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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 복음 5 장 주석 | [하루 한 장] 마태복음5장_복이 있나니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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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 11 (토) [하루 한 장]“복이 있나니” (마5장)
부산 성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자 : 홍융희 목사 (분홍목사)
마태복음 5장은 산상수훈의 서론인
팔복이 선포되며 시작합니다
산은 유대인들에게는 모세가
율법을 받은 시내산의 이미지와
엘리야가 우상을 쳐부순 갈멜산 등
전쟁의 이미지가 겹쳐 있습니다
그래서 산에서 새로운 율법을
선포하는 예수님은 왕이십니다
왕의 새 율법은 복음으로 전해져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힘없는 민초들에게 복이 있다고
그들이 천국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팔복은 우리가 행하고 이뤄야 할
또 하나의 짐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하고 부족한 삶이
예수님 안에서 얼마나 풍족하고
충분한 것인지를 알게 하는
‘하나님의 의’로서의 예수님 자신을
알려주는 복된 말씀입니다
복이 있는 여러분이여,
참 복이신 예수님을 기쁘게 만나
그분을 누리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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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주석 – Daum 카페

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 게 되는 것이다(Carson). … 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 力)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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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3/1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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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마태복음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 인생여행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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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7/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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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예수님의 산상수훈 … – 두란노 서원

교만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온유는 믿음의 품성이다. 믿는 자 또는 믿으려 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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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rn153.tistory.com

Date Published: 5/2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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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5장 – HANGL NOCR – 한글 신기관

5:1 서언 (마태복음 5:1, 2) 여기에는 이 설교의 일반적인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설교자”는 설교자들의 왕이시오, 그의 교회의 위대한 예언자이신 우리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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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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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전서]#970 – 마태복음 5장 – 네이버 블로그

[산상 설교, 마 5:1~8:1눅 6:17~49. 주요 주석: 마태복음. 참조 예수의 생애와 봉사, 지도 5; 도표 7]. 이 “무리”는 예수가 갈릴리의 여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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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5/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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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보훈 (마태복음 5: 1-12) 칼빈 주석 번역

마태복음 5장 1-12절 산상보훈 말씀 칼빈 주석 번역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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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ublished: 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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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장 – BIBLE STORY – 티스토리

1~16절은 팔복으로, 산상 설교 전체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을 뿐아니라 천국 시민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님은 천국 시민의 요건(특징)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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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9/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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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주석 – 마태복음 5:13~16 호크마 주석 – 족자 한국교회

성경 주석 – 마태복음 5:13~16 호크마 주석. …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koreanchurch.blogspot.com

Date Published: 2/19/2021

View: 6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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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장] 마태복음5장_복이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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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마태 복음 5 장 주석

  • Author: 홍융희
  • Views: 조회수 12,9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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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0. 1. 10.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0yCfPoap5Ao

마태복음 5장 주석

마태복음 제 5장

=====5:1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

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

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 ,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

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

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

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

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

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

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신약의 시내

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

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

(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제자들이 – (*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

키는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

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

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갈이'(출19:12) 백성들을 접

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

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5:2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

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

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가르쳐 – (*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

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

, 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 , 호이 프토코

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

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 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

(* ,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

(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

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

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

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

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

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 , 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

리어 ‘아쉬레'(* )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

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

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

할수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

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

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

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

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

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

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

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

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5:4

애통하는 자(* ,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

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

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

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

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

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

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

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

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

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 )와 ‘부른다'(* )의 합성어

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

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

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

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

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5:5

온유한 자(* ,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 )

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

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

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

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

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

(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

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

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

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

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

(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

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구별되는 장소(6:10;9:6), 지

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

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

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

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

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

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

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

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

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

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

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

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 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

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

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

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

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

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

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

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

)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

)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

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

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

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5:7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

)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 )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 )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 )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

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

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

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

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

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

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

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

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5:8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 )란 그리이스인들

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

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 )나 ‘레

바브'(* )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

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

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

(* )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

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

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

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 )

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 )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 )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

)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

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

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

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5:9

화평케 하는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

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 )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

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

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

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

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

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

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

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

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

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

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

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

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

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

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

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

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5:11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

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

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

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

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

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

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

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

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

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 카

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

다'(* ,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

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

러면 그들의 받을 ‘상'(* ,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

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

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

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

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

(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

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

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

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

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

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

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

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

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

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

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

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것이 ‘노새의 태(

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

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

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

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

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

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

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

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

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

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

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

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

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

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

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

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

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 ,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

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

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

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

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

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

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

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

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

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

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

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

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

(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

(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

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

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

다’고 하였다.

=====5:17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

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

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

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

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

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

난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

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

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

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

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

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

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

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

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

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

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

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

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

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

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

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

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

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일점 일획(一點 一劃)(* ,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

)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 )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

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 )라고 하

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

들(* ; / ;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

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

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

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

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

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

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

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

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

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

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

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서 이루어질 것이다.

=====5:19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

곳에서는 ‘극히 작은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

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

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

(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

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

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

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

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

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

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

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

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

(Carson).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

(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

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

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

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

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

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

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

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

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

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

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

(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

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

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

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

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

을 강조하고 있다.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

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

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

)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

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 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

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 ,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

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

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

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

하는 사람은 심판(* , 크리시스;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

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 , 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

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

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

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

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

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

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

(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

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 ,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

게 되는 것이다(Carson).

지옥불(* , 게엔나 투 퓌로스).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 , 힌놈의 골짜기)에

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

(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렘 7:31; 겔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

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

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짝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꼴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

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

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

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라가(* , 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 )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미련한 놈(* ,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

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 )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

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

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

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

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

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5:23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

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

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

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

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

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

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

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

力)해야 할것이다.

=====5:24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 )는 제 2부

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

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 )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

타'(* )가 아닌 ‘디아'(* ,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것 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

(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

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

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

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5:25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

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

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

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

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

는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

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 ,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

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

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

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

중된다. 한편 ‘옥'(* ,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

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

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

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

다(Lange).

=====5: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

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

(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

각했다(Schweizer).

호리라도(* ,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

의 ‘우메'(* )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5:27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

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

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5:28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

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

)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

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음욕을 품는(* , 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

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

텐'(* )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

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 , 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

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

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

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

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5:29,30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

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

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

)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

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

‘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 )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

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

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 , ‘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

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

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

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

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

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

(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

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

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

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있다(18:8, 9).

=====5:31

또 일렀으되 – 이 도입 공식문은 본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

속사 ‘데'(* , 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

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

이다.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

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

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

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

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

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

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

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

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

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5:32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함이니라 –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

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틴 에서는 결혼이 여

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

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

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

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

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

(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

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버리면(* , 아폴뤼온) –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

(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간음하게 함이요(* , 모이큐데나이) – 이는 좀더 육체적이

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 보다 약한 뜻

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

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5:33

헛 맹세를 하지 말고…너희가 들었으나 –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

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

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6:3;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

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

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

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

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

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5:34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 메 오모사이 호로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

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맹세 자체의 무용성

(無用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스스로 맹

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자주 맹세와 서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롬 1:19; 고후 1:23; 갈 1:20).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바 예수께서 강조하

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 온 습관적이고, 진실치 못하고 위선적(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진실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맹세

라는 제도가 영리한 거짓과 궤변적인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회가 되어 버린다면 예수는

그것을 폐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은 근본적으로 순전하고도 일관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맹세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의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지니는 언어의 유희(遊戱)와 자기 합리화(合理化) 및 자기 변호의 추악한 도구

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하늘로도 말라 –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

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

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

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5:35

땅으로…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

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예루살렘으로…큰 임금의 성임이요 – 시 48:2;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으로 맹세하다'(* , 옴뉘나이 엔)

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땅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을 향하여 맹세하

다'(* , 옴뉘나이 에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

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

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

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

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

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

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5:36

네 머리로도 말라 –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

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

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

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

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

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

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5:37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

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

(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

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

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

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

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

(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

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

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

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여기서 ‘악으로 좇아'(*

, 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요 8:44)

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

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

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5: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 출 21:24; 레 24:19-20; 신 19:21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경의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레 19:18). 구약

성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제정함으로써 복수행위가 결정적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나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에 입각한 국

가적 사법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보복 대신으로 금전이

나 물건이 배상금으로 징수되기도 하였다(출 21:26, 27). 그리고 예수의 시대에는 법

정에서 동해 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율법 규정에서 문

제가 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고 공정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복수를 정

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가 단지 동해 복수

범이 사법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만 반대하

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예수가 들고 있는 예

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누가 너희를 때리면 너도 같이

때리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게끔 하라는 식의 예로 나타났을 것이

다. 예수의 주장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Carson).

=====5:39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왼편도 돌려대며 – 여기서 뺨을 치는 행위는 육체적인 아

픔을 주기 위하여 일격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모욕적인 행위도 포함된다

(고후 11:20). 만일 오른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오른편 뺨을 쳤다면 그것은 손등으로

찰싹 때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손바닥을 사용해서 때리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M. Baba Kamma 8:6). 어쨌든 예수의 제자라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동해 복수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적한다

는 것을 ‘법정에서 대항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예(40절)

를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33-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은 형식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상충된다. 그러나 17-20절의 문맥에서 보

면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동해 복수법을 포함하여 모든 구약성경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

에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19:3-4)동해 복수법도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악을 억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는 한 발 양보하여서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폭력의 강물을 막아주는 방파

제로서 법률 규정을 주신 것이다(Piper). 율법의 원칙들이 율법을 지향하던 분에 의

하여 압도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것도 그분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 구

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령이 변화되어 새 언약 아래서 살아 갈 때

를 내다 보았다(렘 31:31-34;32:37-41; 겔 36:26).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면 사람들

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렘 31:34; 겔 36:25)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하나님께

복종할 것이다(렘 31:33; 겔 36:27). 이같이 이런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

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나라 안에서(비록 부분적이지만)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종말론적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

(11:13). 그리고 종말을 지향함으로써 악을 억제하였던 예언들은 이제 새 시대와 그

에 따른 새 마음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Piper).

=====5:40

너를 송사(頌辭)하여…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비록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이

양도 불가능한 소유였지만(출 22:26; 신 24:13),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그들의 속옷

(보통 겉옷은 속옷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법적으로는 자신의 소유임이 인정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 눅 6:29

에서는 송사에 대해 겉옷과 속옷의 순서로 이야기하여서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반대이

다. 이 때문에 혹자(Schweizer)는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가 전제

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속옷을 원하는 소송 대상자가 전제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밤에 입는 의복이며 덮개인 겉옷은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압류할 수 없기 때

문이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순서가 단순히 옷을 벗어주는 정상적인 순서를 생각

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출 22:25, 26에서 이미 하나님 스스

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항

하여 자신의 권리를 재판에서 관철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벗은 채

로 살아가라는 예수의 전례 없는 진술 배후에는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Schweizer).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온갖 고난과 아픔을 무릎쓰는 적극적 이타주의의 실현에의 요구가 강조되

어 있다.

=====5:41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십리를 동행하고 – 세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

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

고 있다. 즉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 ,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한편 이 단어는 27: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

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

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

이 아니라 도울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5:42

네게 구하는 자에게…거절하지 말라 – 네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

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출 22:25; 레 25:37; 신 23:19)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신 15:7-11; 시 37:26;112:5).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눅 6:30)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곧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要點)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

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잠 11:15;17:18;22:26).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

자에게 칼도 줄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Tholuck).

이렇듯이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

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

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5: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

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

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

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

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것이라 추측 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

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

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같은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 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

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

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

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

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

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같은 단서

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

되기도 했다. 한편 본절은 19:19;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

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

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

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

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5:45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

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

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

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예(榮

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그 해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

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없이 사랑

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

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분명 선

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

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

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순종(順從)을 동시에 요구하신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요

15:9-11; 유 1:21). 그런데 칼빈(Calvin) 이후로 많은 신학자들은 44, 45절을 하나님

의 ‘일반 은총’과 관련시켜 왔다. 여기서 ‘일반 은총’이란 모든 인간에게 구별없이

‘공통적으로’ 주어지는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은 공의로써 모든 사람을 정죄하실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시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계속하여 오래동안 은총을 베

푸셨다. 사실 ‘일반 은총’을 강조하는 자들의 견해로는 이구절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원수를 대하는 우리의 기본적인 마음이지 하나님의 사랑이 도덕적인 면과는 무

관하다거나 종말론적으로는 아무 구별없이 주어지는 사랑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은 아

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염두에 둘 사실은 구약성경에는 원수에 대하여 가혹한 태도

를 요구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러한 어두운 면을 무차별적인 사랑으로 극복(克服)하

고 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관념은 그에 반대되는 증거들을

살펴보면 부인될 수밖에 없다. 즉 구약성경에는 형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

을 명령하고 있는 곳이 많이 있다(출 23:4, 5; 레 19:18, 33, 34; 삼상 24:5; 욥

31:29; 시 7:4; 잠 24:17, 29;25:21, 22). 그리고 반면에 신약성경에서도 타락하여

버림 받은 자를 강력히 정죄하고 있다(눅 18:17; 고전 16:22; 살후 1:6-10; 딤후

4:18; 계 6:10). 오히려 44, 45절에서 주장하는 것은 43절에 인용된 구약성경의 율법

이 천국의 상속자(相續者)들이 보여 주어야 할 풍족한 사랑, 즉 다른 사람들이 경험하

였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랑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이 구절의 핵심은 아들

이 되는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성품을 닮은 아들됨을 추구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자신을 예언자 계열 위에

놓는 것이다(5:12). 그러나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는 것은 자신을 하

나님의 성품의 연장위에 놓는 것이다”(D. A. Carson).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

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인 것이다”

(Plummer). 이 두 마디의 말이 보여주는 것은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 주위 사람들의

행동 양식보다 뛰어나게 살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D.A. Carson).

=====5:46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 공관복음에 나오는 세리들

은 로마 정부의 직접적 임명을 받은 조세징수(租稅徵收) 청부 계약의 주계약자가 아니

다(라틴어로는 Publicani). 그들은 통상적으로 외국인이었고 ‘세리’들이란 단지 그

밑에서 일하며 한지방을 맡아서 징수하는 본토(本土) 출신 사람(라틴어로는

Portitores)들이었다. 사실 이들은 멸시받는 존재였다. 그 이유는 조세 청부 제도가

대규모의 부정 부패(不正腐敗)를 낳게 할 뿐 아니라 엄격한 유대인의 눈에는 세리들이

그들을 지배하는 외세를 위하여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매국적인 행위를 하기 때문이었

다. 그 뿐 아니라 세리들은 이방인들과 접촉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더럽혀져서 부정

하게 되었을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상황은 조세징수의 계약자가 이방

인 상급자들과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위 계급의 세리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

다. 실로 세리들은 창녀와 다른 죄인들과 함께 취급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까지도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 즉 그의 모친이나 동료 세리들은 사랑하

는 것이다(D.A. Carson). 그것은 너무도 인간적이요 본능적인 사랑이다.

무슨 상이 있으리요 – 이 말은 결국 하나님께서 각 개인의 삶을 세밀히 평가하고

계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후 5:10). 사실 신령한 일에는 세상의 보상보다 더

공정하고 영화로운 상급(上級)이 주어진다(1-12절).

=====5:47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이방인들도… – 적절한 인사를 하는 것은 예

의와 존경의 표시이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형제들’, 즉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

은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다른 제자들에게만 그런 인사를 한다면 그들은 ‘이방

인'(* , 에드니코이)과 다를 바가 없다. 여기서 ‘에드니코이’는 선민

(選民) 이스라엘에 반(反)하는 이방 민족들 전체를 가리키는데, 대부분의 이방인이 이

교도(異敎徒)이므로, 이 말은 결국 인종적 의미 이상의 영적인 조롱의 뜻을 갖게 되었

다. 사실 “사람이 친구를 사랑할 때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라 볼 수 있다. 즉 친구 사랑은 일종의 확장된 이기심인 것이다”(Broadus). 예수는

바로 이런 이기적 사랑과 예의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 “타락한 옛 인간의 삶

은, 손해는 복수하고 유익은 돌려주는 소박한 정의에 입각한 삶이다. 그러나 구속받

은 새 사람의 삶은 복수를 거부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입각한 삶이

다”(Scott).

=====5:48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온전하라 – 일부 학자들(Allen,

Hendriksen)은 이 절을 마지막 대립 명제(43-47절)의 결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

경우에는 여기에서 말하는 ‘온전’이란 ‘사랑의 온전’이다. 그러나 ‘온전함’에는 훨씬

더 넓은 의미가 들어 있으며, 48절은 본장 전체 대립 명제에 대한 결론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한편 ‘온전'(* , 텔레이오스)이라는 구약성경의 ‘탐밈'(*

, 온전한)이라는 말을 반영하고 있다. 이 ‘탐밈’이라는 말은 희생 동물이

흠(欠)이 없는 것, 즉 하나님께 합당한 것을 말하기도 하고(출 12:5) 여호와께 전적으

로 헌신하는 것, 곧 의로움을 의미하기도한다(창 9:6; 신 18:13; 삼하 22:26). 이와

연결되는 헬라어 단어는 ‘성숙한’ 또는 ‘다 성장한’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다(고전

14:20; 엡 4:13;히 5:14;6:1). 율법이 지향하는 것도 앞의 대립 명제와 관계된 권위

있는 율법 해석에서 보여졌듯이 하나님의 온전하심 그 자체인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이 진정으로 율법과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신 분(17절)을 따르는 제자라면 본받아야할

것이 바로 이런 온전함이다. 사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와 신자들에 관계되는 맥락

(脈絡)안에서만 아버지이신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한다. 진정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예수의 아버지이시고 예수의 제자들의 아버지이신 것이다(H. F. D.

Sparks). 따라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反映)하는 선민으로서

모든 불의한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그들의 독특한 표시였던 것처럼(레 11:44,

45;19:2;20:7, 26) 메시야 공동체도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진정한 곳으로서 이같은 특

징(벧전 1:16)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France). 그러나 이 때문에 자신있게 예

수가, 무제약적인 온전함이 제자들에게 가능 하다고 가르친 거스로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들이 영적으로 파산(破産)하였다(3절)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십사'(6:12)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이 바라던 종말론적

인 목표인 아버지의 온전함을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추구(追求)하여야 하는 것이다.

헬라어 마태복음 5장 원어 성경 주석 강해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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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 데 투스 오클루스 아네베 에이스 토 오로스 카이 카디산토스 아우투 프로셀단 아우토 호이 마데타이 아우투

개역개정,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새번역,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 ㉠그, ‘그가’

우리말성경,1 그때 예수께서 많은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그의 제자들이 다가왔습니다.

가톨릭성경,1 예수님께서는 그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영어NIV,1 Now when he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영어NASB,1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the mountain; and after He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영어MSG,1 When Jesus saw his ministry drawing huge crowds, he climbed a hillside. Those who were apprenticed to him, the committed, climbed with him. Arriving at a quiet place, he sat down

영어NRSV,1 When Jesus saw the crowds, he went up the mountain; and after he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헬라어신약Stephanos,1 ιδων δε τους οχλους ανεβη εις το ορος και καθισαντος αυτου προσηλθον αυτω οι μαθηται αυτου

라틴어Vulgate,1 videns autem turbas ascendit in montem et cum sedisset accesserunt ad eum discipuli eius

히브리어Modern,1 ויהי כראותו את המון העם ויעל ההרה וישב שם ויגשו אליו תלמידיו׃

성 경: [마5: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무리를 보시고 – ‘무리들’은 4:23-25에 언급된 ‘허다한 무리’를 가리킨다. 예수는 자신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을 향해 몸을 돌이키신다. 이때의 예수의 사역은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사역의 내용은 단편적인 교훈을 포함한 병고침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천국 복음'(4:23)의 세밀한 내용을 가르치려 하시는 것이다.

󰃨 산에 올라가 – 마 5-7장을 ‘산상 수훈’이라고 일컫게 한 구절이다. 누가복음에는 이 장소가 평지(눅 6:17)로 되어 있어 ‘평지 수훈’이라 불리우는 바 이러한 차이에 의하여 두 설교를 완전히 다른 것이라 주장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눅 6:17 주석, 강해 참조). ‘산'(*, 토 오로스)과 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단순히 ‘산악지역’, ‘산이 많은 지방’을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 ‘평지’가 산아래 평원(平原)이 아니라 산에 있는 평평한 지역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전승은 가버나움과 디베랴 사이의 한 언덕을 산상 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의 산으로 전하고 있으며 갈릴리에 내려오는 한 전설은 그 산 이름을 핫틴산이라 부르고 있으나 그 어느 것도 분명하지 않다. 한편 고대의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께서 일부러 산에 올라가셨으며 그것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모세와 새로운 계명을 가르치는 자신과의 유사함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산을 흔히 ‘신약의 시내산’이라 일컫기도 한다(Carr and Delitsch). 실로 예수의 메시지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복음이었고 예수께서는 모세보다 위대하신 새로운 모세의 실체이셨던 것이다.

󰃨 앉으시니 – 유대의 랍비들이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의 엄숙한 교수 태도이다(13:2;23:2;24:3; 눅 4:20). 예수께서는 전도자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친근하면서도 위엄있는 한 스승의 모습을 보인다.

󰃨 제자들이 – (*, 호이 마데타이). 선택된 12제자들만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동안 예수를 추종하며 교제하던 무리들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Alford). 마태는 의도적으로 10:1 이전까지는 12제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이 말은 완전히 성장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도 이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11:2). 누가복음의 평행 구절에도 ‘제자의 허다한 무리’라는 표현과 동시에 ‘많은 백성’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눅6:17). 이는 4:25 내용과 조화를 이룬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는 특별히 당신을 진실히 따르기로 소원하는 무리들을 따로 불러 가르치셨다는 것이다.

󰃨 나아온지라 –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에 ‘시내산에서와 같이'(출19:12) 백성들을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던 일은 이 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수 자신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와 직접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과 진리와 생명(요 14:6)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의 계명을 듣고 지키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카이 아노잌사스 토 스토마 아우투 에디다스켄 아우투스 레곤

개역개정,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새번역,2 ㉡예수께서 입을 열어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 ㉡그, ‘그가’

우리말성경,2 예수께서 입을 열어 그들을 가르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가톨릭성경,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영어NIV,2 and he began to teach them, saying:

영어NASB,2 He opened His mouth and began to teach them, saying,

영어MSG,2 and taught his climbing companions. This is what he said:

영어NRSV,2 Then he began to speak, and taught them, saying:

헬라어신약Stephanos,2 και ανοιξας το στομα αυτου εδιδασκεν αυτους λεγων

라틴어Vulgate,2 et aperiens os suum docebat eos dicens

히브리어Modern,2 ויפתח את פיהו וילמד אותם לאמר׃

성 경: [마5: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입을 열어 – 그리스도의 말씀의 엄숙한 권위를 나타내는 표현(13:35; 행 8:35;10:34)으로서 구약성경에서 유래하였다(욥 3:1;33:2; 단 10:16). 이 표현은 주로 격식이 갖춰진 상황이나 계시 전달의 장면에 사용되었다. 그리스도의 입이 열렸으니 ‘떡으로만 살던’ 백성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4:4).

󰃨 가르쳐 – (*, 에디다스켄). 이것은 미완료 과거형이며 동작의 시작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께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는 뜻이다. 예수의 사역에는 가르침과 전파함과 치료함이 포함되어 있었다(4:23). 본문의 예수께서 행하신 ‘가르침'(*, 디다스코)의 최종 메시지는 천국’복음'(*, 유앙겔리온;4:23)이었으며, 이 ‘천국 복음’이야말로 산상 수훈의 중심 주제인 것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호티 아우톤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새번역,3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그, ‘심령이’

우리말성경,3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톨릭성경,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NIV,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3 “You’re blessed when you’re at the end of your rope. With less of you there is more of God and his rule.

영어NRSV,3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3 μακαριοι οι πτωχοι τω πνευματι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3 beati pauperes spiritu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3 אשרי עניי רוח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5: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심령이 가난한 자(*, 호이 프토코이 토 프뉴마티). 누가복음에는 단지 ‘가난한 자'(눅 6:20)로 표현되어 있다. 이런 차이에 대해 혹자는 이 구절은 누가의 정확한 기록에다 마태가 ‘심령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영적인 것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가난한 자’라는 말은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헬라어 ‘프토코스'(*, 가난한)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 여러 개의 히브리 단어 중 가장 중요한 ‘아나임'(*, 가난한 자)이란 말은 부자나 권력가들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suppression)에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사람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가난한 자’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시 37:14;40:17;69:29; 잠 16:19). 이같이 가난한 자란 말은 그 내용적 측면에서 심령이 겸손하고 회개하는 자에 대한 구절들과 연관되어 있다(사 57:15;66:2). 더욱이 사 61:1은 장차 오실 메시야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함으로써 가난한 자의 특성이 단순한 물질적 궁핍의 차원을 능가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눅 4:18). 이러한 점에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단지 용기가 없다거나 물질적으로 궁핍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적인 파탄(破綻)을 솔직이 시인하며,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은 무가치하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이다(시 69:29;70:5;74:21; 사 61:1; 습 3:12). 또한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는 정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이며(시 37:14;86:14), 그리고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것이다(시 34:6, 18;51:17; 사 66:2). 복이 있나니(*, 마카리오스) – 이 단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아쉬레'(*)에 대응되어 사용되던 말로서 본래 외적인 번영을 의미하였으나 여기서는 주.객관적으로 한 인간의 축복받는 상태를 묘사한다. 이 단어의 배후에는 모든 불행한 환경(예를들면 ‘가난’, ‘애통’, ‘주리고 목마름’, ‘핍박받음’등)의 원천(origin)인 죄에 대한 인식과, 이러한 불행을 완전하고도 효과적으로 치유(治癒)할 수 있는 거룩함에 대한 인식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마태복음의 경우 ‘복이 있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육체의 가시적인 안락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리는 궁극적인 평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한 인간의 유복한 상태를 말한다.

󰃨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마태는 메시야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를 “천국”(*,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으로 나타낸다. 이는 메시야를 왕으로 그의 백성들을 천국의 시민으로 묘사하려는 마태의 면모를 보여 준다. 천국은 가난한 자,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 메시야의 통치를 향유하고 그가 주시는 축복을 받을 자의 소유이다. 여기에서의 천국은 넓은 의미로 현세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누릴 모든 특권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축복을 포함한다(Alford). 그러나 천국은 인간의 노력에 대한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한 선물(present)이다. 한편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10절)이 모두 천국에 대한 축복인것은 그 가운데 있는 것들도 모두 천국에 관계되어 있음을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첫번째 복과 마지막 복에서는 축복이 현제 시제로 표현되어 있어 천국이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실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암시하고 있다(4:17;8:29;12:28).

마카리오이 호이 펜둔테스 호티 아우토이 파라클레데손타이

개역개정,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4 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4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영어NIV,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영어NASB,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영어MSG,4 “You’re blessed when you feel you’ve lost what is most dear to you. Only then can you be embraced by the One most dear to you.

영어NRSV,4 “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will be comforted.

헬라어신약Stephanos,4 μακαριοι οι πενθουντες οτι αυτοι παρακλ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4 beati mites quoniam ipsi possidebunt terram

히브리어Modern,4 אשרי האבלים כי הם ינחמו׃

성 경: [마5: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애통하는 자(*, 호이 펜둔테스) – 앞 구절과 마찬가지로 사 61:1의 반영이다. 70인역(LXX)에서 이 어휘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자신과 타인의 죄에 대한 결과를 탄식하는 아픔을 묘사하는 말이다(Mc Neile).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자신의 심령이 파멸하였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진실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고 철저히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이 애통은 영적인 측면의 애통을 말하는 것으로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는 불의(不義)에 대한 애통이며, 사람들이 자랑하던 바로 그 도덕성과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대한 애통이며, 하나님의 뜻을 진지하게 찾고 끝끝내 발견하려는 애통인 것이다. 실로 예수 당시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던 자들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수치가 외세의 압제 이전에 그들 백성들의 개인적인 죄와 민족적인 공동의 죄 때문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바로 이같은 회개의 눈물을 원하신다(4:17).

󰃨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세상의 소유나 기쁨으로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이 뻗쳐 온다. 여기서 ‘위로'(*, 파라칼레오)라는 말은 ‘곁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이는 당신의 백성에게 내주(內住)하시고 동거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사랑의 행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의 ‘위로'(눅 2:25)가 되려 하심이요, 성령이 오신 목적도 ‘위로자'(요 14:16)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에게 내려질 것이다. 그리고 이미 부분적으로 실현된 ‘위로’는 종말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이루어질 천국에서의 ‘위로'(계 7:17;21:4)가 될 것이다. 진정 애통치 않는 자에게 현세와 내세의 위로는 전혀 기대될 수 없는 법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프라에이스 호티 아우토이 클레로노메수신 텐 겐

개역개정,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5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우리말성경,5 복되도다! 온유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영어NIV,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영어NASB,5 “Blessed are the gentle,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영어MSG,5 “You’re blessed when you’re content with just who you are–no more, no less. That’s the moment you find yourselves proud owners of everything that can’t be bought.

영어NRSV,5 “Blessed are the meek, for they will inherit the earth.

헬라어신약Stephanos,5 μακαριοι οι πραεις οτι αυτοι κληρονομησουσιν την γην

라틴어Vulgate,5 beati qui lugent quoniam ipsi consolabuntur

히브리어Modern,5 אשרי הענוים כי המה יירשו הארץ׃

성 경: [마5: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온유한 자(*, 호이 프라 에이스) – ‘온유한'(*)이란 말은 시편 36:11의 70인역(LXX)에서 나온 것이다. 그 주제는 한 인간이 역경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자를 끝까지 보살피실 것이라고 굳게 믿는 신앙으로 인하여 기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온유’란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고통받고, 그 고통을 오래 참음으로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이다(11:29; 약 3:13).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온유란 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였다. 실로 세상의 정복자들은 강한 힘과 권력으로 땅을 정복하였지만 예수께서는 온유하심으로(11:29;21:5) 세상만물과 천국의 주인이 되셨다. 한편, 본절과 7-10절에 있는 다섯 개의 축복 선언은 누가복음에 평행 구절이 없다. 이로 인하여 이것이 후대의 삽입이라고 주장(Wellhausen)하거나 마태의 것들이 누가복음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지만 팔복은 하나의 통일체이며 그 모든 것들이 천국 시민(메시야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의의 규범(norm)인 것이다.

󰃨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땅'(*, 게)이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 45회 나온다. 그것은 유대 땅(2:6), 이스라엘 땅(2:20,21), 어느 지역(4:15;9:26, 31;11:24;27:45), 하늘과 땅 (천지) (5:18, 35), 하늘과 구별되는 장소(6:10;9:6), 지면(10:29), 흙(13:5, 8, 23) 육지(14:24), 온세상(12:40, 42)을 가리키는 경우에 사용되었다. 본문의 땅은 시 37:11의 약속의 땅에 대한 인용이다. 여기에서 땅을 은유적으로만 해석하여 바다나 하늘에 반대되는 지리적인 공간이 아니라고 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땅의 의미를 이스라엘 땅에 국한(局限)시킬 필요는 없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구절의 진정한 뜻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약속(창 15:18)에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처럼 신약의 성도들이 메시야 왕국의 절정이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사 66:22; 계 21:1)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강하면서도 공격적인 자, 질서를 무시하는 난폭자가 땅을 차지하게 되지만 천국의 기업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온유한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시 37:1, 11, 22, 34). 왜냐하면 온유한 자는 그리스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하늘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모두 그들의 소유(고후 6:10)가 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롬 8:17).

마카리오이 호이 페이논테스 카이 딮손테스 텐 디카이오쉬넨 호티 아우토이 코르타스데손타이

개역개정,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새번역,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우리말성경,6 복되도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배부름이 있을 것이다.

가톨릭성경,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영어NIV,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영어NASB,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satisfied.

영어MSG,6 “You’re blessed when you’ve worked up a good appetite for God. He’s food and drink in the best meal you’ll ever eat.

영어NRSV,6 “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will be filled.

