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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 장 설교 | [Live]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 (에베소서 1:1-6)_주일 2부 예배_베이직교회_조정민 목사_20201122 19159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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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실시간 스트리밍 시작일: 2020. 11. 2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42yLMGdDwuM

[장별설교] 에베소서 1장 하나님의 구속경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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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별설교] 에베소서 1장 하나님의 구속경륜

에베소서의 기록 시기

에베소서처럼 교회론을 명징하게 또한 은유적으로 표현한 서신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에베소서 안에서 다양한 신학적 주제를 끌어낼 수 있지만 가장 독보적인 주제는 교회론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바울의 전도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입니다. 2차 전도여행은 사도행전 15:40-18:22에 기록되어 있으며, 사도행전 18:19-21에서 에베소가 잠깐 언급됩니다. 이때가 AD 50-52년 사이였습니다. 에베소서가 기록되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서원을 행하다 붙들리게 됩니다. 그후 가이샤라로 이동하여 수년을 지내고 다시 로마 감옥으로 이동합니다. 로마에 도착하여 잠깐 있는 동안의 이야기를 사도행전에서 기록하면서 마무리됩니다. 에베소서는 로마에 도착한지 얼마지 나지 않아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에베소의 문화적 종교적 배경

에베소서는 철학의 도시요, 경제 정치의 도시였습니다. 특히 에베소는 소아시아 지역의 수도 역할을 했던 곳이기 때문에 주변에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했습니다. 당시 에베소 인구가 20-25만 명으로 봅니다.지금의 목포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20만이란 숫자는 지금의 서울의 세 배 가까이 되는 거대한 도시로 여겨도 무리가 없을 만큼 거대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는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에 하나였을 만큼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월등한 도시였습니다. 에베소 경제에 강력한 힘을 미쳤던 것은 바로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아데미 여신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데미 신전의 크기와 중장함이 얼마나 큰지 아직도 세계 7대 불가사의로 남을 만큼 유명합니다. 종교와 우상의 중심지에 있던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무려 4배나 규모가 컸고, 기둥들이 높이가 18m에 달한다고 합니다. 아데미 신전은 에베소 지역 모든 영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와 연관된 문화와 종교행사 등으로 인해 에베소는 부와 명성을 손에 쥐었습니다. 철학의 도시요, 지독한 우상의 도시였던 에베소 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때 세워진 교회이지만 본격적인 사역을 하게 된 것은 3차전도 여행 때입니다. 사도행전 19장으로 가면 에베소 교회 전도 내용이 나옵니다. 아마도 에베소교회는 2차전도 여행이 아닌 3차전도 여행 때 본격적인 사역을 합니다. 사도행전 19:9-10에 의하면 초기에는 회당에서 전도하다 유대인들이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두란노 서원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워 성경을 가르칩니다. 2년 동안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을 통해 아시아 전 지역에 이르도록 복음이 전파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거짓된 신의 도시였던 에베소 안에 참된 살아계신 하나님이 전파되자 소동이 일어나고 폭동이 일어납니다. 결국 바울은 유대인의 시기와 아데미 신상을 만드는 사람들의 합세로 인해 결국 쫓겨나게 됩니다. 그로부터 약 10년 정도의 시간이 흘러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가게 되고 에베소교회를 향한 애뜻한 사랑으로 에베소서를 기록하게 됩니다.

에베소서의 목적

에베소서는 큰 두 가지 주제를 다룹니다. 하나는 십자가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하나 됨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1:10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하고, 1:23에서는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라고 말합니다.3:10에서 ‘교회로 말미암아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4장에서는 그리스도이 몸을 세우기 위해 여러 직분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5:32을 보십시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러한 맥락에서 에베소서를 본다면 교회는 헛된 신을 경배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대안 공동체’이며, 모든 차별과 구분을 페기하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에베소서 1장

에베소서 1장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2절 인사말

3-14절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찬양함

15-23절 바울의 기도

에베소서 1장 본문

인사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에베소서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에베소서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에베소서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에베소서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에베소서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에베소서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에베소서 1: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의 기도

에베소서 1: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에베소서 1: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에베소서 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에베소서 1: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에베소서 1: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에베소서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에베소서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1. 1-2절 인사말

1절을 유의하여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을 사도(Παῦλος ἀπόστολος Χριστοῦ)로 소개합니다. 사도의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ἀπόστολο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는 예수 그리스도가 보낸 사도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이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기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편지합니다.

바울은 ‘성도들’과 ‘신신한 자들’을 두 번 비교하여 사용함으로 성도들이 갖는 두 가지 특징과 정체성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성도는 신신한 자들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거룩하다’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사용된 거룩의 뜻은 도덕적 거룩으로 제한시켜 사용하지 않습니다. 신자들의 거룩성은 그들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분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바울의 수신자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그의 백성들로 구별하였기 때문에 거룩하였다. 초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에 있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역사를 언급한다.”

먼저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구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편지 안에서 ‘은혜와 평강’은 다른 일곱개의 편지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됩니다. 은혜는 바울이 주장하는 새 언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며,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2절을 유의하여 보면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예수님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2. 3-14절 하나님의 구속계획을 찬양함

3-14절은 하나님의 구속계획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구속하셨을까요? 바울은 본문 속에서 몇 가지를 알려 줍니다.

ㄱ. 창세전에 택하셨다.(4절)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전에 선택하셨습니다.

ㄴ. 기쁘신 뜻대로 택하셨다.(5절)

5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했을 때, 하나님 안에서 큰 기쁨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생각하시고, 기쁨을 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ㄷ. 거저 주시는 은혜로 택함 받았습니다.(6절)

6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함이라고 말합니다. 즉 찬송의 목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탁월하심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ㄹ.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 받았습니다.(3,4,5,6,7절)

가장 중요한 선택의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데 ‘그리스도 안에서’ 주십니다. 4절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5절에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6절은 어떻습니까?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는 ‘통하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7절에서도 우리의 구속이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 속에서 중요한 한 가지 원리를 발견합니다. 그것은 철저히 인간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주도권이 있고,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선택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6절 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말이 6절에서, 14에서 반복합니다. 바울이 강조하고 싶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예정되었고(5절), 구원 받았고(7절), 통일되었으며(10절), 기업이 되었고(11절), 영광의 찬송(12절)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복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3절)

15-23절 바울의 기도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시대, 새 언약의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한 바울은 이제 하나님께 에베소교회를 위해 기도합니다.

기도의 서론(15-16절)

‘이로 말미암아’는 3-14절까지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신비를 이야기합니다. 그로 인해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두 가지를 얻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이며, 사랑은 성도간의 수평적 관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불가분의 관계로 서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증명되며, 사랑은 믿음이 전제되어야 참된 사랑이 됩니다. 믿음 없는 사랑은 자기 열심이며, 사랑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클라인 스노드글래스이란 학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에게로 따로 구별한 사람들을 위한 ‘사랑’으로 불가피하게 이끈다.”

아마도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믿음과 사랑에 특출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2장에 나타난 에베소교회를 볼 때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1:15에 나타난 믿음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자, 그렇다면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ㄱ.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17절)

바울은 가장 먼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알다’라는 헬라어 ‘ἐπιγνώσει’는 ‘더 깊이 알다’다는 뜻의 형태로 일반적 앎보다 더 깊이, 바르게 아는 것을 뜻합니다. 비록 에베소교회가 다른 신앙 안에서 자라기를 했지만 이교적 문화 속에 있기 때문에 종종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왜곡되어 흐트러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는 지식 수준에서 머물르지 말로 날마다 더 많은 하나님의 지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ㄴ. 마음의 눈이 밝아져(8절)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목적이 아니라 원인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이짐으로

①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압니다.(8절 중)

부르심의 소망은 구속사의 전역사에 일어나는 사건과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재림과 심판으로인해 성도들이 받게될 모든 상급을 포괄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도들에게 소망이 되며, 이 땅을 살아갈 이유와 목적이 됩니다.

②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8절 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기업으로 삼으신다하셨습니다. 기업은 장손이 물려 받을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의 기업이 되시고,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기업이 됩니다. 이러한 역설은 기업이란 단어가 갖는 독특성 때문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영광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이 됩니다. 기업을 사랑이란 단어로 바꾸면 더 명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얼마나 기뻐하시는가.라는 말입니다.

③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19절)

세 번째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믿는 우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대로 역사하십니다.

이러한 간구의 이유는 예수님의 승귀하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바울은 20-22절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며, 하늘에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승귀(昇貴, exaltation)는 다시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자리로 되돌아감을 말합니다.

