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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 기도 하는 손 | 알브레히트 뒤러 기도하는 손!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반전주의) 답을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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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던 뒤러의 ‘기도하는 손’ 반전 이야기
아직도 블로그, 유투브, 책에서 친구와의 우정을 상징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으로 소개되는
본질을 흐리는 가짜 감성팔이 이야기. 이제 좀 그만~
그림 속 허세 이야기를 하는 iAn
마드리드 라디오스케치 대표
Hong ik University, Seoul, Industrial Design, Bachelor’s degree 2010
Carlos III University, Art Management, Master’s degree 2014
Hero.D Design Studio, Director 2010-2012
특강 문의:
[email protected]
instagram: @radio_sketch
radiosket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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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 예화

유명한 화가가 된 알버트 뒤러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해서 학비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 그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뒤러의 “기도하는 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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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onebody.org

Date Published: 6/11/2022

View: 7142

좋은글 –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이런 많은 아름다운 손 가운데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손이 있으니, 뒤러가 그린 <기도하는 손>이다. 알브레이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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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bb.or.kr

Date Published: 4/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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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 기도하는 손 모델은 누구였을까? – Fruitfulife

뒤러, 기도하는 손. 위의 그림은 독일의 유명한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이란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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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ruitfulife.net

Date Published: 7/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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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러와 ‘기도하는 손’의 경건미? – 진리와 사랑 (TLT)

그렇다면 과연 이 기도하는 손의 진짜 임자는 누구일까? 가장 손쉬운 추정은 뒤러 자신의 손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것은 뒤러가 여러 자화상을 그린 …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truthnlove.tistory.com

Date Published: 8/7/2021

View: 4228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 여혜당 일기 – Daum 카페

독일 뉴론박물관에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기도하는 손’이 있다. 유명한 화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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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cafe.daum.net

Date Published: 4/5/2022

View: 8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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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뒤러 기도하는 손!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반전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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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뒤러 기도 하는 손

  • Author: 허세미술관
  • Views: 조회수 4,6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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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1. 15.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4llMhncVT-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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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버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 17,099 ) 2015-12-23

유명한 화가가 된 알버트 뒤러의 어린 시절은 무척 가난해서 학비조차 낼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를 만나서 학교에 갈 수 있는 방법을 의논하던 중에 친구가 이런 제의를 했습니다.

“뒤러야, 우리 두 사람 모두 공부를 계속할 수가 없으니 네가 먼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해라. 그러면 나는 식당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 널 도울게. 그리고 네가 공부를 마치고 나서 나를 지원해주면 우리 둘 다 공부를 할 수 있지 않겠니?”

두 친구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결정하고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뒤러의 친구는 식당에 가서 그를 위해 열심히 일하여 매월 꼬박꼬박 학비를 보냈고, 뒤러는 친구의 도움으로 미술학교에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한 후 뒤러는 자기의 학비를 벌기 위해 많은 희생을 한 친구의 도움을 생각하며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그 친구는 식당 한 구석에서 절친한 친구 알버트 뒤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친구 뒤러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 주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많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 저의 손은 이미 식당 일로 인하여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으니 제가 할 몫까지 뒤러가 모두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기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고있던 알버트 뒤러는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의 손을 바라보는 순간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즉시 붓을 들어 사랑하는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하였습니다.

그 그림이 바로 그 유명한 뒤러의 “기도하는 손”입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우리는 일상에서 늘 손을 움직이고, 많은 사람들의 손을 보면서 살아간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가끔은 아름다운 손에 대해 이야기한다. 자식을 안은 손, 병자를 돌보는 손, 상대방을 잡아 이끄는 손, 창작에 몰두하는 손에서 우리는 아름다움과 보람, 가치를 느낀다. 이런 많은 아름다운 손 가운데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손이 있으니, 뒤러가 그린 <기도하는 손>이다.

알브레이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는 독일 르네상스 시기의 위대한 예술가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여 눈으로 본 세계를 감동적으로 표현하는데 열중하였고, 특히 성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독창적인 수법으로 재현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런 위대한 예술가가 남긴 걸작이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그림이 <기도하는 손>이다. 그런데 단지 거친 모습의 모아 쥔 두 손만이 있는 이 그림에는 위대한 사랑과 믿음이 깃든 아름다운 친구의 우정이 숨어있다.