헬라어신약Stephanos,6 μακαριοι οι πεινωντες και διψωντες την δικαιοσυνην οτι αυτοι χορτασ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6 beati qui esuriunt et sitiunt iustitiam quoniam ipsi saturabuntur

히브리어Modern,6 אשרי הרעבים והצמאים לצדקה כי הם ישבעו׃

성 경: [마5: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심령이 가난함'(3절), ‘온유함'(5절) 그리고 ‘애통함'(4절) 만큼 영속적인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예수께서는 영적인 의미로 바꾸신다. 누가복음에는 단순히 ‘주린 자'(눅 6:21)로 묘사되어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그 주림의 목적을 ‘의’라 밝히고 있다. 즉 주림과 목마름은 이 땅위에 사는 모든 인생이 겪는 육적인 기갈(starvation)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심각한 영적 기근을 가리킨다(시 42:2;63:1;107:9; 암 8:11-14). 이러한 굶주림과 목마름은 영으로 거듭난 자들이(요 3:3,5)체험하는 새 생명의 영적 욕구이다(Alford). 이들이 갈망하는 의가 정확하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의 의가 전가(轉嫁)된 ‘종말론적인 구원’이거나 협의적으로는 ‘칭의'(稱義)라고 주장한다(Grundmann, Lohmeyer, McNeile, Schniewind, Schrenk, Zahn, Bornkamm, Bultmann).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디카오쉬네'(*, 의)라는 말이 마태복음에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곳이 없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반대한다(Przybylski, pp.96-98). 그러므로 ‘의’라는 말은 개인적이고도 인격적인 의로움(Hill, Greek Words pp.127 ff;Strecker, Weg.pp. 156-158)인 동시에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적 정의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Ridderbos, pp. 190 ff). 부연한다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세상적으로는 자신이 의로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행할 뿐 아니라 정의가 이루어질 것을 갈망하는 자요, 종말론적으로는 굶주림이나 목마름 같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세상의 불의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의의 본향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자들이다(벧후 3:13)

󰃨 배부를 것임이요 – 이 말에 대한 헬라어 ‘코르타스데손타이'(*)는 푸른 잔디(막 6:39)를 뜻하는 ‘코르토스 클로로스'(*)와 마찬가지로 ‘먹이’나 ‘풀’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을 먹여 살찌우는 데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성도의 목자가 되시어 영생의 생명수와 하늘 양식으로 충만하게 채워 주신다는 의미이다(요 4:14;6:46-51). 진정 의를 구하는 곳에는 영혼의 평안(平安)함이 있으며, 그 완벽한 영혼의 만족이 바로 신앙의 대가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마카리오이 호이 엘레에모네스 호티 아우토이 엘레에데손타이

개역개정,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7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우리말성경,7 복되도다! 자비로운 사람들이여, 그들은 자비를 받을 것이다.

가톨릭성경,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영어NIV,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be shown mercy.

영어NASB,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receive mercy.

영어MSG,7 “You’re blessed when you care. At the moment of being ‘carefull,’ you find yourselves cared for.

영어NRSV,7 “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will receive mercy.

헬라어신약Stephanos,7 μακαριοι οι ελεημονες οτι αυτοι ελε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7 beati misericordes quia ipsi misericordiam consequentur

히브리어Modern,7 אשרי הרחמנים כי הם ירחמו׃

성 경: [마5: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긍휼히 여기는 자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호이 엘레에모네스'(*)는 ‘자비’란 뜻의 ‘엘레오스'(*)에서 파생한 용어이다. 특히 70인역에서 ‘엘레오스’는 ‘사랑’이란 뜻의 히브리어 ‘헤세드'(*)와 ‘동정’이란 뜻의 히브리어 ‘라하밈'(*)의 변역어로 쓰였다. 그중 구약에서 ‘헤세드’는 주인과 종, 또는 친지들 사이의 관계, 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는 단지 감정이나 성품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구약에서 이 용어는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역사(役事)를 의미했으며,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은 자들은 바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즉 긍휼히 여긴다는 말은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고통을 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를 동정한다는 의미를 포괄(包括)한 것이다. 그리고 시련을 당한 자들의 상황에 깊이 동참하여 그들로 하여금 부담없이 도움을 청하게 하는것을 의미한다. 한편 긍휼히 여길 대상은 바로 이 죄악된 세상이며, 성도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실천하는 존재가 된다. 즉 성도에게만이 이 세상의 회복자로서의 자질이 주어져 있다.

󰃨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죄악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세상의 참된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깃든다. 즉 긍휼에 대한 보상은 타인이 베푸는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인 것이다(클레멘트 1서 13:2).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베푸는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적 근거(causal ground)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occasional ground)계기가 된다는 의미이다(6:14, 15). 실로 긍휼은 소자에게 한 잔의 물을 대접하는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 세상의 죄악된 세상과 투쟁하는 거대한 사역에 이르기까지 성도 안에 있는 일관된 태도인 것이다. 또한 본절은 긍휼하심을 받은 성도가 긍휼을 실천하며(요일 4:19), 그 실천으로 다시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하심을 받는 순환론적인 것이다. 이는 마치 눈덩이가 구르면서 더 큰 눈덩이가 되듯이 긍휼의 풍성함에 성도가 거한다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축복 선언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최종적인 보상은 최후의 심판 때 성도에게 주어진다(약 2:13).

마카리오이 호이 카다로이 테 카르디아 호티 아우토이 톤 데온 옾손타이

개역개정,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새번역,8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우리말성경,8 복되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가톨릭성경,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영어NIV,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영어NASB,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영어MSG,8 “You’re blessed when you get your inside world–your mind and heart–put right. Then you can see God in the outside world.

영어NRSV,8 “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will see God.

헬라어신약Stephanos,8 μακαριοι οι καθαροι τη καρδια οτι αυτοι τον θεον οψονται

라틴어Vulgate,8 beati mundo corde quoniam ipsi Deum videbunt

히브리어Modern,8 אשרי ברי לבב כי הם יחזו את האלהים׃

성 경: [마5: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마음이 청결한 자 – ‘마음’의 헬라어 ‘카르디아'(*)란 그리이스인들에게서 (1) 육체적으로 ‘신체의 중심 기관’, (2) 비유적 으로 ‘감정이나 사고의 중심지’를 뜻하는데 쓰였다. 이 용어는 70인역(LXX)에서 히브리어 ‘레브'(*)나 ‘레바브'(*)를 번역할 때 사용되었다. 따라서 ‘카르디아’는 (1) 문자적로 ‘가슴’, (2) 비유적으로 ‘인간의 사고, 종교적 윤리적 행위의 원천'(삼상 12:12)이라는 의미를 내포하였다. 더구나 신약에서 이 용어는 인간의 지.정.의의 근본 원천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7:21; 눅 21:14; 요 16:6 등). 또한 ‘청결’의 헬라어 ‘카다로스'(*)는 당시 유대교의 정결 예식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서 도덕적, 종교 의식적인 정결을 의미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사고와 행위의 원천인 마음을 탐욕과 두 마음에서 해방시키고 정결케 하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그리스도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신실한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마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도는 ‘두 마음’을 품는 자가 아니며(약 1:8),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 그리고 참 소망으로 성도의 교제를 돈독(敦篤)히 하는 자를 의미한다(히 10:22-25 참조).

󰃨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볼 것임이요’의 헬라어 ‘와손타이'(*)는 ‘보다’라는 뜻의 ‘호라오'(*)의 미래형이다. 특히 ‘호라오’는 ‘눈으로 보다’라는 뜻인 ‘블레포'(*)와 ‘눈여겨 보다’라는 뜻인 ‘데아오마이'(*)와는 달리 ‘경험을 통해서 보다’, 즉 ‘실제적으로 보다’라는 뜻이다. 한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출 19:21;33:20; 삿 6:22 등). 이는 죄악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볼 수 없을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영적 축복인 것이다. 실로 지금은 신앙의 눈으로 보게 되지만 결국에는 어떤 거짓도 폭로되고야 마는 지복 직관(至福直觀, beatific vision-하나님을 직접 보게 되는 축복)의 눈부신 광채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히 12:14; 요일 3:1-3; 계 21:22-27).

마카리오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호티 아우토이 휘오이 데우 클레데손타이

개역개정,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새번역,9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 ㉣그, ‘아들들이라고’

우리말성경,9 복되도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이여,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불릴 것이다.

가톨릭성경,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영어NIV,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영어NASB,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영어MSG,9 “You’re blessed when you can show people how to cooperate instead of compete or fight. That’s when you discover who you really are, and your place in God’s family.

영어NRSV,9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children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9 μακαριοι οι ειρηνοποιοι οτι αυτοι υιοι θεου κληθησονται

라틴어Vulgate,9 beati pacifici quoniam filii Dei vocabuntur

히브리어Modern,9 אשרי רדפי שלום כי בני אלהים יקראו׃

성 경: [마5: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화평케 하는 자 – 헬라어 ‘호이 에이레노포이오이'(*) 는 단순히 ‘화평에 속한'(*, 에이레니코스) 사람이 아니라 ‘화평을 만들어 가는 자’를 의미한다. ‘화평'(*, 에이레네)은 히브리어로 ‘샬롬'(*)과 견줄수 있는데, 이 용어는 개인의 안녕(슥 6:13)이나 국가간의 평화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회복으로 인한 궁극적인 평화를 의미한다(사 54:10;66:10-14).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화평의 실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엡 2:14). 바로 예수의 대속적 사역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회복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평화의 왕의 은혜로 구원얻은 성도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예수께서 실현하셨던 평화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실로 그분은 ‘평화의 왕’이셨다(사 9:6, 7; 눅 2:14; 요 14:27). 화평케 하는 것은 단순히 분쟁 등을 완화(緩和)시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화평케하는 진정한 본보기를 하나님이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하신 화평에서 찾아야 한다(엡 2:15-17; 골 1:20).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될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아들’이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다(신 14:1; 호 1:10). 이제는 ‘아들’이라는 칭호가 온유하고 심령이 가난하며 의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줄 알고 특별히 화평케 하는 일을 위하여 준비가 되어 있고 그로써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성품을 반영해 주고 있는 천국의 상속자(inheritor)들을 지칭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화평케 하는 일보다 더 하나님을 닮은 일은 없다”(Broadus). 이러한 축복 선언은 정치적 정열을 불태우고 있던 열심 당원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이었을 것이 분명하다(Morison).

마카리오이 호이 데디오그메노이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 호티 에스틴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새번역,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우리말성경,10 복되도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가톨릭성경,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어NIV,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becaus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10 “Blessed are those who have been persecuted for the sak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10 “You’re blessed when your commitment to God provokes persecution. The persecution drives you even deeper into God’s kingdom.

영어NRSV,10 “Blessed are those who are persecuted for righteousness’ sake,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0 μακαριοι οι δεδιωγμενοι ενεκεν δικαιοσυνης οτι αυτων εστιν 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10 beati qui persecutionem patiuntur propter iustitiam quoniam ipsorum est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10 אשרי הנרדפים על דבר הצדקה כי להם 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5:1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 – 이 구절은 팔복의 마지막 축복이며, 다음 두 구절은 본절의 설명구에 해당한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다란 말씀은 물론 까닭없이 고난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기실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고통당하는 것, 우상에게 절하거나 불의와 타협하기를 거부한 일로 고통당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의 확장을 위해 진력하다가 고초당하는 것,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명예가 실추되고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통제를 받는 것 등을 의미한다. 여기서 예수께서 메시지의 흐름을 화평케 하는 일에서 핍박으로 넘긴 것은 우연(偶然)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증오와 편견을 기뻐하여서 화평케 하는자가 항상 환영받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의에 주리거나 긍휼히 여기는 것이 예수의 제자가 되는 표시인 것처럼 반대를 받는 것도 예수의 제자가 된 표시이다(요 15:18-25; 행 14:22; 벧전 4:13, 14).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딤후 3:12).

󰃨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 이렇게 핍박받는 자들이 받는 보상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받는 복과 같은 것이다(3절). 즉 천국이 저희 것이다. 박해의 시련 속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의에 굳게섰으므로 그들의 큰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는 것이다. 즉 왕이신 메시야의 나라에서 얻어지는 모든 은혜와 은사와 영광은 그들의 것이다. 세상이 그들에게서 무엇을 빼앗든지 그것은 그들로부터 그 무엇도 빼앗을 수 없는 이 하늘나라의 소유에 의해서 보충되고도 남는다. 이로써 천국의 소유로 시작하고 그것으로 끝맺어지는 8복의 설교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마카리오이 에스테 호탄 오네이디소신 쉬마스 카이 디옼소신 카이 에이포신 판 포네론 칻 휘몬 프슈도메노이 헤네켄 에무

개역개정,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새번역,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터무니없는 말’이 없음

우리말성경,11 복되도다! 나 때문에 사람들의 모욕과 핍박과 터무니없는 온갖 비난을 받는 너희들,

가톨릭성경,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영어NIV,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영어NASB,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insult you and persecute you, and falsely say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because of Me.

영어MSG,11 “Not only that–count yourselves blessed every time people put you down or throw you out or speak lies about you to discredit me. What it means is that the truth is too close for comfort and they are uncomfortable.

영어NRSV,11 “Blessed are you when people revile you and persecute you and utter all kinds of evil against you falsely on my account.

헬라어신약Stephanos,11 μακαριοι εστε οταν ονειδισωσιν υμας και διωξωσιν και ειπωσιν παν πονηρον ρημα καθ υμων ψευδομενοι ενεκεν εμου

라틴어Vulgate,11 beati estis cum maledixerint vobis et persecuti vos fuerint et dixerint omne malum adversum vos mentientes propter me

히브리어Modern,11 אשריכם אם יחרפו וירדפו אתכם וידברו בשקר עליכם כל רע בעבורי׃

성 경: [마5:1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나를 인하여…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 이 구절에서는 10절의 핍박을 모욕과 박해와 비방(slander)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고 있고 누가복음에서는 증오도 포함하고 있다(눅 6:22, 23). 10절에서는 ‘의를 위하여’라는 것이 핍박의 이유였으나 여기에서 예수는 ‘나를 인하여’라고 직접적으로 말한다. 이 구절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바로 예수를 닮아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혀 준다. 동시에 제자들과 예수의 행하신 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의로 가득차지 않고는 예수께 충성을 고백할 수없다는 사실을 밝혀 준다.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기독론적인 주장을 암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과 비교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고, 제자들은 예수에 대한 충성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선지자에 비견(比肩)되는 것은 예수가 아니라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 있다.

카이레테 카이 아갈리마스데 호티 호 미스도스 휘몬 폴뤼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후토스 가르 에디옼산 투스 프로페타스 투스 프로 휘몬

개역개정,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새번역,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

우리말성경,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들의 상이 크다. 너희들보다 먼저 살았던 예언자들도 그런 핍박을 당했다.

가톨릭성경,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영어NIV,12 Rejoice and be glad, because great is your reward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영어NASB,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n heaven is great,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영어MSG,12 You can be glad when that happens–give a cheer, even!–for though they don’t like it, I do! And all heaven applauds. And know that you are in good company. My prophets and witnesses have always gotten into this kind of trouble.

영어NRSV,12 Rejoice and be glad, for your reward is great in heaven, for in the same way they persecuted the prophets who were befor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12 χαιρετε και αγαλλιασθε οτι ο μισθος υμων πολυς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ουτως γαρ εδιωξαν τους προφητας τους προ υμων

라틴어Vulgate,12 gaudete et exultate quoniam merces vestra copiosa est in caelis sic enim persecuti sunt prophetas qui fuerunt ante vos

히브리어Modern,12 שמחו וגילו כי שכרכם רב בשמים כי כן רדפו את הנביאים אשר היו לפניכם׃

성 경: [마5:1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팔복에 대하여]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상이 큼이라 – 여기서 먼저 ‘기뻐하다'(*, 카이로)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는 좋은 감정, 벅찬 기쁨의 상태를 의미하며, ‘즐거워하다'(*, 아갈리아오)란 외부로 넘치는 기쁨, 억제할 수 없는 역동적인 환희 등의 뜻으로서 ‘카이로’보다는 좀더 점층된 기쁨의 상태를 암시한다(눅 1:47;10:21; 요 5:35).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핍박 중에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으로 기뻐할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그들의 상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들의 받을 ‘상'(*, 미스도스)이란 무엇일까? 혹자는 이에 대해 ‘합당한 보상이란 단순히 그것을 목표로 하는 행동에 항상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에는 그 행동 자체가 합당한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Lewis)고 한다. 사실 신약성경에서 역설하는 보상의 개념은 대부분 이런 범주(範疇)에 속한다. 진정 우리가 천국의 규범 아래서 살게 되면 자연히 천국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에서 넘쳐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어쨌든 본문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의 제자들은 이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박해와 반대를 받을 것이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전에 박해받았던 예언자들과 같은 계열에 서 있는 것이다(대하 24:21; 느 9:26; 렘 20:2; 행 7:52; 살전 2:15).

󰃨 선지자들을…핍박하였느니라 – 구약성경은 엘리야,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느헤미야 등 위대한 선지자들을 말한다. 한 예로 예레미야는 채찍을 맞기도 했으며(렘20:2),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는 돌에 맞았고(대하 24:21), 유대 전설에 의하면 이사야가 므낫세 치하중 톱으로 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Alford). 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사도들에 대한 핍박을 위시하여 핍박의 역사는 중단된 적이 없다. 이 구절들은 박해받기를 자칭하라고 권장하는 것이 아니며 박해에서 도피하거나 그 때문에 마음이 어지럽거나 보복하려는 것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구속사(‘예언자들’)와 영원(‘하늘에서의 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구절들은 합당한 신앙의 응답의 내용을 이루는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행 5:41; 고후 4:17; 벧전 1:6-). 실로 제자직이란 고난 받은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고난에로 부름받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실 고난은 기쁨이며 은총의 표시이다(Bonhoeffer).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새로운 것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도, 불합리한 것도 아니'(Bonnard)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켜 주면서 특히 10장과 24장에서 다시 언급할 박해의 원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Carson).

휘메이스 에스테 토 할라스 테스 게스 에안 데 토 할라스 모란데 엔 티니 할리스데세타이 에이스 우덴 이스퀴에이 에티 에이 메 블레덴 엨소 카타파테이스다이 휘포 톤 안드로폰

개역개정,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새번역,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우리말성경,13 너희는 이 땅의 소금이다. 그러나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되겠느냐?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 바깥에 버려지고 사람들이 짓밟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영어NIV,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loses its saltin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by men.

영어NASB,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s become tasteless, how can it be made salty again?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except to be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foot by men.

영어MSG,13 “Let me tell you why you are here. You’re here to be salt-seasoning that brings out the God-flavors of this earth. If you lose your saltiness, how will people taste godliness? You’ve lost your usefulness and will end up in the garbage.

영어NRSV,13 “You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salt has lost its taste, how can its saltiness be restored? It is no longer good for anything, but is thrown out and trampled under foot.

헬라어신약Stephanos,13 υμεις εστε το αλας της γης εαν δε το αλας μωρανθη εν τινι αλισθησεται εις ουδεν ισχυει ετι ει μη βληθηναι εξω και καταπατεισθαι υπο των ανθρωπων

라틴어Vulgate,13 vos estis sal terrae quod si sal evanuerit in quo sallietur ad nihilum valet ultra nisi ut mittatur foras et conculcetur ab hominibus

히브리어Modern,13 אתם מלח הארץ ואם המלח היה תפל במה ימלח הן לא יצלח עוד לכל כי אם להשליך חוצה והיה מרמס לבני אדם׃

성 경: [마5:1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 ‘소금'(*, 할라스)은 고대의 종교 세계에서 인내와 순결과 부패 방지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거룩한 제사에 사용되었고(출 30:35; 레 2:13), 하나님과의 영원 불변하는 언약에 연관되었다(민 18:19).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소금의 역할과 가치를 인정하셨다. 예를 들면 제자들은 희생의 의미를 담고서 소금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막 9:49). 한편 본문에 언급된 바대로 소금이 그 맛을 잃는 것에 대한 언급(눅 14:34, 35)은 매우 흔한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상당히 중요한 의미(意味)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사실 ‘소금과 햇빛보다 유용한 것은 없다’는 혹지(Pliny)의 말처럼 소금과 빛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늘 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들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이 분명하다. 앞서 소금의 여러 용도가 이야기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소금은 음식을 보존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고기에 약간만 뿌려 두어도 부패가 상당히 느려지게 된다. 그런데 엄격하게 말하자면 소금이 그 맛을 잃을 수는 없다. 염화나트륨(Nacl)은 완전한 화합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대 세계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소금은 소금물을 증류하여 얻은 것이 아니라 염분이 있는 늪지 등에서 추출된 것이기 때문에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소금은 불순물보다 쉽게 녹기 때문에 용해되어 나오기 쉬웠고 그렇게 희석(稀釋)되어 소금이 추출되고 남은 나머지는 거의 쓸모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는 아직도 맛을 잃은 소금이 평평한 지붕의 흙 위에 뿌려진다고 전해진다. 이 소금 때문에 흙은 더 단단해지고 새는 구멍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지붕이 운동장이나 공공집회의 장소도 되기 때문에 소금은 여전히 사람에게 밟히고 있는 것이다(Deatrick, ‘salt’, p. 47). 한편 ‘어떻게 다시 짜게 할 수 있는가’하는 본문의 질문은 슈바이쩌(Schweizer)가 지적한대로 어떤 구체적인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소금을 다시 짜게 할 수 있는 것이 ‘노새의 태(胎)’와 같다고 대답한 랍비의 말(노새는 번식력이 없으므로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뜻)은 요점을 놓친 것이다(Schweizer). 여기에서 말하는 요점은 (1) 예수의 제자들이 천국의 규범에 따름으로써 세상에서 방부제로 행동하여야 하며, (2) 도덕적 기준이 저급하고, 끊임없이 변경되거나, 기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 속에서 소독제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장점을 계속 유지하여야만 이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Tasker).

휘메이스 에스테 토 포스 투 코스무 우 뒤나타이 폴리스 크뤼베나이 에파노 오루스 케이메네

개역개정,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새번역,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우리말성경,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워진 도시는 숨겨질 수 없다.

가톨릭성경,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영어NIV,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on a hill cannot be hidden.

영어NASB,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set on a hill cannot be hidden;

영어MSG,14 “Here’s another way to put it: You’re here to be light, bringing out the God-colors in the world. God is not a secret to be kept. We’re going public with this, as public as a city on a hill.

영어NRSV,14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A city built on a hill cannot be hid.

헬라어신약Stephanos,14 υμεις εστε το φως του κοσμου ου δυναται πολις κρυβηναι επανω ορους κειμενη

라틴어Vulgate,14 vos estis lux mundi non potest civitas abscondi supra montem posita

히브리어Modern,14 אתם אור העולם עיר ישבת על ההר לא תוכל להסתר׃

성 경: [마5:1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13절에서와 같이 ‘너희’가 강조된다. 너희, 즉 다른 사람이 아닌 제자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비록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상의 빛이라고 생각하였지만(롬 2:19) 진정한 빛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고난받는 종 한 분뿐이다(사 42:6;49:6). 그리고 이것은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요1:9). 그에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비취는 새 빛이 될 수 있는 것이다(엡 5:8, 9; 빌 2:15). 한편 빛은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종교적 상징이다. 신약에서와 마찬가지로 구약에서도 빛이 부정함에 대립되는 순수함, 거짓이나 무지와 대조되는 진리와 지식,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자들에 대조되는 하나님의 계시와 임재를 상징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 산 위에 있는 동네 – 이 문구는 어떤 면에서 의미가 매우 분명하다. 고대의 마을은 흔히 흰 석회암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태양속에서 빛나는 것이 많은 사람들 눈에 보이고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다. 밤에는 동네 주민들이 켜놓은 등불이 주변 지역에 빛을 드리우게 한다(Bonnard). 그런데 ‘산 위에 있는 동네’에 대한 말씀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의 산 또는 시온의 세계 속에서 뛰어나게 되고 모든 족속(族屬)이 그리로 몰려 올 때에 대한 구약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 2:2-5;42 장;49장;54장;60장;Grundmann, Trilling, K.M. Campbell). 그러나 이것은 확실한 추측은 아니며 산 앞에 정관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사야서의 예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어쨌든 만일 전자의 주장이 옳다면 본문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이는 참된 모임이고, 종말에 도래하는 천국의 전초기지이며, 그리스도의 참 빛을 세상에 비추는 순결한 반사체인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모두 마태복음에서는 중심적인 것들이다(Carson).

우데 카이우신 뤼크논 카이 티데아신 아우톤 쉬포 톤 모디온 알 에피 텐 뤼크니안 카이 람페이 파신 토이스 엔 테 오이키아

개역개정,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새번역,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우리말성경,15 등잔을 켜서 그릇으로 덮어 두지 않고 등잔대 위에 두어 그 빛을 온 집안사람들에게 비추는 것이다.

가톨릭성경,15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영어NIV,15 Neither do peopl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owl. Instead they put it on its stand, and it gives light to everyone in the house.

영어NASB,15 nor does anyone light a lamp and put it under a basket, but on the lampstand, and it gives light to all who are in the house.

영어MSG,15 If I make you light-bearers, you don’t think I’m going to hide you under a bucket, do you? I’m putting you on a light stand.

영어NRSV,15 No one after lighting a lamp puts it under the bushel basket, but on the lampstand, and it gives light to all in the house.

헬라어신약Stephanos,15 ουδε καιουσιν λυχνον και τιθεασιν αυτον υπο τον μοδιον αλλ επι την λυχνιαν και λαμπει πασιν τοις εν τη οικια

라틴어Vulgate,15 neque accendunt lucernam et ponunt eam sub modio sed super candelabrum ut luceat omnibus qui in domo sunt

히브리어Modern,15 גם אין מדליקים נר ושמים אותו תחת האיפה כי אם על המנורה ויאר לכל אנשי הבית׃

성 경: [마5:1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사람이 등불을 켜서…비취느리라 – 이 구절은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오는 기사이다. 눅 8:16에는 씨뿌리는 비유 다음에 오고, 막 4:21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눅 11:33에도 이 기사가 나타난다.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이 기사는 문자적으로 유사해서 그 중 어느 것도 독립성을 인정할 수 없다. 그 누가의 구절(눅 8:16)은 서로간에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그중 특히 눅 11:33은 마태의 것을 닮았고, 막 4:21의 기사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 일련의 이러한 일치성은 본문의 확신성을 더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선택한다면 다른 구절에 비해 눅 11:33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The Pulpit Commentary). 한편 본문에 언급된 ‘말'(*, 모디오스)은 곡식의 양을 재는 나무 그릇으로 보통 8.25리터의 양을 담을 수 있는 용기로 알려졌다. 혹자는 이 말의 용도에 대해 등을 마루에 두고 불이 오랫동안 꺼지지 않도록 하려고 곡식을 재는 용기로 그것을 덮어두면 얼마동안은 효과가 있다(Tholuck)고 한다. 그리고 이에 비해 ‘등경’은 복음서에 4회, 그 외에 8회 정도 등장하는데, 그 대부분은 촛대가 아니라 ‘등불 받침대’를 뜻한다. 그런데 이스라엘 가옥 구조상 이 등경은 방 하나에 한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여하튼 등경이 빛을 멀리 비치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하지만, 말은 빛을 비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이 말 아래 둔다는 것은 빛을 차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형식주의, 금욕주의, 전통주의의 제한성(制限性)에 연결된다(Lange). 그리고 등경은 성도와 교회의 개방적 특성과 연결된다(계 1:20). 실로 복음사역자 들은 마치 산 꼭대기에 선(사2:2) 자처럼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의 행실과 언어를 통해 그리스도를 널리 전해야 한다.

후토스 람프사토 토 포스 휘몬 엠프로스덴 톤 안드로폰 호포스 이도신 휘몬 타 칼라 에르가 카이 돜사소신 톤 파테라 휘몬 톤 엔 토이스 우라노이스

개역개정,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새번역,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우리말성경,16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라. 그래서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라.

가톨릭성경,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영어NIV,16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that they may see your good deeds and praise your Father in heaven.

영어NASB,16 “Let your light shine before men in such a way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lorify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영어MSG,16 Now that I’ve put you there on a hilltop, on a light stand–shine! Keep open house; be generous with your lives. By opening up to others, you’ll prompt people to open up with God, this generous Father in heaven.

영어NRSV,16 In the same way, let your light shine before others, so that they may see your good works and give glory to your Father in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6 ουτως λαμψατω το φως υμων εμπροσθεν των ανθρωπων οπως ιδωσιν υμων τα καλα εργα και δοξασωσιν τον πατερα υμων τον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라틴어Vulgate,16 sic luceat lux vestra coram hominibus ut videant vestra bona opera et glorificent Patrem vestrum qui in caelis est

히브리어Modern,16 כן יאר אורכם לפני בני האדם למען יראו מעשיכם הטובים ושבחו את אביכים שבשמים׃

성 경: [마5:1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소금과 등불의 비유]

󰃨 이같이 너희 빛을…영광을 돌리게 하라 – 여기에서 예수는 이 비유를 더 심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그들의 ‘착한 행실’이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는 모든 의(義)를 행하여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빛을 보도록 해야한다. 혹시 이 때문에 박해가 일어나게 될지도 모른다(10-12절). 그러나 박해를 두려워해서 빛을 감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버지를 영화롭게 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같이 빛을 비추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제자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理由)이다(고후 4:6; 벧젠 2:12). 또한 ‘증거한다’는 말에는 말 뿐 아니라 행동도 포함되는 것이다. 실로 선행이 따르지 않는 선한 말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Stier). 이같이 천국의 규범(3-12절)은 천국의 상속자들의 삶 속에서 작용하여 천국에 대한 증거를 만들어 낸다(13-16절). ‘소금'(13절)이 부패를 늦추는 소극적인 역할을 하고 제자들이 세상을 따라 가거나 타협하게 될 위험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는 것이라면, ‘빛'(14-16절)은 죄로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적극적인 면을 말한다. 그리고 덧붙여 제자들이 세상에서 물러나서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기회를 잃게 될 것을 염려하여 경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본회퍼(Bonhoeffer)는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피하는 것은 부르심의 거부다. 보이지 않게 숨으려는 예수의 공동체는 예수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고 하였다.

메 노미세테 호티 엘돈 카탈뤼사이 톤 노몬 에 투스 프로페타스 우크 엘돈 카탈뤼사이 알라 플레로사이

개역개정,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새번역,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우리말성경,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씀을 없애러 왔다고 생각하지 말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러 온 것이다.

가톨릭성경,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영어NIV,17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not come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l them.

영어NASB,17 “Do not think that I ca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did not come to abolish but to fulfill.

영어MSG,17 “Don’t suppose for a minute that I have come to demolish the Scriptures–either God’s Law or the Prophets. I’m not here to demolish but to complete. I am going to put it all together, pull it all together in a vast panorama.

영어NRSV,17 “Do not think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I have come not to abolish but to fulfill.

헬라어신약Stephanos,17 μη νομισητε οτι ηλθον καταλυσαι τον νομον η τους προφητας ουκ ηλθον καταλυσαι αλλα πληρωσαι

라틴어Vulgate,17 nolite putare quoniam veni solvere legem aut prophetas non veni solvere sed adimplere

히브리어Modern,17 אל תחשבו כי באתי להפר את התורה או את דברי הנביאים לא באתי להפר כי אם למלאת׃

성 경: [마5:1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 여기서 먼저 ‘율법’이란 구약성경 전체를 뜻하기도 하고 축약된 의미로서 모세 오경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리고 ‘선지자’는 구약 역사서들로 구성된 초기 선지서들과 이사야 이후의 후기 선지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적 의미보다 오히려 예수 당시 유대인이 신약이 기술되기 전에 구약을 지칭하는 관용적 표현으로 ‘율법과 선지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12;11:13; 눅 16:16; 요 1:45; 행 13:15; 롬 3:21). 한편 ‘폐하다'(*, 카탈뤼사이)란 건축물의 파괴와 연관된 표현으로서(24:2;26:61;27:40) 여기서는 어떤 규범이나 제도의 완전한 개편 또는 폐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실 예수를 비난했던 당시 유대인들은 스스로가 율법의 손상자와 파괴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즉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두개인들은 선지서들을, 고지식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극단적인 엣세네파는 율법과 선지서들을 부분적으로 폐기함으로써 결국 율법의 파괴자가 된 것이다. 이에 비해 그들의 비난 대상이었던 그리스도는 그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자였던 것이다(Lange). 한편 ‘온 줄로’에서 ‘왔다’는 말은 예언자들에게 사용되었던 표현으로서(11:18, 19), 적어도 예수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보냄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있다(Maier).