1장의 마무리는 22-23절에서 명징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모든 구원의 목적들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승귀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시는 충만입니다. 교회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만 결국 이 땅에서 하늘을 간직하며, 하늘의 모든 계시를 담지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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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제1장 강해

에베소서 제1장 강해

1.1-2 에베소서의 서론(발신자와 수신자 및 인사)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에베소서는 바울사도가 쓴 옥중서신으로, 그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이라고 적고 있다. 먼저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변증한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이방에 전할 때에 특히 유대인들의 방해가 많았는데, 이들 방해꾼들은 바울을 사도로 여기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사도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제자를 말하는데, 좁게 보면 분명 바울은 12제자에 들지 않기 때문에 사도라 말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그는 단호히 자신을 사도라고 변증한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사도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상세한 설명은 사도행전에 나타나지만,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고 복음전파를 방해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향하던 중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곳에서 눈이 멀었으며 그 뒤 그가 어떠한 소명을 감당해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 주님으로부터 명령으로 받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났고 또한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점에서 분명히 사도라는 점을 각인시키고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자신이 사도된 것은 자신의 소망과는 별개로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라 말한다. 정작 자신은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는 일이 본연의 사명이었는데, 이와 반대로 예수를 위하여 살게 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로마서에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에 에베소서에서는 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 이유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과는 로마의 교인들과 달리 친근감은 물론 바울을 더 잘 알고 있었기에 이 말을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 아닐까? 아니면 에베소서가 교회론을 다루고 있어 종의 문제보다는 사도로서 교회가 어떻게 서야 할 것인가를 강하게 전하기 위한 의도에서 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빌립보 교회와는 너무나 깊은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바울이 그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인다면 다소 개인적인 서신에 중점을 둔 경우에는 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으나, 전체 그리고 전교회를 전제로 한 것일 때에는 사도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신에 종이라는 말을 생략한 것이 아닐까? 역시 이것도 추측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란 구체적으로 에베소 교회의 교인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에베소라는 도시에 하나님의 택정함을 받고 예정가운데 있는 모든 무리를 두고 말한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성도란 거룩한 무리를 말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라는 말로 끝맺으면 될 텐데 여기에 덧붙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일까? 이 말 속에서 우리는 이 서신이 비단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독자를 바울사도가 생각하고 보낸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어쩜 멀리 보면 우리도 여기의 독자가 될 수 있으며, 수신자가 될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당시의 편지의 일반적인 양식에 따라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발신자인 자신이 어떠한 사람임을 먼저 알리고, 그리고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인가를 밝혔다. 그리고 이들에게 인사로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다. 그런데 이러한 은혜와 평강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사실상 사람으로부터 받는 은혜는 일시적일 수 있다. 어제 나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오늘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사이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평강은 우리 자신 만으로부터 찾는 경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때론 우리가 건강하기 때문에 평강을 누린다고 해 보자. 그러나 이러한 건강도 순간일 뿐이다. 물질이 우리를 평강에 이르게 한다고 보자. 그러나 부자라고해서 다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던가? 돈으로 침대를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단잠을 살 수 없듯이 말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러한 은혜와 평강은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있다. 바울사도는 평강과 은혜라고 하지 않고 은혜와 평강이라 하였다. 왜 이러한 어순을 택한 것일까? 우리가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진정한 평강,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평강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은혜란 무엇인가? 너무나 많이 들어 왔던 것처럼,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의 결과이다. 우리가 무슨 구원받을 행동을 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죄로 인하여 죽었던 우리들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이외에 우리를 죄에서 구속할 그 어떤 방도가 있었던가? 이것이 바로 은혜이다. 이러한 은혜를 깨닫게 되면 자연히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 바로 샬롬, 평강이다. 이것은 방금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간적인 평강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주어진 은혜의 결과로 드러난 평강이다. 그렇기 때문에 평강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 자신을 보면 건강도 물질도 사회적인 지위도 별 볼일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라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에베소서 1.3-6 성부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에베소서 제1장 3절부터 14절까지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하나님 이 삼위에 대한 찬양을 하고 있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순서에 따라 먼저 3절부터 6절까지의 성부 하나님에 대하여 먼저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은 먼저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한다. 찬송은 인간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와는 다르다. 찬송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돌려야 하는 것이다. 가끔 찬양대의 찬양을 듣고 박수를 치는 일을 겪곤한다. 그리고 사회자는 “우리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올립시다”라고 멘트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이 찬양을 하는 자들에게 격려와 그들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끔 대표기도를 하시는 분이 “찬양대의 찬양을 통하여 은혜 받기를 원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도 바른 표현이 아니다. 오로지 찬양받을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그 이외의 누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없다. 만약 찬양을 하는 자에게 박수를 보낸다면 하나님께 돌려야 할 찬양을 도둑질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을 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라고 한다. 말하자면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복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먹고 입고 자는 우리 일상의 의식주의 풍성함을 일컫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신령한 복”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신령한 복이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해서는 차차 점진적으로 밝혀지겠지만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일컫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신령한 복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바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조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신다고 한다. 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복을 누릴 수 있을까? 그것은 당연하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며, 이 예수와 우리가 연합을 함으로써 그의 친 백성이 되게 된 것이다. 만약 포도나무 줄기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란 결코 이와 같은 복을 누릴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성도인 것이다. 또한 그의 친 백성이 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는 맏아들이 되시고,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 아들들이 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예수를 믿는 자, 그와 연합된 자가 바로 이 복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들들이 되게 하시며 하늘로부터 신령한 복을 받게 되는 자들은 어떠한 과정을 통하여 그 일원이 되는 것일까? 바울은 만세전부터 택하시고 그 택하신 자들을 예정 가운데 부르셨다고 본다. 칼빈의 선택과 예정의 교리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우리의 능력이 탁월하기 때문도 아니요 우리의 행실이 완전히 도덕적이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정가운데 은혜로 불러 자녀 삼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그에게만 오로지 영광과 찬송이 돌아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Sola gratia, Soli Deo gloria!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아 온전히 그 분께 찬양과 찬송을 올려 드리며, 그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장 큰 하늘로부터 주어진 복이며, 이 복을 누리는 우리들에게는 세상의 복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좀 더 깊이 묵상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백성임을 잊지 말고 비록 삶의 현실은 고난과 고통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하더라도 하늘로부터 주어진 신령하고 큰 복을 우리가 소유한 자들임을 알아 넉넉히 이겨나가는 우리게 되었으면 좋겠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에베소서 제1장 7절에서 12절까지의 묵상/ 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고 있는가?

우선 이 부분을 묵상함에 있어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개역성경은 물론 개역개정에도 인칭대명서인 “그의” 또는 “그”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성부 하나님을 가르키는 것인지 아니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키는 것인지 분명히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부터 분명히 하고 시작을 하자. 여기서는 우리가 죄 사함을 받게 된 과정과 그 결과를 살피고, 죄 사함 받은 자의 삶의 이정표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1.7-12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하나님)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하나님)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죄 사함의 구체적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는가? 이하에서 살펴보면 죄 사함이라는 속죄의 사역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이는 하늘로부터 시작하여 이제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데, 이는 과거 선택과 예정 가운데 있었던 자들이 이제 현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복은 하늘로부터 내린 신령한 복으로, 이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다함없는)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핏 값으로 속량함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죄 사함의 속량은 지혜와 총명의 신이신 하나님의 비밀(musterion)이기 때문에 감히 우리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정하신 친 백성을 속량하심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oikonomia)을 따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드러나게 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죄 사함의 속량의 결과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첫째로, 이 속량의 신비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하늘에 있는 것”이란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들과 천사들을 말하며, “땅에 있는 것”이란 현세를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과 주께서 창조하신 천지만물을 포함한다. 따라서 주의 십자가의 보혈은 단순히 인간이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 구원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충만”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통일을 이루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의 죄로 인하여 만물도 신음하고 있다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한 바 있음을 생각해 보라. 둘째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기업이 대규모 회사였으며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도 참 좋은 일이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다.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충만,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늘로부터 내려온 신령한 복으로 채워주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이상의 복이 또 있을까?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시는 것은 물론이며, 이제 바꾸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를 달리 표현하여 천국 기업을 누릴 자가 되겠다고 하거나 또는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겠다고 번역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문구를 문구 그 자체로 받고자 한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기업으로 삼으셨는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니 참으로 나는 “황공무지로 소이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과 같이 죄 사함의 속량을 허락하시고 만물을 통일케 하시며 우리를 하나님의 기업으로 삼아 주시겠다고 하셨다면, 이제 구원 받은 백성이 하나님에 대하여 해야 할 약속이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1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찬송을 올려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우리 자신이 바로 찬송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있을까? 비록 쉬운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을 바로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빛과 소금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으로 평가를 하고, 그들 스스로 빛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는 구원받은 백성이 맞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어야 한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에베소서 1장 13절-14절 묵상/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

