주님‘만’의 부활로 그쳤지, 베드로의 부활로 이어지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벌써 두 번씩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아직 예수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요, 예수님의 부활이 나를 위한 부활이라는 부활체험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부활체험이 없었기에 주님의 부활이 내 안에 들어와서 확신이 되고, 믿음이 되고, 헌신이 되고, 위탁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한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기에, 주님께 면목이 없고, 다른 제자들에게 체면도 안서고, 무엇보다도 자기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 전 주님 제자 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저를 대해 주셨지만, 저에게는 그게 더 부담이 됩니다. 차라리 질책하고 꾸중하셨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텐데, 따스한 평화의 인사로 저를 감싸주시고 나아가 주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 못난 저에게 위임하시겠다니, 저는 몸 둘 바를 모르겠고, 주님의 위임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사표내고, 낙향하겠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옛날처럼 평범한 어부로 살겠습니다.” 베드로는 이렇듯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패잔병의 모습으로 갈릴리 자기 고향 마을로 돌아간 것입니다. 모닥불! 빵! 기적의 생선! 고향으로 돌아온 베드로와 동료들은 고깃배에 다시 몸을 싣습니다. 3년 전, 주님을 만나 헌신짝처럼 버렸던 그 낡은 고깃배에 다시 올라탄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던 베드로, 그는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도로 생선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비록 3년을 쉬었지만, 고기잡이로 평생 잔뼈가 굵은 그였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손바닥 보듯 환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철에 따라, 또 시간에 따라 고기떼가 어디에 몰려있는지, 오랜 경험을 통해서 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는 그런 그의 경험과 지식이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모두 허탕이었습니다. 작은 생선 한 마리조차 그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저들은 밤새도록 헛수고한 일로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마지막이니 한 번만 더 던져보자는 심정으로 그물 던지기를 몇 차례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펄펄 뛰는 생선 대신, 물거품 같은 낙담과 실망만 건져 올렸을 뿐입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낮에는 물고기들이 호수 바닥에서 쉬기 때문에 주로 밤에 고기를 잡습니다. 그런데 이제 날이 점점 밝아오니 고기 잡을 가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침내 저들은 그물질을 포기하고 텅 빈 배를 저어서 호숫가로 다가갑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주님께서는 나뭇가지를 모아다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떡을 구워놓고, 또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호숫가에 서서 제자들을 기다리십니다. 배가 약100m쯤 접근해 왔을 때, 주님께서는 “여보시오, 생선 좀 있습니까?” 하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대답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지만, “우리가 밤새도록 애를 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소.” 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시오. 그러면 잡힐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소용없는 일이라고 투덜거리는 동료들을 설득하여, 베드로는 한 번 더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가 그물 가득 걸려든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을 모닥불 주변으로 부르십니다. 싸늘한 새벽에 나뭇가지들이 타는 소리와 함께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빵이 준비되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있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모닥불! 빵! 그리고 기적의 생선! 이것들을 보면서 베드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주님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벌어졌던 온갖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기적의 생선은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나 소명 받던 순간을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그날도 오늘처럼 밤새도록 애썼지만 베드로는 한 마리의 생선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자, 그물이 찢겨질 만큼 엄청나게 많은 생선이 잡혔었지요. 그 때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 라고 말했으나, 주님께서는 오히려 “나를 따르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그를 첫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또 빵은 주님과 나누었던 마지막 만찬을 기억나게 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바로 그날 밤, 주님께서는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시며 이렇게 당부하셨지요.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도 예고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닥불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가야바 집 뜰에서의 그 참담했던 순간을 기억나게 했을 것입니다. 모닥불 앞에서 불을 쬐고 있던 베드로에게 대사제의 여종은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지요?” 그 때 베드로는 만약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며 “나는 정녕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딱 잡아떼었지요. 그 순간 어디선가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했던 주님의 음성이 생생히 베드로의귓전을 때렸습니다. 그 때 참담함과 서러움에 복받쳐 얼마나 눈물을 쏟았던 지요. 이렇듯 지금 감격과 후회가 뒤범벅이 되어 모닥불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랜 침묵 끝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지어준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 대신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하고 마치 그를 난생 처음 만난 것처럼 부르십니다. 이 말이 베드로의 마음에 보통 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 번 물으시는 물음에 겨우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둘러댑니다.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을 다 아시면서, 세 번이나 연거푸 물으시니 어찌 괴롭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은 첫 번째 이유는 양심의 가책이란 사슬에서 그를 해방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스스로의 잘못을 도저히 용서하지 못하고 자학하며 낙향했지만,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벌써 두 번 씩이나 찾아와 평안을 빌었고, 지금은 고향까지 찾아와 손수 조반을 준비하여 대접하시며 베드로를 영접하십니다. 그러기에 사실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물음은 뒤집어 생각해 보면,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야, 네가 비록 나를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괴로워하지 마라. 자학하지도 마라. 나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하는 표현입니다. 이렇듯 주님은 크신 사랑으로 우리 죄를 모두 녹여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클지라도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속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용서와 속죄는 다른 것입니다. 용서는 잘못한 그 사실만을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속죄는 죄의 기억조차도 지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용서’해준 것을 넘어 ‘속죄’해 주셨습니다. 기억에서조차 지워 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주홍빛보다 더 붉은 우리 죄를 눈보다 더 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새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두 번째 이유는 그에게 사도직을 맡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를 배반한 사람에게 어떻게 교회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잘못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그에게 당신 양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람을 쓸 때 자격을 따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결정적인 차이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선회개 후구원을 주장했습니다. “입으로만 회개했다고 죄인이라고 떠들지 말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보여라. 행실로 보여라. 먼저 자격을 갖춰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세례자 요한의 구원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선회개 후구원이라는 도식보다는 오히려 선구원 후회개라는 도식에 가깝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세리나 창녀나 죄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든지 다 와라. 너희는 죄에서 해방됐다. 구원됐다.”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회개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먼저 구원에 대한 감격이 있고, 이에 대한 자연스런 감사의 응답으로 회개가 뒤따릅니다.