󰃨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 이 부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석은 율법과 선지자가 예수를 지시하고 있다고 볼 때 예수가 그것들을 완전케 하는 자이고, 동시에 예수가 바로 그 성취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조시키고 있는 것은 ‘버리다’와 ‘행하다’간의 대조가 아니라 ‘폐(廢)하다’와 ‘완전(完全)케하다’인 것이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있어서 문제되는 것은 ‘율법에 대해 예수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인 것이다(Banks)’ 한편 본문에 제시된 바 ‘완전케 하다'(*, 플레로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그 깊은 뜻과 충분한 의미를 드러낸다’, ‘모두 실행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하나의 큰 목적을 제시하고 있는 바, 예수께서는 율법이 목적, 의도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NcNeile). 이러한 사실은 당신의 권위로써 그 율법의 각 조항을 문자적 해석 이상의 궁극적 목적과 의도를 밝히신 21-48절에서 확실히 알 수 있다. 실로 구약성경이 가지는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권위는 구약성경의 풍성한 성취가 되시는 예수의 품격과 가르침을 통해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의도하는 바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하거나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구약이 지시해 준 자기 자신의 권위에 입각하여 구약성경의 율법이 지향하는 바를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구절이 갖는 기독론적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이 구약이 지향하는 종말론적인 목표(目標)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이 구약성경에 대하여 유일하게 권위있는 해석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를 통해서만 구약성경의 근거를 얻고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는 초점은 바로 예수였으니, 바로 이 점이 바울과 마태가 모두 의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바울은 기독론적이고 종말론적인 해석을 통하여 구약성경에 접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약 해석의 기초를 놓은 분이 예수라는 점이 본 복음서에 의하여 분명해지는 것이다(Carson).

아멘 가르 레고 휘민 헤오스 안 파렐데 호 우라노스 카이 헤 게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우 메 파렐데 아포 투 노무 헤오스 안 판타 게네타이

개역개정,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새번역,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 ㉥그, ‘한 이오타’

우리말성경,18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 가운데 한 점, 한 획이라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가톨릭성경,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영어NIV,18 I tell you the truth, until heaven and earth disappear, not the smallest letter, not the least stroke of a pen, will by any means disappear from the Law until everything is accomplished.

영어NASB,18 “For truly I say to you,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the smallest letter or stroke shall pass from the Law until all is accomplished.

영어MSG,18 God’s Law is more real and lasting than the stars in the sky and the ground at your feet. Long after stars burn out and earth wears out, God’s Law will be alive and working.

영어NRSV,18 For truly I tell you, until heaven and earth pass away, not one letter, not one stroke of a letter, will pass from the law until all is accomplished.

헬라어신약Stephanos,18 αμην γαρ λεγω υμιν εως αν παρελθη ο ουρανος και η γη ιωτα εν η μια κεραια ου μη παρελθη απο του νομου εως αν παντα γενηται

라틴어Vulgate,18 amen quippe dico vobis donec transeat caelum et terra iota unum aut unus apex non praeteribit a lege donec omnia fiant

히브리어Modern,18 כי אמן אמר אני לכם עד כי יעברו השמים והארץ לא תעבר יוד אחת או קוץ אחד מן התורה עד אשר יעשה הכל׃

성 경: [마5:1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 가르 레고 휘민) – ‘믿을 수 있는’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음역한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 말이 ‘틀림없이’, ‘진실로’라는 부사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문장의 마지막에서 그 문장이 진실이거나 또는 진실임이 증명될 수 있다는 것을 보증하는 의미로 사용된 용례가 자주 보인다(기도에서 마지막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경우). 그리고 이 말로써 문장이 시작되기도 한다(렘 28:6; 계 7:12;19:4;22:20). 또는 ‘아멘’이 응답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신 27:15-26; 고전 14:16; 계 5:14). 어쨌든 예수께서 하신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말씀은 당신의 절대적 권위에 입각해 어떤 한 진리를 단정적으로 선언하실 때 흔히 사용하셨다.

󰃨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이는 ‘세상의 종말까지는’으로 번역될수 있는 말로서 예수의 재림을 지향한 표현이다. 진정 세상 종말까지는 율법과 선지자는 폐해질수 없다는 것이 예수의 단정적 선언인 것이다.

󰃨 일점 일획(一點 一劃)(*, 이오타 헨 에 미아 케라이아). – ‘일점’이란 히브리어 문자에서 가장 작은 글자인 ‘요오드'(*)를 가리키며 헬라어로는 ‘이오타'(*)정도의 가장 작은 문자를 뜻하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일획’, 즉 ‘케라이아’가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일획에 대하여 슈바츠(G. Schwaz)는 히브리어 문자 ‘와우'(*)라고 하고, 휠슨(Filson)과 렌스키(Lenski), 알렌(Allen), 잔(Zahn)은 비슷한 히브리어 문자들(*, *, *, )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용되는 작은 획이라고 이해한다. 그리고 타스커(Tasker)와 슈니빈트(Schniewind)와 슈바이처(Schweizer)처럼 순수히 장식적인 획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락스(Lachs)는 가장 작은 글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가리키기 위하여 ‘일점’과 연결지어서 사용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떤 경우든간에 예수는 여기에서 구약성경이 ‘붓 한번 살짝 움직인 정도’의 아주 조그마한 내용조차도 모두 권위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같은 예수의 생각이 구약성경에 대한 최상의 견해이다.

󰃨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이는 분명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 새 세상에서까지도 율법의 권위와 그 효력성은 계속될 것임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24:35; 막 13:31). 그러나 이것으로써 이 구절의 의문점이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문자적 측면에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셨고(12:8), 이혼(divorce)에 관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으며(5:31, 32), 특히 음식에 관한 규정을 무효화시키셨었다(15:11). 그렇다면 땅이 지속되는 한 율법의 한 획도, 나아가 경건한 필사자(筆寫者)가 덧붙인 수식어 중 어느 하나까지도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마태는 어떠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마태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는 율법의 어느 것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엄격한 문자적 보존과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 보다는, 율법이 의도하는 것은 더욱 완전한 형태로 성취되며, 또한 모두 실제로 일어나고 실제로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일어나며,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정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위에서 그리고 그의 가르침과 행위를 계속하는 그의 제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다.

호스 에안 운 뤼세 미안 톤 엔톨론 투톤 톤 엘라키스톤 카이 디닼세 후토스 투스 안드로푸스 엘라키스토스 클레데세타이 엔 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호스 드 안 포이에세 카이 디닼세 후토스 메가스 클레데세타이 엔 테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

개역개정,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새번역,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가운데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아주 작은 사람으로 일컬어질 것이요, 또 누구든지 계명을 행하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 ㉦또는 ‘폐하고’

우리말성경,19 이 계명 가운데 아주 하찮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남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계명을 지키며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가톨릭성경,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영어NIV,19 Anyone who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the same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ever practices and teaches these commands wi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19 “Whoever then annul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so the same, sha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ever keeps and teaches them, he sha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19 “Trivialize even the smallest item in God’s Law and you will only have trivialized yourself. But take it seriously, show the way for others, and you will find honor in the kingdom.

영어NRSV,19 Therefore, whoever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the same,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but whoever does them and teaches them will be called great in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19 ος εαν ουν λυση μιαν των εντολων τουτων των ελαχιστων και διδαξη ουτως τους ανθρωπους ελαχιστος κληθησεται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ος δ αν ποιηση και διδαξη ουτος μεγας κληθησεται εν τη βασιλεια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19 qui ergo solverit unum de mandatis istis minimis et docuerit sic homines minimus vocabitur in regno caelorum qui autem fecerit et docuerit hic magnus vocabitur in regno caelorum

히브리어Modern,19 לכן מי אשר יפר אחת מן המצות הקטנות האלה וכן ילמד את בני האדם קטון יקרא במלכות השמים ואשר יעשה וילמד אותן הוא גדול יקרא ב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5:1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지극히 작다 일컬음 –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와 큰 자 사이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구절은 천국 안에도 등급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본다. 11:11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곳에서는 ‘극히 작은 자’를 가리키는 말이 본절에 사용된 단어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18:1-4). 한편 본 구절에서 ‘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자라는 표현은 자신들이 그릇된 판단에 의해 율법을 중요한 것과 중요치 않은 것으로 나누어 놓은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일침을 가하는 표현이다(Meyer, Westein). 그런데 우리가 알 것은 위와 같이 지극히 작은 계명 하나라도 버리는 자가 천국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인정되거나 중요하지 않는 존재로 여겨질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천국에서 특권을 누리는데 등급(grade)이 있다거나 천국에서도 수치를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공관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다(20:20-28; 눅 12:47, 48). 이런 구분은 그 사람이 ‘계명 중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신실히 지켰는가에 따라 이루어질 뿐 아니라 그가 얼마나 열심히 타인의 올바른 삶을 위해 계명을 가르쳤는가 하는 점도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 계명’이란 모든 율법과 선지자로 지칭되는 구약성경의 계명을 가리킨다. 이같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가 오심으로써 폐기된 것이 아니라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계명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다 실천되어야 한다(율법을 구분하는데 대하여는 22:36;23:23 주석 참조). 그러나 이러한 실천이 갖는 본질적인 성격은 이미 17, 18절에서 규정 되었다. 율법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미리 지시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말을 따르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길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의 가르침이 구약의 계시를 성취한 것이므로 천국에서 등급이 정해지는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을 어느 정도 따르고 실천(實踐)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따라서 구약이 미리 지시해 주었던 예수의 가르침을 순종하여야 하는 것이다(Carson).

레고 가르 휘민 호티 에안 메 페리슈세 휘몬 헤 디카이오쉬네 플레이온 톤 그람마테온 카이 파리사이온 우 메 에이셀데테 에이스 텐 바실레이안 톤 우라논

개역개정,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새번역,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너희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말성경,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새파 사람들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영어NIV,20 For I tell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Pharisee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you will certainly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영어NASB,20 “For I say to you that unless your righteousness surpasse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ot enter the kingdom of heaven.

영어MSG,20 Unless you do far better than the Pharisees in the matters of right living, you won’t know the first thing about entering the kingdom.

영어NRSV,20 For I tell you, unless your righteousness exceeds that of the scribes and Pharisees, you will never enter the kingdom of heaven.

헬라어신약Stephanos,20 λεγω γαρ υμιν οτι εαν μη περισσευση η δικαιοσυνη υμων πλειον των γραμματεων και φαρισαιων ου μη εισελθητε εις την βασιλειαν των ουρανων

라틴어Vulgate,20 dico enim vobis quia nisi abundaverit iustitia vestra plus quam scribarum et Pharisaeorum non intrabitis in regnum caelorum

히브리어Modern,20 כי אני אמר לכם אם לא תרבה צדקתכם מצדקת הסופרים והפרושים לא תבאו אל מלכות השמים׃

성 경: [마5:2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율법의 완성이신 예수]

󰃨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낫지 못하면 – 은혜의 시대를 여시는 예수의 가르침은 관대하고 편리하게 되는 것이기 보다는 오히려 온전하게 되는 것을 요구한다(48절). 따라서 본문의 요구는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에게서 바리새인들보다 더 나음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그들이 보다 많은 계명과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마태는 근본적으로 유일한 계명, 즉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축소시켰다) 그들이 새로운 의 즉, 훨씬 더 포괄적인 의를 이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바리새인과 서기관(2:4;3:7 주석 참조)은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엄격한 종교 집단의 무리들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비판하신 것은 그들이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족할 만큼 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Hill). 그들이 만들어 놓은 복잡하고 수많은 규정때문에 도덕적인 사회가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 율법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실추되어 성경에서 요구한 성결이라는 철저한 요구에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서는 바라새인들의 의가 부인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다만 예수의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의(義)의 판단 기준이 되었다. 실로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보다 한 단계, 즉 결정적인 단계를 더 나아가야 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율법 조문에 철저히 순종했는데, 그들은 모든 세금 이외에도 정확하게 수입의 10%를 헌금했으며, 하나님의 안식일과 율법의 가르침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순교(martyrdom)를 당했으며, 또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중요하게 될 때 비로소 자신들의 삶이 진정 인간적인 삶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러한 그들의 행위로는 진정 어떤 식으로도 비웃음을 당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로부터는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우수한 의(義)가 기대되었다. 즉 제자들은 형식적 삶과 선행 위주의 삶을 추구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욱 우월한 하나님께 대한 내면적인 열정과 사랑과 경건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義)의 결과로서 오직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참으로 인간적 욕망을 탈피한 하나님 중심적인 의(義)가 요청되었다. 실로 그들은 사 61:3이 말하고 있는 ‘의의 나무들’이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세력이되며 그들을 통해서 세상 안에 들어오게 될것이다.

󰃨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이말은 천국이 상대적으로 남보다 더 나은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며 또한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사랑)을 지키는 자, 율법을 지적으로 잘 아는 자가 아니라 그것을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자가 들어갈 곳임을 강조하고 있다.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토이스 아르카이오이스 우 포뉴세이스 호스 드 안 포뉴세 에노코스 에스타이 테 크리세이

개역개정,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21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아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출 20:13

우리말성경,21 살인하지 말라. ‘살인한 사람은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너희가 들었다. 출20:13

가톨릭성경,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 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영어NIV,21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murder, and anyone who murders will be subject to judgment.’

영어NASB,21 “You have heard that the ancients were told, ‘YOU SHALL NOT COMMIT MURDER’ and ‘Whoever commits murder shall be liable to the court.’

영어MSG,21 “You’re familiar with the command to the ancients, ‘Do not murder.’

영어NRSV,21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ose of ancient times, ‘You shall not murder’; and ‘whoever murders shall be liable to judgment.’

헬라어신약Stephanos,21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τοις αρχαιοις ου φονευσεις ος δ αν φονευση ενοχος εσται τη κρισει

라틴어Vulgate,21 audistis quia dictum est antiquis non occides qui autem occiderit reus erit iudicio

히브리어Modern,21 שמעתם כי נאמר לקדמונים לא תרצח ואשר ירצח מחיב הוא לבית דין׃

성 경: [마5:2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 헬라어 본문은 ‘옛 사람들에 의해 이야기된 것’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되어 있다’라는 드문 표현은 신약성경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즉 거의 독점적으로 성경 인용의 서두로 사용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모세의 율법을 받은 ‘시내 산 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살인한 자가 재판(裁判)을 받는다는 것은 십계명 중에는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으나 모세 율법에는 자주 이야기되어 있다(창 9:6; 출 21:12; 레 24:17; 민 35:16). 따라서 예수 당대의 사람들은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어진 율법 속에 살인을 금지하고 살인자는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살인은 아무 생명이나 해하는 것이 모두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또 살인을 금하는 것은 단순히 법률상의 명령이었을 수도 있다(창 9:6). 그리고 ‘심판’, 즉 ‘크리시스'(*)란 마을마다 있었던 재판소(신 16:18; 대하 19:5;Jos, Antig. IV, 214;Wars II, 570-71)나 범죄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설립된 23인 평의회에서 진행되는 사법 절차를 가리키는 것이다.

󰃨 너희가 들었으나 – 예수께서는 율법에 깊은 이해가 있었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에게 말씀하실 때는 흔히 ‘너희가 읽지 못하였느냐'(12:3, 5;19:5;21:16,42)는 말로써 당신의 뜻을 전하시곤 하셨다. 본문의 이 ‘들음’에의 환기는 그 당시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청중의 대부분이 종교적 특권에서 제외된 평범한 백성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 일반 평민들은 회당에서 율법 교사들이 들려주고 가르쳐 주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간접 전달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요 12:34).

에고 데 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오르기조메노스 토 아델포 아우투 에노코스 에스타이 테 크리세이 호스 드 안 에이페 토 아델포 아우투 라카 에노코스 에스타이 토 쉬네드리오 호스 드 안 에이페 모레 에노코스 에스타이 에이스 텐 게엔난 투 퓌로스

개역개정,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새번역,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 자기 ㉩형제나 자매에게 ㉪얼간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의회에 불려갈 것이요, 또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옥 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 ㉨그, ‘형제에게’.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까닭없이’가 첨가되어 있음 ㉩그, ‘형제에게’ ㉪그, ‘라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람어 라가는 욕하는 말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에게 분노하는 사람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또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는 사람도 공회에서 심문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바보다’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지옥 불 속에 떨어질 것이다.

가톨릭성경,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영어NIV,22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subject to judgment. Again, anyone who says to his brother, ‘Raca,’ is answerable to the Sanhedrin. But anyone who says, ‘You fool!’ will be in danger of the fire of hell.

영어NASB,22 “But I say to you that everyone who is angry with his brother shall be guilty before the cour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You good-for-nothing,’ shall be guilty before the supreme court; and whoever says, ‘You fool,’ shall be guilty enough to go into the fiery hell.

영어MSG,22 I’m telling you that anyone who is so much as angry with a brother or sister is guilty of murder. Carelessly call a brother ‘idiot!’ and you just might find yourself hauled into court. Thoughtlessly yell ‘stupid!’ at a sister and you are on the brink of hellfire. The simple moral fact is that words kill.

영어NRSV,22 But I say to you that if you are angry with a brother or sister, you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if you insult a brother or sister, you will be liable to the council; and if you say, ‘You fool,’ you will be liable to the hell of fire.

헬라어신약Stephanos,22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οτι πας ο οργιζομενος τω αδελφω αυτου εικη ενοχος εσται τη κρισει ος δ αν ειπη τω αδελφω αυτου ρακα ενοχος εσται τω συνεδριω ος δ αν ειπη μωρε ενοχος εσται εις την γεενναν του πυρος

라틴어Vulgate,22 ego autem dico vobis quia omnis qui irascitur fratri suo reus erit iudicio qui autem dixerit fratri suo racha reus erit concilio qui autem dixerit fatue reus erit gehennae ignis

히브리어Modern,22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כל אשר יקצף על אחיו חנם מחיב הוא לבית דין ואשר יאמר אל אחיו רקא מחיב הוא לסנהדרין ואשר יאמר אתה הנבל מחיב לאש גיהנם׃

성 경: [마5:2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 예수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완전한 성취자로서의 신적 권위를 1인칭 주어 ‘나'(*, 에고)를 통해 역설하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단순한 문자적, 의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서 그것의 궁극적, 본질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설명하시고 계신 것이다.

󰃨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 예수는 살인의 근원은 분노(忿怒)이며, 분노도 원리상으로는 살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을 율법이 실제로 지향하는 바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이 살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더 나은 의를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진정 형제에 대하여 분노하는 사람은 심판(*, 크리시스;21절)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어떤 법정에서도 내면적인 분노의 사건을 다루지는 않기 때문에”(Scott)그 심판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심판이 분명하다. 한편 여기서 형제(*, 아델포스)란 남자 형제로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에서는 이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이 분명히 혈연상의 형제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는 언제나 예수가 사용한 말에서 나오고 있다. 그리고 좁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는 기자인 마태가 사용한 경우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그리스도인의 습관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르치면서(6:9) 그러한 가르침의 한 부분으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형제간에는 분노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심판이 점점 엄중(嚴重)해진다는 것을 표현해 주는 수사법은 찾아볼 수 없다(Hendriksen).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범죄에도 등급이 나누어져서 점점 심한 범죄로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제에게 노하여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와 형제를 ‘라가’라고 욕하는 자가 분명히 구별되지는 않는다. 한편 형제를 모욕하면 ‘(하나님의)법정’ (*, ‘쉬네드리온’은 ‘산헤드린’을 뜻할 수도 있고<개역 성경>, 법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에 서게될 뿐 아니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Carson).

󰃨 지옥불(*, 게엔나 투 퓌로스). – 문자적으로는 ‘불붙은 게엔나’라는 이 표현은 히브리어 ‘게힌놈'(*, 힌놈의 골짜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이방신 몰록(Moloch)과 또한 혐오감을 불러 일으키는 몰록 제사 의식과 관련된 장소였다(왕하 23:10; 대하 28:3;33:6; 렘 7:31; 겔 16:20;23:37). 이러한 의식은 하나님이 금지한 것이었다(레 18:21). 요시야 왕이 그러한 의식을 폐지할 때에 그는 이 골짜기를 오물과 죄인의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만들어서 더러운 곳이 되게 하였다(왕하 23:10). 후기 전승에 따르면 1세기에도 이 골짜기는 쓰레기를 쌓아두는 곳이었고 연기와 불이 꽉 찬 곳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이 꼴짜기는 종말론적인 심판이 행해지는 장소를 상징하게 되었다. 지옥과 음부(11:23;16:18)는 각각 영원한 지옥과 심판 이전의 상태에 있는 죽은 자들의 거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이 가능한 구절은 거의 없다. 두 단어가 모두 의미가 같고 ‘지옥’을 뜻하는 경우가 더 일반적이다(Livingstone, Jeremias).

󰃨 라가(*, 라카) – 이 단어는 ‘텅빈(무가치한)’, ‘우둔한’, ‘어리석은’, ‘멍청한’이라는 의미의 아람어 ‘레카'(*)를 음역한 것으로서 상대의 인격을 매우 경멸할때 사용하던 일종의 욕이다.

󰃨 미련한 놈(*, 모레) – ‘라카’와 거의 같은 뜻의 모욕이다. 헬라인에게는 ‘모레’가 ‘어리석다’는 의미를 갖지만 히브리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헬라어가 히브리어 ‘모레'(*)를 연상시키게 하는데, 이 말은 도덕적 배신, 반란, 악이라는 의미를 갖는다(시 78:8<70인역 77:8>; 렘 5:23). 한편 혹자는(Bruce)는 이 양자의 차이에 대해 ‘라카’는 ‘어리석은 놈’이라는 뜻으로서 그 지적 수준이 아주 저급한 것을 꼬집는 말이며, ‘미련한 놈’은 ‘추악(醜惡)한 녀석’이라는 뜻으로서 그 인격과 마음이 매우 천박한 상태를 지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두 용어 모두 상대방의 인격에 참혹한 상처를 안기는 욕임에 틀림없다

에안 운 프로스페레스 토 도론 수 에피 토 뒤시아스테리온 카케이 므네스데스 호티 호 아델포스 수 에케이 티 카타 수

개역개정,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새번역,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 ㉬그, ‘네 형제’

우리말성경,23 그러므로 네가 만약 제단에 예물을 드리다가 네 형제가 너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 생각나면

가톨릭성경,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영어NIV,23 “Therefore, if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has something against you,

영어NASB,23 “Therefore if you are presenting your offering at the altar, and there remember that your brother has something against you,

영어MSG,23 “This is how I want you to conduct yourself in these matters. If you enter your place of worship and, about to make an offering, you suddenly remember a grudge a friend has against you,

영어NRSV,23 So when you are offering your gift at the altar, if you remember that your brother or sister has something against you,

헬라어신약Stephanos,23 εαν ουν προσφερης το δωρον σου επι το θυσιαστηριον κακει μνησθης οτι ο αδελφος σου εχει τι κατα σου

라틴어Vulgate,23 si ergo offeres munus tuum ad altare et ibi recordatus fueris quia frater tuus habet aliquid adversum te

히브리어Modern,23 לכן אם תקריב קרבנך אל המזבח ושם תזכר כי יש לאחיך דבר עליך׃

성 경: [마5:2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생각나거든 – 본문과 같은 내용의 일들은 실제 생활에서 끝없이 많이 일어나는 사건이다. 물론 이 내용의 배경은 유대인의 예배 의식에서 연유한 것(예물은 희생 제물로 짐승을 사용하며, 제단은 성전안 마당에 위치함)이지만 그 뜻하는 바는 하나님의 존전에서(in presence) 엄숙하게 예배드리다가 양심에 거스리는 죄나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자기의 그릇된 행위가 기억난다면(막 11:25)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지체없이 화해의 노력부터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진정 모든 것을 익히 알고 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의 신변을 아무런 편견없이 살피는 그 자신의 정직한 판사가 되어야 한다. 물론 형제 중 한 사람이 까닭없이 어떤 형제를 비난하며 까닭없이 도리에 어긋나게 화를 낼 가능성도 있다. 그 때는 죄책이 비난 당한 당사자에게가 아니라 그에게 있을 것이다(Lenski). 어쨌든 하나님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를 등한히 하는 자의 예배와 헌신과 헌물은 절대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본문에서 묵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사 1:10-17). 따라서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에 힘쓸 뿐 아니라 동시에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에도 진력(盡力)해야 할것이다.

아페스 에케이 토 도론 수 엠프로스덴 투 뒤시아스테리우 카이 휘파게 프로톤 디알라게디 토 아델포 수 카이 토테 엘돈 프로스페레 토 도론 수

개역개정,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새번역,24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 ㉭그, ‘네 형제’

우리말성경,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두고 우선 가서 그 사람과 화해하여라. 예물은 그 다음에 돌아와 드려라.

가톨릭성경,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영어NIV,24 leave your gift there in front of the altar. First go and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영어NASB,24 leave your offering there before the altar and go; first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and then come and present your offering.

영어MSG,24 abandon your offering, leave immediately, go to this friend and make things right. Then and only then, come back and work things out with God.

영어NRSV,24 leave your gift there before the altar and go; first be reconciled to your brother or sister, and then come and offer your gift.

헬라어신약Stephanos,24 αφες εκει το δωρον σου εμπροσθεν του θυσιαστηριου και υπαγε πρωτον διαλλαγηθι τω αδελφω σου και τοτε ελθων προσφερε το δωρον σου

라틴어Vulgate,24 relinque ibi munus tuum ante altare et vade prius reconciliare fratri tuo et tunc veniens offers munus tuum

히브리어Modern,24 עזוב תעזב שם את קרבנך לפני המזבח וקדם ללכת לכפר פני אחיך ואחרי כן בוא הקרב את קרבנך׃

성 경: [마5:2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예물을 드리라 – ‘먼저 화목하고’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톤 디알라게디'(*)는 제 2부정과거 수동태 명령형으로서 ‘화목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즉 이 말은 적극적 성격을 띠고 있는 단어로서 ‘솔선하여 화해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동사는 상호 적대적인 관계에 놓인 이후에, 상호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디알라게디’보다 자주 사용되는 ‘카탈라쏘'(*)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Lightfoot). 한편 상호간의 화해란 측면이 강조되는 이유는 ‘카타'(*)가 아닌 ‘디아'(*, ‘둘’, ‘둘 사이’)가 접두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overtson). 실로 제의적인 것보다는 인간적인 것을 우위에 두는 것(9:13;12:7;23:25, 26)은 마태의 기록에 있어서 특징적인 것이며 그 경향에 있어서는 예수 자신에게로 소급된다(막 7:15, 16). 여하튼 본문의 ‘먼저’라는 말은 ‘화목하고’라는 말과 짝을 이루어 매우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물의 가치나 중요성을 묻기 보다는 형제와의 화해가 얼마나 더 중요하며 가치 있는 일인가를 강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위한 따뜻한 사랑과, 격의없는 화해와, 생명을 내놓을 정도의 봉사 등일 것이다(25:40). 결국 구절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배가 이웃들과의 관계로 인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가 예배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terms)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Schweizer).

이스디 유노온 토 안티디코 수 타퀴 헤오스 호투 에이 멭 아우투 엔 테 호도 메포테 세 파라도 호 안티디코스 토 크리테 카이 호 크리테스 토 휘페레테 카이 에이스 퓔라켄 블레데세

개역개정,25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새번역,25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얼른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어서, 그가 너를 감옥에 집어넣을 것이다.

우리말성경,25 너를 고소하는 사람과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 서둘러 그와 화해하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너를 간수에게 내어 주어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가톨릭성경,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영어NIV,25 “Settle matters quickly with your adversary who is taking you to court. Do it while you are still with him on the way, or he may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may hand you over to the officer, and you may be thrown into prison.

영어NASB,25 “Make friends quickly with your opponent at law while you are with him on the way, so that your opponent may not deliver you to the judge, and the judge to the officer, and you be thrown into prison.

영어MSG,25 “Or say you’re out on the street and an old enemy accosts you. Don’t lose a minute. Make the first move; make things right with him. After all, if you leave the first move to him, knowing his track record, you’re likely to end up in court, maybe even jail.

영어NRSV,25 Come to terms quickly with your accuser while you are on the way to court with him, or your accuser may hand you over to the judge, and the judge to the guard, and you will be thrown into prison.

헬라어신약Stephanos,25 ισθι ευνοων τω αντιδικω σου ταχυ εως οτου ει εν τη οδω μετ αυτου μηποτε σε παραδω ο αντιδικος τω κριτη και ο κριτης σε παραδω τω υπηρετη και εις φυλακην βληθηση

라틴어Vulgate,25 esto consentiens adversario tuo cito dum es in via cum eo ne forte tradat te adversarius iudici et iudex tradat te ministro et in carcerem mittaris

히브리어Modern,25 מהר התרצה לאיש ריבך בעודך בדרך אתו פן יסגיר אתך איש ריבך אל השפט והשפט יסגירך לשוטר והשלכת את בית הכלא׃

성 경: [마5:2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하는 자…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 본 비유에서 채무자는 전례(前例)에 따라 그의 형제에게 악을 행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대 세계에서는 채무자는 채무를 모두 변제할 때까지는 옥에 갇히게 되었으며 많은 채권자들은 이렇게 해결짓는 것으로 만족했다고 한다. 한편 누가복음에서는(눅 12:57-59) 이 상황을 응용하면서 회개할 줄 모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경고하고 있다. 따라서 원래는 종말론적인 말 많은 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다. 그런 관계로 다음과 같은 말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만일 시비가 있어 법정에 갈 때에 법정 밖에서 문제를 청산해야 한다. 그 순간을 놓쳐버리면 더 이상의 화해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이후에는 오직 지옥의 고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편 ‘길에 있을 때에’라는 말은 누가의 기록에 근거해 볼 때 법정에 시비를 가리기 위해 가는 도중의 길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길’은 마지막 기회’의 장(場)이라고 여겨진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급히 사화하는 것’뿐이다. 실로 인간은 어떤 일을 쉽사리 미루어버리는 게으른 경향성이 있기 때문에 기회가 주어진 이상 더 이상 지체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형제에게 마음을 다한 ‘사화’ 곧 화목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기회마저 놓쳐버린다면 ‘송사자’의 고소를 받은 ‘재판관’은 정식 재판에 회부하고 말 것이다.

󰃨 재판관이 관예에게 – 여기서 ‘관예'(*, 휘페레테스)란 배의 노를 젖는 사람을 가리키나, 그 의미가 확대되어 종이나 회당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시중들을 가리키기도 하였다(눅 4:20조). 물론 본문에서는 재판관의 명령을 받아 그대로 집행하는 일종의 형리(刑吏)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본 교훈은 이 관예의 손에까지 넘기우는 것을 원치 않고 어찌하든지 주어진 화해의 기회를 은혜롭게 선용하라는 데 집중된다. 한편 ‘옥'(*, 퓔라케)은 상징적으로 지옥, 즉 ‘불붙는 게엔나’를 묘사한다(22절). 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26절에 언급되고 있는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이란 문구에 집중하여 ‘퓔라케’를 연옥(purgatory)으로 말하며 이 상징된 장소에서 우리의 죄책의 빚을 갚아 버릴 길을 찾는다. 그러나 ‘퓔라케’는 연옥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심판적 공의와 완전한 상태에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Lange).