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지금까지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설명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13절에서는 “그 안에서”라는 말로 시작을 하고 있는데, 이 말은 위에서도 여러 번 등장한 문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계속 이 용법을 사용하고 있을까? 이미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과 질서(구원의 서정序程)는 그리스도를 경유하심과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심, 그리고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박윤선). 그리고 위의 세 가지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중보역(仲保役), 그의 공로 및 우리와 그의 연합을 의미로 담고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바울은 에베소 교인을 향하여 “너희도”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너희도”라는 말이 아닌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여기서는 “너희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위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본래 택한 백성인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을 지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용어를 바꿈으로써 이러한 구원의 서정은 비단 택한 백성이라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 너희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너희들” 이방인들도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믿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진리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또한 어떻게 그들은 이 말씀을 알게 되는 것인가? 바울은 진리의 말씀이란 곧 구원의 복음과 같은 것이라 본다. 따라서 진리가 무엇인가의 문제는 곧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앞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도 가능하게 될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일까?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1:2-4)라고 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렇다면 진리의 말씀 역시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며, 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이 이방인들임에도 어떻게 진리의 말씀인 복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믿게 된 것인가? 칼빈도 말한 바와 같은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믿게 되었고, 이러한 믿음을 통하여 이방인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인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즉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양자(養子) 의식의 확인표를 붙이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성령에는 “약속의”라는 말이 붙어 있다. 이 말이 붙은 것은 구약에서 예언으로 약속한 대로 오신 성령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이렇게 신실한 예언의 성취로 오신 성령이니 장래의 영광스러운 구원성취도 보증하시는 성령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이는” 이라고 표현한 “성령”은 보혜사로서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은 자 또는 위의 11절의 표현대도 설명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심에 대한 보증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보증(arrabon)이란 매매를 함에 있어 계약금(보증금)을 주는 것을 의미하므로, 향후 미래 우리의 완전한 구속을 전제로 한 현재적인 약속을 알게 하며 보증이 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이다. 그리고 우리의 완전한 구원은 미래적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선택과 예정 가운데 이미 구원을 허락하신 것이기에 “그 얻으신 것”(peripoieseos)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값 주고 사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에 영광의 찬송을 올려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1.15-23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

1.15-19 바울의 감사와 간구의 내용들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제1장 15절부터 23절까지는 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향한 감사와 간구의 기도이다. 우리가 이 내용을 살피기 전에 먼저 보아야 할 것은 “이로 말미암아”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로 앞 두 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도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아 기업을 보증하셨다는 점이다. 그런데 바울은 15절에서 너희 믿음과 함께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듣고 감사한다고 말한다. 물론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속함을 받은 것도 참으로 감사할 제목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좀 더 나아가 그들의 삶을 두고 감사하고 있다. 즉, 그들은 믿음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구체적으로 사랑이라는 삶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 사도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믿노라”라고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믿는 자로서의 그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과연 바른 것인가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치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라면 그 삶은 구체적으로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처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드러나야 하는 것 아닐까?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이 믿음은 물론 사랑을 실천하고 있어 더욱 귀하게 생각하여, 그가 기도할 때마다 감사가 그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어떤 내용으로 기도를 하고 있는가? 바울은 먼저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기에,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바울은 분명히 한다. 만약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가운데 내주 하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어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이들에게 하나님 알기를 간구하지만, 사실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알기를 간구한다는 것은 다음에 시작되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또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안다는 의미의 용어를 좀 정리하고 가자. 먼저 17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이라고 할 때의 ‘앎’이란 epignosei라는 말로, 이는 경험적으로 서로 알아가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지적으로 아는 gnosis와 구별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하면 여기서 “앎”이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그리고 전인격적으로 친밀하게 아는 것을 말한다. 한편 18절 이하의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을 믿는 친백성들이 모든 영적인 사리들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의 ‘안다’라는 말은 eidenai라는 말로, 이는 전쟁에 나가기 전에 병기와 군사에 대하여 실제적인 상황을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여기서는 사실에 관한 지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17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지적으로 ‘안다’라는 말로 전자가, 18절 이하에서 사실적으로 ‘안다’라는 말로 후자가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이처럼 17절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을 통하여 에베소 교인들은 이미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제 이러한 기초 위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영적인 사리들을 더욱 알게 되기는 간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영적인 사리들은 어떤 것들일까? 첫째는, 18절 앞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울은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기를 간구한다. 부르심의 소망이란 과거의 선택과 예정 속에서 정하신 대로 부르심에 따른 소망을 말한다. 이 소망은 인간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주어지는 소망이기 때문에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에베소 성도들은 하나님의 경륜가운데 불러서 거룩한 무리인 성도의 수를 더한 것이기 때문에, 미래는 물론이거니와 현재도 하나님의 친백성 된 자임을 알아 소망의 삶을 살아갈 것을 바울은 간구한다. 바울은 또한 둘째로,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기를 간구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천국백성으로서의 앞으로 받을 유업을 말하며, 또 이를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그 영광의 풍성함을 잘 깨닫길 바란다는 간구이다. 우리의 기업이 무엇인가? 세상의 기업과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시사 자기의 백성이 되게 하셔서 끝까지 그 유업을 이어받게 하시겠다는 미래적인 약속이다. 따라서 첫 번째 부르심의 소망은 두 번째인 기업의 영광으로 미래가 보장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실을 보면 그리 녹록한 삶이 아닐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이 함께 하심을 알아 절망하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함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간구이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의 간구는 부르심과 기업의 영광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구조적으로 보면 부르심은 과거적이라면 영광의 풍성한 기업은 미래적인 것이며, 이러한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19절의 하나님의 능력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그들이 이 능력을 힘입음은 물론이거니와 이 능력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다음으로 미룬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1.15-23 에베소 교회를 향한 바울의 기도

1.19-23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의 내용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울은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기초로 에베소 성도들이 부르심의 소망과 영광의 풍성한 기업을 알게 하심은 물론 이제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심을 확신가운데 알게 되기를 간구한다. 여기 19절의 하나님의 능력은 구조적으로 보면 부르심은 과거적이라면 영광의 풍성한 기업은 미래적인 것이며, 이러한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능력은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지극히 큰 것이라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그 힘의 위력을 다이나마이트의 어원인 dunameos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힘의 위력이 역사함을 에베소 교회 성도들이 알기를 간구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힘의 위력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인가? 그 내용이 바로 20절 이하의 내용이다. 그의 힘의 능력은 죽은 자 가운데서도 살리는 능력이며, 이 살리는 능력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달려 죽으심과 그의 부활을 통하여 증거가 된 것이다. 특히 십자가에 죽으심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볼 때에는 가장 무력한 죽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힘의 위력은 그를 하늘 우편에 앉히시고, 모든 것 위에 있게 하시는 통치자로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시는 위력이다. 그래서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은 통상 하늘나라 천사들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이러한 것보다 더 뛰어나게 하심으로 이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받게 하실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다. 이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깨어진 관계를 하나님의 힘의 위력을 힘입어 회복케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힘의 위력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 되게 하신 능력이다. 그리고 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충만으로 삼으셨다.

그런데 좀 더 우리가 세심히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마지막 절인 23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의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한다는 표현은 좀 이상하다. 그리스도는 만물을 넘어 서 있는 분인데, 그 만물 안에서 충만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만물 안에서”라는 의미를 “만물로써”라는 말로 바꾸어 사용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박윤선). 그리고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는 표현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케 한다는 것인가? 아니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에 의하여 교회를 충만케 하신다는 것인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의미적으로 보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충만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것이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해석을 할 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이 교회를 통치하고 관리하시는 분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과 맞아 떨어진다. 그래서 성경은 때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보편교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있는 그의 몸으로, 이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충만케 하시겠다는 것이라는 것이 이 본문의 결론이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에베소서 1장은 매우 중요한 장이다. 바울은 믿은 자들은 성 삼위 하나님을 통한 모든 영적 은혜를 소유했음을 열거한 뒤(1:3-14), 믿는 자들에게 그들이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을 친밀하게 하게 되기를 간구한다(17). 첫째는 소망을 낳는 구원으로의 과거의 부르심이며(18), 둘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 안에 두신 장래의 기업이고(18),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의 두 가지를 연결시키는 성도들에게 효력을 미치는 하나님의 현재의 위력이다. 그런데 이 위력은 과거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및 그의 뛰어남으로 드러났으며, 장래에는 그리스도가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사 그 만물 위에 서실 때에 드러날 것이며, 현재에는 교회 위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로서의 그리스도의 지위에서 잘 드러난다(이하 계속 구모영씀).