복음서는 그런 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세리 삭개오가 그랬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나는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없다고, 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그게 아닙니다. “너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 그 진리를 깨달아라.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라.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살아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이 말을 들은 베드로의 뺨에는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주님의 하늘같은 사랑에 감동되어서 말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는 절대로 주님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죽도록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할 때까지, 이 감격의 순간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았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네가 나를 섬기겠느냐?” “네가 나를 예배하겠느냐?” “네가 교회에 잘 출석하겠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하느냐고 만 물으셨습니다. 왜 일까요? 그건 이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말에 “사랑에 눈이 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상대방의 좋은 점만 보이지 나쁜 점은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니 보기는 보아도 그 단점이 나에겐 나쁘게 보이질 않습니다. 남들은 뭐라 해도 나에겐 오히려 그 단점이 매력으로 보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다 좋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합니다. 이래도 기쁘고, 저래도 기쁩니다. 그래서 고통 중에도 기뻐할 수 있고, 환난 중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의 사랑이, 구원의 감격이 너무 커서 시련과 고통쯤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교회에 열심히 출석해라, 매일 성경을 읽어라, 십일조 생활을 해라.” 하고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강요하지 않아도 저절로 합니다. 내가 오늘의 나 된 것, 지금 내가 사는 것, 내가 이런 축복의 생을 누리는 것,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고, 희생하고, 가난해지고, 죽으셨기 때문인데, 그 사랑과 은총에 감사해서 응답으로 드리는 감사의 행위인 예배생활, 경건생활, 헌금생활이 뭐 그리 어렵겠습니까? 저들은 의무감에서 교회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기쁨과 감사로, 자발적으로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은 그 은혜가 감사해서 울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를 살리는 사람들은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10명의 의인이 없어서 멸망했는데, 만약 교회를 위해 눈물 흘리는 열 사람만 있으면 어떤 교회도 시험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고 반석 위에 든든히 설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제자들을 친히 찾아오시고, 또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신 이야기는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삼고초려(三顧草廬) 이야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삼고초려란 고사 성어는 옛날 중국 삼국 시대에, 촉한의 유비가 난양에 은거하고 있던 제갈량의 초옥으로 세번이나 찾아간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언뜻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비는 인재를 얻기 위해서 제갈량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지만, 주님은 죄인을 용서하시고 그를 들어 당신의 도구, 당신의 사도로 쓰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견지에서 볼 때, 베드로는 지혜로운 사람도, 유력한 사람도, 가문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고, 수난의 현장에서 도망쳤고, 주님을 부인했던 비겁자였고 실패자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그를 친히 세 번씩이나 찾아와 속죄해주시고, 양떼를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인재이기 때문에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찾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곳에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내 양을 돌봐다오.” 비록 우리는 때론 실망도 하고 좌절도 하지만, 때론 주님을 배반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리십니다. 때때로 우린 죄책감에 허우적대며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친히 찾아오셔서 상처 난 우리 심령을 치유해 주시고, 따스한 손 내밀어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꺼져버린 우리의 사명에 다시 불을 지펴 활활 타오르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주님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에 실패했었습니다. 하지만 디베랴 바닷가에서 사랑의 주님과 다시 만나고 이제 자기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도 베드로가 만났던 그 주님을 다시 만나 뵙고 변화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정원진 목사 (서울제일교회) [email protected]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메일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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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25)