1490년대 젊은 화가 뒤러와 프란츠 나이스타인은 절친한 친구사이였다. 이 둘은 너무 가난했기에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둘은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두 친구는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이 돈을 벌어서 다른 사람을 돌보아주기로 작정했다. 그 결과 프란츠가 일하게 되었고, 그의 뒷바라지로 뒤러는 학교에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뒤러는 유명한 화가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프란츠는 친구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일했다. 그 결과 뒤러는 학교를 졸업하여 유명한 화가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다.

이제 역할을 바꾸어 자기가 친구를 미술학교에 보내기 위해 돌아왔다. 하지만 프란츠는 친구를 위해 너무 오랫동안 희생하며 험한 육체노동을 했기에 손이 굳어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수가 없었다. 프란츠는 마음이 아팠지만 어쩔 수 없이 화가가 되는 꿈을 포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츠를 찾아간 뒤러는 창을 통해 프란츠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뒤러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님! 저의 손은 이미 일하다 굳어서 그림을 그리는 데는 못 쓰게 되었습니다. 내가 할 몫을 뒤러가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참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소서!’

이 광경을 본 뒤러는 어떠했을까? 마디마디 상처투성이의 손이지만, 아마도 자기를 위해서 희생하고 기도하고 있는 친구의 손을 바라보면서 이 손이 자신을 위해 온갖 희생을 치룬 사랑과 우정으로 뭉친 진정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순간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복받치는 감정을 참으며 그 자리에서 즉시 연필과 그림도구를 펼치고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정성스럽게 스케치했다. ‘프란츠! 자네의 손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네. 세계의 제일 아름다운 작품이 바로 내 눈앞에 있네.’ 이렇게 해서 뒤러의 유명한 작품 <기도하는 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그림 속 손의 주인공은 바로 뒤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친구 프란츠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손이기도 하다. 이 그림을 그리고는 뒤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다.’ 그렇기에 뒤러가 그린 손은 아름답게 가공하려는 어떤 의도도 없이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표현되어 있다. 비록 거칠게 굳어진 손이지만 마주 잡은 손의 모습이 한 인간이 다른 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이타행(利他行)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뒤러의 <기도하는 손>에 담긴 일화는 기도가 가지고 있는 은밀하면서도 진실한 가치와 능력을 이야기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라고 말한다. 이 그림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이며, 그 감사는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 친구의 공부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손가락이 휘고 굳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됐지만 친구의 성공을 진정으로 기뻐하는 감사와 희생의 손인 것이다. 자신의 희생과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모아진 이 뒤틀린 두 손이 세상에 희생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전하신 그리스도의 삶 같지는 않은가? 성서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께서도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기도 속에서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많은 나를 버릴 수 있으며, 이웃을 위한 사랑과 참다운 희생을 하나님께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기도하는 모습일 것이다. 바로 기도의 과정은 눈물과 땀과 피와 영혼을 하나님께 바치는 고통과 희생이 따르기에 살아서 할 수 있는 순교라고 말하는 것이다. 특히 기도는 어떤 문도 열 수 있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고난과 시련의 해답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성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명시하고 있는 것이며, 그 기도는 우리가 가야할 길과 구해야 될 것들을 명확하게 제시해주지 않는가?

프란츠가 친구 뒤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 뒤러의 재능이 하느님의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밝히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기도의 힘이다. 그 <기도하는 손>은 뒤틀리고 상처투성이의 투박한 노동의 손이지만 진정 아름다운 희생과 사랑, 우정이 깃은 세상의 빛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남아 심금을 울리고 있다.

기도할 수 있을 때까지 기도하라.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할 수 없다고 기도를 포기하지 말라.

기도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이미 당신은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챨스 스펄젼)

뒤러와 ‘기도하는 손’의 경건미?

뒤러와 ‘기도하는 손’의 경건미?

크리스천 기도 자세의 표준처럼 간주돼온 것 하나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그림, ‘기도하는 손'(Betende Hände, 영어 Praying Hands)이다. 뒤러는 독일이 자랑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판화가/장식가/미술이론가/수학자이다.