[에베소서 1장 강해설교]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엡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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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에베소서 1장 강해설교 중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이라는 설교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신령한 축복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신령한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복”(엡 1:3-14)

♣명제: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녀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기업을 주신다.

♣목적: 하늘의 신령한 복은 창세전에 택함 받은 자가 받아 누리게 된다.

사람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 있다면 복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복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좋아하는 단어이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복을 받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의 목적이 복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복을 주시려고 나를 구원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기업을 허락해 주시려고 하나님은 만세 전에 택하시고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신령한 복입니다. 바로 영혼의 구원을 받고 천국의 기업을 받아 누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복입니다. 이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예수님을 죽이신 것은 바로 나의 죄를 가져가시고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신령한 복을 이 시간 받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을 삼아주신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아무나 주시지 않습니다. 아버지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녀만 가능합니다. 자녀가 아니면 절대 아버지의 재산이 많이 있다고 해도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먼저 자녀 삼아 주시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절대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자격은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주시는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신령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복을 주시되’ ευλογεω(율로게오 2127) 축복하다, 복을 받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시는데 신령한 복을 내려주셔서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데 아무 때나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한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고백했을 때에 신령한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영광을 돌리고 경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신령한 축복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준비해 놓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택함 받은 백성들에게 자발적으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원 주로 고백해야 합니다.

(엡 1:4-5)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받은 복 중에 가장 큰 복은 나를 자녀 삼아 주신 복입니다. 죄인이었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택하사’ εκλεγω(에클레고 1586) 골라내다, 선택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기 전에 나를 선택하셔서 골라내셨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지기 전에 그중에 나를 선택하여 뽑아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무나 골라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골라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 것을 아시고 골라내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 내가 선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공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 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를 만세전에 골라내어 뽑은 사실이 실제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이미 나를 골라내어 선택하시기로 계획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없으면 절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골라내어 선택한 사람마다 한 명도 빠짐없이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들을 부르고 있으며 선택한 모든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정하사’ προοριζω(프로오리조 4309) 예정하다, 미리 정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나를 미리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아신 것도 아니고 믿음 생활 잘할 것도 아셨던 것이 아닙니다.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나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주시기로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삼아 주시는 복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미리 예정하신 것은 만세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방적으로 예정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예정하신 것은 만세전에 계획하셨던 것이며 이 계획이 현재 나에게 나타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주시기 위해 정하신 것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나를 선택하시고 절대 후회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잘못 선택했다. 하지 않으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찬송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시는 특권이 아닙니다. 아들만이 아버지를 찬양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기쁠 때가 언제입니까?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에 들도록 행동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자녀 삼아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복을 주셨습니다.

(엡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찬송하게’ επαινος(에파이노스 1868) 찬송, 칭찬, 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그분만을 높이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칭찬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칭찬을 받을 때 가장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때 신이 나고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쁘고 즐거운 시간이 언제입니까? 바로 택함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기뻐하고 칭찬하며 인정해 줄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칭찬하는 일이며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찬송의 가장 큰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감사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때 진노를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거부하고 불평하며 감사하지 않았을 때에 고기를 주고 진노하셨습니다. 찬송의 목적은 바로 모든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내 입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만 나타내고 높이는 것입니다. 찬송을 할 때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영광 받을 분이 없다는 고백 가운데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내가 하나님께 찬송의 복을 받았으니 나의 마음을 모아 최선을 다해 주님을 인정하고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하려는 것이라’ εις(에이스 1519) ~안으로, ~향하여, ~위하여,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세전에 예정하시고 선택하셔서 구원을 주신 목적은 거저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려면 진정으로 내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나의 찬송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올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만을 향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찬송이 되어야 하며 오직 주님만을 위한 찬송이 되어야 합니다. 내 안에 두 마음을 품으면서 찬송을 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을 향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찬송이 나올 때에 진정한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엡 1: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전부터 바라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해 이전부터 영광의 찬송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하나님을 향해 찬송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세전부터 원하셨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부터 바라던’ προελπιζω(프로엘피조 4276) 제일 먼저 바라다, 처음으로 바라다, 전부터 바라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영광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와 찬송을 드리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찬송받기를 원하셨습니다. 나를 창조해 놓으시고 거듭나게 하셔서 가장 먼저 원하셨던 일이 바로 전부터 바라던 찬송입니다.

하나님은 이 찬송을 받기 위해 만세전부터 고대하면서 기다리셨습니다. 오직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들만 바라보면서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아담을 통해 영광을 받기를 원하셨지만 결국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의 죄를 씻겨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고 구원받은 자들을 통해 영광 받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부터 바라셨던 경배와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완전하게 준비가 끝났고 택함 받은 백성들이 온전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각 개인들에게 영광을 받으시려고 준비하시고 계획하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림으로 만세전부터 나의 찬송을 받으시려고 고대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을 풀어드려야 합니다.

셋째, 성령의 인침 받는 복입니다.

성령의 인을 받았다는 것은 도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소유권을 나타낼 때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표시가 바로 성령의 도장을 받는 복입니다. 이단들은 짐승의 표를 받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양의 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성령의 인침을 받기 위해서는 진리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십자가 복음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절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어야만 합니다.

‘듣고’ ακουω(아쿠오 191) 듣다, 들어서 깨닫다, 경청하다, 라는 뜻입니다. 구원의 복음 말씀을 들어서 나의 것으로 깨닫고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경청하여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에는 듣는 장소가 있습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듣고 있는 장소며 시간입니다. 구원의 복음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내가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계획하시고 준비가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능동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내 힘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계획 가운데 함께 하셨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어’ πιστευω(피스튜오 4100) 믿다, 신뢰하다, 의지하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게 된 것입니다. 믿는 것도 말씀을 듣고 믿는 장소와 때가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나를 계획하시고 선택하셔서 믿게 된 것입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주님을 믿은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교회에 나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했습니다. 내가 한 것처럼 보이는 이면에는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인 치심을 받았으니’ σφραγιζω(스프라기조 4972) 인치다, 봉인하다, 라는 뜻입니다. 인을 친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나타낼 때 사용했습니다. 토지를 매매할 때에 인을 치고 예수님께서 무덤에 들어가셨을 때도 인을 쳤습니다. 편지를 쓸 때도 인을 쳐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아 봉인되었다면 나는 이제부터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은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몸이라고 해도 내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인 쳐주신 사건은 실제적으로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님께서 나에게 하나님의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장을 받은 사건은 이미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아무나 하나님께서 도장을 찍어주시지 않습니다. 지혜가 있다고 공부를 잘한다고 돈이 많다고 힘이 세다고 권력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도장을 찍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보지 않으시고 무조건 도장을 찍어주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도장으로 찍힘을 받은 것은 실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하심으로 나에게 성령으로 인을 쳐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도장을 찍어주시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삼아주시고 성령의 도장을 찍어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신령한 축복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령한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만세전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들만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축복입니다.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생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의 기업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생겼습니다. 또한 아들이 된 사람들은 아버지를 마음껏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찬송의 복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경배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신령한 복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자신의 소유라고 하는 도장을 각 개인들에게 찍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들어온 자들은 절대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로 믿고 끝까지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믿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며 하늘의 신령한 축복을 받은 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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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엡 1:3-14)

주제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본문 : 에베소서 1장 3-14절

설교자 : 최종혁

엡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한번 들었는데 기억에 오래 남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인데, ‘뭐가 되었든지 양이 많아지면 상대적으로 가치는 없어진다’입니다. 우리는 공기가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에 감사하지는 않습니다. 아파서 숨을 못 쉬게 되었을 때 그것의 소중함을 압니다. 구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이 참 귀하고 소중한 것이지만 구원에 대해 자주 말하다보니 너무 익숙해지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고 지내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에베소서 말씀에 대해 ‘가난뱅이처럼 사는 부자들에게 쓴 편지’라고 했습니다. 많은 것을 가진, 정말 큰 복을 가진 성도들이 마치 그것이 전혀 없는 것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일깨워주고자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우리가 받은 복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이 말씀은 한 문장으로 된 아주 긴 말씀이기에 좀 어렵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헬라어 문장 중에 가장 긴 문장이라고 합니다. 본문 말씀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일반적인 사실(3절)과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4-14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이 말은 찬송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햇빛과 비 등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시는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하게 주신 복을 말합니다. 믿는 자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누구나 다 이 복을 받습니다. 누구는 적게 받거나 누구는 많이 받거나 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믿는 자라면 동일한 복을 받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입니다. 그것은 ‘하늘에 속한 것’이고, 그것은 ‘신령한 것’입니다. 이 복은 물질적인 복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물질적인 것들을 약속하시는데 땅과 같은 재물, 오래 사는 것 등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런 물질적인 것이 강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에 대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것에 우선순위를 두면 그 외의 것은 채워주시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는 복은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복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을 통해 옵니다. 물론 그 중에는 물질적인 복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그것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성령을 통해 오는 신령한 복입니다.