아멘 레고 소이 우 메 엨셀데스 에케이덴 헤오스 안 아포도스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개역개정,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새번역,26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 ㉠그, ‘코드란테스’

우리말성경,26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1고드란트까지 다 갚기 전에는 거기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가톨릭성경,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영어NIV,26 I tell you the truth, you will not get out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영어NASB,26 “Truly I say to you, you will not come out of there until you have paid up the last cent.

영어MSG,26 If that happens, you won’t get out without a stiff fine.

영어NRSV,26 Truly I tell you, you will never get out until you have paid the last penny.

헬라어신약Stephanos,26 αμην λεγω σοι ου μη εξελθης εκειθεν εως αν αποδως τον εσχατον κοδραντην

라틴어Vulgate,26 amen dico tibi non exies inde donec reddas novissimum quadrantem

히브리어Modern,26 אמן אמר אני לך לא תצא משם עד אשר שלמת את הפרוטה האחרונה׃

성 경: [마5:2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살인에 대한 새 법]

󰃨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 결문의 장엄한 이러한 표현은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는데, 일반적으로 이 결문은 종말적인 사건을 암시해 준다. 한편 18:34에 보면, 본절과 매우 유사한 표현이 비슷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비유 속에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통한 최종적인 유죄 선고를 나타내 준다. 왜냐하면 마지막 빚 한 푼까지도 모두 지불한다는 것은 완전히 가망이 없기 때문이다. 눅 12:59에서도 이 명제는 상황이 더 계속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마태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협적인 심판을 암시하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에(22:13;24:51;25:30, 46) 그는 확실히 여기에서도 심판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생각했다(Schweizer).

󰃨 호리라도(*, 톤 에스카톤 코드란텐). – 이것은 라틴어의 ‘콰드란스'(quadrans), 즉 사분의 일 앗사리온(1앗사리온은 하루 품 삯에 해당하는 데나리온의 1/16정도에 불과)이나, 두 렙돈(막 12:42)에 해당하는 아주 작은 단위의 돈이다. 따라서 이 표현은 빚을 다 갚기까지 형벌을 면키 심히 어렵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결코…하지 못하리라’는 뜻의 ‘우메'(*)라는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더욱 강조되고 있다(Robertson).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우 모이큐세이스

개역개정,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27 “㉡’간음하지 말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출 20:14

우리말성경,27 ‘너는 간음하지 말라’는 옛 사람들의 말을 너희가 들었다. 출20:14

가톨릭성경,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영어NIV,27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Do not commit adultery.’

영어NASB,27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영어MSG,27 “You know the next commandment pretty well, too: ‘Don’t go to bed with another’s spouse.’

영어NRSV,27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not commit adultery.’

헬라어신약Stephanos,27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τοις αρχαιοις ου μοιχευσεις

라틴어Vulgate,27 audistis quia dictum est antiquis non moechaberis

히브리어Modern,27 שמעתם כי נאמר לקדמונים לא תנאף׃

성 경: [마5:2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간음(姦淫)치 말라 – 간음하지 말라는 구약성경의 계명(출 20:14; 신 5:18)은 유대교 문헌에서는 순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의 문제로 다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간음이란 남의 아내(약혼자도 해당)를 ‘도둑질’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예수는 그 행위를 모든 부녀자에게로 확대시키고 있다(28절).

에고 데 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블레폰 귀나이카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 에데 에모이큐센 아우텐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개역개정,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새번역,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우리말성경,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를 음란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미 마음으로 간음죄를 지은 것이다.

가톨릭성경,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영어NIV,28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looks at a woman lustfully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영어NASB,28 but I say to you, that everyone who looks on a woman with lust for her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영어MSG,28 But don’t think you’ve preserved your virtue simply by staying out of bed. Your heart can be corrupted by lust even quicker than your body. Those leering looks you think nobody notices–they also corrupt.

영어NRSV,28 But I say to you that everyone who looks at a woman with lust has already committed adultery with her in his heart.

헬라어신약Stephanos,28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οτι πας ο βλεπων γυναικα προς το επιθυμησαι αυτης ηδη εμοιχευσεν αυτην εν τη καρδια αυτου

라틴어Vulgate,28 ego autem dico vobis quoniam omnis qui viderit mulierem ad concupiscendum eam iam moechatus est eam in corde suo

히브리어Modern,28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כל אשר יביט באשה לחמד אותה נאף נאפה בלבו׃

성 경: [마5:2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여자를 보고…이미 간음하였느니라 – 예수는 제 7계명을 다른 차원, 즉 음욕조차도 용납되지 않는 완전한 순결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제 10계명에서 이미 이러한 점이 분명히 밝혀져 있다. 한편 ‘여자’를 나타내는 헬라어 ‘귀네'(*)는 ‘아내’보다는 ‘여자’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즉 예수는 유대 법에서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 범위까지 확대하는 철저한 도덕률을 원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율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은 사실상 율법을 무효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래 의도에 맞추어서 변경하는 것이다'(Davies).

󰃨 음욕을 품는(*, 에피뒤메사이) – 이 단어는 과거 부정사로 사용되었으며 원형이 ‘에피뒤메오’로서 ‘갈망하다’, ‘욕망하다’ 등의 뜻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긍정적 의미로 ‘원하다’는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롬 1:24에서는 분명히 성적인 욕망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본 구절, 즉 ‘여자를 보고 음욕(carnal desire)을 품는’의 ‘프로스 토 에피뒤메사이 아우텐'(*)이라는 표현은 목적의 의미로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으려고’라는 뜻이 되거나, 결과적인 의미로 ‘그 여자에게 음욕을 품게 되다’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전자의 의미를 갖는 것 같다. 즉 ‘아우테스'(*, 소유격)보다 ‘아우텐’의 의미인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우텐’이라는 목적격은 부정사에 대한 지시의 목적격(즉 의미상의 주어)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음욕을 갖게끔 하려고’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성이 있다(Carson). 따라서 카슨(Carson)은 이 구절에 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는 남자가 여자로 하여금 음욕을 품게하려고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의도가 성취되며 그는 ‘그 여자’와 간음을 하고, 여자도 간음한 여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인하여 예수의 가르침의 의미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문제의 핵심(核心)이 여전히 음욕과 마음속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 마음에(*, 엔 테 카르디아 아우투) –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심장을 의미한 다거나 또는 인간이 지닌 지.정.의 가운데 감정적인 부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의미하는 바는 지.정.의를 모두 포함하는 전인격을 가리킨다. 한편 이 말은 ‘떨리다’, ‘두근거리다’라는 어원을 갖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외적인 행위 이전에 눈과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간음에 그 중요성을 두신다(Robertson).

에이 데 호 옾달모스 수 호 뎈시오스 스칸달리제이 세 엨셀레 아우톤 카이 발레 아포 수 쉼페레이 가르 소이 히나 아폴레타이 헨 톤 멜론 수 카이 메 홀론 토 소마 수 블레데 에이스 게엔난

개역개정,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새번역,29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29 네 오른쪽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 눈을 뽑아 내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더 낫다.

가톨릭성경,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영어NIV,29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gouge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영어NASB,29 “If your right eye makes you stumble, tear it out and throw it from you; for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the parts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영어MSG,29 “Let’s not pretend this is easier than it really is. If you want to live a morally pure life, here’s what you have to do: You have to blind your right eye the moment you catch it in a lustful leer. You have to choose to live one-eyed or else be dumped on a moral trash pile.

영어NRSV,29 If your right eye causes you to sin, tear it out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your members than for your whole body to be thrown into hell.

헬라어신약Stephanos,29 ει δε ο οφθαλμος σου ο δεξιος σκανδαλιζει σε εξελε αυτον και βαλε απο σου συμφερει γαρ σοι ινα αποληται εν των μελων σου και μη ολον το σωμα σου βληθη εις γεενναν

라틴어Vulgate,29 quod si oculus tuus dexter scandalizat te erue eum et proice abs te expedit enim tibi ut pereat unum membrorum tuorum quam totum corpus tuum mittatur in gehennam

히브리어Modern,29 ואם תכשילך עין ימינך נקר אותה והשלך ממך כי טוב לך אשר יאבד אחד מאבריך מרדת כל גופך אל גיהנם׃

성 경: [마5:29,3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간음에 대한 새 법]

󰃨 네 오른눈…빼어 내버리라 – 죄를 범하게끔 하는 신체의 부분들을 경계하라는 본구절 때문에 오리겐(Origen)과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고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해서 만족할 만큼 예수의 가르침에 철저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해서 음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눈’은 우리 신체 중 우리를 범죄하게 하는 것, 특히 성적인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가장 많이 비난을 받았던 부분이다(민 15:39; 잠 21:4;겔 6:9;18;12;20:8). 그리고 ‘오른눈’은 가장 좋은 눈을 말한다. 한편 ‘실족케 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스칸달리조'(*)는 ‘나로 인하여 걸림돌이 되다’, ‘나로 인하여 범죄하게 하다'(18:6-9;눅 17:2; 롬 14:21) 또는 ‘타인의 길을 방해하다’, ‘믿지 못하게 하다'(11:6;15:12),’오해하게 하다'(17:27; 요 6:61) 등의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명사 ‘스칸달론'(*)은 덫을 작동시키는 ‘미끼가 달린 막대기’, 즉 멸망으로 인도하는 유혹물(enticement)또는 ‘죄짓게 하는 유혹'(temptation to sin)이란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사실과 본문의 맥락에서 살펴볼 때, ‘너로 실족케 하거든’이란 오른눈이 ‘너의 전존재를 죄짓는 유혹으로 이끌거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오른눈은 유혹의 도구와 동기(動機)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한편 이 구절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음욕에 대한 것을 다루는 곳에 왜 ‘오른손’이 나오는가 하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를 들기 위한 것이거나 음욕도 도둑질의 일종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혹자(Lachs)는 이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이 말이 남성의 성기를 가리키기 위한 완곡 어법이라고 한다. 즉 히브리어로 ‘야드'(*, ‘손’)가 사 57:8에서는 이러한 용법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 어쨌든 죄를 짓는 부분을 잘라내거나 빼어 버리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문자적인 것보다 상징성이 강한 교훈으로서 예수의 제자들은 죄의 문제를 단호하고도 철저하게 해결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있는 상상력은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다. 그러나 눈으로 인하여 더러운 것만 보게 된다면 상상력은 오염되게 될 것이다. 성적인 죄 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상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따라서 상상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는 것이 천국의 의(義)를 추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빌 4:8). 모든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다 똑같이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눈이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28절). 그렇지 못하면 아예 멀리하고 바라보지도 말라(Scott). 실로 이같이 죄악의 시초에서든 그 과정상에 있든 일단 자신의 죄악이 자각되는 순간 어떠한 여유나 합리화도 용납치 않고 단호한 결단으로써 죄악의 본질을 근절(根絶)하고 멀리하는 것만이 그것을 극복하는 유일한 지혜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남는 것은 죄의 대가인 지옥 뿐이다. 이런 사실은 너무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는 여러 곳에서 이것을 되풀이 하고있다(18:8, 9).

카이 에이 헤 엨시아 수 케이르 스칸달리제이 세 엨콮손 아우덴 카이 발레 아포 수 쉼페레이 가르 소이 히나 아폴레타이 헨 톤 멜론 수 카이 메 홀론 토 소마 수 에이스 게엔난 아펠데

개역개정,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새번역,30 또 네 오른손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찍어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 / ㉣그, ‘게헨나’

우리말성경,30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 손을 잘라 내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몸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더 낫다.

가톨릭성경,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영어NIV,30 And if your right hand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part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영어NASB,30 “If your right hand makes you stumble, cut it off and throw it from you; for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the parts of your body,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영어MSG,30 And you have to chop off your right hand the moment you notice it raised threateningly. Better a bloody stump than your entire being discarded for good in the dump.

영어NRSV,30 And if your right hand causes you to sin, cut it off and throw it away; it is better for you to lose one of your members than for your whole body to go into hell.

헬라어신약Stephanos,30 και ει η δεξια σου χειρ σκανδαλιζει σε εκκοψον αυτην και βαλε απο σου συμφερει γαρ σοι ινα αποληται εν των μελων σου και μη ολον το σωμα σου βληθη εις γεενναν

라틴어Vulgate,30 et si dextera manus tua scandalizat te abscide eam et proice abs te expedit tibi ut pereat unum membrorum tuorum quam totum corpus tuum eat in gehennam

히브리어Modern,30 ואם ידך הימנית תכשילך קצץ אותה והשלך ממך כי טוב לך אשר יאבד אחד מאבריך מרדת כל גופך אל גיהנם׃

에르레데 데 호스 안 아폴뤼세 텐 귀나이카 아우투 도토 아우테 아포스타시온

개역개정,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새번역,31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는 사람은 그에게 이혼 증서를 써주어라’ 하고 말하였다. / ㉤신 24:1

우리말성경,31 ‘아내와 이혼하는 사람은 이혼증서를 주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신24:1

가톨릭성경,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하신 말씀이 있다.

영어NIV,31 “It has been said,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must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영어NASB,31 “It was said, ‘WHOEVER SENDS HIS WIFE AWAY, LET HIM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영어MSG,31 “Remember the Scripture that says, ‘Whoever divorces his wife, let him do it legally, giving her divorce papers and her legal rights’?

영어NRSV,31 “It was also said, ‘Whoever divorces his wife, let him give her a certificate of divorce.’

헬라어신약Stephanos,31 ερρεθη δε οτι ος αν απολυση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δοτω αυτη αποστασιον

라틴어Vulgate,31 dictum est autem quicumque dimiserit uxorem suam det illi libellum repudii

히브리어Modern,31 ונאמר איש אשר ישלח את אשתו ונתן לה ספר כריתות׃

성 경: [마5:3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이혼에 대한 새 법]

󰃨 또 일렀으되 – 이 도입 공식문은 본장에 나오는 다른 표현들보다 짧으며, 특히 접속사 ‘데'(*, 또)로 앞 부분과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31, 32절은 원래 대구절의 형식을 갖고는 있지만 앞에 나오는 짤막한 가르침이 내용을 더 진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 이 구절은 아내의 ‘수치스러운 일’에 관계된 이혼 법령인 신 24:1에서 확립된 조치를 요약한 것이다. 이 말은 원래 28절의 예수의 말씀이 겨냥하고 있는 것, 즉 여인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정확히 가지고 있었다. 사실 모세 당시의 이혼 증서는 순전히 매사에 피동적일 수밖에 없는 여인의 지위와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안전 보장책(安全保障策)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이혼법은 차츰 남자의 손 안에서 편리한 도구가 되어갔는데, 남자들에게 일시적인 결혼을 허용하게 했고 때에 따라서는 단 하루만의 결혼도 허용함으로써 성적(性的)인 방종이 실제적으로 허용되는 악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여성은 다시 물건, 즉 남자가 버리거나 또는 취할 수 있는 남자의 소유물로 전락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시류에 대한 보완으로써 바리새인 그룹 가운데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School of Shammai)는 오직 이혼 조건이 부정(不貞)과 율법적인 위반에 국한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상당히 진보적이고 자유로운 힐렐 학파(the Hillel school)는 어떤 이유이든지 간에 어느 한 쪽에서 이혼 의사가 있을 때에는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19:3). 물론 각 파는 여자들의 인권(人權)을 보호할 목적으로 이같은 법조문을 만들어 내었으나 결국에는 단순히 자기네들이 내세운 법조문의 고수와 당위성 수립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힐렐보다 샴마이 학파의 견해에 더 가까운 교훈을 주셨지만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신중하게 여자들의 인격과 권위를 옹호하셨음을 알 수 있다.

에고 데 레고 휘민 호티 파스 호 아폴뤼온 텐 귀나이카 아우투 파렠토스 로구 포르네이아스 포이에이 아우텐 모이큐데나이 카이 호스 에안 아폴렐뤼메넨 가메세 모이카타이

개역개정,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새번역,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을 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그 여자를 간음하게 하는 것이요, 또 버림받은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음하는 것이다.”

우리말성경,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와 이혼하면 그 아내를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이혼한 여자와 결혼하는 사람도 간음죄를 짓는 것이다.

가톨릭성경,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영어NIV,32 But I tell you that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except for marital unfaithfulness, causes her to become an adulteress, and anyone who marries the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영어NASB,32 but I say to you that everyone who divorces his wife, except for the reason of unchastity, makes her commit adultery; and whoever marries a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영어MSG,32 Too many of you are using that as a cover for selfishness and whim, pretending to be righteous just because you are ‘legal.’ Please, no more pretending. If you divorce your wife, you’re responsible for making her an adulteress (unless she has already made herself that by sexual promiscuity). And if you marry such a divorced adulteress, you’re automatically an adulterer yourself. You can’t use legal cover to mask a moral failure.

영어NRSV,32 But I say to you that anyone who divorces his wife, except on the ground of unchastity, causes her to commit adultery; and whoever marries a divorced woman commits adultery.

헬라어신약Stephanos,32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οτι ος αν απολυση την γυναικα αυτου παρεκτος λογου πορνειας ποιει αυτην μοιχασθαι και ος εαν απολελυμενην γαμηση μοιχαται

라틴어Vulgate,32 ego autem dico vobis quia omnis qui dimiserit uxorem suam excepta fornicationis causa facit eam moechari et qui dimissam duxerit adulterat

히브리어Modern,32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המשלח את אשתו בלתי על דבר זנות עשה אתה נאפת והלקח את הגרושה לו לאשה נאף הוא׃

성 경: [마5:3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이혼에 대한 새 법]

󰃨 음행한 연고 없이…간음함이니라 – 예수께서는 음욕을 품는 것이 도덕적으로 볼 때 간음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할 뿐 아니라(27-30절) 무고(誣告)한 이혼은 간음의 가능성을 낳는 죄악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이혼한 여자의 대부분이 재혼하게 된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특별히 초대 교회 당시의 팔레스틴 에서는 결혼이 여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취할 수 있었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쉽게 납득이 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결혼은 이혼당한 여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그 여자와 결혼하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든지 간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한편본문의 ‘음행한 연고 없이’란 다른 말로 ‘부정한 일을 저지른 확실한 사실이 없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마가와 누가의 기록에(막 10:2-12; 눅 16:18) 따르면 본 조건문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혹자는(McNail, De Wette, Bruce 등) 이 부분을 초대 교회 당시의 복잡한 교회내의 사정을 익히 알고 있던 후기 편집자의 첨가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비평적 입장이고 이 주장이 19:8, 9의 교훈과 그 맥(脈)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분명 예수의 직접적인 교훈이라 확신할 수 있다. 한편 본 조건문을 역으로 이해하게 되면 ‘음행'(*, 포르네이아)을 한 자와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짝지워 주신 결혼을 파기할 수 있다는 묵시적 교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기독교 윤리(基督敎 倫理)의 한 단계 더 높은 요구를 하시는 것이 분명하다(Meyer),즉 예수께서는 당시 인습적으로 이혼의 권한을 거의 전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편들이 보호받아 마땅한 아내의 허물을 덮어주는 큰 사랑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셨을 것이다(Augustine). 즉 예수께서는 당시 샴마이 학파의 가르침보다 더 초월적이고 고급한 기독교 윤리를 강조하셨던 것이다.

󰃨 버리면(*, 아폴뤼온) – ‘가게하다’, ‘이혼하다’의 현재 분사로 한 번 이혼한 후 다시 돌아보지 아니하고 평생 버려두는, 그리하여 그 이혼당한 여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재혼(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간음죄에 해당)하게 만드는 악의적인 유기(遺棄)를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 간음하게 함이요(*, 모이큐데나이) – 이는 좀더 육체적이고 적극적인 죄악의 면모를 나타내는 ‘포르네이아'(*) 보다 약한 뜻으로 어떤 법규정을 위반 했다는 일반적인 범법 행위로서의 간음을 강조한 말이다. 이로 보건대 이혼당하여 다시 재혼함으로써 간음하는 여인의 허물보다 고의적으로 아내를 버린 남편의 죄과(罪過)가 더욱 크고 심대(甚大)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팔린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토이스 아르카이오이스 우크 에피오르케세이스 아포도세이스 데 토 귀리오 투스 호르쿠스 수

개역개정,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33 “옛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님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는 또한 들었다. / ㉥레 19:12; 민 30:2; 신 23:21(칠십인역)

우리말성경,33 또 옛 사람들에게 ‘네가 한 맹세를 어기지 말고 주께 한 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가톨릭성경,33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네가 맹세한 대로 주님께 해 드려라.’ 하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또 들었다.

영어NIV,33 “Again,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e people long ago, ‘Do not break your oath, but keep the oaths you have made to the Lord.’

영어NASB,33 “Again, you have heard that the ancients were told, ‘YOU SHALL NOT MAKE FALSE VOWS, BUT SHALL FULFILL YOUR VOWS TO THE LORD.’

영어MSG,33 “And don’t say anything you don’t mean. This counsel is embedded deep in our traditions.

영어NRSV,33 “Again,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to those of ancient times, ‘You shall not swear falsely, but carry out the vows you have made to the Lord.’

헬라어신약Stephanos,33 παλιν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τοις αρχαιοις ουκ επιορκησεις αποδωσεις δε τω κυριω τους ορκους σου

라틴어Vulgate,33 iterum audistis quia dictum est antiquis non peierabis reddes autem Domino iuramenta tua

히브리어Modern,33 עוד שמעתם כי נאמר לקדמונים לא תשבע לשקר ושלם ליהוה שבעותיך׃

성 경: [마5:3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헛 맹세를 하지 말고…너희가 들었으나 – 마태는 이제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옛 사람에게 말한 바에 포함된 것은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것이 아니라 출 20:7; 레 19:12; 민 30:2; 신 5:11;6:3;22:21-23 등의 내용을 정확하게 축약한 요약문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거짓 맹세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과 서약을 깨뜨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일단 여호와의 이름이 언급되면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갚아야 할 채무(債務)가 되는 것이다. 마태는 23:16-22에 나오듯이 논쟁을 위한 배경 속에서 다시 이 주제를 다루는데, 거기에서 훌륭한 예(例)들을 많이 들고 있다. 여기에서의 배경은 분명히 논쟁을 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예수가 천국과 그 나라의 의를 어떻게 구약과 관련시키는가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에고 데 레고 휘민 메 오모사이 홀로스 메테 엔 토 우라노 호티 드로노스 에스틴 투 데우

개역개정,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새번역,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영어NIV,34 But I tell you, Do not swear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God’s throne;

영어NASB,34 “But I say to you, make no oath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the throne of God,

영어MSG,34 You only make things worse when you lay down a smoke screen of pious talk, saying, ‘I’ll pray for you,’ and never doing it, or saying, ‘God be with you,’ and not meaning it. You don’t make your words true by embellishing them with religious lace. In making your speech sound more religious, it becomes less true.

영어NRSV,34 But I say to you, Do not swear at all, either by heaven, for it is the throne of God,

헬라어신약Stephanos,34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μη ομοσαι ολως μητε εν τω ουρανω οτι θρονος εστιν του θεου

라틴어Vulgate,34 ego autem dico vobis non iurare omnino neque per caelum quia thronus Dei est

히브리어Modern,34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לא תשבעו כל שבועה לא בשמים כי כסא אלהים המה׃

성 경: [마5:34]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메 오모사이 호로스), 문법적으로 부정과거 부정사의 문형으로서 이를 정확히 해석하면 ‘절대 맹세하지 말라’는 강한 명령문이 된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맹세 자체의 무용성(無用性)을 강조하는 내용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실 예수께서는 법정에선 스스로 맹세하셨다(26:63, 64). 그리고 사도 바울도 자주 맹세와 서약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롬 1:19; 고후 1:23; 갈 1:20). 그런 점에서 본문에서 제시하는 바 예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유대인들이 범해 온 습관적이고, 진실치 못하고 위선적(형식적)인 맹세를 단호히 거부하는 명령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진실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마련된 맹세라는 제도가 영리한 거짓과 궤변적인 속임수를 사용하는 기회가 되어 버린다면 예수는 그것을 폐기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방향은 근본적으로 순전하고도 일관된 진실성이 중요하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전혀 맹세하지 않는다면 그릇된 맹세를 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실로 불완전한 인간에게 있어서의 맹세는 맹세 그 자체가 지니는 언어의 유희(遊戱)와 자기 합리화(合理化) 및 자기 변호의 추악한 도구로 전락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하늘로도 말라 – 예수는 사람이 무엇으로 맹세하든 간에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모든 맹세가 묵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이는 하늘이나 땅이나 예루살렘, 심지어는 머리카락 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와 소유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본문의 ‘하늘’은 원래 하나님의 창조물이지만 이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곧 그 창조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이 된다.

󰃨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 이는 사 66:1을 암시하는 표현으로써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하늘의 보좌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해 주고 있다(행 7:48). 실로 그 초월한 권위를 지니신 하나님의 보좌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경솔하고 습관적이며 또 위선적인 맹세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그같은 맹세는 철저히 삼가해야만 한다.

메테 엔 테 게 호티 휘포포디온 에스틴 톤 포돈 아우투 메테 에이스 히에로솔뤼마 호티 폴리스 에스틴 투 메갈루 바실레오스

개역개정,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새번역,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5 땅을 두고도 하지 말라.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또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하지 말라. 예루살렘은 위대한 왕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영어NIV,35 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o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영어NASB,35 or by the earth, for it is the footstool of His feet, o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영어MSG,35 (SEE 5:34)

영어NRSV,35 or by the earth, for it is his footstool, or by Jerusalem, for it is the city of the great King.

헬라어신약Stephanos,35 μητε εν τη γη οτι υποποδιον εστιν των ποδων αυτου μητε εις ιεροσολυμα οτι πολις εστιν του μεγαλου βασιλεως

라틴어Vulgate,35 neque per terram quia scabillum est pedum eius neque per Hierosolymam quia civitas est magni Regis

히브리어Modern,35 ולא בארץ כי הדום רגליו היא ולא בירושלים כי היא קרית מלך רב׃

성 경: [마5:3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땅으로…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 하늘을 당신의 보좌 삼으신 하나님은 또한 땅을 당신의 발등상으로 삼으시고 그곳을 통치하신다. 그러므로 ‘하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땅’ 도 맹세의 대상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 예루살렘으로…큰 임금의 성임이요 – 시 48:2;99:2 의 내용을 암시한 표현이다. 그런데 마태는 본문을 ‘…으로 맹세하다'(*, 옴뉘나이 엔)는 앞의 두묘사(하늘로, 땅으로)와는 다른 히브리적인 표현법인 ‘…을 향하여 맹세하다'(*, 옴뉘나이 에이스)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예루살렘에로의 지향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적 변형(變形)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으로 유대인들에게는 궁극적 본향(本鄕)이요, 지향점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기도와 맹세 등 각종 종교적 행위를 함에 있어서 항상 예루살렘에로의 눈길을 돌리곤 하였다. 한편 ‘큰 임금’이라는 말 앞에는 관사가 붙어있다. 이것은 곧, 그 임금이 너무도 잘 알려진 탁월한 존재임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라서 ‘큰임금’은 모든 역사를 통해 잘 알려진 탁월한 왕, 곧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25:34).

메테 엔 테 케팔레 수 오모세스 호티 우 뒤나사이 미안 트리카 류켄 포이에사이 에 멜라이난

개역개정,36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새번역,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성경,36 네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성경,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어NIV,36 And do not swear by your head, for you cannot make even one hair white or black.

영어NASB,36 “Nor shall you make an oath by your head, for you cannot make one hair white or black.

영어MSG,36 (SEE 5:34)

영어NRSV,36 And do not swear by your head, for you cannot make one hair white or black.

헬라어신약Stephanos,36 μητε εν τη κεφαλη σου ομοσης οτι ου δυνασαι μιαν τριχα λευκην η μελαιναν ποιησαι

라틴어Vulgate,36 neque per caput tuum iuraveris quia non potes unum capillum album facere aut nigrum

히브리어Modern,36 ]73-63[ אף בראשך אל תשבע כי אין ביכלתך להפך שער אחד ללבן או לשחר אך יהי דברין הן הן לא לא והיותר מאלה מן הרע הוא׃

성 경: [마5:36]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네 머리로도 말라 – 머리가 인간 신체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만물이 하나님께 관련된 것 같이 우리의 머리도 하나님께 관련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더구나 이 머리털은 하나님에 의해서 세신 바 되었고, 또 그 머리카락의 색이 희고(노령) 검게(청년)하는것(그 연수를 정하시고 생(生)과 사(死)를 정하시는 것) 역시 하나님의 소관에 속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造成)하셨다. 진정 인간은 자신의 머리털의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머리털의 원소유자는 하나님의 것이 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인간 자신의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에스토 데 호 로고스 휘본 나이 나이 우 우 토 데 페리손 투톤 에크 투 포네루 에스틴

개역개정,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새번역,37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또는 ‘악한 자’

우리말성경,37 너희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만 하라. 그 이상의 말은 악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톨릭성경,37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영어NIV,37 Simply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 ‘No’; anything beyond this comes from the evil one.

영어NASB,37 “But let your statement be, ‘Yes, yes’ or ‘No, no’; anything beyond these is of evil.

영어MSG,37 Just say ‘yes’ and ‘no.’ When you manipulate words to get your own way, you go wrong.

영어NRSV,37 Let your word be ‘Yes, Yes’ or ‘No, No’; anything more than this comes from the evil one.

헬라어신약Stephanos,37 εστω δε ο λογος υμων ναι ναι ου ου το δε περισσον τουτων εκ του πονηρου εστιν

라틴어Vulgate,37 sit autem sermo vester est est non non quod autem his abundantius est a malo est

히브리어Modern,37 ]73-63[׃

성 경: [마5:37]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맹세에 대한 새 법]

󰃨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본문을 헬라어 원문에 더 가깝게 해석하자면 ‘그러나 너희는 옳다, 옳다라고 말하든지 아니오, 아니오라고 말하든지 하라’고 재번역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은 말이 두 번씩 반복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났다. 어떤 랍비들의 의견에 의하면 ‘옳다’나’아니오’를 반복하여 쓸 경우에는 그것이 맹세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바로 예수가 비난하고 있는 비뚤어진 결의론적(決議論的) 사고라고 생각된다. 같은 말이 중복된 것은 NIV에서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는 것처럼 설교자의 수사적 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약 5:12). 이렇게 되면 이단락(33-37절)에서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 전후 관계로 볼 때 이 구절이 의도하는 것은 구약성경이 지향하는 진정한 방향, 즉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맹세가 핑계로 이용되지 않고 진실성이 위협을 받지 않는 곳이라면 그처럼 무분별하게 맹세를 폐기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둘째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언약을 세운다'(창 9:9-11; 시 16:10; 눅 1:68; 행 2:27-31). 그것은 하나님께서 때로는 거짓말을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다(히 6:17). 우리가 또한 바울의 경우로 판단해 본다면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도 맹세를 하였다(롬 1:9 고후 1:23; 빌 1:8; 살전 2:5). 그 이유는 앞에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예수 자신도 맹세를 하고 증언을 하였다(26:63-64). 또 우리는 예수의 설교가 대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5:27-30;6:5-8). 여기에서는 예수가 정식으로 구약의 율법을 논박하고 있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하여야 한다. 즉 율법이 허용(許容)하거나 명령하고 있는 것(신 6:13)을 예수는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구약이 지향하는 바에 대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 권위가 있는 것이라면, 이제 그의 가르침으로 구약이 온전한 형태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D.A. Carson).

󰃨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 여기서 ‘악으로 좇아'(*, 투 포네루)란 ‘악로부터’ 또는 ‘악한 자로부터'(거짓의 아비;요 8:44)로 번역될 수 있다. 결국 본문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하고도 책임감 있는 답변을 회피하고 오히려 그것을 넘어 하나님의 권위를 빌어 구구한 맹세를 하는 것은 분명 ‘악한 자로부터’ 생겨난 허위와 위선에 따른 결과임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흠을 확신할 수 있는 자는 ‘맹세’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그 옳고 그름을 진솔히, 그리고 단호하게 고백할 수 있다.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옾달몬 안티 옾달무 카이 오돈타 안티 오돈토스

개역개정,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출 21:24; 레 24:20; 신 19:21

우리말성경,38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출21:24;레24:20;신19:21

가톨릭성경,38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영어NIV,38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Eye for eye, and tooth for tooth.’