아마 이처럼 교인/신자들 눈에 익은 그림도 드물 것이다. 수많은 교인들이 아주 어릴 적부터 잠자리에 들기 전 꼭 작은 벽화나 조각에 있는 이 손 모습을 바라보거나 연상하며, 이 포즈 그대로 두 손을 모으고, 두 눈을 꼭 감고 기도하도록 집안에서 교육 받으며 자랐다.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꼭 이렇게 해야만 제대로 하는 기도인 양 가르치곤 해 왔다. 그만큼 이 ‘기도하는 손’ 자세는 유명하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소위 ‘합장'(合掌) 자세이다. 과연 이 그림대로의 모습이 성경적인 기도 자세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합장이 우리네 기도의 표준 자세라고 일러주는 구절이 성경에 전혀 없다! 더 나아가 성경은 기도를 위한 특정 자세-눈 감기, 두 손 모으기, 두 손 마주잡기나 깍지끼기 등-에 관한 아무런 지시도 암시조차도 하지 않았다. 구태여 성경 속 신앙인들의 기도 자세를 논하자면, 서서 기도하기, 엎드려 기도하기, 무릎 꿇고 하기, 두 손(팔) 들고 기도하기 정도이다. 또 예수님은 식전 축사(‘식기도’)나 기도 때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 그 자세가 오직 주님께만 허용된 기도자세인지는 모르지만.

그런데도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 지금껏 거의 절대적인(?) 파워를 구사하면서 그 그림 및 포즈가 전 세계 신/구교 신자들에게 함께 널리 보급돼 왔다. 바람직한 현상일까? 아마도 어떤 독자는 “별 걸 다 따지네. 그냥 저렇게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이지, 그걸 갖고 구태여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가 있는가?” 할 지 모른다. 그렇다면 역지사지로, 더 따질 필요도 없이 우리가 구태여 이 기도 포즈를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화인 일화들

그런데 뒤러의 ‘기도하는 손’의 배후에는 좀 미심쩍은 내력들이 있다. 이를 좀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자.

우선, 1508년작인 이 그림 속 기도하는 손의 실제 모델이 누구였냐는 이야기.. 그러니까 화가가 누구의 손을 보고 이 그림을 그렸나에 관한 일화로, 감동적인 ‘진짜’ 스토리로 굉장히 널리 유포되어 있다.

이 손 모델 일화엔 서로 다른 두 버전이 있다. 간추려 본다.

먼저, 뒤러와 그의 어릴 적 친구였다는 “프란츠 크닉슈타인”이 둘 다 아주 가난한 가운데 서로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하여 한 쪽이 고향에서 일과 기도를 하면서 지원할 동안 다른 한 쪽은 먼저 학업을 닦고, 성공한 후 돌아온 뒤에는 서로 역할을 바꿔 교대하기로 굳게 약속했다는 내용이다. (한 버전에 따르면, 그러기 위해 ‘동전 던지기’를 했단다). 퍽 오랜 후, 과연 알브레히트가 대성하고 귀향하여 자신을 후원해온 친구 프란츠의 집을 찾아가 유리창을 들여다 보니 그 날도 프란츠가 노동으로 거칠어진 두 손을 모아 뒤러가 대성하기를 빌고 있더라는 것이다. 뭉클한 감동에 눈물이 솟구친 뒤러가 “자, 이젠 네가 공부하러 갈 차례야”라고 말했지만, 프란츠는 고개를 저으며 “그동안 노동 일을 하다 보니 그림 솜씨도 많이 줄고(?) 손도 거칠어졌다. 이제 와서 새삼 공부를 해선 뭘 하냐? 다만 네가 성공한 것으로 만족하련다”는 식으로 대답했단다. 친구의 이 말에 너무나 미안하고도 다시 감격한 뒤러는 눈물을 흘리며 그 충정에 일말이라도 보답하는 심정으로 프란츠의 기도하는 두 거친 손을 길이 기념하려고 이 그림을 제작했다는 줄거리다.

그 다음으로는, 내용은 위와 거의 같지만 손 모델은 친구가 아닌 뒤러의 동생이라는 설이다. 이 두 가지 설이 뒤러의 이 ‘기도의 손’의 중요한(?) 의미성을 풍선처럼 부풀려 주면서 동시에 이 기도 자세가 표준적인 것인 양 역시 풍선처럼 하늘 높이 띄워 주는 역할을 해 왔다.