또한 이 복은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이 ‘하늘’이 장소적인 개념은 아닙니다. 우리가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야만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이런 복을 모두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동일하게 이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찬송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은 무엇일까요? 이 복이 어떻게 우리들에게 주어졌을까요? 그리고 이 복이 우리에게 왜 주어졌을까요? 이제는 이 세 질문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

그 복은 첫째, 우리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된 것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4-5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누구도 거룩하지 않고 스스로 거룩하게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이 단어는 인간과 거리가 멉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어떤 사람이든지 죄 아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거룩하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해 ‘의롭다’, ‘거룩하다’, ‘죄 없다’, ‘흠 없다’고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왜 우리에게 복이 될까요? 우리가 거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3에서는 우리를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표현하고, 로마서 1:18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나타난다”고 말씀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롬 2:5).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시는 날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인간을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아들들이 되게 하심

우리가 받은 복은 둘째, 하나님의 아들이 된 복입니다. 5절에서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복에 대해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 2:11-12). 이것이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이 없었던 사람, 하나님의 백성과 관계가 없었던 자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자들입니다. 우리의 상태에 대해 성경은 우리가 “연약할 때”라고 말하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라고 말하며,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라고 말합니다(롬 5).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아들들”이라는 말은 입양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입양에 대한 문화나 어감 때문에 아마도 “아들”이라고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입양’이라는 것에는 어떤 부정적 의미도 없습니다. 로마 문화에서 입양된 아들은 친자와 동일한 권리를 가지게 되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입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리를 우리에게 그대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 특권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히 2:11). 예수님께서도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2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말했던 바울은 다시 3절에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복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거나 큰 권력을 가졌다면 그것 때문에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분, 만물을 다스리시고 소유하시는 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도 아니었고 하나님과 원수된 자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속량, 곧 죄사함을 얻게 하심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절). “속량” 혹은 ‘구속’이라는 단어는 돈을 주고 사서 해방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노예시장에서 이런 단어를 사용했는데, 돈을 사용해서 주인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디에 매였거나 누구의 종이 되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 이것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원래 죄의 종이었습니다. 스스로 자유하다고 생각했던 것 뿐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알지 못했고 자유를 찾지도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죄의 종으로서 그 죄의 대가로 우리가 지불해야 할 것은 사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셨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 1:18-19),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 2:14),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계 5:9). 죄의 종이었던 자들을 예수님이 피로 사셔서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우리는 죄라는 주인에게 세뇌당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시려고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고 죄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이것은 법적인 것이고 신분적인 변화입니다. 죄인이 의인이 되었고, 하나님의 원수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죄의 노예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속량’,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입니다.

비밀을 알게 하심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8-9절). 하나님의 계획은 알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를 알려주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분명한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볼 수 있는 눈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들은 눈을 여셔서 구원자 예수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끝날 지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10)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일시적으로 사단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이 땅의 권세 잡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우주의 진정한 주인이 전면에 나서서 우주를 다스리실 그날이 옵니다. 누군가는 그 주인과 함께 다스릴 것이고 누군가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계획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다. 온 우주의 통치자를 아는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기업을 받게 하심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11절). 여기서 “기업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업을 받았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 대해 말씀하고 우리가 받은 기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기업을 받았다는 의미가 더 맞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상속자, 약속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참된 기쁨과 만족, 하나님과의 교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의 오해 없는 교제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오해와 갈등, 다툼이 있는 것은 우리가 모두 죄의 문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그날’이 오면 어떤 오해도 없이 기쁨으로 교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간에 진정한 사랑을 나눌 그날이 올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우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우리가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찬양과 감사가 넘치고, 진정한 예배를 드릴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기업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전혀 맛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면 누릴 수 있습니다.

기업이 보증을 받게 하심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성령은)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3-14절). “보증”은 ‘보증금’이나 ‘약혼반지’라는 뜻입니다. 다가올 실체에 대해 그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보증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비싼 물건을 살 때 보증금이라는 것을 냅니다. 반드시 그 물건을 살 것이라는 사실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약혼반지의 의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결혼을 할 것이라는 증표입니다. 그와 같은 의미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령은 놀라운 기업의 일부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우리가 받은 복들은 우리가 구원받게 됨으로 얻는 유익들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극적으로 변하고 우리의 미래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것들이 여러분에게 작은 것으로 보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들보다 하찮은 것처럼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복은 어떻게 주어졌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런 복을 받게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모든 행동과 일의 주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을 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이 하신 일은 구원을 계획하신 일입니다.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사”(4),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5),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9),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11).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선택’이라는 것은 많은 것들 중에서 일부를 골라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트에서 살 물건을 고를 때 선택의 주도권은 그것을 ‘원하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주권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창세전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이전입니다. 창세기 1장 1절 이전의 상황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던 때는 우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했을 때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아니 생각하기도 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다윗은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주권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44). 이 세상이 존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계획을 세우셨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 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절). 아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를 속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실행하신 분입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 2:14-17). 우리는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필요했는데 우리가 스스로를 위해 죽을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죽어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지 않게 해방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피를 ‘보혈’이라고 부릅니다. 값진 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인간과 같은 피였지만 그 피가 아주 귀하신 분, 높으신 분, 무한하신 분의 피였기에 그것은 ‘보혈’이 되는 것입니다. 그 피는 ‘위대한 교환’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드렸습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로움’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위대한 교환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13절).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인치십니다. 문서에 인을 찍는 것은 소유권, 신빙성, 안정성을 의미합니다. 인을 통해 그 문서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있고, 그 문서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인이 제대로 찍혀있다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 인을 찍은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거나 허가를 받은 사람이 아니면 뜯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치심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놀라운 확신과 평안을 주는 것입니다.

이 복은 왜 주어졌는가

삼위의 하나님께서 각자의 일을 하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복들이 주어졌을까요? 하나님은 왜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을까요? 왜 우리를 선택하셨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5),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9),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11). 우리 편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도 그들이 크거나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이유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우리를 어떤 목적으로 구원하셨을까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6),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려고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도 해야 할 일이고 죽어서도 할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구원받은 목적입니다. 각자의 삶에서 예배를 드리고 함께 모여서 공적인 예배를 드립니다. 합당한 예배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교제하면서 서로를 세워주며 예배합니다. 더 많은 이들이 예배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전도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으로 우리가 누리게 된 복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매일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무엇이 진짜인지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진짜인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영원이 진짜인지 아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영원에 비춰 이 땅의 삶을 바라봐야 합니다. 영원을 바라보지 않으면 교회는 그저 ‘이것 해라’ ‘저것 해라’ 하는 식의 세상의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이 어떤 자인지 눈을 열어서 구원의 복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선택하셨는지, 예수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성령님이 어떻게 구원을 인치셨는지 아시고, 이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보이는 것에 속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을 이 세상에 드러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난뱅이처럼 살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히 부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 이 복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에베소서 1장 강해설교말씀] “교회의 참된 터는 예수 그리스도”(엡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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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에베소서 1장 강해설교말씀 중에서 교회의 참된 터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시고 선택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속량함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죄 사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죄 사함을 받은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으니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목: “교회의 참된 터는 예수 그리스도” (엡 1장)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본문: 에베소서 1:1-23

요절: “또 만물을 그분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2)

주제: 교회의 머리와 몸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터이시다.

오늘은 에베소서를 강해하겠습니다. 에베소서도 옥중서신입니다. 로마 옥중에서 사도 바울이 AD 60년경에 쓴 서신으로 교회론에 대해 자세하게 깊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자매 서신이라고 할 만큼 키아즘 구조(주제별 짝을 이룸)를 이루고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기초를 둔 교회론을, 골로새서는 공간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되시는 기독론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교회의 머리와 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확실하게 가르쳐 주고 있기에 이단사이비에서 주장하는 교회론에 빠지지 않게 보호해 줍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 예수님 이외에 어떤 인간도, 교황도, 교주도, 목회자도, 장로도,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바른 교회론은 바른 신앙의 기초가 됩니다. 교회에서 에베소서를 반복해서 가르쳐야 이단에 빠지지 않습니다. 찬송 600장(통 242장)은 “에베소서 주제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강해 시마다 이 찬송을 부르기를 원합니다.