영어NASB,38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영어MSG,38 “Here’s another old saying that deserves a second look: ‘Eye for eye, tooth for tooth.’

영어NRSV,38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An eye for an eye and a tooth for a tooth.’

헬라어신약Stephanos,38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οφθαλμον αντι οφθαλμου και οδοντα αντι οδοντος

라틴어Vulgate,38 audistis quia dictum est oculum pro oculo et dentem pro dente

히브리어Modern,38 שמעתם כי נאמר עין תחת עין שן תחת שן׃

성 경: [마5:38]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 출 21:24; 레 24:19-20; 신 19:21 등의 내용을 가리킨다. 이상과 같은 구약성경의 규정들은 복수를 조장(助長)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에서는 복수를 금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레 19:18). 구약성경의 배경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율법을 제정함으로써 복수행위가 결정적으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은 아니나 미리 처벌 조항을 규정하여 하나님의 질서와 공의에 입각한 국가적 사법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때로는 보복 대신으로 금전이나 물건이 배상금으로 징수되기도 하였다(출 21:26, 27). 그리고 예수의 시대에는 법정에서 동해 복수법을 그대로 적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율법 규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보복을 제한하고 공정하게 처벌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복수를 정당화(正當化)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예수가 단지 동해 복수범이 사법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이용되는 것에만 반대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라면 예수가 들고 있는 예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만일 누가 너희를 때리면 너도 같이 때리지 말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그를 때리게끔 하라는 식의 예로 나타났을 것이다. 예수의 주장은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Carson).

에고 데 레고 휘민 메 안티스테나이 토 포네로 알 호스티스 세 라피제이 에이스 텐 뎈시안 시아고나 수 스트렢손 아우토 카이 텐 알렌

개역개정,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새번역,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우리말성경,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에 맞서지 말라.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어라.

가톨릭성경,39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영어NIV,39 But I tell you, Do not resist an evil person. If someone strike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o him the other also.

영어NASB,39 “But I say to you, do not resist an evil personl; but whoever slaps you on your right cheek, turn the other to him also.

영어MSG,39 Is that going to get us anywhere? Here’s what I propose: ‘Don’t hit back at all.’ If someone strikes you, stand there and take it.

영어NRSV,39 But I say to you, Do not resist an evildoer. But if anyone strikes you on the right cheek, turn the other also;

헬라어신약Stephanos,39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μη αντιστηναι τω πονηρω αλλ οστις σε ραπισει επι την δεξιαν σου σιαγονα στρεψον αυτω και την αλλην

라틴어Vulgate,39 ego autem dico vobis non resistere malo sed si quis te percusserit in dextera maxilla tua praebe illi et alteram

히브리어Modern,39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אל תתקוממו לרע אך המכה אותך על הלפי הימנית הטה לו גם את האחרת׃

성 경: [마5:39]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왼편도 돌려대며 – 여기서 뺨을 치는 행위는 육체적인 아픔을 주기 위하여 일격을 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야비하고 모욕적인 행위도 포함된다(고후 11:20). 만일 오른손잡이가 다른 사람의 오른편 뺨을 쳤다면 그것은 손등으로 찰싹 때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손바닥을 사용해서 때리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일로 간주되었다(M. Baba Kamma 8:6). 어쨌든 예수의 제자라면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동해 복수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적한다는 것을 ‘법정에서 대항하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둘째 예(40절)를 보게 된다면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다. 따라서 33-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가르침은 형식적으로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상충된다. 그러나 17-20절의 문맥에서 보면 예수가 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즉 동해 복수법을 포함하여 모든 구약성경이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율법에서 이혼을 허용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19:3-4)동해 복수법도 인간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에 악을 억제하기 위하여 제정된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한 발 양보하여서 인간의 악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폭력의 강물을 막아주는 방파제로서 법률 규정을 주신 것이다(Piper). 율법의 원칙들이 율법을 지향하던 분에 의하여 압도된 것과 같이 인간의 마음이 완악한 것도 그분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심령이 변화되어 새 언약 아래서 살아 갈 때를 내다 보았다(렘 31:31-34;32:37-41; 겔 36:26). 종말론적 시대가 시작되면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을 뿐 아니라(렘 31:34; 겔 36:25)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와서 하나님께 복종할 것이다(렘 31:33; 겔 36:27). 이같이 이런 문제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종말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예수와 그의 나라 안에서(비록 부분적이지만)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고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종말론적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다(11:13). 그리고 종말을 지향함으로써 악을 억제하였던 예언들은 이제 새 시대와 그에 따른 새 마음에게 자리를 물려준 것이다(Piper).

카이 토 델론티 소이 크리데나이 카이 톤 키토나 수 라베인 아페스 아우토 카이 토 히마티온

개역개정,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새번역,40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우리말성경,40 누가 너를 고소하고 속옷을 가져가려 하거든 겉옷까지도 벗어 주어라.

가톨릭성경,40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영어NIV,40 And if some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tunic, let him have your cloak as well.

영어NASB,40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shirt, let him have your coat also.

영어MSG,40 If someone drags you into court and sues for the shirt off your back, giftwrap your best coat and make a present of it.

영어NRSV,40 and if anyone wants to sue you and take your coat, give your cloak as well;

헬라어신약Stephanos,40 και τω θελοντι σοι κριθηναι και τον χιτωνα σου λαβειν αφες αυτω και το ιματιον

라틴어Vulgate,40 et ei qui vult tecum iudicio contendere et tunicam tuam tollere remitte ei et pallium

히브리어Modern,40 ואשר יחפץ לריב עמך ולקחת את כתנתך תן לו גם את חמעיל׃

성 경: [마5:40]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너를 송사(訟査)하여…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 비록 모세의 율법에서는 겉옷이 양도 불가능한 소유였지만(출 22:26; 신 24:13), 예수의 제자들은 누가 그들의 속옷(보통 겉옷은 속옷보다 값어치가 더 나간다)을 요구한다면 자신의 만족을 찾지 말고 법적으로는 자신의 소유임이 인정되더라도 기쁘게 그것을 넘겨 주어야 한다. 눅 6:29에서는 송사에 대해 겉옷과 속옷의 순서로 이야기하여서 순서가 마태복음과는 반대이다. 이 때문에 혹자(Schweizer)는 누가복음에서는 겉옷을 빼앗아 가려는 강도가 전제되어 있고 마태복음에서는 속옷을 원하는 소송 대상자가 전제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밤에 입는 의복이며 덮개인 겉옷은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압류할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순서가 단순히 옷을 벗어주는 정상적인 순서를 생각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출 22:25, 26에서 이미 하나님 스스로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는 법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다른 사람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리를 재판에서 관철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을 내어 주고 벗은 채로 살아가라는 예수의 전례 없는 진술 배후에는 불행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들어 있다(Schweizer).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웃의 유익을 위해 온갖 고난과 아픔을 무릎쓰는 적극적 이타주의의 실현에의 요구가 강조되어 있다.

카이 호스티스 세 앙가류세이 밀리온 헨 휘파게 멭 아우투 뒤오

개역개정,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새번역,41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

우리말성경,41 누가 네게 억지로 1밀리온을 가자고 하거든 2밀리온을 같이 가 주어라.

가톨릭성경,41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영어NIV,41 If some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miles.

영어NASB,41 “Whoever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with him two.

영어MSG,41 And if someone takes unfair advantage of you, use the occasion to practice the servant life.

영어NRSV,41 and if anyone forces you to go one mile, go also the second mile.

헬라어신약Stephanos,41 και οστις σε αγγαρευσει μιλιον εν υπαγε μετ αυτου δυο

라틴어Vulgate,41 et quicumque te angariaverit mille passus vade cum illo alia duo

히브리어Modern,41 והאנס אותך ללכת עמו דרך מיל לך אתו שנים׃

성 경: [마5:41]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십리를 동행하고 – 세번째 예화에서는 길 안내자나 또는 운반자로서 민간인들에게 동행할 것을 강요하는 로마 수비대의 권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즉 본문에서 ‘억지로 가게하다'(*, 앙가류오)는 강제적 의미가 강한 ‘징발하다’는 뜻으로서 로마 군인들은 민간인들을 징용하여 군수 물자를 규정된 거리(로마 도량형으로 1마일 곧 ‘5리’, 우리나라 치수로는 약 3리 정도, 이는 보통 성인의 약 1,000보(步)에 해당)를 운반하게 했다(W. Hatch, Essays in the Bibical Greek, pp.37-38). 한편 이 단어는 27:32에서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사용되었는데, 로마인들은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에까지 운반하도록 강요한다. 이 경우와 비슷하게 로마 군인들은 자주 한 개인에게 그러한 봉사를 요구했는데, 법질서에 정확히 일치하지 않을 때에도 이 봉사를 요구했다(Schweizer). 이처럼 강제로 징용(徵用)을 당하게 되면 무고히 소송을 당한 경우처럼 분노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예수의 제자들이 가져야 할 자세는 앙심을 품거나 복수심에 불타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토 아이툰티 세 도스 카이 톤 델론타 아포 수 다니사스다이 메 아포스트라페스

개역개정,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새번역,42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

우리말성경,42 네게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거절하지 마라.

가톨릭성경,42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영어NIV,42 Give to the one who asks you, and do not turn away from the one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영어NASB,42 “Give to him who asks of you, and do not turn away from him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영어MSG,42 No more tit-for-tat stuff. Live generously.

영어NRSV,42 Give to everyone who begs from you, and do not refuse anyone who wants to borrow from you.

헬라어신약Stephanos,42 τω αιτουντι σε διδου και τον θελοντα απο σου δανεισασθαι μη αποστραφης

라틴어Vulgate,42 qui petit a te da ei et volenti mutuari a te ne avertaris

히브리어Modern,42 השאל מאתך תן לו והבא ללות ממך אל תשב פניו׃

성 경: [마5:42]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보복에 대한 새 법]

󰃨 네게 구하는 자에게…거절하지 말라 – 네번째의 예화에서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도록 명령할 뿐 아니라(출 22:25; 레 25:37; 신 23:19) 관대한 정신을 요구하고 있다(신 15:7-11; 시 37:26;112:5). 이 구절에 대한 평행구절(눅 6:30)의 형태를 보면, 두 가지 요구가 아니라 한 가지 요구라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는 곧 비슷한 것을 반복함으로써 요점(要點)을 더 분명하고 강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마지막 두 예화를 보면 38-39절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옳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 이야기 전체는 이웃을 향해 열려진 마음의 자세, 즉 더 나은 의(義)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네 개의 미담은 강한 충격을 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율법의 규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은 돈을 꾸고자 하는 사람에게 무한정으로 돈을 주라고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잠 11:15;17:18;22:26). 구하는 자에게 준다면 살인자에게 칼도 줄 것인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심사숙고(深思熟考)해야 한다(Tholuck). 이렇듯이 이 예화들이 수없이 애매모호한 설명들로 인하여 그 의미가 약화되거나 왜곡 되어서는 안된다. 신자들이 이러한 예화들과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자세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랑과 성경에서 명하고 있는 것, 그리고 예수의 심장을 닮은 뜨거운 열정 뿐이다.

에쿠사테 호티 에르레데 아가페세이스 톤 슬레시온 수 카이 미세세이스 톤 에크드론 수

개역개정,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새번역,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레 19:18

우리말성경,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도 너희가 들었다. 레19:18

가톨릭성경,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 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영어NIV,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영어NASB,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영어MSG,43 “You’re familiar with the old written law, ‘Love your friend,’ and its unwritten companion, ‘Hate your enemy.’

영어NRSV,43 “You have heard that it was said,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nd hate your enemy.’

헬라어신약Stephanos,43 ηκουσατε οτι ερρεθη αγαπησεις τον πλησιον σου και μισησεις τον εχθρον σου

라틴어Vulgate,43 audistis quia dictum est diliges proximum tuum et odio habebis inimicum tuum

히브리어Modern,43 שמעתם כי נאמר ואהבת לרעך ושנאת את איבך׃

성 경: [마5:43]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에 근거한 실천적 윤리를 강조하신 예수의 교훈중에 최절정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하신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씀은 율법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욱이 현존하는 랍비 문헌들 조차도 그처럼 대담하고 부정적인 결론으로 비약(飛躍)하는 것은 좀처럼 없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본문이 유대인의 가치관을 비웃기 위해 기독교에서 후에 첨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확실한 근거가 없는 가설일 뿐이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쿰란 공동체의 생활을 살펴보는 것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라는 공동체 내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외부인들을 미워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그것이 유대 사회 전체의 흐름이었을것이라 추측 된다. 사실 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들만이 신앙을 지키는, 소위 ‘남은 자들'(remnants)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사랑과 미움의 대상을 그처럼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즉 이처럼 냉혹한 흑백 논리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매사를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예수 당시에 이같은 식의 사고 방식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Davies). 한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앞 부분의 원칙은 레 19:18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원칙의 범위는 이방인이 아니라 주로 선민으로 자처하는 이스라엘 내부인들로만 해석되었다. 물론 때로 이스라엘에서 정주(定住)하고 있는 이방인에게도 조건부로 적용되기도 했다(레 19:33, 34; 신 10:18, 19). 즉, 이것은 할례와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선민 공동체 속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에게만으로 제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들의 이러한 원칙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간혹 그들은 이같은 단서없이 원수 사랑을 인정하기도 했고(삼상 24:20), 가축이 관계된 문제에서나(출 23:4, 5) 또는 위급한 상태(잠 25:21, 22) 등과 같은 일상사(日常事)에서 이 원수애가 요구되기도 했다. 한편 본절은 19:19;22:39 과는 달리 구약을 인용하면서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특히 레 19:33, 34에서는 이방인에 대해서도 똑같은 사랑을 베풀라고 명령하고 있는데도 본 인용구는 그런 명령까지도 무시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일반 대중들은 하나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하였다면, 반대로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인정되며 나아가서는 공인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눅 10:25-37을 보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하며, 또 믿는 자들에게는 오직 사랑할 의무만 있고 미워할 권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에고 데 레고 휘민 아가파테 투스 에크드루스 휘몬 카이 프로슈케스데 휘페르 톤 디오콘톤 휘마스

개역개정,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새번역,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우리말성경,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가톨릭성경,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영어NIV,44 But I tell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영어NASB,44 “But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영어MSG,44 I’m challenging that. I’m telling you to love your enemies. Let them bring out the best in you, not the worst. When someone gives you a hard time, respond with the energies of prayer,

영어NRSV,44 But I say to you, Love your enemies and pray for those who persecute you,

헬라어신약Stephanos,44 εγω δε λεγω υμιν αγαπατε τους εχθρους υμων ευλογειτε τους καταρωμενους υμας καλως ποιειτε τους μισουντας υμας και προσευχεσθε υπερ των επηρεαζοντων υμας και διωκοντων υμας

라틴어Vulgate,44 ego autem dico vobis diligite inimicos vestros benefacite his qui oderunt vos et orate pro persequentibus et calumniantibus vos

히브리어Modern,44 אבל אני אמר לכם אהבו את איביכם ברכו את מקקליכם היטיבו לשנאיכם והתפללו בעד מכאיביכם ורדפיכם׃

호포스 게네스데 휘오이 투 파트로스 휘몬 투 엔 우라노이스 호티 토 헬리온 아우투 아나텔레이 에피 포네루스 카이 아가두스 카이 브레케이 에피 디카이우스 카이 아디쿠스

개역개정,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새번역,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 ㉩그, ‘아들들이’

우리말성경,45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이나 똑같이 햇빛을 비춰 주시고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가톨릭성경,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영어NIV,45 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in heaven. He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영어NASB,45 so that you may be sons of your Father who is in heaven; for He causes His sun to rise on the evil and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the unrighteous.

영어MSG,45 for then you are working out of your true selves, your God-created selves. This is what God does. He gives his best–the sun to warm and the rain to nourish–to everyone, regardless: the good and bad, the nice and nasty.

영어NRSV,45 so that you may be children of your Father in heaven; for he makes his sun rise on the evil and on the good, and sends rain on the righteous and on the unrighteous.

헬라어신약Stephanos,45 οπως γενησθε υιοι του πατρος υμων του εν ουρανοις οτι τον ηλιον αυτου ανατελλει επι πονηρους και αγαθους και βρεχει επι δικαιους και αδικους

라틴어Vulgate,45 ut sitis filii Patris vestri qui in caelis est qui solem suum oriri facit super bonos et malos et pluit super iustos et iniustos

히브리어Modern,45 למען תהיו בנים לאביכם שבשמים אשר הוא מזריח שמשו לרעים ולטובים וממטיר על הצדיקים וגם על הרשעים׃

성 경: [마5:45]

주제1: [메시야 왕국의 새로운 기준]

주제2: [사랑에 대한 새 법]

󰃨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따르고 그의 성품에 동참하는 자는 윤리적 관점에서 그분의 ‘아들’이 되는 것을 뜻한다(9, 16절 참조). 이 ‘아들’됨은 단순한 명예로서가 아니라 영광스런 신분과, 현재와 미래를 통틀어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와같은 영예(榮譽)를 누릴 필수 요건이 바로 44절에 언급된 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다.

󰃨 그 해를…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 예수의 사람들은 그 삶의 전형으로서 하나님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한편 하나님은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를 구별없이 사랑하셔서 모두에게 똑같이 해를 비취게 하시고 비를 내리시는 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의미하는 바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면에서든지 구별이 없고 따라서 결국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된다고 결론 지어서는 안된다. 예수는 분명 선인과 악인에게는, 특히 종말론적 측면에서 확실한 차등(差等)이 주어질 것이라고 가르치셨다(25:3-46). 그리고 신약성경에는 그 공평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각 개개인에게 엄격한 도덕적 생활과

[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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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마태복음 5장 주석강해말씀 중에서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라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해서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야 합니다. 오직 복음을 선포하면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팔복강해(마 5:1-48)

1-12절, 팔복

[1-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 . . .

마태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말한다.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을 구분하는 것 같다. ‘무리’는 이런 혹은 저런 관심을 가지고 또 이런 혹은 저런 동기로 예수께 나온 자들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교훈을 실천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도 두 부류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기를 원한다.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그가 산 위에서 가르치신 말씀이라고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부른다. 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고 본다. 본문의 내용은 예수께서 여덟 부류의 복된 자들을 언급하셨다고 하여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부른다. 처음 네 가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이고, 나머지 네 가지는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부유한 자는 어떤 사람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기 자신이 지식과 지혜와 의와 힘이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겸손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항상 교만과 함께 간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 자기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과, 또 자기가 의뢰하는 돈이나 세상의 것들이라는 것이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것들이 환난 날에 자기를 구원하며 장차 지옥의 불못에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들이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된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무도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받은 자의 모습이다. 이사야 66:2는,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돌아보리라]”고 말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얻을 것이다. 성경에 증거된 대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우선 자신의 빈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이 지식과 지혜가 없고 의가 없고 힘이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8:3). 이것은 사람이 겸손한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받는 자 곧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심령이 교만치 않고 겸손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겸손한 자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복음을 진심으로 믿게 된다. 교만한 자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

물론, 구원받은 자는 계속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무능력을 늘 인식하고 우리의 우리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늘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애통을 말하는 것인가? 사람에게 의미 있는 애통은 회개의 애통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죄의 심각함, 즉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많은 부족과 죄를 인해 애통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51:17).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말하였다(욜 2:12-13).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었다고 본다(눅 7:37-38).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앞에 말한 그 여자에 대해 예수께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듯이(눅 7:47, 50),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사죄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더러운 죄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깨끗케 되기 때문이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온유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교만함, 완고함, 패역함, 목이 곧음과 반대된다. 교만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온유는 믿음의 품성이다. 믿는 자 또는 믿으려 하는 자는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순종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는다. 여기의 ‘땅’은 이 세상에서 땅 몇 평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을 받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이 세상에서는 힘센 자나 억센 자가 땅을 차지하겠지만, 천국은 다르다. 천국은 온유한 자가 얻는다. 온유한 자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말했다(벧전 1:3-4).

히브리서 저자는,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말했다(히 11:16).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의 기업을 얻게 될 것이다.

예수 믿고 구원 얻은 자들도 여전히 온유해야 한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온유는 또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교훈하였고(엡 4:2), 또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했다(골 3:12).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 즉 하나님 말씀대로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경건과 도덕성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신에게 의가 없고 죄만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의가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구원의 문 앞에 서 있다. 그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듯이, 사람이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깨닫고 의를 갈망하면 의를 풍성히 얻을 것이다. 그 풍성한 의란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얻는 완전한 의를 말한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했다(롬 3:20-22).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 . . .

7절부터의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주께서는 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은혜와 긍휼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도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라고 말했다(엡 2:4-5). 예정(豫定)도, 속죄(贖罪)도, 중생(重生)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태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다(엡 4:32).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14-15). 더욱이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긴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긍휼히 여기지 않은 자들을 긍휼 없이 대하실 것이다.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하였다(약 2:13).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겨야 마땅하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렘 17:9). 주께서도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사람의 마음이 더러운 것은 물욕, 정욕, 명예욕 같은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은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죄씻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것은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마음이 더러운 자, 곧 죄와 탐욕으로 더러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뵈올 수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또 그의 영광의 형상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잘 유지해야 한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 . . .

예수께서는 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 ‘화평케 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골로새서 1:20-2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것은 복음 전파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지만,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증거하였다(고후 5:18).

둘째로, 화평케 한다는 것은 사람들 간의 화목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서로 간에도 화목하기를 힘쓸 것이다. 서로 화목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행위이다. 로마서 12: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갈라디아서 5:19-21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전통사본] 등 아홉 가지를 육체의 일들로 말하였고 또 이런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되었다. 야고보서 3:17,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 간의 불화를 제거하시고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화목하게 하는 성도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성도다운 행위, 즉 거룩하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표요 확증이다. 특히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전도의 일과 하나님 안에서 서로 화목시키는 일은 성도다운 선한 일이다.

[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 . . .

주께서는 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말씀하셨다. 팔복의 처음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인데, 다음 네 번째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이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하나님께로 나오고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 남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하여 핍박까지 받는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의 때문에’라는 뜻이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즉 하나님의 계명대로 산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확실히 천국 백성이기 때문이다. 의를 행하는 것이 구원받은 천국 백성의 표라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더욱 그러할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의를 사모하고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고 의를 위해 살고 의를 전파하고 의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순교도 당한다.

예수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인하여’라는 말은 ‘나 때문에’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욕과 핍박을 받을 것을 내다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마 16:24-25). 그것은 핍박받을 것도 예상되는 길이다. 마귀는 예수 믿는 자를 미워하고 세상을 충동하여 성도를 핍박하게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믿는 자들을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로 비난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상을 말씀하시며 핍박받을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이 구절은 또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등을 보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죄악에 대한 형벌에 차등이 있을 것이듯이, 선행에 대한 상급에도 차등이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성경 역사에서 참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바른 말을 하였기 때문이고, 그 바른 말이 회개치 않는 악인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도 회개치 않는 사람들은 참된 목사들의 설교를 미워하고 그들을 핍박하고 거짓말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악간에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며 악인들의 악행을 반드시 공명정대하게 보복하실 것이다.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삶에서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주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표가 되며 큰 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힘있게 살지 못한 것을 뉘우치자. 어떤 고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바르게, 충성되게 살자.

본문을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의 복에서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준비를 보인 것 같다. 심령의 가난,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 또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는 구원받은 자들의 덕을 보인 것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을 깨끗케 하며,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며 또 서로 화목하며, 의를 위해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당신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며 온유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가? 또 남을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며 화목케 하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가?

13-16절,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 . . .

예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즉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 믿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자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 즉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도 모르는 자들이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성경말씀도 믿지 않는 자들이며 성경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소금은 무슨 역할을 하는 물질인가? 소금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짠맛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방지이다.

소금의 첫 번째 역할은 짠맛이다. 소금은 모든 음식에 필수적이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하나도 만들지 못할지 모른다. 소금은 맛있는 음식에 필수적이다. 젓갈, 찌개, 김치를 너무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지만, 너무 짜지 않고 너무 싱겁지도 않은 적당한 소금간은 최고의 음식맛을 낸다.

이것은 어떤 영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 같다. 인생의 최고의 맛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에 맞는 삶을 가리킬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고 목적이 없고 허무하고 또 도덕적으로도 추하고 더러운 것은 인생의 맛이 없는 삶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과 아름다움은 바로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그것이 인생의 참된 맛이다.

소금의 두 번째 역할은 부패의 방지이다. 이것은 짠맛의 부수적 역할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상하기 쉬운 식품들을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햇볕에 말리거나 소금을 뿌려 절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도 소금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

이것도 영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불경건하고 죄악된 사회가 더욱 불경건하고 죄악된 사회로 악화되는 것을 억제하는 요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른 생활교훈을 받은 자들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만 악을 떠날 것이다. 그들이 그 교훈대로 산다면 세상은 급격하게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된 이 세상에서 도덕성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대로, 만일 그들이 짠맛 곧 경건성과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일 것이다. 경건과 도덕성을 상실한 교인들은 세상에 아무 유익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을 것이다.

[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 . . .

예수께서는 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빛’은 지식,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 그리고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두움은 무지, 불의와 거짓, 슬픔과 불행, 그리고 죽음을 상징한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고 의와 진실이 없고 기쁨과 행복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은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르셨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있다. 기독교는 밀교(密敎)가 아니다. 기독교회의 모임은 공개된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교회로 모이며 예배를 드렸다. 설교들은 다 공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 공개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앞에 예(例)가 된다. 그것은 좋은 예 혹은 나쁜 예가 된다. 그것은 주로 인간 관계,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물론, 사상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자들이 있다. 또 기독교를 오해해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있다. 또 진리의 지식의 차이때문에, 기본적인 혹은 중요한 생각의 차이때문에 부득이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정당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든지 악하다든지 거짓말쟁이라든지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특히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사람들 앞에 증거가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이웃 사랑을 교훈한다(레 19:18). 이웃 사랑은 가난한 자나 외로운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특히 구제 행위를 강조한다.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탈북자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친절히 대하고 도와 주어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서로 사랑함은 서로 친절히 대하고 또 서로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4-7). 에베소서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종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주인들에게 순종해야 하고, 주인들은 종들에게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엡 5:22, 25; 6:1-4, 5-9).

욥은 선하게 살았다. 그는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에게 먹을것과 입을 것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고기도 배부르게 먹게 하였고, 숙박할 곳이 없는 나그네에게 유숙할 방도 제공하였다(욥 31:16-20, 31-32).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가 잘 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간다(롬 2:23-24).

오늘날에는 어떤 교회의 직분자들이 음행하고 공금횡령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며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아주 좋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죄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관계를 조심해야 하고 돈 욕심을 버리고 돈 거래에 있어서 정정당당하고 깨끗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우리에게 소금의 맛을 잃지 말고 잘 유지하라고 암시하셨다. 소금의 짠맛은 음식을 맛있게 하는 필수물이다. 그것 없이는 모든 음식이 맛을 낼 수 없을 정도이다. 인생의 참 맛이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이 무엇인가? 그것은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참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 또 그의 뜻대로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을 가정에서부터 또 모든 인간관계에서 실천할 때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과 참 맛이 있다. 또 소금이 부패 방지에 쓰이듯이, 우리는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세상에서 의와 선과 진실을 지키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성도가 도덕성의 수호자가 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소망이 없다. 그러나 성도들이 깨어 있다면 세상은 급속히 부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경건과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도덕성, 특히 우리의 선한 행실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에서 본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가정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이런 삶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사랑의 원리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사랑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선한 삶을 삶으로써 그들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17-20절, 구약성경을 이루려 오심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 . .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고 말씀하셨다.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의 핵심은 모세가 쓴 처음 다섯 권의 책이며 그것을 우리는 모세의 율법이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구약시대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완전케 한다’는 원어(플레로오)는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과 구약성경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는 뜻이다.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관계, 즉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속죄 사역은 모세의 율법의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덕법을 성취하셨다. 즉 도덕법이 요구하는 의(義)를 이루셨다. 예레미야는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리리라고 예언했고(렘 23:5-6) 다니엘은 죄악이 영원히 속량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는 때에 대해 예언하였다(단 9:2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도덕법의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10:4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식법도 성취하셨다. 그는 구약의 상징적 의식들, 제사 제도, 성막 제도, 절기 등의 실체로 오셨다. 특히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했다(골 2:16-17).

또 히브리서는 “이 장막[구약의 성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고 말했고(히 9:9-12), 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하였다(히 10:1).

초대교회의 말시온이라는 이단은 구약의 하나님은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서로 다른 하나님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폐지하기 위해 오셨고,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큰 오해이었다.

역사상, 율법주의라는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 반율법주의라는 사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율법이 폐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이 두 사상은 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오해한 것들이었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 . . .

주께서는 또, “[이는]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이룰 것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은 구약의 율법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켰다고 본다. 주께서는 구약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증거하신 것이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라는 표현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신적 권위를 가짐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단어 영감]을 증거한다. 아니, 단지 축자 영감 정도가 아니고, 축점(逐點) 영감 혹은 축획(逐劃) 영감을 보이는 것이다. 도덕법이나 성경은 결코 폐지되지 않고 남김없이 성취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이루셨다.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 . . .

주께서는 또,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첫째는 신약교회를 가리키고(마 11:11-12; 13:24, 31, 33, 44, 45, 47), 둘째는 장차 임할 영광의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은 신약교회로 이미 시작되었고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영광의 천국으로 완성된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생활의 정도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성경을 다 믿고 힘써 지키는가 하면,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차이가 내세 천국에서의 인격의 차등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성경은 상급의 차등은 분명히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의 정도에 따른 내세의 인격의 차등은 분명치 않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전성, 즉 영화를 믿는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인격의 차등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자는 확실히 교회 안에서 큰 자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의 온전한 순종, 작은 부분까지의 순종이 요청된다.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 . . .

주께서는 또,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상당한 수준의 의처럼 보였다. 그것은 외적으로 별로 흠 잡을 데 없어 보이는 의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십일조 생활을 하는 등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온갖 탐심과 거짓으로 차 있다고 지적하셨다(마 15:8; 23:25, 28).

주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성심의 율법 준행을 가리키셨다고 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신 6:5). 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15:8). 우리가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할 때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그의 대속(代贖)의 완전한 의를 가리키셨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의를 얻었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성도는 율법을 행하되 단지 외적으로가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성심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외적 행위보다 더 나은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실상 천국에 들어갈 성도의 더 나은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의이다. 그 의는 완전한 의이다. 그 의가 성도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6).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 의지하고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율법과 복음, 구약과 신약을 충돌시키지 말자. 그 둘은 조화를 이룬다. 복음은 율법의 성취이다. 도덕법의 성취이며 의식법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충돌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근거하여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에 비추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한 의를 믿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믿는 것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은 그 의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도덕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여전히 모든 계명과 성경 교훈을 성심으로 준행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함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는다.

21-26절, 살인에 대하여

[21-22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살인은 죄악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 출산하기 전의 태아도 인간이므로, 낙태도 태아 살해 즉 살인이며, 자기의 목숨을 끊는 자살도 살인이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고 낙태도 하지 말고 자살도 하지 말아야 한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 . . .

주께서는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 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들이 제6계명에 포함된 내용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그의 율법 해석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노하는 자마다’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라고 되어 있다. 화는 정당한 경우에 낼 수 있을 것이지만, 까닭 없이 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유 없이 내는 화는 형제에 대한 미움의 표현일 것이다. 고린도전서 13:5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또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라가’라는 아람어는 ‘바보, 빈 머리’라는 뜻으로 남을 경멸하는 욕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바보, 빈 머리, 미련한 놈’ 등의 욕을 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6:10은 후욕하는[욕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욕하는 것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며 남을 미워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악한 일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나 형제에게 바보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 즉 오늘날 말로 하면 법정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것이나 욕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고 지옥불에 들어갈 큰 죄악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께서는 화목하는 생활, 즉 우리의 실생활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예배의 행위보다 우리의 실생활을 원하신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 순종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 15:22).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표는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화목하라]”고 말했다. 우리의 선한 삶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나타난다.