하지만 언뜻 경건하고 참되게 들리는 이런 스토리를 퍼뜨리는 사람들의 바람[願] 및 주장과는 달리, 이 두 가지 교대 학업/지원설은 전혀 근거 없이 조작된 허구에 불과하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지 이제부터 설명하련다.

뒤러의 집안은 친구의 도움 없이는 공부를 못할 정도로 가난한 가정이 전혀 아니었다! 헝가리 귀율라 부근의 아이토스에서 독일 바이에른(즉 바바리아)의 뉘른베르크(Nürnberg, 또는 누렘베르그/Nuremberg, 누럼벍)로 옮겨온 이민자였던 아버지, 알브레히트 뒤러 1세는 성공적인 금세공인이었다. 뒤러 자신, 금세공 일을 배우는 것으로 장인 수업을 시작했다. 뒤러의 어머니 바르바라 홀퍼는 바로 뒤러 아버지의 스승이었던 당대 금세공 대가의 딸이었다. 그러므로 부부가 뒤러의 미술 학업을 뒷바라지 하지 못하리만큼 ‘가난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 부부가 낳아서 길러낸 자녀가 모두 최소 14, 최다 18명이었고 알브레히트는 그 셋째이면서 차남이었다.

뒤러의 대부인 안톤 코버거 역시 금세공업자였다가 출판업자가 되어, 독일 전국에 24개 인쇄소와 국내외의 수많은 오피스를 둘 정도의 대사업가였다. 따라서 뒤러가 재능은 뛰어나도 혹 돈이 없어 미술 수업을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면, 그를 가장 먼저 도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상의 간단한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가난한’ 뒤러와 ‘프란츠 크닉슈타인’ 사이, 또는 뒤러와 동생 사이의 아름답고 아픈 학업/후원 상호교대 맹약설은 빛을 잃고 만다. ‘기도하는 손’에 얽힌, 눈물을 자아내는 애틋한 배경의 에피소드가 ‘뻥’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검증되지 않은, 실화 아닌 실없는 이야기에다 선뜻 신뢰와 애정을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인터넽에는 이 야화를 소개하는 수많은 사이트들이 자기네가 뭔 대단한 선행이라도 하는 양 이 우화로 혹세무민하고 있으니 참 개탄할 노릇이다.

진짜 모델

그렇다면 과연 이 기도하는 손의 진짜 임자는 누구일까? 가장 손쉬운 추정은 뒤러 자신의 손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것은 뒤러가 여러 자화상을 그린 사실로도 간접 입증된다. 또한 매우 정교하게 묘사된 이 그림 속의 손가락들은 뒤러 자신의 긴 손가락들과 가장 닮아 있다.

▶ 뒤러의 자화상: (28세 때인 1500년에 제작)

손 모양은 그렇더라도 이 ‘합장’ 기도 자세 역시 본래 뒤러의 창의적 아이디어였을까? 그렇지 않다.

일단 이 ‘기도하는 손’의 내력을 보면, 본래 이 그림은 천주교 성당 제대(祭臺) 장식화(altar piece)의 일부를 위한 밑그림이었다. 즉 야콥 헬러라는 부유한 상인의 후원으로 프랑크푸르트의 도미니칸 수도회 성당 앞면의 제대화로서 뒤러에게 의뢰한 것이었다( 제대화 링크: > ) 뒤러는 거기 들어갈 다양한 그림들 가운데서도 사도의 기도하는 자세를 특히 염두에 두고 궁리하기 시작했다.

3면작으로 되어 있는 이 제대 그림에는 파울로 보이는 대머리 사도의 기도자세를 포함, 3명이 비슷한 합장 자세를 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서도 이 사도의 포즈가 ‘기도하는 손’과 같다.( > ) 그러나 이마저도 뒤러의 비슷한 기도 포즈의 첫 작품이 아니었고, 그가 앞서 그린 ‘드레스덴 제대화’에도 비슷한 포즈가 나타나 있다( > ) 역시 3면작인 드레스덴 제대화의 가운뎃그림은 1497년 완성되었으나 양쪽 옆 그림은 1504년쯤 추가되었으며. 거기서 오른쪽의 ‘성 제바스티안’ 의 손 모습은 4년 후에 그린 ‘기도하는 손’과 거의 같다. 뒤러는 그밖에도 이 포즈와 비슷한 그림들을 앞서 그린 바 있다.