1) 교회의 참된 터는 우리 주 예수라 그 귀한 말씀 위에 이 교회 세웠네.

주 예수 강림하사 피 흘려 샀으니 땅 위의 모든 교회 주님의 신부라

2) 온 세계 모든 교회 한 몸을 이루어 한 주님 섬기면서 한 믿음 가지네.

한 이름 찬송하고 한 성경 읽으며 다 같은 소망 품고 늘 은혜받도다.

3) 땅 위의 모든 교회 주안에 있어서 하늘의 성도들과 한 몸을 이루네.

오 주여 복을 주사 저 성도들같이 우리도 주와 함께 늘 살게 하소서.

에베소(Ephesus=Efes)는 당시 소아시아 수도로(300년간) 로마의 5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사도시대 당시에 인구 30여만 명으로 소아시아 최대의 도시였습니다. 소아시아(Asia Minor 아나톨리아)는 오늘날 터키를 말하는 것으로 지중해를 기준으로 동쪽(해 뜨는 곳 Orient)에 가장 큰 땅입니다. 구약성경 시대에 헷(Hittite) 족속의 본고장이었고, 1453년 동로마 시대(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이스탄불)을 멸망시키고 1차 세계대전까지 460년 동안 세계를 제패한 이슬람의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을 이룬 나라가 터키(Turkey)입니다. 이스라엘은 1516-1920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차 대전 말에 영국 통치령으로 되었다가 2차 대전 후인 1948년 5월 14일에 독립을 했습니다. 그리스(헬라)도 14세기부터 1821년 독립할 때까지 400년간 오스만 제국(투르크인의 지배)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에베소는 서부 소아시아의 에게해(Aegean Sea) 연안에 (현재의 터키)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 의해 BC 9세기에 건립된 식민도시입니다. 해상과 대륙 상업이 만나는 곳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고 BC 550-540년에 건조된 당시 세계 최대의 웅대한 아르테미스(Artemis=아데미, 풍요와 다산의 여신) 신전(세계 7대 불가사의, AD 401년 파괴)과 로마 제국 시대에 건조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 (AD 1세기)으로 소아시아의 종교 센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수도였고 지금도 성지 순례하면 로마식 도시와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 바로 에베소입니다. 로마의 아우구스투스(Augustus) 황제 때 건축된 유적이 현재 남아있습니다. 사도바울도 2차 전도여행 때에 에베소를 잠시 들렸고(행 15:41),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에베소에서 2년 반(AD 56-59년) 머물면서 두란노 서원(the school of Tyrannus, 두란노는 에베소 관리의 이름으로 그 뜻은 봉사 혹 섬김이란 ‘디아코니아’임)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19:1-22).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팔던 우상숭배자 데메드리오와 그 일당들에게 고소가 되어 AD 59년 5월 축제 때에 바울이 로마식 원형 극장에서 순교할 뻔했는데, 죽음 직전에 에베소를 떠나서, 배를 타고 마게도냐로 건너갔습니다(행 20:1). 후에 에베소 교회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아볼로, 디모데가 목회를 했습니다. 사도바울이 AD 64년 가을에 네로 황제의 기독교 박해 때 로마 제국에 다시 체포되어 AD 65년 봄에 순교한 직후 에베소 교회의 목회를 그동안 바울을 따라다니며 전도여행에 동참했던 디모데에게 맡겼었는데, 디모데가 ‘5월 아데미 축제’ 때 축제에 모인 열광하는 군중들을 향하여 말씀을 선포하다가 군중이 던진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고, 사도 요한이 디모데를 이어서 AD 65년부터 에베소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의하면 에베소교회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의 중심지(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신대로(요 19:27), 요한은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고 65년경 에베소교회를 맡아 복음을 전하며 요한 공동체인 신학교도 세워 후학들을 양성했습니다. 마리아는 이곳에서 별세하여 그 무덤이 에베소 교회의 터에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특징적 주제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본서에는 ‘교회’(에클레시아, Ekklesia)라는 말이 9번 나옵니다(로마서에는 5번, 고린도전서에는 22번, 고린도후서에는 9번, 갈라디아서에는 3번 등). 에베소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장, 교회의 본질, 3-6장은 교회의 속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장 교회의 기초, 2장 교회의 구성원, 3장 보편성, 4장 일체성, 5장 성결성, 6장 전투성입니다].

1. 문안 인사(엡 1:1-2)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2절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이 증거 하는 대로, 다메섹에 피신한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러 가던 중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사도가 되었습니다(행 9:15). 바울은 옥중에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평강을 그들에게 기원합니다. 그것은 죄 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은혜이며 그것에 근거한 마음의 평안과 육신적, 물질적, 환경적 평안을 포함합니다.

2.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송함(엡 1:3-14)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분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8 이는 그 은혜를 그분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분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분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분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분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분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그분은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救贖) 하시고 그분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인해 그분을 찬송하면서 그분의 구원을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택(예정)과,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과, 셋째는 성령의 인치심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송해야 합니다.

3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복입니다. 그것은 땅에 속한 것 곧 현세적, 육신적, 물질적 복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것, 즉 내세적, 영적인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은 것은 죽어도 장차 부활하고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건강, 진학, 취직, 결혼, 출산, 재산 등도 복이지만, 이런 것은 우리가 죽으면 다 끝나는 현세적인 복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영생과 영원한 천국의 복입니다.

4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심은 구원하실 자들을 창세전에 선택하시는 계획에서 시작되었다고 증언합니다. 5절에 하나님의 선택은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sovereign will)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인류 중에 어떤 이들을 구원하시려고 사랑하셨고 택하셨고 구원과 영생으로 예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1:1), 그분의 근원이 ‘영원무궁 전부터’이심(미 5:2)을 증거 합니다(요 8:58, 17:5).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무리의 죄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의 죄책을 그분에게 전가(轉嫁)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속량 하실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의 일차적 목적은 택자들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함을 보입니다. 죄는 사람 앞에서는 때때로 감출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혜롭고 거룩하고 의롭게 지음을 받았으나(전 7:29; 골 3:10; 엡 4:24) 범죄함으로 더러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구원하셔서 다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기를 계획하셨습니다.

5절에 또 하나님께서는 택자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본질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만, 양자(養子)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을 얻었습니다(요 1:12).

6절에 하나님의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죄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것밖에 없습니다. 지옥 갈 자들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7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속함을 증거 합니다. 레위기 17:11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贖)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救贖)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the precious blood로 한 것이니라,”고 말했습니다(벧전 1:18-19).

8절 “이는 그 은혜를 그분께서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이는’이라는 원어(헤스 ἧς hes)는 ‘그 은혜를’ 가리킵니다. 예정받은 이들에게 지혜와 총명이 넘치게 하십니다.

9-10절 “9 그분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9절의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in the dispensation of the fulness of times’라는 말은 영어성경들(KJV, NASB)의 번역대로 10절 초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분 뜻의 비밀 the mystery of his will’은 구원의 이치 곧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대속(代贖)의 이치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구약 백성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였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성령 충만을 받기 전에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기쁘심을 따라 according to his good pleasure’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방법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었음을 말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행 4:12에서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서 담대히 증거 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위한 구원의 유일한 길이십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시간표가 있습니다. 아담 후 6천 년의 역사를 위한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습니다. 아담 후 천년 경에 노아라는 인물이 태어났습니다. 아담 후 2천 년 경에는 아브라함이 출생했습니다. 아담 후 3천 년 경에는 다윗이 출생했습니다. 아담 후 4천 년 경이되어 ‘때가 찬 경륜대로 dispensation’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분 안에서 통일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정 가운데 이미 우주와 지상의 모든 것을 하나로 만드시고 통일(통합)하십니다. ‘통일되게’라는 원어는 아나 케파 라이오 사스샤이(anakephalaiosasthai 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인데 ‘함께 모으다 gather together’는 뜻으로 “정돈되게, 하나로 묶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인 이레니우스(Irenaeys of Lyons, 약 AD 130년경 서머나 출생, 약 AD 202 별세)는 이 단어로 총괄갱신(recapitulation)를 주장합니다. ‘총괄갱신’이란 번역은 아시아신학대학교의 한철하 박사(총장)의 저서「고대기독교사상」에서 처음 사용하는데 ‘회복’이란 뜻으로 re-capitulation(뜻: 물에 빠져 들어가는 사람의 머리를 건져 살림)이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리스도가 성육신함으로써 인류를 자신 안에 총괄하여 인류를 회복하며 갱신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회복신학의 키워드입니다. 박종구목사님(크로스웨이, 월간목회 대표)께서는 융합(fusion) 혹은 지식의 통합이란 뜻인 “통전統攝”(consilience)으로 해석하십니다. 1998년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 1929년~현재)은 이란 저서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Socio-biological research)을 주장하면서 통섭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21세기 학문과 문화의 경향을 말해줍니다. 무궁 신학에서도 엡 1:10을 무궁(올람 ‘Olam)의 원리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유일한 중보자로 하늘과 땅과 인간의 구원을 하나로 통일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며 온전케 하십니다.