<설교 후반부에 인터넷이 갑자기 끊어짐에 따라 온라인 예배를 다시 시작해서 두 개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설교 동영상 1: https://youtu.be/gwUhs2P9f3o?t=2524

설교 동영상 2: https://youtu.be/UWoAFeZ_CXc

2021년 12월 26일 주일예배

✦ 회복하시는 은혜 41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장 15~25절)

[ 들어가는 말 ]

여러분은 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 또는 사람들이 누구십니까? 대개는 가장 먼저 가족이 떠오를 겁니다. 또는 친한 교회 성도님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공동체가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가정이고 하나는 교회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짝지어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복을 주셨습니다. 또 성령님을 보내셔서 성도들에게 임하게 하셨을 때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인 가정과 교회를 깨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사람이 내 배우자가 아니라면, 내 자녀가 아니라면, 내 부모님이 아니라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겁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까? 또한 지금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에 교회의 형제자매들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면, 신앙생활에도 역시 뭔가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묶어주신 공동체의 지체들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도대체 누구를 사랑하고 있는 겁니까?

그런데 사랑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을 하기는 하는데 어떤 사랑을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집착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안식월 때 프랑스 파리를 갔는데 당시 12살이던 아들이 군사박물관을 가보겠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 건물 안에 나폴레옹의 무덤이 있는데, 거기 유언이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나는 나의 유골이 세느 강변,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프랑스 국민 한가운데서 안식을 취하기를 원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국민을 사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사랑한 게 아니라 “그토록” 사랑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청년들을 죽였고,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억지로 전쟁터에 끌고 가서 러시아로 데려갔다가 얼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처럼 자신의 정복욕을 위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서도 승리의 영광을 자기 가족들에게 돌렸고, 또 정복한 나라의 왕의 자리도 다 자기 가족들에게 주었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철저히 그의 야심을 성취하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국민을 ‘그토록 사랑했다’고 말했습니다.

독일 나치 정권의 아돌프 히틀러도 연설할 때마다 ‘나는 독일을 사랑합니다. 게르만 민족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유대인들을 비롯한 많은 다른 민족들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수많은 게르만 민족도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과연 진짜 사랑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그런 식의 사랑이 많은 게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중심적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사랑한다고 하는데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이익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일 뿐입니다. 자기만족만을 위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며 상처를 주고받고, 심하면 다른 사람들을 죽게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1. 주님을 사랑할 때 주님의 양을 먹일 수 있다

1) 회복을 위한 세 번의 같은 질문

지난번 본문과 연결되어,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이 고기를 잡지 못하던 것을 잡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같이 하는데 식사 내내 제자들은 말이 없었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예수님이 피워 놓으신 숯불을 보았을 때, 자기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가 숯불을 쬐고 있던 장면이 그대로 생각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아직 풀지 못한 숙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두 사람만 알고 있는 그날 밤의 일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 그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자기는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빈 무덤을 향해 열심히 달려갔지만,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다가 ‘주님이시다’라는 말에 바다에 뛰어내려 예수님께 왔지만, 방금 잡은 생선을 가장 빨리 예수께 갖다 드렸지만,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는 풀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우리도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문제가 해결이 안 되니까 아무리 맛있는 밥을 먹어도 맛을 못 느끼고, 아무리 즐거운 프로그램을 봐도 재미가 없고, 잠을 실컷 잔 것 같은데도 영 찌뿌둥합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 문제를 풀고 싶었지만 풀 수가 없었습니다. 풀 능력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저녁에 오셨고, 그때 도마가 없어서 일주일 후에 한 번 더 나타나셨지만, 그때 말을 못했습니다. ‘예수님,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라고 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계를 위해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그에게 찾아와주십니다. 그리고 그의 문제를 풀도록, 그래서 그가 회복되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자신이 주님을 부인했던 자리인 숯불 앞에서 하나님의 신뢰를 회복하는 역사가 이제 베드로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15절 상)