그러므로 더더구나 친구 ‘프란츠 크닉슈타인’의 손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하는 형태는 뒤러의 오리지널일까? 호주의 문화비평가 윌리엄 올베리 박사가 밝힌 대로, 사실 뒤러는 이 손 자세를 이탈리아에서 모방했다고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뒤러는 이탈리아로 최소 2회 견학 나들이를 했고, 그 도중에 당대 대가들의 작품도 직접 볼 기회가 있었다.

다음 두 그림을 비교해 보자. 왼쪽 그림은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만테냐의 ‘성 안드레와 성 롱기누스 사이에 계신 부활하신 크리스토님'(1472년작)에서 오른쪽에 서 있는 롱기누스 가 합장한 손 모습이다. 뒤러의 손 모양과 거의 똑 같다.

만테냐의 원 그림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

따라서 뒤러의 ‘기도하는 손’은 만테냐의 그림 속 롱기누스의 손 모습을 본 떠 큰 틀로 삼고, 뒤러 자신의 손을 보고 상세히 그려 넣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합장 자세가 이 때 시작됐다고 할 수는 없고, 이전부터 있어 온 천주교도들의 거의 공통된 기도 자세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한편 올베리의 관찰에 따르면, 뒤러의 기도 손은 비록 일부 관절은 좀 휜 것으로 보이지만 , 손톱은 노동자가 아닌 일반 사회인처럼 잘 다듬어져 있고, ‘값비싼’ 종류의 옷소매를 곁들였다. 그렇다면, 더군다나 가난한 사람의 기도하는 손 모양이 아니라는 결론이 자연스레 나는 것이다. 적어도 노동자 청년이 미술학도인 뒤러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릴 적부터 최소 십 수 년간 온갖 잡일을 하느라 거칠어지고 험해진 손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이 기도하는 손이 뒤러의 친구 또는 동생 아무개의 것이었다는 낭만적인(?) 설화는 순전히 누군가 꾸며낸 이솦 식의 우화임이 분명하다.

뒤러는 경건한 신자?

이 글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뒤러가 얼핏 간절하고 경건해 뵈는(?) 이 ‘기도하는 손’에 걸맞을 만큼의 기도자요 “경건한” 신자였는가 라는 의문을 이어서 다루어 보려고 한다.

뒤러는 주로 당대의 다양한 천주교 성당 장식화 등 카톨맄 관련 그림들을 그렸지만, 세속 작품도 흔하다. 그 가운데 ‘멜랑콜리아 I'(Melencolia I’, 1514년작)이라는 동판화가 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다 수많은 물체들을 미세하고 정교하게 새긴 이 판화는 ‘기도하는 손’과 맞먹을 만큼 뒤러의 대표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그림 안에는 두 날개의 ‘천사’로 보이는 여성 캐맄터와 ‘아기 천사’ 또는 쿠피드 로 보이는 캐맄터가 등장해 있고, 곁에는 잠을 자는 듯 웅크린 깡마른 종의 개가 있다.

이 그림 속에는 또 여러 상징물들이 마치 무대 위의 빼곡한 소도구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다. 심각한 명상적 얼굴의 여성 캐맄터가 손에 쥐고 있는 컴퍼스 외에도 아기’천사’가 무슨 의자처럼 천을 깔고 올라타 있는 수레바퀴, 톱, 대패, 망치, 못, 직선자 등 당대의 장인들이 쓰던 다양한 도구가 바닥과 주변에 널려 있고, 곁에는 돌공(石球)과 역시 돌을 다듬어 만든 5각 다면체(희미하게 해골이 새겨져 있음!), 그리고 구석에는 연금술사들이 쓰는 소형 화로도 놓여 있다. 여성 ‘천사’의 허릿춤엔 열쇠 꾸러미와 자루 모양의 지갑이 달려 있다.