11-12절 “11 모든 일을 그분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분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분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분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분 마음의 원대로 역사(役事) 하시는 자 him who worketh all things after the counsel of his own will’ 곧 주권자이십니다. 우리의 예정은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뜻에 근거합니다. 이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12절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먼저 바랐던(혹은 믿었던) 우리로 first trusted in Christ.’라는 뜻입니다.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That we should be to the praise of his glory,’는 원어는 6절과 14절의 말씀과 동일한데, 그것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13-14절 “13 그분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분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그분은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救贖) 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13절 ‘그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너희도’라는 말은 앞 절의 ‘우리로’라는 말과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너희 에베소 교인들도 구원의 복음 진리를 듣고 그 복음을 믿어 약속의 성령님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분 안에서 또한 믿어’라는 말은 ‘구원의 복음을 믿어’라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인치심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을 때 성령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선택과 구속(救贖)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세 번째 단계입니다.

14절의 ‘이는’(호스 ὅς hos)(남성 관계대명사)이라는 말은 앞 절의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원어에서 ‘성령님’은 중성 명사이지만, 남성 관계대명사가 사용된 것은 성령의 인격성의 한 증거입니다.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Which is the earnest of our inheritance until the redemption of the purchased possession”라는 원어는 “그 얻으신 것의 구속(救贖)의 때까지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라고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성령님의 인치심은 성도의 끝까지 견딤의 보증과 보장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주님께서 피 흘려 사시고 성령님께서 인치신 자들은, 모두 다 끝까지 보존되며 영광의 구원에 이를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기도함(엡 1:15-19)

15 이를 인하여 주 예수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 그분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5절 ‘이를 인하여’라는 말은, 앞 절에 말한 에베소인들의 구원받은 사실을 인하여라는 뜻입니다. ‘주 예수님 안에서 너희 믿음과’라는 말은 ‘주 예수님께 대한 너희 믿음과’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도의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그가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은 그의 믿음이 순종하는 믿음 곧 참된 믿음이라는 증거입니다. 16절에 바울이 에베소인들로 인하여 감사한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믿음이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 진실한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주의 종들과 성도들의 참된 감사가 있습니다.

1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바울은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앞서 엡 1:3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인성(人性)을 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 증거대로 ‘사람’이시고(딤전 2:5), ‘의인’이시고(행 7:52), ‘마지막 아담’과 ‘둘째 사람’이십니다(고전 15:45, 47).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또한 ‘영광의 아버지’이십니다. 요 17:5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이라고 말합니다(고전 2:8; 약 2:1).

18절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the eyes of your understanding being enlightened’라는 말은 앞 절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사’라는 기도 내용과 비슷합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눈뿐 아니라 또한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6:22-23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마음의 눈]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시고 마음 눈을 밝히셔서 세 가지를 알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첫째로 그분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둘째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셋째로 그분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19절 그분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을 알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이 중 첫째와 둘째는 서로 통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소망은 부활과 천국과 영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이며 성도의 확실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곧 죄로부터의 구원은 바로 이 소망으로의 초청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기업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부활한 성도들이 들어갈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과 거기서 누릴 영생복락(永生福樂, 이를 줄이면 “영락”; 찬송 287장 후렴에 “우리 주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입니다. 고후 4:17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라고 했으며 계 21:10-11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19절 ‘그분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라는 구절은 ‘믿는’이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졌고 심히 무감각해졌던 우리를 깨우쳐 회개하고 예수님 믿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는 그분의 능력입니다. 그분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죄로 죽었던 나의 영혼이 다시 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자를 은혜로 역사하셔서 자발적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이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알아야 합니다.

4. 그리스도와 교회(엡 1:20-23)

20 그분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분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분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분을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20절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역사(役事)하여 그분의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표현입니다. 죽음은 인류 역사 수천 년 동안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처럼 보였고, 인생의 절망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절망처럼 보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가장 큰 절망을 단번에 정복한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의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세상에서 참으로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과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심 또한 놀라운 사실들입니다. 그분의 승천에 관하여, 구약성경은 에녹과 엘리야의 사건을 통해 이미 예시한 바 있습니다(창 5:24; 히 11:5; 왕하 2:11).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승천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요 6:62; 16:28). 특히 누가복음 24:51과 사도행전 1:1-2, 9-11은 승천의 사실을 증거 합니다(눅 9:51; 엡 4:8-10; 딤전 3:16; 히 4:14). 승천하신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롬 8:34; 골 3:1; 벧전 3:22; 히 1:3; 8:1; 10:13; 12:2).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신 의의(意義)는 다음 두 절에 언급되어 있는데 첫째는, 그분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심이고(21절), 둘째는, 만물을 그분의 발아래 복종시키십니다(22절).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님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롬 16:20,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 상하게 하시리라.” 사탄이 그리스도의 발아래 또한 우리의 발아래 굴복되는 때는 바로 주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입니다. 마란-아타!

그러면, 높임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첫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습니다.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다’는 원어는 ‘교회에게 만물 위의 머리로 주셨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만물 위의 머리’라는 표현에서 ‘머리’라는 말은 ‘우두머리, 통치자, 주’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5:23과 골로새서 1:18에도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했는데, 그것들은 다 통치적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주이실 뿐만 아니라 또 교회의 머리이시므로, 교회는 그분에게 절대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의 참된 지도자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뿐이십니다(마 23:10). ‘머리’라는 말은 유기체적 의미도 가집니다. 머리와 몸은 불가분리의 관계입니다. 엡 4:15-16은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한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생명적 관계입니다. 교회는 잠시라도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생명이요 힘이십니다.

둘째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23절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한 개인이지만, 또한 새로운 인류이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인류가 선택되었습니다(엡 1:4).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며 정돈됩니다(엡 1:10).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한 새 사람을 이루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엡 2:15).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또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고 표현됩니다. ‘충만케 하시는’이라는 원어(플레루메누 πληρουμένου pleroumenou)(현재 중간태 분사)는 ‘자신을 위해 충만케 하시는, 자신을 위해 완성시키시는’ 뜻입니다. 교회의 충만과 완성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측면에서 이해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충만한 성취요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적으로, 온 세계적으로 교회를 통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창세전의 하나님의 선택과 2천 년 전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 사역과 성령께서 죄인을 중생시키시고 성화시키시고 마침내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이 모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교회를 통해 충만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초가 되시는 교회를 더욱 사랑하며,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며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늘 공급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늘과 땅, 우주와 세계, 시간과 공간을 통일시키시는 우리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의 영, 혼, 몸이 통섭되며, 무궁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무궁한 생명을 선물로 받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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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장 1절-6절,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 매일성경큐티 새벽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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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매일 성경 큐티 본문은 에베소서 1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으로, 에베소 교회의 교인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인사말과 편지의 전체 주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새벽 설교로 정리하였습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에베소서 1장 1절-6절,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함께 할 찬송

새 찬송가 9장, 하늘에 가득 찬 영광의 하나님 / 새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숲을 보아야 합니다

페루라는 나라에는 ‘나스카 평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곳에는 하늘에서만 볼 수 있는 그림들이 있습니다. ‘나스카 라인’이라고도 불리는 이 그림들은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도 불립니다. 땅에서 볼 때는 그저 선이 그어져 있는 것 같지만, 하늘에서 비행기를 타고 바라보면 고양이나 독수리, 거미나 고래와 원숭이 같은 동물들과 여러 식물들의 모양을 그린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우리가 돋보기나 현미경을 통하여 자세하여 살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멀리 떨어져야만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나무를 볼 때도 있지만, 숲을 보아야 할 수 있는 일들도 있습니다.