예수님이 세 번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데, 마지막 질문이 ‘시몬아’라고 부르시면서 ‘네가 나를 정말로 믿느냐?’라고 하신 게 아니라, 또는 ‘네가 나를 잘 아느냐?’가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셨다는 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베드로는 이전에 분명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전까지 따르며 고백했던 그 사랑은 무슨 사랑이었느냐는 겁니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까? 그분을 따라다녀야 그분이 왕이 되시면 그분 밑에서 높은 자리를 하나 차지하니까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베드로도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갔던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리더라고 으스댔던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얻기 위한 사랑이었습니다.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었는데, 이 순간 예수님이 물어보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말은 ‘이제 너 자신을 향한 자기중심적인 사랑을 포기했느냐?’라고 물어보시는 것과 같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던 순간에도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이 잡혀가신 대제사장의 집 뜰까지 따라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 거기까지 따라갔습니까? 사랑하지 않았으면 따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작은 여종의 질문에도 버티지 못할 만큼의 사랑이라면 그것이 어떤 사랑이란 말입니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첫 번째 질문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늘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버리고 떠나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사람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자신이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과 행동부터 앞섰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앞서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제자가 뭘 해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킬 것이다”(14:15)라고 하셨고, 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14:21)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말로만 ‘사랑합니다’ 한다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런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합니까?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15절 중)

베드로는 ‘예, 저는 다른 제자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다만 주님을 사랑한다고만 고백합니다. 베드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칭찬도 책망도 하지 않으시고 한 가지 명령만 하십니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5절 하)

이것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이며, 그의 사랑 고백을 믿어주시고 그를 용서하신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 주님의 양을 먹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양이 자기의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임을 명심해야 했습니다. 가끔 보면 목회자를 목자라고 하고 성도들을 양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래서 ‘내 양’이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양’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자기 양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방식대로 양에게 풀을 먹이면 안 되는 겁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을 먹이면 안 됩니다. 주님이 선택하신 것을 먹여야 합니다. 인간 목자는 먼저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따라서 양을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진정한 사랑은 예수님 같은 목자, 즉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목자가 되는 것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말로만 사랑하고 말로만 죽을 때까지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베드로가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로만 큰소리치지 말고 너 자신을 희생하여 내 양을 먹이는 목자가 될 때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믿을 수 있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한마디로 말해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강하게 윽박지르는 게 아니라 먼저 본을 보이는 목자, 더러운 이득을 얻기 위해 주님의 양을 이용하지 않는 목자, 약함으로 주님의 강함을 드러내는 목자, 이 땅에서 시들어버리는 거짓 영광을 구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구하는 목자가 참 목자이신 예수님께 영광의 상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내 양을 먹이라” 하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그것을 깨닫고 편지를 썼습니다. 베드로전서와 후서를 보십시오. 양 무리에게 본이 되라고 다른 교회 지도자들에게 권면합니다. 그리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지 말라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른 지도자들에게 권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6절)

여기서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데, 두 번째로 물으실 때는 ‘네가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생략하십니다.