[25-26절]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주께서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엄격하고 철저할 것을 말씀하신다. 죄는 깨닫는 즉시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사랑이다. 그것은 율법에 말씀하신 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신 6:5) 이웃을 우리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며(레 19:18; 마 22:39) 또 주께서 친히 새 계명으로 주신 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요 13:34). 사랑하는 자는 선한 마음을 품고 살며 남을 존중하며 서로 화목할 것이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전 13:5). 에베소서 5:21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했다.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은 신약성경에 밝히 증거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전 13:4-5). 에베소서 4:29, 31-32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했다. 우리는 선한 말을 하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야고보서 3:13-17은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거슬러]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말했다. 성도는 거룩하고 화목하며 너그럽고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오늘날 유행하는 낙태나 자살도 포함하는 말이다. 또 그것은 남을 미워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여러 행위들을 포함한다. 우리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고 형제에게 욕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남을 무시하지 말고 남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화목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예수님의 마음이며 성령의 열매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27-30절, 간음에 대하여

[27-28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주께서는 십계명의 제7계명, “간음치 말라”는 계명에 대해 말씀하신다. ‘간음’(adultery)이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키며, ‘음행’(fornication)이란 보통 결혼관계가 아닌 두 사람 사이에 합의적 성관계를 가리킨다. 제7계명은 부부관계 외의 성행위, 즉 간음, 음행, 근친상간, 강간, 매춘, 동성애, 수간(獸姦) 등을 정죄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주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함을 보인다. 사람은 보는 데서 감정적 충동이나 소유의 충동을 가진다. 아이들은 마트에서 장난감을 보면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은 좋은 옷이나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사고 싶어하고 먹고 싶어한다. 그런 충동을 안 가지려면 안 보는 것이 상책이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었으므로 그 과일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다(창 3:6). 다윗은 저녁 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였고(삼하 11:2)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게 해 동침하는 실수를 범했다.

물론, 안 보고도 상상할 수 있고 또 보고도 충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면 충동을 받기 쉬운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것이 낫고 보아도 잠깐만 보고 두 번 보지 않고 자세히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그를 포옹하거나 뽀뽀를 하거나 그와 함께 눕는 불결한 상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성도덕이 심히 해이해진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접대 문화, 유흥 문화가 성행하고 매춘 행위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다. 또 이런 풍조를 조장하는 음란물들이 인터넷 문명을 통해,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스마트폰 등을 통해 홍수처럼 밀려오며 많은 사람들이 악한 풍조에 영향을 받는 것 같다. 과연 말세이다.

우리가 여성의 미니 스커트나 짧은 반바지, 너무 파진 옷, 짝 달라붙는 옷 등을 반대하며 또 청년들의 은밀한 남녀 교제를 금지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성적 충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지혜로운 성도는 그런 점을 깨닫고 그런 일을 피해야 한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까닭 없이 노하고 또 형제를 욕하는 것이 살인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고, 간음해야만 간음이 아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도 살인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다.

[29-30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은 실재하며 범죄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불구자로 성결하게 살 수 있다면 온전한 몸으로 범죄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눈으로 범죄한다면 한 눈으로만 보는 자나 장님이 더 낫고, 손으로 범죄한다면 한 손이 없거나 못 쓰는 자가 더 낫다. 불구자가 더 유익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에게 두 눈이 있는가, 두 손이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눈과 손으로 범죄하는가 범죄하지 않는가이다.

이 구절은 또한 범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를 보인다. 건강한 몸보다 더 복된 것은 깨끗한 인격이다. 물질적으로, 육신적으로 모든 것을 갖추었어도 범죄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범죄하지 않는 자는 복되며 천국백성답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죄하지 않기를 기도해야 하며, 반드시 회개해야 하며, 또 그 회개는 죄의 철저한 청산이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몸의 지체들이 범죄하는 도구가 되지 않고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롬 6:13). 우리의 눈은 성경을 읽는 눈이 되고,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며, 우리의 손은 선한 봉사를 하는 손이 되고, 우리의 입은 주를 찬송하고 전도하는 입이 되고, 우리의 발은 선한 일, 곧 전도와 심방과 봉사의 일에 빠른 발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요지는 무엇인가? 첫째로,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마음으로 미워함이나 까닭 없이 노함이나 형제에 대해 욕함이 마음의 살인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우리는 마음의 간음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모든 죄인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는다. 두 눈과 두 손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 가는 것보다 한 눈과 한 손을 가지고 범죄치 않고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나님의 공의는 매우 두렵고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계명을 어기는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는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범죄하는 모든 죄인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31-32절, 이혼에 대하여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정당한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이 외에도, 신앙적 이유 때문에 분리하기를 원하는 경우(고전 7:15)나 고의적으로 배우자를 버린 경우도 불가피한 이혼의 경우라고 보이며, 또 구타나 학대 등 심히 비인간적 고통을 당하는 경우나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리된 경우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2:16에서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셨다.

또 부당한 이혼이 옳지 않듯이, 부당한 재혼, 예컨대 부당한 이혼자와의 결혼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경우를 다 인정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33-37절, 맹세에 대하여

[33-36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엄숙히 무엇을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참된 맹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표이며 그런 자만 할 수 있다고 본다. 신명기 6:12-13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말하였고, 신명기 10:20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하였다.

본문에서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로나 땅으로나 예루살렘으로나 네 머리로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요, 모든 맹세를 다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태복음 26:63-64에 보면, 그는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할 때,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심으로 맹세를 긍정하셨다. 고린도후서 1:23에 보면, 사도 바울도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맹세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맹세는 가능하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2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그것으로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거기서 그것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그러한 일들에서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는 합법적 맹세는 행해져야 한다.”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 . .

주께서는 말씀하셨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는 맹세할 때 예와 아니오를 명확히 말하여야 한다.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을 주장하거나 증거해서는 안 되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불성실하게 약속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아는 만큼 주장하고 증거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약속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해야 한다. 우리는 맹세에 대해 바로 알고 행하자.

38-42절,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완전한 의이시다. 그 의를 받은 자는 또한 완전한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 의의 삶은 단순히 외적 규례를 지키는 삶이 아니고, 내면적으로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하지 않고 사랑하고, 음욕을 품지 않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며, 거짓 맹세하지 않으며,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은 철저한 공의의 보응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 공의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구약 율법을 부정하실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의 뜻은 다른 데 있다.

사실, 구약의 엄격한 공의의 법에 의거한다면, 우리 모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의 벌을 거두어주셨으니,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말씀은 경찰력이나 사형법이나 합법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였다. 경찰이나 군대, 사형이나 전쟁은 사회와 국가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와 온 세상이 얼마나 더 혼란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주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주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보복하려 하지 않으셨다. 공의의 보복 자체는 악이 아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악한 자에게도 선을 베푼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긍휼과 선을 베풀 때 악인들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자. 그가 악하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그에게 선을 베풀며 선하게 대하자.

43-48절, 원수를 사랑하라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전통사본에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는 말씀 다음에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라는 말씀이 있다.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원본의 본문이라고 본다. 누가복음 6:27-28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레위기 19:18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고 더 강화하신 것이다. 우리는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45-47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 . . .

주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주께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행위구원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답고 하나님의 자녀의 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뿐이다.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까닭은 하나님께서 먼저 악인들에게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악인들에 대해서는 두고라도, 우선 성도들 가운데 낯선 형제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따뜻하게 대하자. 신입교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 기존 교인들의 온화한 태도로 말미암아 편안함을 느끼게 하자. 끼리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특히 낯이 익지 않은 분들에게 인사하자.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이다.

친한 사람과만 인사하고 대화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태도이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도둑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교회를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주께서는 성도 상호간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 친절과 선을 베풀라고 가르치신다. 그 자신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시간에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또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행할 수 있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 . . .

주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이라는 말씀은 존재적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한자, 완전자시요 피조물인 우리는 유한자, 불완전자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 피조물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하고 충만해져도 신이 될 수 없다.

여기에 ‘온전하심’이라는 말은 문맥적으로는 친한 사람들에게뿐 아니라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온전, 즉 도덕적 온전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 하나님의 속성, 특히 그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은 온전함을 본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좁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하자. 교회 안에서 여러 해 사귄 교우들에게뿐 아니라, 교회에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분들에게도, 또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러하자.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그러하자. 이것이 주께서 가르치신 온전함의 내용이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자.

[역대상 2장 주석강해설교] 유다의 자손 야곱에서 다윗까지(역대상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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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튜 헨리 주석, 마태복음 05장

5:1 서언 (마태복음 5:1, 2) 여기에는 이 설교의 일반적인 개요가 기록되어 있다. Ⅰ. “설교자”는 설교자들의 왕이시오, 그의 교회의 위대한 예언자이신 우리 주 예수님이셨으니, 그는 “세상의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 예언자들과 세례 요한은 “능력 있게” 설교를 하였으나, 그리스도는 “이들을 훨씬 능가하였다.” 그는 영원하신 지혜자로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그의 뜻을 완전히 아셨다(요 1:18). 우리는 앞 장 바로 끝 부분에서 볼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병 고치심은 이 산상 설교를 위해 준비한 것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신적 능력과 선을 행하신 자로부터 가르침을 받도록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아마도 이 설교는 그가 갈릴리에서 두루 말씀하셨던 설교들을 요약하거나 열거한 것인 듯 하다. 그의 설교 본문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이 설교는 그 본문의 전반부로서 판단과 실천에서 “회개하거나 개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 준다. 그는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말 3:7)라는 질문에 답하여, “어떻게 할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는 이 본문의 후반부에 대하여 설교하였는데, 그때에 그는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를(13:)보여 주었다. Ⅱ. 이 산상 설교를 하신 “장소”는 갈릴리에 있는 산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우리 주 예수님은 잘 갖추어진 곳에서 설교하시지 못하였다. 즉 그에게는 설교하기에 편리한 장소가 없었으며, 더욱이 “그의 머리를 둘 곳도 없으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온갖 지위와 명예, 안락을 누렸지만 그들은 율법을 그릇되게 와전시켰다. 그러나 진리의 위대한 스승이신 우리 주님은 광야에로 내몰아졌으며, “산”보다 더 좋은 강단을 찾을 수 없었다. 이 산은 “거룩한 산”이나 “시온 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평범한 산이었다. 이러한 산에서 설교하신 것은 구약의 율법 시대에서와 같이 어떤 장소만이 특별히 거룩하지는 않으며, 만일 그것이 적절하고 편리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기도하고 전파해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해석하셨던 이 설교를 산에서 하신 것은 율법이 “산”에서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것은 기독교 율법의 엄숙한 선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차이는 있다. 즉 “율법이 주어졌을 때” 주님은 “산”위에 “내려 오셨으나,” 지금은 “올라 가셨다.” 그 때에는 “천둥과 번개로” 말씀하셨으나 지금은 고요하고 조용한 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때에는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지금은 가까이 오도록 초청을 받고 있다. 아, 이 얼마나 축복스러운 변화인가! 만일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이 확실히 그의 영광이라면 복음의 영광은 모든 것을 능가하는 영광이다. 왜냐하면 “은혜와 진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기” 때문이다(고후 3:7; 히 12:16 등).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갈릴리의 두 지파인 스볼론과 잇사갈에 대해 예언되었으며, 또한 우리는 이 “산에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는 법을 배우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산은 “여호와의 산”이었고 여기에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길을 가르치셨다.” Ⅲ. “청중”은 그에게 나아왔던 제자들이었다. 마가복음 31장 3절 누가복음 6장 1절에 보면 그의 부르심을 받고 나아온 제자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병만을 고치려고 그를 따랐던 사람들과는 달리 사랑하는 마음과 배우려는 열의를 가지고 그를 따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이 기꺼이 가르침을 받으려고 했고(그는 온유한 자에게 그의 길을 가르친 것이다), 또한 그가 가르치신 것(이것은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다)을 알려고 했고 또한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 일들에 대해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만 했다. 이 설교에 기술된 의무들은 천국의 은전(恩典)을 받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들어가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 의해 성실히 수행되었다. 그러나 비록 이 설교가 제자들에게 행해진 것이라 할지라도 역시 “많은 무리들”도 청종하였다. 왜냐하면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랐다”고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시내 산에서와 같이”(출 19:12) 백성들을 멀리 떨어지게 했던 일은 이 “산”에서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 그에게 말씀드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가 이 설교를 말씀하신 것은 “무리들”을 목표로 삼았다. 그가 기적들을 행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무리들이 그에게로 모여들었을 때 그는 그렇게 많은 무리들에게 가르칠 절호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물고기가 있는 곳에 얼마를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복음의 그물을 던지는 것은 신실한 교역자들에게 좋은 격려가 된다. “무리들”의 광경은 설교자로 하여금 생기를 북돋아 주는데 이것은 그 자신이 칭찬을 얻으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유익을 주려는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야 한다. Ⅳ. 그의 설교의 “엄숙성”은 “낮으시니”란 말에 암시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종종 이야기체로 많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 설교는 고정된 설교였다(kaqi,santoj auvtou/, 그가 앉으시니). 그는 청중들이 가장 잘 들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하였다. 그는 심판자가 입법자처럼 앉으셨다. 이것은 진지하고 침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일이 언급되고 청종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가 “앉으신”것은 “성경 말씀이 성취되려고 하기 위함이며”(말 3:3), “그는 연단사(금이나 은 등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처럼 앉아서 “찌꺼기, 즉 레위의 후손들의 부패한 교훈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다. “그는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다”(시 9:4). 왜냐하면 “그가 말씀하셨던 말씀이 우리를 심판할 것이기” 때문이다. “입을 열어”란 구절은 욥기 3장 1절에서와 같이 히브리적인 완곡어법(婉曲語法)에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이 설교의 엄숙성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즉 모인 군중에 너무도 많았으므로 그는 목청을 돋우어 평상시보다 더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그의 종들과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으며, “그들의 입을 여셨다”(겔 3:27; 24:27; 33:22).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자신이 직접 “입을 열어,” 자유스럽게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씀하셨다. 고대 교부들 중의 한 사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입을 여시지 않고”가르치신 경우가 허다하다. 다시 말하면 그의 거룩하고 모범이 되는 생활로 “가르치신 것이다.” 아니, 그는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함으로써” 가르치셨으나 이제는 “그의 입을 열고 가르치심으로써” 성경이 말씀한 예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잠 8:1, 2, 6). 지혜가 부르짖지 아니하느냐?─높은 곳의 꼭대기에서 부르짖지 아니하느냐? 또한 “그의 입술을 여는 것은 바른 일들이 될 것이다.” 그는 약속을 따라서 그들을 가르치셨으니(사 54:13),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학자의 혀”와(사 50:4) “주 여호와의 신”을 가지셨다(사 61:1). “그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그들이 마땅히 미워해야 할 악과 그들이 마땅히 거처해야 할 선이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의 성향과 우리의 대화의 경향을 조절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의 때는 개혁(개심)의 때이다(히 9:10). 복음으로 우리는 개심 되어야 하며, 선하고 나아져야만 한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진리”는 “경건함에 속한 진리”이다(딛 1:1).

5:3 팔복 (마태복음 5:3-12) 그리스도는 그의 설교를 축복의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우대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축복된 멜기세덱”으로서,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축복 받을” 자로서(창 12:3), “우리를 축복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기(행 3:26)”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축복을 마련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 주시고 선언하시기 위해 오셨으며, 또한 여기에서 그는 그것을 “권세 있는 자와 같이,” “축복(심지어 영원한 생명까지도)을 명령하실 수 있는” 자와 같이 하시며, 그 축복은 선한 사람에게 거듭 약속되었다. 그가 그들에게 행복을 선포하신 사실이 그들을 실제로 행복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가 축복하신 자들은 참으로 복되기 때문이다. 구약은 저주로 끝마쳤으나(말 4:6), 복음은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축복을 물려받기 위하여 지금까지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여기에서 진술하고 있는 각(各) 축복은 이중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첫째, 참으로 행복한 자로 간주되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들의 특성은 무엇인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둘째, 그런 특성을 가진 사람에게 주어진 약속된 그 참 행복은 무엇인가를 보이고 있다. 그것의 실현은 그들을 참으로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1. 이것은 맹목적이고 육욕적인 세상의 파멸적인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축복은 사람들이 얻으려고 갈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시 4:6).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목적을 오해하고 행복에 대해 그릇된 개념을 품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당연하다). 즉 그들은 스스로 미혹된 길로 들어서며, 비참을 자초하는 것이다. 흔히 “복된 사람”이란 세상에서 부요하고 위대하고 영예스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환락 속에서 나날을 보내며 쾌락 속에서 해를 넘기는 자들을 “복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살찐 것을 먹고 달콤한 것을 마시며 고자세로 으시대거나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의도나 목적, 목표도 이와 같다. 그들은 “탐리하는 자를 축복하며”(시 10:3), 그들은 “부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맹목적이고 육욕적인 세상의 파멸적인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축복은 사람들이 얻으려고 갈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시 4:6).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목적을 오해하고 행복에 대해 그릇된 개념을 품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이 잘못된 길에 빠지는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당연하다). 즉 그들은 스스로 미혹된 길로 들어서며, 비참을 자초하는 것이다. 흔히 “복된 사람”이란 세상에서 부요하고 위대하고 영예스러운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환락 속에서 나날을 보내며 쾌락 속에서 해를 넘기는 자들을 “복된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살찐 것을 먹고 달콤한 것을 마시며 고자세로 으시대거나 머리를 조아려 경배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의 의도나 목적, 목표도 이와 같다. 그들은 “탐리하는 자를 축복하며”(시 10:3), 그들은 “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이 근본적인 오류를 고치시고 새로운 전제를 제시하고 축복과 복된 사람(이것은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역설적으로 보이며 구원의 조명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진리와 확실성의 규율과 교훈─이것으로 우리는 머지않아 심판을 받아야 한다─이 된다)에 대한 전혀 다른 개념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훈의 시작이 된다면 기독자의 행위의 시작은 그의 행복의 척도를 그러한 격언에 취하는 것이 되어야만 하며 이에 따라서 그의 행동을 지도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2. 이것은 그의 복음이 은사와 은혜, 안락과 유용성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자들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시킴으로써 복음을 받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른자,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 나라의 영예와 특권에서 보면 행복하였다.

3. 그것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고 그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새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축복을 사람들이 해산할 마지막 무렵에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더 계속하려는 설교에 대해 그들로 하여금 준비케 하려고 맨 처음에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축복과 저주가 선포되었던 그리심산과 에발산(신 27:12 등)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함이다. “거기에서는” 저주가 표현되었고 축복은 암시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축복이 표현되었고 저주는 암시되었다. 이 양자에서 “생명과 죽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그러나 율법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죽음의 지배로 나타났으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좋은 것만을 소유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내는 생명의 섭리로 나타나 있다. 또한 그의 손으로 행하신(마 4:23, 24) 은혜스러운 치료를 보고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스러운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그가 시종일관하였고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고 말할 것이다.

4.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협정에 대한 항목들을 설정하고 종합하기 위한 것이다. 신적 계시의 범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과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여기에 설명된 것보다 더 적은 말로 완전히 설명된 곳은 하나도 없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믿어야 될 복음이다. 이 특성들과 일치되지 않거나 이 약속에 의거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이 여기에 알려져 있으며 “큰길”(대로, 사 35:8)을 이루고 있다. 또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 그에 의해서, 씨와 열매, 곧 요구된 은혜와 약속된 영광을 모두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손을 통합이 없이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사이를 아무 것도 지나갈 수 없다. 이것은 그의 복음이 은사와 은혜, 안락과 유용성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자들만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시킴으로써 복음을 받는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올바른자,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그 나라의 영예와 특권에서 보면 행복하였다.그것은 영혼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초대하고 그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새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축복을 사람들이 해산할 마지막 무렵에 말씀하시지 않고 그가 더 계속하려는 설교에 대해 그들로 하여금 준비케 하려고 맨 처음에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축복과 저주가 선포되었던 그리심산과 에발산(신 27:12 등)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기억하게 함이다. “거기에서는” 저주가 표현되었고 축복은 암시되었으나, “여기에서는” 축복이 표현되었고 저주는 암시되었다. 이 양자에서 “생명과 죽음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그러나 율법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죽음의 지배로 나타났으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좋은 것만을 소유하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내는 생명의 섭리로 나타나 있다. 또한 그의 손으로 행하신(마 4:23, 24) 은혜스러운 치료를 보고 이제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스러운 말씀”을 들었던 자들은 그가 시종일관하였고 사랑과 친절을 베풀었다고 말할 것이다.그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협정에 대한 항목들을 설정하고 종합하기 위한 것이다. 신적 계시의 범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과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한다. 여기에 설명된 것보다 더 적은 말로 완전히 설명된 곳은 하나도 없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믿어야 될 복음이다. 이 특성들과 일치되지 않거나 이 약속에 의거하지 않은 것은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행복으로 인도하는 길이 여기에 알려져 있으며 “큰길”(대로, 사 35:8)을 이루고 있다. 또한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이것은, 우리가 그에게서, 그에 의해서, 씨와 열매, 곧 요구된 은혜와 약속된 영광을 모두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의 손을 통합이 없이는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사이를 아무 것도 지나갈 수 없다.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복된 사람이 가지는 여덟 가지 특성을 우리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기독자의 주요한 은혜들을 나타내고 있다. 그것들 각 부분은 현재의 축복을 선포하고 있다. 즉 “∼자는 복이 있나니”이다. 또한 각 부분에는 미래적인 축복이 약속되어 있으며, 이것은 위탁된 은혜와 의무의 특질을 알맞게 하기 위하여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면 과연 복 있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Ⅰ. “심령이 가난자 자”는 복이 있다(3절). 겁 많은 심령(poorspiritedness, 역주:심령이 가난한 – poor in spirit와 비슷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음)은 사람들을 축복 받는 것에서 멀리 떨어지게 하므로 죄와 덫 ─ 비겁과 천박한 두려움, 정욕에 대한 자발적인 굴복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의 심령의 가난은 영혼의 은혜스로운 성벽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지기 위하여 자신을 비우게 되는 것이다. 1. “심령이 가난한”이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세상적인 부귀를 비울 수 있는 완전히 가난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낮은 조건일 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조건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교만하고 불평하며 운명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빈곤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빌 4:12)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가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 불편은 계속적으로 참아야 하며,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세상적인 부귀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번영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닥쳐올 손실들과 실망을 즐겁게 참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가난을 서약하지만 국가들의 부귀를 독점하는 로마 교회에 있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공한 것을 팽개쳐 버림으로써 교만과 위선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서는 부요하다고 할지라도 “심령은 가난”해야만 하며, 즉 가난한자의 위치에까지 낮아져서 그들의 연약함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그들을 동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난을 기대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과도하게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난이 특별히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만 한다(히 10:34). 욥은 “심령이 가난한 자”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취해갔을 때”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2.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겸손하고 비천한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무엇을 가지든지, 하든지 자신을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자나 교만한 자와는 반대되는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견으로 어린아이와 같으며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18:4; 19:14). “심령이 가난한”이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다면 기꺼이 세상적인 부귀를 비울 수 있는 완전히 가난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낮은 조건일 때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조건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교만하고 불평하며 운명을 탓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빈곤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하며, “비천에 처할 줄도”(빌 4:12) 알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가난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그것에 만족해야 하며 그 불편은 계속적으로 참아야 하며, 우리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하며, 그것을 최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세상적인 부귀에 무관심하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번영하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닥쳐올 손실들과 실망을 즐겁게 참는 것이다. 그것은 특별히 가난을 서약하지만 국가들의 부귀를 독점하는 로마 교회에 있는 자들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제공한 것을 팽개쳐 버림으로써 교만과 위선으로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세상에서는 부요하다고 할지라도 “심령은 가난”해야만 하며, 즉 가난한자의 위치에까지 낮아져서 그들의 연약함을 스스로 체험하면서 그들을 동정해야만 한다. 우리는 가난을 기대하고 준비해야만 한다. 과도하게 두려워하거나 그것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가난이 특별히 선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 우리들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환영해야만 한다(히 10:34). 욥은 “심령이 가난한 자”였으므로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취해갔을 때”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 겸손하고 비천한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무엇을 가지든지, 하든지 자신을 비천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약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 자나 교만한 자와는 반대되는 겸손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견으로 어린아이와 같으며 연약하고 어리석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것이다(18:4; 19:14). 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했으나 그들은 자신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였다(계 3:17). 즉 그들은 “정신적으로는 가난”했지만 “심령은 부요”하였던 것이다. 한편 바울은 은사와 은혜면에서 있어서 매우 탁월하여 “정신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심령은 가난하였으며,” 자신을 “사도들 중 가장 작은 자”나 모든 성도들 중 제일 못난 자, 그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극히 멸시하는 자로 보며, 남을 가치 있게 여기며, 자신을 그들보다 낮은 자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선을 행하기에는 값싸고 비열하고 보잘 것 없는 자로 기꺼이 자처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며 우리는 비천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그는 거룩하시고 우리는 죄스러우며 그는 모든 것이고 우리는 하등의 보잘 것 없는, 아무 것도 아닌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그 앞에서, 그의 능력있는 손 아래에서 겸손히 낮추는 것이다. 3.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의로움과 능력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창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가 가난한 죄인에게 긍휼을 부르짖었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곧 이 “심령의 가난”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난하다고 불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언제나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1) 이 심령의 가난은 기독자의 은혜들 중에서 맨 처음에 두어졌다. 철학자들은 겸손(비천)을 그들 중의 덕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맨 처음에 두고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며, 심령의 가난은 첫째 복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 밖의 모든 축복들의 기초는 겸손(비천)에 놓여져 있다. 높이 세우려는 자는 낮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복음적 은혜를 위한 맨 처음의 두드러진 준비이다. 그것은 씨를 받아드리는 데 알맞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 스럽게 여기신다. 그들은 그의 작은 자이며 그들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더 은혜를 주시며, 그들은 최고의 안전한 생을 영위하며 편안함을 가지며,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잘못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불안하다.

(3)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은혜”의 왕국은 이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만이 “가난한 자의 모임”(시 74:19)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영광”의 왕국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실 때 그에게 응하는 자는 이와 같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크고 높은 심령들은 “세상의 왕국”의 영광을 취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하는 영혼들은 “하늘의 왕국”을 얻는다. 비록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귀를 가지고 선을 베푸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올 때를 위하여” 좋은 담보물을 이와 같이 쌓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지 않는 가난한 자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동일한 행복이 유용하게 부요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만일 내가 만족하게 그를 위하여 돈을 쓸 수 없으며 부족하다면 그것도 보상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우리는 좋은 주인을 섬기지 않는가? “심령이 가난한”이란 우리 자신의 의로움과 능력은 결코 신뢰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창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은혜를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세리가 가난한 죄인에게 긍휼을 부르짖었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곧 이 “심령의 가난”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가난하다고 불러야만 한다. 왜냐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하며, 언제나 하나님의 문에서 구걸하며, 언제나 그의 집에 매달리기 때문이다.이 심령의 가난은 기독자의 은혜들 중에서 맨 처음에 두어졌다. 철학자들은 겸손(비천)을 그들 중의 덕 중의 하나로 취급하지도 않았지만 그리스도는 그것을 맨 처음에 두고 있다. 자신을 부정하는 것은 그의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우는 과목이며, 심령의 가난은 첫째 복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그 밖의 모든 축복들의 기초는 겸손(비천)에 놓여져 있다. 높이 세우려는 자는 낮게 시작해야 한다. 그것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복음적 은혜를 위한 맨 처음의 두드러진 준비이다. 그것은 씨를 받아드리는 데 알맞는 토양을 마련하는 것이다. “피곤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쉼을 얻게 될 것이다.그들은 “복이 있다.” 그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그들을 은혜 스럽게 여기신다. 그들은 그의 작은 자이며 그들의 천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더욱 더 은혜를 주시며, 그들은 최고의 안전한 생을 영위하며 편안함을 가지며,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잘못되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교만한 영혼은 언제나 불안하다.”천국이 저희의 것임이라.” “은혜”의 왕국은 이와 같은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만이 “가난한 자의 모임”(시 74:19)이라고 불리우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일원이 되기에 적합하다. “영광”의 왕국은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들 자신에 겸손하고 하나님이 그들을 낮추실 때 그에게 응하는 자는 이와 같이 높임을 받게 될 것이다. 크고 높은 심령들은 “세상의 왕국”의 영광을 취하지만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하는 영혼들은 “하늘의 왕국”을 얻는다. 비록 부자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부귀를 가지고 선을 베푸는 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하늘 나라”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장차 올 때를 위하여” 좋은 담보물을 이와 같이 쌓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행을 할 수 있는 자금을 가지지 않는 가난한 자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물론 동일한 행복이 유용하게 부요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가난한 자들에게 약속되어 있다. 만일 내가 만족하게 그를 위하여 돈을 쓸 수 없으며 부족하다면 그것도 보상받게 될 것이다. 또한 그때에 우리는 좋은 주인을 섬기지 않는가? Ⅱ.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4절). 이것은 또 다른 이상한 축복으로서 앞의 축복에 적절히 뒤따르고 있다.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데 익숙해 있으며, 가난한 자는 은혜스럽게 애통한다. 우리는 자칫하면 “즐거운 자”가 복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위대한 애통자이셨던 그리스도는 “애통하는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신다. 축복과는 적대가 되는 애통, 즉 죄악스러운 애통도 있다. 그것은 “세상의 슬픔”이다. 다시 말하면 영적인 사건에 대한 절망적인 울적함과 세속적인 사건에 대한 슬픈 고뇌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축복에 도움이 되는 이른바 자연스런 애통이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함께 역사 한다. 그리고 그 축복은 우리의 애통의 원인인 그 고난을 성화 시켜 준다. 그러나 또한 은혜스러운 애통이 있는데, 이것은 축복을 받기에 적합한 것으로서 습성적인 진지함이며, 환락을 억제하는 마음, 실제적인 슬픔이다. 1.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한 참회의 애통. 이것은 “경건한 슬픔,” 하나님께 속한 근심이며,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슥 12:10). 그들은 하나님의 애통하는 자들로서 회개의 생활을 하며 그들의 성품의 타락성과 실제적인 많은 범죄들과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이 물러서 버린 것에 대하여 애통한다. 또한 타인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그들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운다”(겔 9:4).