숲을 보아야 합니다, 나스카 평원의 그림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깊이 생각할 때 깨닫게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전체를 보아야 깨닫는 경우도 있습니다. 욥은 하루 만에 자신의 자녀들과 재산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날 하루만을 볼 때는 하나님께서 욥을 버리신 것처럼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욥기 전체를 볼 때, 우리는 욥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탄에게도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었으며, 마지막에는 갑절의 축복을 받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지금의 시련과 고난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가 있지만, 지나고 나서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 역시 때로는 숲을 보듯이 전체를 보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에베소서의 첫 부분인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 핍박자에서 전도자로

특히 바울은 1절을 통하여,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감옥에 넘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이라는 먼 곳까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갔습니다. 그 과정 중에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핍박자였던 바울은 전도자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출신과 지식 그리고 열정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전도자로서의 필요한 것임을 아셨고,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처음에 사도 바울이 회심한 사실을 두고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넘기기 위한 속임수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바나바를 통하여 바울이 초대 교회 안에 소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복음이 전해지고 연결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핍박자인 사도 바울을 부르신 하나님의 뜻은, 처음에 예루살렘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숲을 보듯 크고 길게 볼 때, 모든 이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임을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2.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뜻으로 이방인의 사도가 된 바울과 같이, 죄인이었던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실 역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5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이유가 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에베소서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바울이 6절에서 말하는 ‘은혜의 영광’이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하시면서까지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고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ἔπαινος, 에파이노스)하게 하심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6절에서 말한 이 찬송은, 세상의 유행가나 사람들의 사랑 노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특별한 ‘찬양’을 의미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 뜻을 깨달은 성도들의 입술에는, 더 이상 세상의 노래가 아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노래가 가득하게 됩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시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사 43:21). 오늘 바울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을 높이 찬양합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 찬양을 드립시다. 앞서 우리가 찬양한 바와 같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을 다 쓸 수도 없을뿐더러, 그 사랑에 대한 글들을 쌓아 둘 수도 없을 정도로 지극합니다.

그러니, 오늘 이 새벽에 우리 함께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기도합시다. 또, 오늘을 살아가며 하루 종일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찬양합시다. 오늘 하루, 내 입술에서 감사의 찬송이 끝이지 않는 은혜 충만한 날이 되시길 바랍니다.

함께 하는 기도

위대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우리 인생 전체를 통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며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오늘이 되게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함께 할 기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도록 지혜를 주소서.

주어진 오늘을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아 주께 영광 돌리게 하소서.

우리 나라와 민족을 살펴 주시고 모든 다툼이 화해되게 하소서.

복음 전해야 할 한 사람이 생각나게 하소서.

참고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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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10(수) \”에베소서 1: 1-14\” /작성: 이계심

성경 에베소서 1: 1-14

찬송 20장 “큰 영광 중에 계신 주”

오늘부터 묵상하는 에베소서는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로마에 수감되어 있을 때 쓴 옥중서신으로 불리는 편지 중의 하나입니다.

에베소서에는 어떤 특정한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내용이 없습니다. 바울의 다른 편지들처럼 특정 교회의 교우들이나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에 대한 바울의 견해를 쓴 편지가 아니라 에베소 교회를 비롯한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교회들이 돌려보면서 읽도록,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는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교리적인 부분과 성도의 새로운 삶에 대한 실천적인 권면에 대해 회람용으로 쓴 편지입니다.

바울은 특히 하나님을 믿게 된 이방인 교인들에게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구원이 어떻게 이방민족에게까지 확장되면서 언약과 구원이 이어지게 되었는지,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성도의 구원이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묵상할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절은 인사말과 에베소서 전체에 대한 서문이며, 3-14절은 사도 바울이 교우들에게 하나님을 향해 찬송하기를 원했던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즉, 3-6절은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구원을 예정하신 것을 찬송하는 것이고, 7-12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구원의 목적을 찬송하며, 13-14절은 구원에 대한 성령의 인치심(보증)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먼저 앞부분 1절과 2절의 인사말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의지나 계획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따라 “그분의 뜻을 전하는 자” 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 즉, “내가 누구인가?” 를 분명히 알고 깨달을 때 인생의 의미와 삶의 목적을 알게 됩니다. 자기가 지금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알게 되고, 살아갈 목표가 분명해 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고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구원받았고, 이 세상에 보내진 사람이다.” 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늘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에 나오는 본문 3절부터 14절까지는 성경 헬라어 원문이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 긴 글입니다. 어떤 논리적인 글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서정적인 찬송가를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사도 바울이 무엇을 찬송하기 원했는지 눈여겨 살펴야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는 3절에 “찬송하리로다!”로 시작하여 14절에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로 끝나면서, 찬송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세 가지의 찬송 이유와 내용이 말합니다.

첫째는 3-6절에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신령한 복,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3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여기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셨는데, “신령한 복” 은 이 땅에서 받는 현세적(現世的)인 복, 세상적인 복과는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육체와 물질과 눈에 보이는 이 땅의 복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발견하였고, 유치한 복이 아니라 가장 고상한 복, 순간적인 복이 아니라 영원한 복, 이 땅에서의 복이 아니라 하늘에서 누릴 복을 “신령한 복”이라고 소개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복 뿐만 아니라, 신령한 복을 사모하고, 그 것을 이 땅에서도 누리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설날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시고, 또 역귀성하셨는데, 이 세상에서의 고향도 의미 있지만, 영원한 본향이 더욱 중요합니다.

감사한 것은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강한 의지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거저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치 선물처럼 주어진 것입니다. 본래 은혜라는 단어 “카리스” , 이 단어 자체가 선물이라는 뜻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녀삼아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주님을 찬양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찬송할 내용이 7절에서 12절 사이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시려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구원해 주시고, 이 십자가의 속량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계획은 창세전부터 예정되어 있었지만, 실제 그 일은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시며 돌아가셨기에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이 기쁜 소식 즉, 복음이 모든 민족과 백성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먼저는 사도 바울과 그의 제자들에게 전해졌고, 그 다음에는 이 말씀의 수신자인 에베소 교우들과 오늘 새벽에 나오신 저와 여러분에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어와 문화가 달라도, 지리와 생활 배경이 차이가 있어도 복음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이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입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전 세계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가 함께 예배를 드리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토록 문화와 생활의 차이가 나는 타문화, 다른 민족들에게도 기독교의 복음이 전해지게 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믿음의 가족, 형제요 자매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초대 교회 이후 오늘까지 생명의 복음이 전해져왔던 역사적 사실이며, 우리가 지금도 복음전도, 선교를 해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셋째로 13절과 14절에는 나중에 믿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속자(기업)로 삼아주셨음을 성령님을 통해 보증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십니다. 13절, 14절을 새 번역으로 읽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은 우리 구원, 상속의 담보라고 하셨습니다. 14절 말씀에 우리 기업의 ”보증” 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어로 “아라본(Arrabon)” 인데 ”나머지 잔금을 기한 내에 반드시 지불하겠다는 보증“ 으로 마치 계약금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지금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에서 완전히 구원을 받을 때까지 보증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령님을 통해 하늘에서 누릴 기쁨과 축복을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사람의 심령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들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16절입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묵상한 본문 예베소서 1장 1절에서 14절까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단어가 모두 6번 나옵니다. “엔 크리스토스” , 즉 “그리스도 안에” 라는 단어를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만 35번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 것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도, 하나가 되는 것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 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이든지 직장에서든지, 학교나 사회생활을 하든지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서”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만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적용하고 실천하는 말씀의 증인들이 되어 이 땅을 새롭게 하고 회복하며 공의와 질서를 바로 세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해주었던 구원의 기쁜 소식이 오늘 나에게도 전해져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저희들도 바울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임을 깨닫게 하시고, 사명을 따라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 생활 속에서 창세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쁨으로 찬송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 거저 주신 구원의 감격을 회복시켜 주시고, 주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성령님께서 우리 믿음의 보증이 되신 것 또한 감사와 찬송을 드립니다. 우리가 완전한 구원을 얻을 때까지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며, 이끌어 주시고,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면서 바울처럼,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적용하고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입니까?

2. 나는 하나님이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찬송하고 있습니까? 찬송을 받으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신 일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그 과정과 의미를 묵상해 보십시오.

3.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받아들이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오늘 우리와 함께하심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찾아 읽어 보십시오. 요한복음 6:37, 히브리서 13:5

4. 오늘 우리가 묵상한 본문에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단어가 나오는 부분에 밑줄을 긋고, 어떤 부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라는 의미가 내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작성자: 이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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