우리가 남들과 비교할 때는 대답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아주 형편없이 살지 않고 어느 정도 괜찮게 살면 남과 비교하며 ‘예, 저는 괜찮지요.’라고 대답하기 쉽습니다. ‘내 사랑이 아주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저 사람보다는 낫지.’라고 비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합리화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를 통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분들에게 질문을 하면 그런 말을 합니다. ‘죽으면 천국에 갈 것 같습니까, 지옥에 갈 것 같습니까?’라고 물으면 ‘천국에는 못 갈지 몰라도 지옥에는 안 갈 것 같습니다. 남을 해친 적도 없고 살인, 강도, 사기 등 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 테러리스트나 범죄자를 보십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어느 정도 괜찮지 않겠습니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나보다 더한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이 정도면 됐지.’라고 스스로 합리화하며 위로하는데, 왜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과는 비교하지 않습니까? 왜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만 비교합니까?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그 사람들과 비교해서 자기가 착하니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은데 스스로 자꾸 합리화합니다. 비교를 해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지, 자기보다 나은 사람, 더 착한 사람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다툼과 갈등이 일어날 때,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실 교횡에서 갈등이 일어날 때는 목회자와 직분자들이 가장 갈등의 중심에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뭘 몰라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잘 알아서 그렇습니다. 교만 때문입니다. 결국은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 내가 더 뛰어나다. 내 생각이 옳다. 내 힘으로 된 거다.’라는 교만이 다툼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통해야 하는 것은 누가 실력이 더 좋으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느냐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와 믿음의 원리만 있어야 합니다. 다른 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닥터이신 분들이라고 ‘닥터 아무개’, ‘프로페서 아무개’라고 불러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의 직분이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장로, 권사, 집사 등 좋은 직분이 많은데 왜 그런 걸로 부릅니까? 또 성도가 그런 것보다 더 높습니다.

그런데 자꾸 세상의 직위에 따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불러야 합니다. 대학을 나온 사람이라면 ‘어이, 김 학사!’ 또 석사를 받은 사람에게는 ‘어이, 이 석사!’라고 불러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전부 타이틀 따라 불러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통하는 것은 사랑과 은혜와 믿음의 원리이어야지, 세상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결국 그런 생각에 포함된 것은 남들보다 위에 있다는 것인데, 남을 나보다 낮게가 아니라 낫게 여기는 겸손에서 귀한 신앙생활이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고, 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잘 알지 못하는 우둔한 사람이라는 겸손한 고백에서부터 사랑과 은혜와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런 비교의 잣대를 버리고, 즉 ‘나는 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했습니다.’라는 식을 버리고,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라고 요구하십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냐? 그것을 보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이번에도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또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에서 ‘내 양으로’ 바뀌었고, ‘먹이라’에서 ‘치라’로 단어가 조금 바뀌었지만, 같은 의미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농담으로 ‘치라’ 했으니까 진짜 쳐 주고 때려줘야 한다고 말하는데, 전혀 맞지 않습니다. 농담일 뿐이지 뜻이 똑같습니다. 조금 더 광범위할 뿐입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7절)

예수님은 두 번의 대답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세 번째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베드로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하시니까 ‘내 대답을 완전히 믿지 않으시는구나’ 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근심합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질문을 받고 근심할 때 왜 예수님이 지금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시는지 그 의도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예수님이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려 하신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사건은 그가 그냥 묻어 두고 싶은 일입니다. 다른 제자들에게도 자기가 부인한 것을 숨기고 있었을 겁니다. 예수님도 모른 척해주면 좋겠다고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숨기고 싶은 일을 예수님이 드러내려고 하시는 것을 알고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한 겁니다.

이것은 자기가 사랑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사랑은 아주 작은 사랑일 뿐이라는 것을 겸손하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자기가 부인한 것을 다 아신다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부인한 것을 다 아시는데도 저는 주님을 사랑하는데, 그러니까 제 사랑은 작은 사랑입니다. 부족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는 것은 바로 이렇게 겸손한 사랑입니다. 돈이나 건물이나 유능함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자기 사랑이 인정받지 않거나 자기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부인해버리는 베드로가 아니라, ‘주님, 저는 언제든지 실패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주님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렇지만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통해 교회를 세우시게 됩니다.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겸손한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통해 지금도 주님은 교회를 세우십니다. 하나님의 양을 먹이고 칠 사람은 바로 그러한 겸손한 사랑을 가진 사람입니다. 자기가 언제든지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연약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며 고백하는, 그러면서도 주님을 향해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교회를 세우십니다.