두 캐맄터의 뒷 건물 모서리에는 사다리가 걸쳐져 있고, 건물 벽의 한 쪽면에는 천칭(저울), 한 쪽 면에는 모래시계와 종이 걸려 있으며, 종 바로 아래에는 숫자판이 조각되어 있다. 이 숫자판은 가로와 세로, 양방 사선 등 전방위로 각 수열의 합산이 34씩인, 소위 ‘마방진'(magic square, 마술정방형)이다. 이런 숫자판이 중세에 공적으로 소개되기는 이 작품이 처음이다.

그런가 하면 하늘에는 뱀 꼬리를 달고 비상하는 모습의 박쥐 같은 새의 날개에 작품 제목이 새겨져 있고, 그 배후의 어떤 혹성(?)인가로부터 하늘을 꽉 채우는 광선이 비취는데, 박쥐가 날면 밤일 텐데도 모순되게도 하늘 위에는 아취 모양의 무지개가 걸려 있다. 그 아래 쪽은 해변처럼 보인다.

뒤러는 도대체 이런 소도구들, 그리고 전체 그림을 통해 뭘 나타내려 한 것일까? 의혹이 일지 않을 수가 없다.

흥미롭게도 이런 상징물들은 프리메이슨들이 매우 선호하는 것들이다! 컴퍼스와 (여기엔 없는) 대각자는 더군다나 메이슨 로고를 이루는 대표적인 두 심벌일 정도이다. 그래서 메이슨들은 그랜드 라지 이전시대 인물인 뒤러가 중세의 모종의 비밀집단에 개입된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왔다. 개 눈엔 뭐만 보인다고 그들로서는 당연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열하면, 추가적인 석공/목공용 도구, 석구와 해골이 새겨진 돌 다면체, 소위 ‘야콥 사다리’, 연금 화로, 천칭, 모래시계 등이 죄다 메이슨들이 반겨 “환장하는” 요소들이다. 사면에 뿌려지는 빛살, 울리기를 기다리는 종 등도 마찬가지. 특히 거의 예외 없이, 모든 메이슨 라지에는 잘 다듬은 매끈한 마름돌과 거친 마름돌이 놓여 있는 것과도 뭔가 통한다는 게 비평가들의 주장이다. 그래서 메이슨 자체 평론가들 치고 뒤러의 이 작품에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더욱이 이 모든 것 위에 뒤러는 금세공인의 아들인 금세공인 출신의 수공/회화 예술 장인이었다. 메이슨들이 볼 때는 더 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메이슨 후보감인 것이다.

과연 뒤러는 ‘그랜드라지 전 시대’의 메이슨이었을까? 뒤러의 생애를 볼 때 “구린” 구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가 (미켈란젤로나 다빈치 등이 참여했다는) 중세의 모종의 비밀조합에 개입됐다는 기록이 현재까지는 전무하므로 확인하기가 불가능하다. 추정만 난무할 뿐.

호사가들, 비평가들은 뒤러가 고대 그리스 때부터 내려오는 소위 ‘4대 담즙질’의 하나인 멜랑콜리아가 현대의 우울증이 아니라 일종의 ‘천재정신’이라고 주장한다. 즉 외로운 천재일 수 밖에 없는 명장 뒤러의 내적 고심과 장인 정신 또는 다른 고차원의 담즙질로 승화될 수 없는(?) 문제 해소의 벽에 부닥친 좌절감(?) 등을 소도구 집합들을 통해 나타내는 일종의 자화상이라는 것이다. 여성 천사 캐맄터가 뚫어져라고 허공(?)인가를 바라보는 형형한 시선이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곁에서 뭘 열심히 쓰고 있는 아기천사/쿠피드 캐맄터는 일종의 정서적 도우미 격인 ‘유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른 개는 아마도 피로와 휴식을 위한 태만욕구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뒤러는 실상 천재인 동시에 우울증 환자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의 몇몇 자화상에 그려진 커다란 두 동공은 안정된 행복감과 미소보다는 불안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말해 준다는 분석이 있어왔다(예: > ). 실제로 그는 자신의 고향 뉘른베르크를 비롯한 유렆 도처에 창궐한 역병으로 인한 죽음과 저주를 무서워했고, 1494, 1505-1507년의 이탈리아 여행도 역병으로부터의 피신 차원이었다는 설이 있다. 그의 시구(詩句) 하나는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내일 매장돼 있을지 모른다”라는 것이었다. 이 기간중(1498년) 그는 또 요한계시록에 근거한 종말론 시리즈 목판화를 만들기도 했다.