2. 타인의 고통을 위해 동정하는 애통.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의 애통은 “경건한 대회를 인하여,” “시온의 파괴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이다(습 3:18; 시 137:1). 특히 그들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멸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 “애곡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한 참회의 애통. 이것은 “경건한 슬픔,” 하나님께 속한 근심이며,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죄에 대해 슬퍼하는 것이다(슥 12:10). 그들은 하나님의 애통하는 자들로서 회개의 생활을 하며 그들의 성품의 타락성과 실제적인 많은 범죄들과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이 물러서 버린 것에 대하여 애통한다. 또한 타인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그들의 가증한 일로 인하여 탄식하며 운다”(겔 9:4).타인의 고통을 위해 동정하는 애통.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자들의 애통은 “경건한 대회를 인하여,” “시온의 파괴를 인하여” 슬퍼하는 것이다(습 3:18; 시 137:1). 특히 그들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우신 그리스도와 같이 멸망하는 영혼들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 “애곡하는” 것이다. 이제 이 은혜스러운 애통자들은,

(1) “복이 있다.” 헛되고 죄스러운 “웃음”을 짖지만 그 마음은 슬플 수 있는 것처럼 은혜스러운 애통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진정한 즐거움, 은밀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복이 있는”것은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종종 우셨다는 것 이외에는 웃으셨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헛된 환락을 수반하는 많은 유혹들에 대항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도장이 찍어진 용서와 정해진 평화의 위로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2) “저희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즉시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위로를 위하여 많은 준비가 되어 있다. 영광이 그들을 위해 심기워진다. 확실히 그들은 나사로(눅 16:25)와 같이 하늘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늘의 행복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위로 받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기쁨”이며, 완전한 즐거움이며 영원한 만족이다.” 그것은 이 “경건한 슬픔”에 의해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들에게 갑절이나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천국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이 가는 천국이 될 것이다. 그것은 즐거움의 수확, 즉 눈물로 씨를 뿌린 것에 대한 댓가가 될 것이다(시 126:5, 6). 즐거움의 산은 우리들의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 그 대로가 놓여있다(사 66:10 참조). “복이 있다.” 헛되고 죄스러운 “웃음”을 짖지만 그 마음은 슬플 수 있는 것처럼 은혜스러운 애통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진정한 즐거움, 은밀한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복이 있는”것은 “슬픔의 사람”이었으며 종종 우셨다는 것 이외에는 웃으셨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그리스도와 같기 때문이다. 그들은 헛된 환락을 수반하는 많은 유혹들에 대항할 수 있는 무장을 갖추고 있으며, 도장이 찍어진 용서와 정해진 평화의 위로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저희는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즉시 위로를 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위로를 위하여 많은 준비가 되어 있다. 영광이 그들을 위해 심기워진다. 확실히 그들은 나사로(눅 16:25)와 같이 하늘에서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늘의 행복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위로 받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기쁨”이며, 완전한 즐거움이며 영원한 만족이다.” 그것은 이 “경건한 슬픔”에 의해 그들을 위해 준비된 자들에게 갑절이나 즐거운 것이 될 것이다. 천국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이 가는 천국이 될 것이다. 그것은 즐거움의 수확, 즉 눈물로 씨를 뿌린 것에 대한 댓가가 될 것이다(시 126:5, 6). 즐거움의 산은 우리들의 눈물의 골짜기를 통해 그 대로가 놓여있다(사 66:10 참조). Ⅲ. “온유한 자”는 복이 있다(5절). 온유한 자란 고요히 자신을 하나님과 그의 말씀, 그의 홀(笏)에 복종하는 자며, 그의 지시를 따르고 그의 의도에 응하며, “모든 사람에게 온유”한 자이다(딛 3:2). 또한 그는 성내지 않고 그것을 자제하고 참을 수 있는 자며, 침착하거나 부드러운 답변을 하는 자며, 해야할 경우가 있을 때는 예의범절을 벗어나지 않고 그들의 불쾌함을 나타낼 수 있는 자며, 다른 사람이 뜨거울 때 차가와 질 수 있는 자이다. 또 그들이 다른 모든 것을 견지하기 어려운 때에라도 인내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꾸준히 견지하는 자이다. 온유한 자란 거의 성을 내지 않는 자이며, 또한 분을 낼지라도 쉽사리 그것을 가라앉히는 자이며, 자기의 원리를 지켜 한 번 복수하기보다는 오히려 스무 번 용서해 줄 수 있는 자이다. 이러한 온유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다고 이곳에 표현되어 있다. 1. 그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된 예수님과 같기 때문이며, 특히 그들은 그에게서 배우고 있다(마 11:29). 그들은 진노의 주님이시지만 광포는 없으신 하나님 자신과 같다. 그들이 “복된 것”은,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친구들과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최고로 안전하고 방해받지 않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관계나 조건, 단체에도 어울리며,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

2. “저희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시편 37편 11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현세적인 약속을 나타낸 거의 유일한 표현이다. 이 경건의 가지는 특별한 방법으로 “금생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롱 받고 모욕을 당하는 온유함은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건강과 부귀, 위안, 안전을 촉진하는 실제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온유하고” 침착한 자는 완고하고 난폭한 사람에 비하면 최고로 편안한 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 혹은 “저희는(하늘 나라의 상징) 땅(가나안 땅, 원문은 “땅”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음)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 위의 모든 축복과 땅 아래 모든 축복은 온유한 자의 것이다. 그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된 예수님과 같기 때문이며, 특히 그들은 그에게서 배우고 있다(마 11:29). 그들은 진노의 주님이시지만 광포는 없으신 하나님 자신과 같다. 그들이 “복된 것”은, 그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친구들과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최고로 안전하고 방해받지 않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관계나 조건, 단체에도 어울리며, 살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저희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시편 37편 11절에서 인용된 것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현세적인 약속을 나타낸 거의 유일한 표현이다. 이 경건의 가지는 특별한 방법으로 “금생의 약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조롱 받고 모욕을 당하는 온유함은 이 세상에서도 우리의 건강과 부귀, 위안, 안전을 촉진하는 실제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온유하고” 침착한 자는 완고하고 난폭한 사람에 비하면 최고로 편안한 생을 살아가는 것으로 진술되고 있다. 혹은 “저희는(하늘 나라의 상징) 땅(가나안 땅, 원문은 “땅”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음)을 기업으로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늘 위의 모든 축복과 땅 아래 모든 축복은 온유한 자의 것이다. Ⅳ.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6절).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가난과 낮은 상태에 처해 있음을 계속 말해 주는 실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 처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손상과 피해를 입게 할 뿐 아니라 정당한 대우를 받으려 해도 소용없게 만든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압제자 편에서의 권력 때문이므로 그들은 의를 소유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평등한 것을 바라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이것은 우울한 경우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선한 양심을 위하여 또한 선한 양심으로 이러한 어려움을 겪는다면 “복이 있다.” 그들로 하여금 되어진 정의와 권리의 처지를 살피시고, 이윽고 압제자들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구원해 내실 하나님을 바라고 희망을 가지게 하자(시 103:6). 압제를 끝까지 참고 견디며 그들의 송사를 하나님께 조용히 아뢰는 자들은 적절한 시기에 그가 그들에게 나타내어 보일 지혜와 친절에서 충분히 만족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러한 욕구들은 은혜스러운 것으로서 모두가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은 영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이며 신적 은혜의 선물들을 위해 자격을 부여한다. 1. “의”가 여기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의 상징으로 나와 있다(시 24:5; 마 6:33 참조). 영적 축복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 또한 우리에게 그 의를 전가함으로 말미암아 전달되고 획득되며,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해 확인된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되는 것,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기 위하여 “의로움으로 새로워진 온전한 새 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와 그 약속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것이 곧 “의”이다.

2. 우리는 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또한 실제로 그것들을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듯이 먹고 마시는 것 이외에는 만족될 수 있으며, 비록 다른 것은 부족하여도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와 같이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영적인 축복들을 진지하고 끈질기게 갈구해야 한다.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쓰레기요 찌꺼기요,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 비록 내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것으로 족하겠나이다.” “의”가 여기에서 모든 영적인 축복의 상징으로 나와 있다(시 24:5; 마 6:33 참조). 영적 축복은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 또한 우리에게 그 의를 전가함으로 말미암아 전달되고 획득되며, 하나님의 신실함에 의해 확인된다. 우리를 위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그리스도를 가지는 것,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로움”이 되는 것, “새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기 위하여 “의로움으로 새로워진 온전한 새 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와 그 약속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것이 곧 “의”이다.우리는 이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우리는 참으로 또한 실제로 그것들을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찾듯이 먹고 마시는 것 이외에는 만족될 수 있으며, 비록 다른 것은 부족하여도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는 자와 같이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영적인 축복들을 진지하고 끈질기게 갈구해야 한다.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죽겠나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쓰레기요 찌꺼기요, 불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주시옵소서. 비록 내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이것으로 족하겠나이다.” “주리고 목마른 것”은 종종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만족을 필요로 하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욕구는 어떤 일이 이루어진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용서가 행해지고 매일의 생생한 은혜의 공급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영혼은 마치 몸이 흡족한 음식을 요구하듯이 의(義)의 음식, 곧 그날에 필요한 일을 하기 위한 은혜의 음식이 필요한 것이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양식을 위해 수고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축복을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정된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하몬드(Hammond) 박사는 실천 교리 문답서 에서 “주린 것과 목마른 것”을 구별하고 있다. 즉 “주림”이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바라는 욕구로서, “성화 시키는 의”이며, “목마름”이란 원기를 돋우기 위해 마실 것을 바라는 욕구로서 의롭게 하는 “의(義)”요, 우리가 용서받았다는 의식이다. 이와 같이 영적인 축복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러한 욕구에 있어서 “복되며,” 그러한 축복들로 “채움을 받게 될 것이다.”

(1) 그들은 그러한 욕구들에 있어서 “복되다.” 비록 은혜의 모든 욕구가 은혜는 아니지만(거짓의, 의미한 욕구는 아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은혜이다. 그것은 “좋은” 어떤 것의 “증거”이며 “나은” 어떤 것의 “보증”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욕구이며 그는 그 자신의 손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만족케 하며 속이지 않는 올바른 대상에 희망을 건 사람이나 “땅에 티끌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2) 그들은 그러한 축복들로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만족하도록 주실 것이다.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그의 은혜와 호의는 그 의로운 욕구에 어울리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들 자신의 공허를 의식하고는 그런 자들에게 “은혜 위에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이다. 그는 “주리는 자를 배불리시며”(눅 1:53), 그들을 “만족케 하신다”(렘 31:25). 하늘의 행복은 확실히 그 영혼을 채울 것이다. 그들의 의는 완전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형상도 또한 완성될 것이다. 그들은 그러한 욕구들에 있어서 “복되다.” 비록 은혜의 모든 욕구가 은혜는 아니지만(거짓의, 의미한 욕구는 아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은혜이다. 그것은 “좋은” 어떤 것의 “증거”이며 “나은” 어떤 것의 “보증”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는 욕구이며 그는 그 자신의 손의 일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만족케 하며 속이지 않는 올바른 대상에 희망을 건 사람이나 “땅에 티끌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그들은 그러한 축복들로 “채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만족하도록 주실 것이다. “영혼을 채울 수”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며, 그의 은혜와 호의는 그 의로운 욕구에 어울리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그들 자신의 공허를 의식하고는 그런 자들에게 “은혜 위에 은혜로” 채워 주실 것이다. 그는 “주리는 자를 배불리시며”(눅 1:53), 그들을 “만족케 하신다”(렘 31:25). 하늘의 행복은 확실히 그 영혼을 채울 것이다. 그들의 의는 완전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의 형상도 또한 완성될 것이다. Ⅴ.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7절). 이것은 그 나머지와 같이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긍휼이 여기는 자는 현명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으며 또한 부요한 자로도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을 “복되다”고 선포하신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비천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동정하고 돕고 구제하려는 자애롭고 경건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윤택하거나 인색하지 않는 수단(자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가 참으로 “긍휼히 여기는”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을 꾸준히 참을 뿐만 아니라 기독자의 동정으로 우리 이웃의 고통에 동참해야만 한다. 긍휼은 나타내져야 하며(욥 6:14), “긍휼의 동정심”을 옷 입어야 한다. 이로써 고통 중에 신음하는 자들을 최선을 다하여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무지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가르쳐야 하며, 부주의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경고해야 한다. 죄의 상태에 있는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태로운 지경에서 건져내어야” 한다(역주. 슥 3:2). 우리는 우울하고 슬픔 가운데 있는 자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로해야 한다(욥 16:5). 궁핍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들의 쓸 것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것을 거절한다면 그것이 어떤 구실이든지 우리는 “우리의 긍휼의 동정심을 닫아 버리는”것이다(약 1:15, 16; 요일 3:17).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줌으로써 네 영혼을 건져내라”(사 58:7, 10). 아니, “선한 사람은 그의 짐승에게도 자비스럽다.” 이제 긍휼히 여기는 자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1. 그들은 “복이 있다.” 구약 성서에도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41:1). 이로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선이 그분이 영광인 하나님과 비슷하다. 그분이 “긍휼히 여기는 자”인 것처럼 “긍휼히 여김”으로서 우리는 어느 정도 “그 분이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며, 우리 자신에게도 만족감을 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쓰이는 도구가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즐거움 중의 하나는 “선행을 베푸는” 기쁨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복음서에서는 이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2. “저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즉 그들이 긍휼을 필요로 할 때 “사람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우리는 언제 급속히 친절을 필요로 할 때가 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시 18:25). 가장 자비하고 긍휼한 자는 “공로”가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없으며 긍휼을 행하는 일에 급히 서둘러야만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알뜰한” 긍휼(6:14), “공급하시는 긍휼”(잠 19:17), “생존케 하시는 긍휼”(시 41:2), 그날에 주의 긍휼(딤후 1:18)을 얻게 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마 25:34, 35). 한편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지옥불의 심판)을 받게 돌 것이다. 그들은 “복이 있다.” 구약 성서에도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 41:1). 이로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선이 그분이 영광인 하나님과 비슷하다. 그분이 “긍휼히 여기는 자”인 것처럼 “긍휼히 여김”으로서 우리는 어느 정도 “그 분이 완전하신 것 같이 완전하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이며, 우리 자신에게도 만족감을 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쓰이는 도구가 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즐거움 중의 하나는 “선행을 베푸는” 기쁨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이 말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즉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 20:35, 복음서에서는 이 말씀을 찾아볼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저희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즉 그들이 긍휼을 필요로 할 때 “사람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우리는 언제 급속히 친절을 필요로 할 때가 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실 것이다”(시 18:25). 가장 자비하고 긍휼한 자는 “공로”가 있는 것처럼 꾸밀 수 없으며 긍휼을 행하는 일에 급히 서둘러야만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알뜰한” 긍휼(6:14), “공급하시는 긍휼”(잠 19:17), “생존케 하시는 긍휼”(시 41:2), 그날에 주의 긍휼(딤후 1:18)을 얻게 될 것이다. 아니, 그들은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마 25:34, 35). 한편 “긍휼을 나타내 보이지 않는 자”는 “긍휼없는 심판”(지옥불의 심판)을 받게 돌 것이다. Ⅵ.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것은 모든 복들 중에서 가장 포괄적인 복이다. 여기에는 성결과 행복이 완전하게 묘사되어 있고 병행되어 있다. 1. 여기에는 복된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특성”이 있다. 즉 그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참된 종교는 청결한 마음에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내적으로 청결한 자는 그 자신이 “청결하고 깨끗한” 종교의 세력 아래에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참된 기독교는 마음, 즉 “마음의 청결”에 놓여 있다. 즉 “마음의 악을 씻어버림”에 있다(렘 4:14). 우리는 하나님께 깨끗한 “손”뿐만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시 24:4, 5; 딤전 1:5). 마음은 “혼합”에 반대되는, “청결”해야한다. 즉 잘 하려고 노력하는 정직한 마음이어야 한다. 이 청결함이란 “부패”와 “불결”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섞인 것이 없는” 포도주와 “진흙탕 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물과 같은 것이다. “육적인 정욕,” 모든 불결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청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또한 “세상적인 정욕”에서 청결하게 지켜야 한다. 탐욕은 “부정 이득”으로 불리운다. 또한 영육의 모든 더러움에서, “마음에서 나오고 사람을 더럽히는” 모든 것에서 청결하게 지켜야 한다. 마음은 “신앙으로 청결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나타나며 보존되어야 한다. “내 속에 이러한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오 하나님!”

2. 여기에는 복된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위로”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 하나님을 “보는 것”은 영혼의 행복의 완성이다. “그를 보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현재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땅위에 있는 천국”이다. 또한 우리가 미래 상태에서 그를 보는 것은 “하늘에 있는 천국”이다. 그가 “계신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더 이상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지 않는 것, 또한 우리와 같이 그를 보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그를 보고 그와 같이 되며, 그 형상에 만족하는 것(시 17:15), 영원히 그를 보며 그를 결코 잊지 않는 것─이것이 천국의 행복이다.

(2)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행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만 약속되어 있다. “청결한 자”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불결한 자에게는 경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상에서 불결한 영혼은 어떤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가” 그들의 불법을 차마 간과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그의 청결함을 방관할 수 없다. 또한 불결한 것은 하나도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 참으로 성화 된 자는 누구든지 그들에게 어울리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다. 신적 은혜는 항상 그것을 바라는 자에게 함께 할 것이다. 여기에는 복된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특성”이 있다. 즉 그들은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참된 종교는 청결한 마음에 있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내적으로 청결한 자는 그 자신이 “청결하고 깨끗한” 종교의 세력 아래에 있음을 나타내 보인다. 참된 기독교는 마음, 즉 “마음의 청결”에 놓여 있다. 즉 “마음의 악을 씻어버림”에 있다(렘 4:14). 우리는 하나님께 깨끗한 “손”뿐만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들어 올려야 한다(시 24:4, 5; 딤전 1:5). 마음은 “혼합”에 반대되는, “청결”해야한다. 즉 잘 하려고 노력하는 정직한 마음이어야 한다. 이 청결함이란 “부패”와 “불결”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섞인 것이 없는” 포도주와 “진흙탕 물이 섞이지 않는” 순수한 물과 같은 것이다. “육적인 정욕,” 모든 불결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마음을 “청결”하게 보존해야 한다. 또한 “세상적인 정욕”에서 청결하게 지켜야 한다. 탐욕은 “부정 이득”으로 불리운다. 또한 영육의 모든 더러움에서, “마음에서 나오고 사람을 더럽히는” 모든 것에서 청결하게 지켜야 한다. 마음은 “신앙으로 청결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에게 정결한 처녀로 나타나며 보존되어야 한다. “내 속에 이러한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오 하나님!”여기에는 복된 자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위로”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하나님을 “보는 것”은 영혼의 행복의 완성이다. “그를 보는 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현재 상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땅위에 있는 천국”이다. 또한 우리가 미래 상태에서 그를 보는 것은 “하늘에 있는 천국”이다. 그가 “계신 그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더 이상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보지 않는 것, 또한 우리와 같이 그를 보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것, 그를 보고 그와 같이 되며, 그 형상에 만족하는 것(시 17:15), 영원히 그를 보며 그를 결코 잊지 않는 것─이것이 천국의 행복이다.하나님을 볼 수 있는 행복은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만 약속되어 있다. “청결한 자”가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으며 불결한 자에게는 경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영상에서 불결한 영혼은 어떤 즐거움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가” 그들의 불법을 차마 간과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도” 그의 청결함을 방관할 수 없다. 또한 불결한 것은 하나도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 참으로 성화 된 자는 누구든지 그들에게 어울리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으로만 만족할 수 있다. 신적 은혜는 항상 그것을 바라는 자에게 함께 할 것이다. Ⅶ.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9절). 위로부터 온 지혜는 먼저 “청결”하고 그 다음에 “화평한 것”이다. 복된 자는 하나님께는 “청결하고,” 사람들에게는 “화평한” 자이다. 왜냐하면 양자에 관련하여 양심은 “허물없이” 보존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1. “화평스러운 성벽”을 지닌 사람이다. “거짓말을 꾸미는 것”이 거짓에 탐닉된 것인 것처럼, “화평케 하는 것”은 화평에 대해 강하고 진지한 애정을 지니는 것이다. “나는 화평을 원하노라”(시 120:7). 화평케 하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고 바라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본령(本領)내에 있는 것이며 침착하기를 노력하는 것이다.

2. “화평스러운 친교”를 지닌 사람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부지런하게 친교가 깨어지지 않도록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며, 만일 그것이 깨어졌을 때는 다시 화평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이 화평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들을 타인에게 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형제와 이웃 사이의 거리감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합치시켜 분쟁을 조정시키며, “갈라진 틈을 보수하는 자”이다. “화평케 하는 것”은 때로 “감사받지 못하는 일”이 될 때가 있다. 분쟁을 못하게 하는 것이 화평케 하는 자가 할 일이다. 또한 “양 편 뺨을 함께 맞는 것”이 그의 직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한 직분이며 우리는 그 일을 하는 데 앞장서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최선을 다해 불화한 자들을 화목케 하고 그들의 직무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기독자의 사랑을 권면해야 하는 교역자에 대한 교훈으로 특별히 의도되었다고 한다.

(1) 이와 같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화평을 유지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참으로 봉사함에 의해 그 자신이 충만한 즐거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범죄 행위를 파괴”하고 “땅 위에 화평”을 선포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있다.

(2) “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하다는 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들로 삼을 것이며 거기에서 그들은 그를 닮게 될 것이다. 그는 화평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의 왕이다. 양자의 성령은 화평의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 모두와 화목하신다고 선포하셨으므로 그는 서로에 대하여 적대하며 화해할 줄 모르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삼지 않을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면 화평을 깨뜨리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화평스러운 성벽”을 지닌 사람이다. “거짓말을 꾸미는 것”이 거짓에 탐닉된 것인 것처럼, “화평케 하는 것”은 화평에 대해 강하고 진지한 애정을 지니는 것이다. “나는 화평을 원하노라”(시 120:7). 화평케 하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고 바라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의 본령(本領)내에 있는 것이며 침착하기를 노력하는 것이다.”화평스러운 친교”를 지닌 사람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부지런하게 친교가 깨어지지 않도록 화평을 유지하는 것이며, 만일 그것이 깨어졌을 때는 다시 화평을 회복하는 것이다. 자신이 화평의 제안에 귀를 기울이며 그것들을 타인에게 하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형제와 이웃 사이의 거리감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합치시켜 분쟁을 조정시키며, “갈라진 틈을 보수하는 자”이다. “화평케 하는 것”은 때로 “감사받지 못하는 일”이 될 때가 있다. 분쟁을 못하게 하는 것이 화평케 하는 자가 할 일이다. 또한 “양 편 뺨을 함께 맞는 것”이 그의 직무이다. 그러나 그것은 선한 직분이며 우리는 그 일을 하는 데 앞장서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최선을 다해 불화한 자들을 화목케 하고 그들의 직무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기독자의 사랑을 권면해야 하는 교역자에 대한 교훈으로 특별히 의도되었다고 한다.이와 같은 사람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화평을 유지하며 다른 사람을 위해 참으로 봉사함에 의해 그 자신이 충만한 즐거움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범죄 행위를 파괴”하고 “땅 위에 화평”을 선포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와 함께 일하고 있다.”저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그러하다는 것은 그들 자신들에게 증거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아들로 삼을 것이며 거기에서 그들은 그를 닮게 될 것이다. 그는 화평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의 왕이다. 양자의 성령은 화평의 성령이시다.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 모두와 화목하신다고 선포하셨으므로 그는 서로에 대하여 적대하며 화해할 줄 모르는 자들을 그의 자녀로 삼지 않을 것이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면 화평을 깨뜨리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이로 보건데 그리스도는 불과 검, 형벌적인 율법으로 그의 종교가 전파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또한 완고한 성미나 난폭한 기질을 가진 사람을 그의 제자로 삼으려 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이 세상의 아들은 혼란한 틈을 타서 이득을 취하는 것(to fish in troubled waters)을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화평케 하며 늘 평온함을 지니는 자이다. Ⅷ.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이것은 모든 복들 중에서 가장 역설적인 복이며 기독교에 독특한 복이다. 따라서 이 복은 맨 나중에 놓여졌고 다른 복들과는 다르게 10절-12절에 더 확대시켜 강조하고 있다. 이 복은 바로의 꿈처럼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거의 신뢰될 수 없지만 “그 일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후반부에는 사람이 바꿔져 있다. “너희─곧 나의 제자들, 즉각적인 추종자들은 복이 있다. 덕에 있어서 뛰어난 너희는 이것과 더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어려움과 고통을 당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자. 1. 핍박받은 성도들의 경우가 언급됨. 그것은 어려운 경우이며, 매우 비참한 것이다.

(1) 그들은 맹수에게 쫓기듯이 핍박받았고 내쫓김을 당하였으며 학대를 받아야만 했다. 기독자는 마치 “이리의 머리를 가진 자”(사회에서 버림받은 법의 방치자처럼)가 되었는데 그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와 같이 버림을 받았다. 그들은 벌금형을 받았고, 투옥을 당하였고, 추방되고, 지위를 빼앗겼으며 모든 신분과 명예에서 쫓겨났다. 또한 매맞고 고문을 당하고 고통을 받았으며 언제나 도살한 양과 같이 취급되었다. 이것은 “의인 아벨”의 때로부터 거룩한 후손에 대항하는 뱀의 후손의 사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히 11:35).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기독자는 그 이상의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요 3:13). 그는 우리에게 모본을 남겨 주셨다.

(2) 그들은 “거짓으로 그들을 거스려 하는 모든 악한 말로 대적”을 당하였다. 가증스러운 자로 묘사하기 위해 그들에게, 개별적 사람들에게, 총체적으로 의인의 세대에 별명과 비난의 칭호가 붙여졌다. 때로는 그들을 경시하고 업신여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짓밟힘을 당하게 했으며, 때로 그들을 만만찮게 함으로써 강력하게 공격을 당하게 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일로 힐문과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시 35:11; 렘 20:18; 행 17:6, 7). 그들에게 다른 불행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도 이런 것은 할 수 있었다. 핍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야만적인 처신을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곰가죽으로 뒤집어쓰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들을 괴롭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저들을 먼저 가장 나쁜 사람으로 말해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최악의 잔인한 처신을 그들에게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거스리고 핍박할 것이다.” 핍박받은 성도들의 경우가 언급됨. 그것은 어려운 경우이며, 매우 비참한 것이다.그들은 맹수에게 쫓기듯이 핍박받았고 내쫓김을 당하였으며 학대를 받아야만 했다. 기독자는 마치 “이리의 머리를 가진 자”(사회에서 버림받은 법의 방치자처럼)가 되었는데 그를 발견하면 누구든지 죽일 수 있었다. 그들은 “만물의 찌꺼기”와 같이 버림을 받았다. 그들은 벌금형을 받았고, 투옥을 당하였고, 추방되고, 지위를 빼앗겼으며 모든 신분과 명예에서 쫓겨났다. 또한 매맞고 고문을 당하고 고통을 받았으며 언제나 도살한 양과 같이 취급되었다. 이것은 “의인 아벨”의 때로부터 거룩한 후손에 대항하는 뱀의 후손의 사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히 11:35). 그리스도는 우리들에게 기독자는 그 이상의 핍박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이상히 여겨서는 안 된다(요 3:13). 그는 우리에게 모본을 남겨 주셨다.그들은 “거짓으로 그들을 거스려 하는 모든 악한 말로 대적”을 당하였다. 가증스러운 자로 묘사하기 위해 그들에게, 개별적 사람들에게, 총체적으로 의인의 세대에 별명과 비난의 칭호가 붙여졌다. 때로는 그들을 경시하고 업신여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짓밟힘을 당하게 했으며, 때로 그들을 만만찮게 함으로써 강력하게 공격을 당하게 했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일로 힐문과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시 35:11; 렘 20:18; 행 17:6, 7). 그들에게 다른 불행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자들도 이런 것은 할 수 있었다. 핍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들은 그들에 대한 자신들의 야만적인 처신을 스스로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곰가죽으로 뒤집어쓰지만 않았더라면 그들은 이들을 괴롭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저들을 먼저 가장 나쁜 사람으로 말해놓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최악의 잔인한 처신을 그들에게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거스리고 핍박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들을 “거스리는 것”은 그들을 “핍박하는 것”이며, 머지 않아서 그들의 “강팍한 말”(유 15)과 “희롱”(히 11:36)은 심판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을” 너희에게 할 것이다. 때로는 증인으로 “심판의 자리” 앞에서 때로는 “잔치석상에 위선적인 조롱자들과 함께” 비웃는 자의 자리에서 거짓으로 악한 말을 할 것이다. 그들은 “취한 자의 노래”이다. 때로는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한 것처럼 정면으로, 또한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했던 것처럼 그들의 배후에서 훼방하고 거스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에 대해 부당하게 가해졌던 것처럼 그렇게 험악하고 무서운 악은 일찍이 없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3) 이 모든 것은 “의를 위함”이다.(10절). 또한 “나를 인함”이다(11절). “의를 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는”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義)의 역사와 거의 밀접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에 대한 원수는 그리스도의 원수이기도 하다. 그들은 “의를 위해”고난을 받으며, 그들의 양심을 거스려 범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선행을 하기 위해 고난을 당한다. 박해자들이 어떤 구실을 붙이든 간에 그들의 적의를 품는 목표물은 바로 경건의 능력이다. 중상을 받고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이다. “당신을 인하여 내가 비난을 견디었나이다”(시 69:9; 롬 8:36).

2. 고난받는 성도에 대한 위로가 주어져 있음.

(1) 그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그들의 생애에서 “나쁜 것들”을 받으며(눅 16:25), 좋은 이유로 그것들을 받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는 영예(행 5:41)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선을 베푸는 기회이며 또한 은혜의 특별한 위로와 찾아오심, 그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고후 1:5; 단 3:25; 롬 8:29, 36).

(2) 그들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천국은 저희의 것이다.” 그들은 현재 그것에 대한 확고한 칭호를 가지고 있으며 장차 경험할 것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이며 머지 않아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고난들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상을 받을 만한 것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상”이 약속되어 있다(12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도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것 이상으로 매우 큰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이며, 미래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안전하게 보존되며, 위험이나 사기, 폭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를 “위해” 버리는 자(비록 그것이 생명이라고 할지라도)들은 마침내 그에 “의해” 잃지 않는 것을 마련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국은 마침내 우리가 살아나가는 인생 여정에서 직면한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의를 위함”이다.(10절). 또한 “나를 인함”이다(11절). “의를 위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는”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義)의 역사와 거의 밀접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에 대한 원수는 그리스도의 원수이기도 하다. 그들은 “의를 위해”고난을 받으며, 그들의 양심을 거스려 범죄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며, 선행을 하기 위해 고난을 당한다. 박해자들이 어떤 구실을 붙이든 간에 그들의 적의를 품는 목표물은 바로 경건의 능력이다. 중상을 받고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이다. “당신을 인하여 내가 비난을 견디었나이다”(시 69:9; 롬 8:36).고난받는 성도에 대한 위로가 주어져 있음.그들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그들의 생애에서 “나쁜 것들”을 받으며(눅 16:25), 좋은 이유로 그것들을 받고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복이 있는” 것은 그것이 그들에게는 영예(행 5:41)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선을 베푸는 기회이며 또한 은혜의 특별한 위로와 찾아오심, 그의 임재를 체험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고후 1:5; 단 3:25; 롬 8:29, 36).그들은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천국은 저희의 것이다.” 그들은 현재 그것에 대한 확고한 칭호를 가지고 있으며 장차 경험할 것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이며 머지 않아 그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고난들에는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상을 받을 만한 것이 없지만 여기에서는 “상”이 약속되어 있다(12절).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도다.”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행한 것 이상으로 매우 큰 것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이며, 미래적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안전하게 보존되며, 위험이나 사기, 폭력이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은 그를 “위해” 버리는 자(비록 그것이 생명이라고 할지라도)들은 마침내 그에 “의해” 잃지 않는 것을 마련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천국은 마침내 우리가 살아나가는 인생 여정에서 직면한 모든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해 줄 것이다. 온 시대에 걸쳐서 고난받는 성도들로 하여금 그 고난과 핍박을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그들 앞에 놓여진 이 즐거움”이었다.

(3)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라(12절). 그들은 탁월성에 있어서 너희보다 뛰어나 있었으며, 또한 시간적으로도 너희 전에 있었으며 이는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약 5:10)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박해를 받았고 능욕을 당하였다. 너희는 너희 자신에 의한 방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사야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말한다.(사 28:10)고 조롱을 받았는가? 엘리사는 그의 대머리 때문이었는가? 모든 선지자들이 이렇게 취급되었는가?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놀라지 말라. 그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불평하지 말라. 고난의 길이 다져진 길임을 아는 것은 위안이 되며, 이러한 지도자들은 뒤쫓아가는 것은 영광이다. 그들이 고난을 극복하는데 충분했던 은혜는 너희에게 불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원수들은 옛적에 주님의 사자들을 조롱하였던 자들의 후손이요 계승자이다”(대하 36:16; 마 3:31; 행 7:52).