사실 사역자들이 다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늘 스스로 감탄하는 것은 ‘아니,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계속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사역을 하는가?’ 사실 매주 30-40분 가만히 들어주는 이런 데가 어디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제가 계속 할 수 있습니까? 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사역자들도 ‘내가 잘났으니까 이런 것을 하지.’라고 하는 분은 없으실 줄 압니다. 다 자기가 부족한 것을 압니다. 장로, 안수집사, 권사 등 직분을 받은 것이나, 목자 목녀를 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이런 걸 할 수 있는가? 당연히 못하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시니까 제가 감당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힘과 지혜를 주십시오.’라고 겸손하게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사실 예수님은 앞의 두 번은 ‘네가 나를 아가페로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제가 필리아로 사랑합니다.’라고 친구간의 우정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세 번째로 물으실 때는 ‘네가 나를 필리아로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예, 필리아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이고 필리아는 친구 간의 우정과 사랑을 주로 의미하지만, 예수님이 처음에는 조건 없는 아기페로 사랑하느냐고 하셨더니 필리아로 사랑한다고 해서 세 번째는 낮춰주셔서 필리아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아가페냐 필리아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세 번의 베드로의 부인 사건을 떠올려주시기 위해서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베드로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며 주님 앞에서 고백을 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기의 사랑을 고백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회개를 한 사람에게만 합당한 사명을 베드로에게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2)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의 배신으로 사실 스스로 그 마음에 얼마나 상처로 남아 있었겠습니까?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친히 찾아오셨고, 앞의 두 번에 제대로 고백을 못하니까 세 번째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되풀이해서 물으시면서 세 번 부인했던 그가 세 번 사랑한다고 고백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가슴에 꽉 차 있던 상처를 치유해주시고 그를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이게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나중에 그토록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은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 잘못한 사람에게 기회를 주면 잘한 일이라고 생각은 되지만 그것 때문에 내 마음이 오히려 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기회를 주니까 그때부터 그 사람이 아주 내 마음에 들게 행동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기회를 준 다음에도 그 기회를 통해 바로 서는 것이 금방 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변화를 경험하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그때까지는 내 속이 상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가리켜 소위 ‘사랑 장’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랑의 속성으로 가장 처음 뭐가 나옵니까?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 13:4). 여기서 ‘오래 참는다’는 말에는 ‘나 자신을 희생한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기회를 주면서 오래 참는 것은 내가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그 사랑을 입은 나도 다른 사람에게 오래 참으면서 기회를 줄 때, 그래서 나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어줄 때, 반드시 부활의 역사,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기회를 주었더니 속을 긁어 놓습니까? 사랑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기회를 주기 때문에 내 속이 상할 수 있습니다. 속이 상하다면 제대로 가고 계신 겁니다. 기회를 주었는데도 속이 상하지 않는다면 이상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희생하지 않았다는 말이 되기 떄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회를 받은 사람들인데도 기회를 베풀줄 모른다면 그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없겠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만 기회를 주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삶일 수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뿐 아니라 나를 배신한 사람에게까지도 기회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그런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지금 내 마음속에 배신의 못을 박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래서 지금 내가 관계를 끊어버려야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요즘은 SNS에서 이상하게 구는 사람은 친구에서 끊어버리는 게 쉽다 보니까 실제 관계도 그런 식으로 막 끊어버리는 것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겉으로 볼 수도 있고 억지로 웃을 수도 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지워버리고 제쳐버리고 교류를 전혀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회를 다시 주면 내 속이 상할 수 있습니다. 아니, 상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배신자였던 우리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처절히 고통을 당하며 상하셨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살리시는 역사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2. 각자 다른 사명을 주신다 (18~25 절 )

1) 베드로의 사명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8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는 말은, 베드로가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가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고 싶은 대로 살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사실은 자기를 위한 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라는 말씀은 그 당시 통용되던 속담인데, 이것은 남이 옷을 입혀 주고, 해야 할 일을 정해 주고, 가야 할 곳으로 데리고 가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베드로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원래 속담에는 ‘네 팔을 벌리리니’라는 표현은 없는데, 이 말은 노인의 무기력함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으려는 체념의 몸짓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팔을 벌린다는 것은 로마시대의 십자가형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처형당했다고 교회 전승에 전해집니다.

띠를 띠운다는 표현 역시 십자가에 팔을 묶는 행동을 암시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묶여서 복음의 신실한 증인으로 자기가 가고 싶지 않은 곳에 끌려갈 것이며, 예수님이 당하신 죽음을 그도 맞이하게 될 것을 암시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19절)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라는 겁니다. 죽기까지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은 “나를 사랑하라. 내 양을 먹이고 치라. 선한 목자가 되라.”라는 말씀입니다.