사실 죽음은 일찍이 그를 좌절시킨 주된 요인이기도 했다. 지옥과 연옥도 무서워 한 뒤러는 1502년에 죽은 부친 뒤러 1세의 구원 여부를 안타까워 했고, 1514년 어머니의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을 임종하면서도 공포에 치를 떨었다. 같은 해 제작된 이 작품 멜랑콜리아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기념비’라는 설도 있다. 뒤러는 또 2년 뒤인 1516년엔 신화적인 그림인 ‘페르세포네의 피랍’도 그렸다.

청년 시절인 1490년대에 당대 북 유렆의 지도적 예술인인 마르틴 숀가워의 문하생이 되려고(?) 떠난 듯 하나, 정작 숀가워는 뒤러가 도착한 얼마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것이 못내 아쉬웠던지 뒤러는 그후 모두가 금세공업자이거나 화가였던 고인의 아들 형제들을 두루 만나고 다니기도 했다. 1494년 7월 7일 뉘른베르크로 돌아온 그는 23세의 나이로 구리세공인의 딸이자 아마추어 하프 연주자인 약혼녀, 아그네스 프라이와 결혼하지만, 뒤러는 결혼 불과 3개월 후 홀로 알프스로 떠나 산맥을 넘으며 동식물 등 자연을 묘사한 그림들을 그려냈다. 물론 계속 같이 살긴 살았으나 둘 사이에 끝내 자녀는 없었다.

그러나 뒤러가 메이슨이든 아니든(고심하는 멜랑콜맄 천재였든), 우리로서 중시되는 점은 그가 그다지 성경적이거나 우리가 대단히 존경할 만큼 경건한 신앙인은 분명 아니었다는 점이다. 성경에서는 부정한 동물의 하나인 박쥐의 펼쳐진 두 날개에다 자신의 명제를 내건 점이나, 한밤의 광선 위에 내걸린 모순된 무지개 형상, 사다리, 석구, 돌 다면체 위의 해골, 모래시계와 마방진, 연금 화로 등은 중세 명장들에게 거의 예외없이 발견되는 복잡한 신화적 요소 또는 헤르메틱스나 오컬티즘을 시사해 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여성 천사, 아기 천사라는 영물은 존재하지도 않고 개념조차 있을 수 없다.

카톨맄 교회에 대한 개혁 지향 정신도 그렇다. 메이슨들은 그들의 횃불/광선 상징이나 ‘일루미나티(광명파)’라는 호칭에서도 그렇듯 소위 계몽(enlightenment) 정신을 강조한다.

뒤러는 종교개혁이 막 시작되던 무렵, 이를테면 과도기를 살던 사람이었다. 뒤러가 살던 당시의 뉘른베르크는 마르틴 루터의 개혁 중심지의 하나였다. 이탈리아를 중심한 문예부흥과 인문주의 등을 적극 지지하고 답습한 뒤러가 루터의 개혁 정신에 호응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는 또 루터의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준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인문주의자/성경원문학자인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와 친구였고, 두 번에 걸쳐 에라스무스의 초상화(1520/1526년)를 그려 주기도 했다 . (예: > )

뒤러는, 루터의 최대 후원자로 그를 봐르트부르크 성에 숨겨 주었던 작센 선제후, 현주(the Wise) 프리드리히 3세에게서 선사 받은 것을 비롯, 최소 16권의 루터 저서를 갖고 있었고, 루터의 개혁관에 심취해 있었다. 그랬던 주된 이유는 루터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정신적 스승인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지도자 요한 폰 슈타우피츠를 존중한 데다(루터 역시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사 출신이었다) 슈타우피츠의 설교를 두 번 들었고, 직접 함께 식사를 하며 자신의 작품 사본도 증정했기 때문이다. 또 슈타우피츠의 이름을 딴 일종의 종교연구단체인 ‘소달리타스 슈타우피치아나(SS)’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뒤러는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고 영원히 고통 당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두려움을 달래려고, 해골을 곁에 두고 자신을 채찍질하며 금욕적 고행을 추구하는 히에로니무스(=제롬, 라틴어 성경 불가타 역자), 제대 앞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화상, 도리깨를 든 예수로 자신을 풍유하는 등 고행적 주제를 선호하여 작품을 그려냈다. 또 슈타우피츠의 영향으로 예정론, 인간의 철저한 죄성과 부패와 무가치함, 육체를 “죽이는” 고행 등의 효력을 믿었다.