2) 요한의 사명

예수님이 제자들과 교회에게 남겨주신 사명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증언의 사명입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그런데 목양의 사명을 위해서 베드로를 준비시키셨듯이, 증언의 사명을 위해서 하나님은 그 동안 다른 한 제자를 준비시키고 계셨는데, 그는 바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입니다.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0-21절)

‘주님이 사랑하시는 저 제자도 저처럼 주님을 위해 죽게 되는 겁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퉁명스럽게 보이고, 듣기에 따라서는 가벼운 책망 같게도 들립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2절)

그 제자는 죽지 않고 있을 수도 있고 일찍 죽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베드로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베드로야, 이것은 네가 관심을 둘 문제가 아니라 내가 알아서 할 문제다. 너에게는 하나의 의무만 있다. 나를 따르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받은 사명이 있고, 요한이 받은 사명이 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베드로는 목자와 설교자와 교회의 증인이 되며 결국 순교자가 됩니다. 반면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느라 숨어 다니며 나중에 오래 살았지만, 교회 지도자와 예언자가 되었고 또 신실한 작가가 되어 요한복음, 요한1, 2, 3서,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살다 죽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주신 사명이 각자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진 한 가지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나를 따르라!” 따르는 모습은 다릅니다. 그런데 따르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생활의 초점은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속해야 하고, 그분께만 책임을 져야 하며, 그분만 바라보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 사랑으로 다른 지체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말씀이 제자들에게 나가자 오해가 생깁니다. 어떤 오해입니까?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3절)

그 제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설령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하고 가정하신 것 뿐인데, 제자들은 그렇게 하시겠다는 말씀으로 전해 듣고 오해한 것입니다. 악한 의도는 없었겠지만 본의 아니게 요즘 말로 ‘가짜뉴스’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약 그 제자가 죽지 않게 되든지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그것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이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결정하실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양을 돌봄과 희생을 통해서 나타난다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의 사랑은 신실한 기록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이 사람이 바로 요한인데, 요한이 쓴 글들을 보면 그는 아주 지적으로 예민한 사상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서론을 보면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높은 수준의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모든 상황을 다 목격했던 제자인 요한은 지성과 통찰력과 감수성을 겸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의 일을 기록한 것은 아주 신뢰할 만하다는 겁니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4절)

여기서 ‘우리’는 요한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 그를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제자들일 수도 있고, 그가 섬긴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그의 기록을 토대로 이 책을 최종적으로 묶으면서 마지막 언급을 여기에 쓴 겁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5절)

이것은 과장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이 과장법을 잘 씁니다. 시편에도 보십시오. ‘눈물이 너무 많이 흘러서 침대가 둥둥 떠다닙니다.’라는 식의 과장법을 씁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더라도 우리 지식과 교리의 한계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 나가는 말 ]

마지막으로 정리해보면, 요한복음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겠다는 약속으로 시작되었습니다(1:12). 그런데 이제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세 번에 걸친 질문과 “나를 따르라”, “내 양을 먹이라”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분의 이름을 믿는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는 길이라는 의미입니다.

생명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입어 영생을 얻은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라고 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삶입니다. 사랑 없이는 그 누구도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질문을 드립니다. 우리의 참 행복은 어디에 달려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의 것을 많이 가진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돈이나 내가 소유한 어떤 것도 진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일시적으로는 줄 수 있지만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비싼 옷을 입거나 고급 음식을 먹거나 유명한 곳을 여행한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작은 회사에서 크고 유명한 회사로 직장을 옮겼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사업체가 번성해서 큰 사이즈로 옮기고 매출이 두 배, 세 배 올랐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던 학교에 합격하거나 자녀가 좋은 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 잡아 엄청난 연봉을 받는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행복해집니까? 참된 행복, 영원한 행복은 간단합니다. 주님의 명령대로 사랑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할 때 행복해집니다. 누가 내게 못되게 할 때 확 끊어버리면 행복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고 속이 상해도 오히려 품어주고 기회를 줄 때,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배신자인 우리를 품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수준이 낮은 우리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도록 끌어 올려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우리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가운데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 행복과 기쁨과 평안, 그리고 주님의 이 사랑 안에서만 가능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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