뒤러는 또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한다는 바람과 끊임 없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근로 정신도 강조했다. 그래선지 부단히 작품을 양산해 냈고, 죽기 얼마 전에는 자신의 수학 연구를 집대성한 수학 이론서를 써 내기도 했다. 그는 “미술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므로 유용하다”는 지론을 편 바 있다. ‘멜랑콜리아’와 같은 해에 제작됐으면서 대조적인 인상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는 평온해 뵈는 분위기 속에서 열심히 연구/묵상하면서 지내고 싶어하는 작가 자신의 바람이 시사된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에도 모래 시계와 해골 등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한 해 전 작품인 ‘기사, 죽음과 마귀'(1513)에서는 길곁에서 악령들이 조롱하든 유혹하든 상관없이 꿋꿋이 말을 타고 가는 기사의 말 아래로 충직스런 개가 따르는 모습을 통해 어떤 정신적/근로적 그리고 영적(?) 승리 개념을 표출하려 했다. 이 판화는 그가 선호하던 당대의 문예부흥 후원자 귀족(들)에게 응원을 보내는 정치성을 띠고 있다는 일설도 있다. 뒤러는 “참 신앙의 첫 표지는 악령들에 대한 싸움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뒤러의 신앙 개념은 중세에서 개혁기로 넘어가는 문예부흥적, 과도기적 미성숙성을 엿보여 준다.

뉘른베르크 출신의 뒤러를 익히 알았던 마르틴 루터는 1528년 4월 6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말을 남겼단다:

“그런 탁월한 인사를 위한 애곡은 마땅하고 바르다…크리스토님께서 그 분의 지혜의 충만(즉 천국) 가운데로 받아들여 주셔서, 가장 난국인 시대에, 그리고 다가올 더 많은 난국의 시대(미리 벗어나)에 행복한 죽음을 맞은 그를 우리는 복 받은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평안히 안식하기를. 아멘.”

과연 루터의 바람대로 뒤러는 천국에 가 있을까..?

알브레히트 뒤러의 <기도하는 손>

** 기도하는 손 ** 독일 뉴론박물관에는,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르네상스 시대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기도하는 손’ 이 있다. 유명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 었던 뒤러는 그림 공부를 위해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갔다. 그곳에서 역시 화가의 꿈을 가진 한스를 만나 함께 하숙을 하며 둘은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둘은 가난했다. 그들은 돈벌이를 하면서 그림을 배워야했기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한스가 제안을 했다. “뒤러야, 우리가 도무지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데 이렇게 해보자. 네가 먼저 그림을 배워 라. 내가 돈을 벌어 너를 돕겠다. 네가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 네가 나를 도와주면 되지 않겠니?” 한스는 열심히 일해 꼬박꼬박 학비를 보냈다. 뒤러는 한스의 도움을 받아 그림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뒤러가 학교를 졸업할 쯤에는 그의 그림이 하나 둘씩 팔리기 시작했다. 이제 뒤러가 한스의 뒷바라지를 할 차례였다. 뒤러는 한스가 일하는 식당을 찾아 갔다. 때마침 한스는 식당의 한구석에서 친구를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이었다. “주여! 저의 손은 노동으로 굳어져 이미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나이다. 제 가 할 몫의 능력을 뒤러에게 주시고 주의 영광을 위해 제 친구가 진실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자기를 위해 희생한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본 순간, 뒤러는 자기가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떤 것보다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뒤러는 그 자리에서 연필을 들어 친구를 위하여 신 앞에 모아진 한스의 손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러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는 손이 가장 깨끗한 손이요 가장 위대한 손이요 기도하는 자리가 가장 큰 자리요 가장 높은 자리요.” 이렇게 친구에 대한 사랑과 고마운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알브레히트 뒤러 의 ‘기도하는 손’ 이 다.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독일이 EU에 가입하기전 독일화폐에 그려져 있었던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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