(4) 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12). 일반적인 고통 아래에서처럼 이러한 고난을 당했을 때 그저 참고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영예와 위엄, 즐거움과 유익이 그것의 고통과 수치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받는 일에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그것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든다), 바울과 같이 그것들을 “기쁨으로”당해야 한다(고후 12:10).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계시며,” 우리 보다 “뒤에 계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므로써 그 고난들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한다(벧전 4:12, 13).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라(12절). 그들은 탁월성에 있어서 너희보다 뛰어나 있었으며, 또한 시간적으로도 너희 전에 있었으며 이는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약 5:10)을 보여 주기 위함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박해를 받았고 능욕을 당하였다. 너희는 너희 자신에 의한 방법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사야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말한다.(사 28:10)고 조롱을 받았는가? 엘리사는 그의 대머리 때문이었는가? 모든 선지자들이 이렇게 취급되었는가?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놀라지 말라. 그것을 어려운 일이라고 불평하지 말라. 고난의 길이 다져진 길임을 아는 것은 위안이 되며, 이러한 지도자들은 뒤쫓아가는 것은 영광이다. 그들이 고난을 극복하는데 충분했던 은혜는 너희에게 불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 원수들은 옛적에 주님의 사자들을 조롱하였던 자들의 후손이요 계승자이다”(대하 36:16; 마 3:31; 행 7:52).그러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12). 일반적인 고통 아래에서처럼 이러한 고난을 당했을 때 그저 참고 만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리는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영예와 위엄, 즐거움과 유익이 그것의 고통과 수치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난받는 일에 “자만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그것은 모든 것을 수포로 만든다), 바울과 같이 그것들을 “기쁨으로”당해야 한다(고후 12:10). 또한 그리스도는 우리보다 “앞서 계시며,” 우리 보다 “뒤에 계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므로써 그 고난들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한다(벧전 4:12, 13).

5:13 제자 된 자의 직분 (마태복음 5:13-16) 그리스도는 근래에 그의 제자들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에서는 더 나아가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Ⅰ.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이 말씀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에게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며, 비록 멸시를 받을지라도 그들은 실제로 세상에 축복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이와 같이 고난을 받기 때문에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들보다 앞서 간 선지자들은 가나안 땅의 소금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온 세상의 소금”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전 세계로 나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실망이 되는 일은 그들의 “수가 적었고 힘이 약했다”는 사실이다. “온 세상”과 같이 넓은 지역에서 그들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들이 군대의 무력이나 칼의 힘으로 일하려 했다면 그것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금과 같이 조용히 일하였으며, 한줌의 소금은 그 맛을 널리 확산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널리 퍼져서 누룩과 같이 서서히, 불가항력적으로 일하였던 것이다. 복음의 교훈은 “소금”과 같다. 그것은 꿰뚫으며, “빠르며,” “능력 있는”것이다(히 4:12). 그것은 “마음”을 찌른다(행 2:37). 그것은 청결케 하며, 맛있게 하며, 부패를 방지한다. 성경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라는 구절이 있다(고후 2:14). 이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없이는 모든 학문이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언약은 “소금의 언약”으로 불리운다(민 18:19).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소금은 모든 제사에 사용된다(레 2:13). 또한 에스겔의 신비스러운 성전에서도 마찬가지이다(겔 43:24).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소금이 되라는 복음의 교리를 배웠고 또한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금으로서 가르치는 사명을 받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기독자는, 특히 교역자들은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실이다. 1. 만일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들이 된다면 그들은 “좋은 소금”이다. 다시 말하면 희고 작으며 작게 쪼개진 것이나 그러면서도 매우 유용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플리니(Pliny)는 말하기를, Sine sale, vita humana non potest degere ─ 즉 소금이 없이 인간의 생명이 지탱될 수 없다고 했다. 만일 그들이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들이 된다면 그들은 “좋은 소금”이다. 다시 말하면 희고 작으며 작게 쪼개진 것이나 그러면서도 매우 유용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플리니(Pliny)는 말하기를, Sine sale, vita humana non potest degere ─ 즉 소금이 없이 인간의 생명이 지탱될 수 없다고 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복음으로 맛을 낸다. 즉 은혜의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이다. 지식이나 감정, 말이나 행동, 이 모든 것들은 은혜로 고르게 되어야 한다(골 4:6).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확산시킬 수 없다(막 9:50).

(2) 그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들은 선해야(be good)만 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해야(do good)만 한다. 또한 그들 자신의 현세적인 흥미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의 맛과 향기로 그들을 변형되기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슬며시 들어가야만 한다.

(3) 그들은 세상에 대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무지와 사막에 놓여 있는 인류는 섞어 가는 맛없는 다량의 음식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파송함으로써 그들의 생과 교훈을 통하여 그들을 지식과 은혜로 맛을 내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과 천사들, 또한 신적인 일들을 맛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합당케 하기 위함인 것이다.

(4) 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만 되었는가? 그들은 무더기로 쌓여 있어서는 안 되었고, 언제나 예루살렘에 함께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소금으로서 음식물에 이곳 저곳에 알알이 흩어져야 한다. 마치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에 흩어져 있었으나 그들이 사는 곳에서는 그들의 맛을 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소금이 우리에게로 굴러 떨어지면 그것은 어리석게도 불길한 징조로 칭하나, 실상은 이 소금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실제로 흉조라는 점을 주시한다.

2. 그들이 이러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다.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맛을 내어야만 하는 너희들이 맛이 없고, 영적인 생활이 결핍되고, 기운이 없다면, 또는 만일 기독자가 그렇다면, 특히 교역자가 그렇다면 그의 처지는 매우 처참하다. 왜냐하면,

(1) 그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은 “맛 없는 음식물”을 맛나게 한다. 그러나 “맛 없는 소금”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기독교는 사람에게 맛을 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행하면서도 맛이 없고 하찮으며 품위 없고 김이 빠진 상태에 머문다면, 어떠한 교훈도 어떠한 수단도 그로 하여금 맛을 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맛을 내게 하는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2) 그는 “무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 쓸데도 없다.” 도대체 맛없는 소금이 소용될 곳이 어디 있는가? 이성 없는 사람과 같이 그것은 은혜 없는 기독자와 같을 것이다. 사악한 사람은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 사악한 기독자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 사악한 교역자는 기독자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

(3) 그의 운명은 결국 파멸과 거절이기 때문이다. 그는 “밖에 버리움”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와 신자의 교제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하는데, 그는 이들에게 오점과 부담이 된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짓밝힘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비난받았던 자들과 그들 자신이 짓밟힐 수밖에 없는 자들의 수치와 거절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그들은 자신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복음으로 맛을 낸다. 즉 은혜의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이다. 지식이나 감정, 말이나 행동, 이 모든 것들은 은혜로 고르게 되어야 한다(골 4:6). “너희 속에 소금을 두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확산시킬 수 없다(막 9:50).그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그들은 선해야(be good)만 될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해야(do good)만 한다. 또한 그들 자신의 현세적인 흥미를 만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의 맛과 향기로 그들을 변형되기 위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슬며시 들어가야만 한다.그들은 세상에 대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무지와 사막에 놓여 있는 인류는 섞어 가는 맛없는 다량의 음식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파송함으로써 그들의 생과 교훈을 통하여 그들을 지식과 은혜로 맛을 내게 하며 그리하여 하나님과 천사들, 또한 신적인 일들을 맛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합당케 하기 위함인 것이다.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만 되었는가? 그들은 무더기로 쌓여 있어서는 안 되었고, 언제나 예루살렘에 함께 계속적으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소금으로서 음식물에 이곳 저곳에 알알이 흩어져야 한다. 마치 레위인들이 이스라엘에 흩어져 있었으나 그들이 사는 곳에서는 그들의 맛을 전할 수 있었던 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소금이 우리에게로 굴러 떨어지면 그것은 어리석게도 불길한 징조로 칭하나, 실상은 이 소금이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실제로 흉조라는 점을 주시한다.그들이 이러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들은 “그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다. 만일 다른 사람들에게 맛을 내어야만 하는 너희들이 맛이 없고, 영적인 생활이 결핍되고, 기운이 없다면, 또는 만일 기독자가 그렇다면, 특히 교역자가 그렇다면 그의 처지는 매우 처참하다. 왜냐하면,그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소금은 “맛 없는 음식물”을 맛나게 한다. 그러나 “맛 없는 소금”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기독교는 사람에게 맛을 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이러한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그것을 계속적으로 행하면서도 맛이 없고 하찮으며 품위 없고 김이 빠진 상태에 머문다면, 어떠한 교훈도 어떠한 수단도 그로 하여금 맛을 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기독교가 하지 않으면 그 어느 것도 맛을 내게 하는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그는 “무익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무 쓸데도 없다.” 도대체 맛없는 소금이 소용될 곳이 어디 있는가? 이성 없는 사람과 같이 그것은 은혜 없는 기독자와 같을 것이다. 사악한 사람은 피조물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 사악한 기독자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 사악한 교역자는 기독자들 중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다.그의 운명은 결국 파멸과 거절이기 때문이다. 그는 “밖에 버리움”을 받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회와 신자의 교제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하는데, 그는 이들에게 오점과 부담이 된다. 또한 그는 “사람들에게 짓밝힘을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비난받았던 자들과 그들 자신이 짓밟힐 수밖에 없는 자들의 수치와 거절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Ⅱ.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14절). 이것도 역시 전자와 같이 그들이 유용한 자임을 나타낸다(sole et sale nihil utilius─즉 태양이나 소금보다 더 유용한 것은 없다). 그러나 더 영광스러움을 나타낸다. 모든 기독자는 “주 안에서 빛”이며(엡 5:8), “빛들로 나타내어야”한다(빌 2:15). 그러나 교역자들은 특별한 방법으로 나타내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고 있으며(요 8:12), 또한 그들은 “그와 함께 역사하는 동역자들”이며, 그들에게는 그의 어떤 명예가 주어져 있다. 참으로 “빛은 좋은 것”이며, 고마운 것이다. 세계(창조)의 첫날의 빛은 그러하였고, 그 때에 빛은 “흑암에서 빛을 내었다.” 각 날의 새벽빛도 그러하며, 또한 복음도 그러하며, 또한 지각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던지는 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흑암에 처해 있었고,”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을 세상에서 빛을 내도록 들어 올리셨다. 또한 그들은 그렇게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의 빛을 차용하고 빌린 것이다. 이 비유는 여기에서 두 가지 일로 설명되고 있다. 1. “세상의 빛”인 그들은 탁월하고 눈에 띄며, 많은 사람들의 주시를 받고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특히 봉사에 있어서 솔선수범하며 열심 있는 자들은 두드러지게 되며, 횃불처럼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징조”(사 8:18)와 “예표”(슥 3:8)의 사람이다. 그들의 모든 이웃들은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하고 추천하며 그들을 즐거워하며 그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비난하며 그들을 상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을 주시하는 자들”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해야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이 “주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전에는 무명의 사람들이었으나, 그가 그들에게 부여한 특성이 그들로 하여금 위대하게 했다. 그들은 복음의 전파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았지만 그들은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고 보좌로 나아갔으며 재판장이 되었다(눅 22:30).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당신을 높이는 자를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

2. “세상의 빛”인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기로 되어 있다(15절). 그러므로,

(1) 그들은 등불로서 “두어질”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촛불들에 불을 켰으므로 그들은 말 아래 두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이 언제나 갈릴리의 동네들이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세상에로 보냄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촛대, 즉 황금 촛대이며, 이곳에는 그들의 빛이 멀리 퍼지도록 이러한 빛들이 놓여져 있다. 복음은 매우 강한 빛이요. 그 자체의 많은 증거가 수반되는데, 즉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숨기우지 못하며,” 즉 그것에 거스려 자신들의 눈을 고의적으로 닫지 않은 자 들에게는 이 빛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것에로 가까이 접근하려는 자들과 그것이 있는 곳에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 그 빛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 탓이다. 그들이 그 빛을 집안에 들이지 않으려 하며, 부지런하고 공정하게 그 빛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쁜 편견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등불처럼 “비추어야”한다.

[1] 그들은 그들의 “선한 전파”에 의해 그들이 가진 지식을 타인을 위하여 전파해야만 한다. 그것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널리 펼쳐야만 한다. 달란트를 안 쓰고 처박아 두어서는 안 되며 그것으로 장사를 해야만 한다(역주:눅 19:20).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비밀과 모호 속에 감추어 두거나 명상이나 겸손, 자기 보존의 우선 아래 숨겨서는 안 되며, “그들이 은사를 받은 것 같이 똑같이 일을 집행해야만” 한다(눅 12:3).

[2] 그들의 “선한 생활”에 의해 그들은 “켜서 빛을 비추어야만”한다(요 5:35). 그들의 모든 대화에서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임을 증거 해야만 한다(약 3:13).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소생시키고 위로해야만 한다(욥 29:11). “세상의 빛”인 그들은 탁월하고 눈에 띄며, 많은 사람들의 주시를 받고 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 특히 봉사에 있어서 솔선수범하며 열심 있는 자들은 두드러지게 되며, 횃불처럼 주목을 받을 것이다. 그들은 “징조”(사 8:18)와 “예표”(슥 3:8)의 사람이다. 그들의 모든 이웃들은 그들을 주시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칭찬하고 추천하며 그들을 즐거워하며 그들을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시기하고 미워하며 비난하며 그들을 상하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을 주시하는 자들”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해야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많이 “주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전에는 무명의 사람들이었으나, 그가 그들에게 부여한 특성이 그들로 하여금 위대하게 했다. 그들은 복음의 전파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그것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 의해 비난받았지만 그들은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았고 보좌로 나아갔으며 재판장이 되었다(눅 22:30).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당신을 높이는 자를 높일 것이기 때문이다.”세상의 빛”인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기로 되어 있다(15절). 그러므로,그들은 등불로서 “두어질”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촛불들에 불을 켰으므로 그들은 말 아래 두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과 같이 언제나 갈릴리의 동네들이나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제한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세상에로 보냄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는 촛대, 즉 황금 촛대이며, 이곳에는 그들의 빛이 멀리 퍼지도록 이러한 빛들이 놓여져 있다. 복음은 매우 강한 빛이요. 그 자체의 많은 증거가 수반되는데, 즉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숨기우지 못하며,” 즉 그것에 거스려 자신들의 눈을 고의적으로 닫지 않은 자 들에게는 이 빛이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것에로 가까이 접근하려는 자들과 그것이 있는 곳에로 나아오는 모든 자들에게 “빛을 비출 것이다.” 그 빛을 받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들 탓이다. 그들이 그 빛을 집안에 들이지 않으려 하며, 부지런하고 공정하게 그 빛에 대해 알아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쁜 편견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은 등불처럼 “비추어야”한다.그들은 그들의 “선한 전파”에 의해 그들이 가진 지식을 타인을 위하여 전파해야만 한다. 그것을 “말 아래’ 두지 않고 널리 펼쳐야만 한다. 달란트를 안 쓰고 처박아 두어서는 안 되며 그것으로 장사를 해야만 한다(역주:눅 19:20).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 자신을 비밀과 모호 속에 감추어 두거나 명상이나 겸손, 자기 보존의 우선 아래 숨겨서는 안 되며, “그들이 은사를 받은 것 같이 똑같이 일을 집행해야만” 한다(눅 12:3).그들의 “선한 생활”에 의해 그들은 “켜서 빛을 비추어야만”한다(요 5:35). 그들의 모든 대화에서 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임을 증거 해야만 한다(약 3:13). 그들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지도하며 소생시키고 위로해야만 한다(욥 29:11).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어떻게” 우리의 빛을 비출 것인가?─사람들이 “볼 수”있고 시인할 수 있는 이러한 “선행들”을 행함으로써, 좋은 소식을 그들에게 전하여 기독교에 대해 좋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빛을 비추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울 수 있도록 선행을 베풀어야 하며, 자기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은밀히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하나님과 우리의 영혼 사이에 놓여있는 것은 우리 자신에 간직되어야만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연히 공개되고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신앙 고백과 일치되는 것이 되도록 힘써 노력해야 하며 칭찬할 만한 것이 되어야만 한다(빌 4:8). 우리들의 주위에 있는 자들은, 종교는 단지 공공연한 이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또한 우리는 신앙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능력 아래에 거한다는 사실을 확신하도록 우리의 선한 말들을 “듣고,” 우리의 선한 행위를 “보아야”한다. 둘째,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빛을 비우어야만 하는가?─”너희의 선행을 보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이것은 바리새인들이 목표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그들의 모든 선행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었다),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종교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일에서 목표로 삼아야 하는 큰 일이라는 사실이다(벧전 4:11). 이 중심에서 우리의 모든 행동의 선(線)은 만나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노력해야만 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영광 돌리도록 모든 일을 다해야만 한다. 우리의 선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1. “칭찬의 구실”이 되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며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들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2. “경건에 대한 동기”가 된다. “그들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기독교의 진리와 탁월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거룩한 경쟁의식에 의해 너희의 선행을 본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의 거룩하고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대화는 죄인들의 회심을 더욱 촉진케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에 생소한 자들은 이것으로써 그것(종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수 있다. 모범을 보임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다. 즉 모범은 스승이다. 종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것에 의해 종교에 친숙해질 수 있으며, 따라서 경건한 대화에는 마음을 사로잡는 효력이 있는 것이다. “칭찬의 구실”이 되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보며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들에게 이러한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경건에 대한 동기”가 된다. “그들로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기독교의 진리와 탁월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며, 거룩한 경쟁의식에 의해 너희의 선행을 본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며,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스럽게 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성도의 거룩하고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대화는 죄인들의 회심을 더욱 촉진케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에 생소한 자들은 이것으로써 그것(종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수 있다. 모범을 보임으로써 가르치는 것이다. 즉 모범은 스승이다. 종교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이것에 의해 종교에 친숙해질 수 있으며, 따라서 경건한 대화에는 마음을 사로잡는 효력이 있는 것이다.

5:17 율법의 완성 (마태복음 5:17-20) 그리스도께서 전파하신 사람들─그들을 위해 그의 제자들에게 이러한 교훈을 가르치셨다─자들은 그들의 종료에 있어서, 1. “구약 성경”을 “규례”로 삼고 있었던 자들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정당함을 보여 주고 있다.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던 자들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잘못임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을 “규례”로 삼고 있었던 자들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정당함을 보여 주고 있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모범”으로 삼고 있었던 자들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이 잘못임을 보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Ⅰ. 그리스도께서 제정하려고 오셨던 규칙은 “구약 성경”과 정확히 일치되었는데, 여기에서는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선지자들”은 율법에 대한 주해자였으며, 둘 다 함께 그리스도께서 유대교에 있어서 보좌 위에 기초한 신앙과 행위의 규범으로 설정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이것을 계속 왕좌적인 지위로 유지하고 있다. 1. 그는 “구약 성경”을 말소하거나 약화하는 생각을 배격하고 있다. 그는 “구약 성경”을 말소하거나 약화하는 생각을 배격하고 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1) “율법이나 선지자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내가 그것들을 파괴하려고 온 줄로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께서 설립하려고 오신 이 나라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신봉하고 그 능력과 순결성을 체험했던 성경의 명예를 손상시킬 것이라는 경계심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라. 아니,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라.

(2)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불평을 가지고 또한 그 멍에에 지친 참람한 유대인들은 내가 그것들을 파괴하려고 온 것으로 생각지 말라.” 육적인 자유 사상가들은 메시야가 그들을 신적 계율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신적인 약속들을 확실케 하며, 그들을 행복케 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지 말라. 그리스도는 자연법이나 도덕법에 의해 금지된 것을 명령하시지 않으며, 율법이 부과한 것을 금지하시지도 않는다. 그가 잘못을 고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내가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영혼의 구세주는 “마귀의 역사”나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것만을 파괴하는 분이며,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받은 탁월한 명령을 파괴하러 오시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그것들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 다시 말하면,

[1] 그는 율법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오셨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 아래에 나셨다”(갈 4:4). 그는 모든 점에서 율법에 순종하셨고, 그의 양친을 영화롭게 하였고, 안식일을 거룩케 하였으며, 기도하시고 구제하셨으며,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행하셨으며, 완전히 순종하셨고 어떤 일에서도 율법을 깨뜨리시지 않았다.

[2] 그는 율법의 약속들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를 증거 했다. 은혜의 언약은 내용상으로 보면, 그때와 지금이나 동일하다. 즉 그 증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3] 그는 율법의 모형에 부합시키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Tillotson이 표현한 대로) 그는 의식적인 법을 “헛되게” 만드시지 않고, “유효하게” 만드셨으며, 그 자신을 그러한 모든 그림자들의 본체로 나타내셨다.

[4] 그는 율법과 선지자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그것을 완성하고 완전케 하기 위하여 오셨다. “완성하다”(plhrw/sai)는 말은 적절히 이를 나타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율법을 이전에 약간의 물을 담았던 그릇으로 간주한다면 그리스도는 그 물을 부어버리려 오시지 않고 그 어구까지 채우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또한 처음에는 굵은 선으로 대충 윤관만 그렸던 그림에 비유한다면, 그리스도는 그 그림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추가 사항과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율법과 선지자를 개선하셨다.

[5] 그는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기독자의 원리는 유대교의 주요 목적과 상반되거나 거의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최고 수준에까지 진척시킨 것이다. 복음은 “개혁의 때”이며(히 9:10),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것을 세우는 것이다.

2. 그는 구약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구약을 폐지하려고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결코 폐지될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18절).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이요, 신실한 증인인 내가 엄숙히 그것을 선포하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즉 시간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고 보상의 불변 상태가 모든 법칙들을 대신할 때에, 율법의 일점 일획, 즉 가장 적고 최소한 세목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천지는 장차 합치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떨어지거나 헛되이 되기보다는 천지에 있는 모든 만물이 파멸과 혼란 속으로 휘감기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율법이나 복음의 말씀이나를 막론하고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에 관한 한, 아무리 적은 것으로 간주되는 일점이나 일획이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주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고 그의 인장이 박힌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법칙들은 그 자체들이 매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를 격언에 반영시키고 있다. Apices juris non sunt jura – 즉 “법의 극지향점은 법이 아니다”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율법의 일점과 일획을 지키시고 유지하실 것이다.

3. 그는 조심스럽게 율법을 지킬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있으며, 그들에게 그것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것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19절).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 자들,” 즉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중한 것을 무시하며 또 그렇게 하도록 사람을 가르치며,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마 15:3) 자들은,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선생이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선생으로 고용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들” 즉, 이로서 그들 자신이 바리새인들보다 “구약 성경”에 더 친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들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는다 해도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계명에는 다른 것에 비해 보다 적은 것이 있다.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없지만 비교적으로 그렇다. 유대인들은 새의 보금자리에 관한 계명과 같은 것은 지극히 적은 계명으로 간주하였다(신 22:6, 7). 그렇지만 이러한 지극히 적은 계명도 매우 크고 괄목할 만한 의미와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

(2) 하나님의 계명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취소하는 것은 교훈이나 실천에 있어서 위험스러운 일이다. 또한 그것들을 깨뜨리는 것, 즉 “그 범위를 축소”하거나 “그것들의 의무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십계명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취소하는 것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대담하게 치는 것이므로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이상의 어떤 것이며, 율법을 헛것으로 만드는 것이다(시 119:126).

(3) 이러한 부패가 더욱 퍼지면 퍼질수록 그들은 더욱 나쁘게 되는 것이다. 계명을 깨뜨리는 것은 건방진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와 같이 가르치는 것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이것은 분명히 그 당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그들 나름대로의 주석에 의해 본문을 개악(改惡)하고 외곡시켰던 자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율법이나 선지자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경건한 유대인들은 내가 그것들을 파괴하려고 온 줄로 두려워 말라.” 그리스도께서 설립하려고 오신 이 나라는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으로 신봉하고 그 능력과 순결성을 체험했던 성경의 명예를 손상시킬 것이라는 경계심 때문에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말라. 아니, 그리스도께서는 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알라.”율법과 선지자에 대해 불평을 가지고 또한 그 멍에에 지친 참람한 유대인들은 내가 그것들을 파괴하려고 온 것으로 생각지 말라.” 육적인 자유 사상가들은 메시야가 그들을 신적 계율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신적인 약속들을 확실케 하며, 그들을 행복케 하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기 위해 온 것으로 생각지 말라. 그리스도는 자연법이나 도덕법에 의해 금지된 것을 명령하시지 않으며, 율법이 부과한 것을 금지하시지도 않는다. 그가 잘못을 고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내가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영혼의 구세주는 “마귀의 역사”나 하나님께로 오지 않은 것만을 파괴하는 분이며, 우리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서 받은 탁월한 명령을 파괴하러 오시지는 않았다. 아니, 그는 그것들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다. 다시 말하면,그는 율법의 명령을 순종하기 위하여 오셨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 아래에 나셨다”(갈 4:4). 그는 모든 점에서 율법에 순종하셨고, 그의 양친을 영화롭게 하였고, 안식일을 거룩케 하였으며, 기도하시고 구제하셨으며,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을 행하셨으며, 완전히 순종하셨고 어떤 일에서도 율법을 깨뜨리시지 않았다.그는 율법의 약속들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오셨다. 그러한 것들은 모두 그를 증거 했다. 은혜의 언약은 내용상으로 보면, 그때와 지금이나 동일하다. 즉 그 증보자는 오직 그리스도이신 것이다.그는 율법의 모형에 부합시키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Tillotson이 표현한 대로) 그는 의식적인 법을 “헛되게” 만드시지 않고, “유효하게” 만드셨으며, 그 자신을 그러한 모든 그림자들의 본체로 나타내셨다.그는 율법과 선지자의 결핍을 채움으로써 그것을 완성하고 완전케 하기 위하여 오셨다. “완성하다”(plhrw/sai)는 말은 적절히 이를 나타내고 있다. 만일 우리가 율법을 이전에 약간의 물을 담았던 그릇으로 간주한다면 그리스도는 그 물을 부어버리려 오시지 않고 그 어구까지 채우기 위해 오셨던 것이다. 또한 처음에는 굵은 선으로 대충 윤관만 그렸던 그림에 비유한다면, 그리스도는 그 그림을 완성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추가 사항과 해설을 덧붙임으로써 율법과 선지자를 개선하셨다.그는 동일한 목적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기독자의 원리는 유대교의 주요 목적과 상반되거나 거의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최고 수준에까지 진척시킨 것이다. 복음은 “개혁의 때”이며(히 9:10),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개선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그것을 세우는 것이다.그는 구약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구약을 폐지하려고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결코 폐지될 수 없다고 강조하셨다(18절).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이요, 신실한 증인인 내가 엄숙히 그것을 선포하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즉 시간이 더 이상 계속되지 않고 보상의 불변 상태가 모든 법칙들을 대신할 때에, 율법의 일점 일획, 즉 가장 적고 최소한 세목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천지는 장차 합치될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떨어지거나 헛되이 되기보다는 천지에 있는 모든 만물이 파멸과 혼란 속으로 휘감기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율법이나 복음의 말씀이나를 막론하고 “영원히 지속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율법에 관한 한, 아무리 적은 것으로 간주되는 일점이나 일획이라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주시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고 그의 인장이 박힌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법칙들은 그 자체들이 매우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를 격언에 반영시키고 있다. Apices juris non sunt jura – 즉 “법의 극지향점은 법이 아니다”라고,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율법의 일점과 일획을 지키시고 유지하실 것이다.그는 조심스럽게 율법을 지킬 것을 제자들에게 맡기고 있으며, 그들에게 그것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것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19절).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는 자들,” 즉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의 중한 것을 무시하며 또 그렇게 하도록 사람을 가르치며, 그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헛된 것으로 만드는(마 15:3) 자들은,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선생이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에서는 선생으로 고용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처럼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들” 즉, 이로서 그들 자신이 바리새인들보다 “구약 성경”에 더 친근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들은 비록 다른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는다 해도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수 있다.하나님의 계명에는 다른 것에 비해 보다 적은 것이 있다.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없지만 비교적으로 그렇다. 유대인들은 새의 보금자리에 관한 계명과 같은 것은 지극히 적은 계명으로 간주하였다(신 22:6, 7). 그렇지만 이러한 지극히 적은 계명도 매우 크고 괄목할 만한 의미와 취지를 가지고 있었다.하나님의 계명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취소하는 것은 교훈이나 실천에 있어서 위험스러운 일이다. 또한 그것들을 깨뜨리는 것, 즉 “그 범위를 축소”하거나 “그것들의 의무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십계명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취소하는 것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대담하게 치는 것이므로 그대로 지나쳐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율법을 범하는 이상의 어떤 것이며, 율법을 헛것으로 만드는 것이다(시 119:126).이러한 부패가 더욱 퍼지면 퍼질수록 그들은 더욱 나쁘게 되는 것이다. 계명을 깨뜨리는 것은 건방진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그와 같이 가르치는 것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이것은 분명히 그 당시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그들 나름대로의 주석에 의해 본문을 개악(改惡)하고 외곡시켰던 자들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 진지한 경건과 종교의 핵심을 성경의 그릇된 해석에 의해 파멸시키려는 견해는 그것들이 주장될 때 사악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질 때는 더욱 나쁘다. 그렇게 하는 자는 “천국에서,” 즉 영광의 나라에서 “작다”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그는 결코 그곳에로 오지 못할 것이며, 영원히 배척을 받을 것이다. 오히려 복음적 교회에 있어서 그러할 것이다. 그는 그 안에서 선생의 위엄을 받을 가치가 없으므로 그 일원으로도 간주될 수 없다. 이러한 거짓들을 가르치는 선지자는 그 나라에서 꼬리가 될 것이다(시 9:15). 진리가 그 자신의 증거로 드러날 때 이와 같이 타락한 선생들은 바리새인과 같이 칭찬을 받는다 하더라도 현명하거나 선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교역자들로 하여금 율법을 부패시키는 것보다 더 보잘 것 없고 비천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말 2:8, 11). 죄를 경시하거나 조장하는 자들, 또한 종교상의 엄격함이나 진지한 헌신에 대해 경멸하거나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교회의 찌꺼기들이다. 그러나 한편 그들의 생활과 교훈으로 실제적인 종교의 순수성과 엄격성을 진작시키려고 노력하는 자들이나 선한 것을 행하고 가르치는 자는 참으로 영예스러운 자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큰 자로 여겨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가르친 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은 그들이 한 손으로 세운 것을 다른 손으로 무너뜨리는 자들이요, 스스로 거짓을 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종교는 망상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으로부터 말하며 그들이 설교한 대로 사는 자는 참으로 위대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도 그를 영화롭게 할 것이다(삼상 :30). 그리고 이후에 그들은 “우리 아버지의 나라에서 계명성들”과 같이 빛나게 될 것이다. Ⅱ. 그리스도께서 이 규칙에 의해 세우려고 오셨던 의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이라야만 한다(20절). 이것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을 종료의 최고봉에 도달한 사람으로 여겼던 자들에게는 이상한 교훈이었다. 서기관들은 가장 뛰어난 율법 선생이었고, 또한 바리새인들은 가장 유명한 율법 교사들이었다. 그들은 둘 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며(마 23:2),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율법에 가장 일치된 자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그들과 같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는 스스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않으면 천국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에게 있어서 이보다 더 큰 놀라움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그것을 엄숙하게 단언하고 있다. 즉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이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해 적대하는 원수들이었으며, 큰 핍박자들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칭찬 받을 만한 일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금식과 기도, 구제를 많이 하였으며, 또한 착실하게 의례상의 약속들을 준수하였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을 임무로 삼았으며, 그들은 사람들의 이익을 도모하고 그들에 대해 늘 배려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두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하면 그 중 하나는 바리새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여기에서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세우려 온 종교는 사악한 것을 몰아낼 뿐만 아니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선보다 나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많이 행해야만 하고 더 나아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율법에는 편파적”이었으며, 또한 율법의 규례적인 부분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주적”이어야만 하며 목사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만족하게 여겨서는 안 되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은 겉모양에만 신경을 쓰지만 우리는 “내적인” 경건을 자각해야만 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과 칭송”을 목표로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한 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그들은 종교에서 행한 것에 대해 자만하고 그것을 “의”로 신뢰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행했을 때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고 말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의”만 신뢰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게 될 수 있는 것이다.

5:21 살인에 대하여 (마태복음 5:21-26)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원리들, 즉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전히 율법과 예언서의 지배자였으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 지배자는 아니라는 사실들을 규정하심으로서, 어떤 특별한 실례에서 율법을 해설하거나, 그러한 주해자들이 율법에 해설을 붙였던 퇴폐한 주해로부터 율법을 계속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또한 훈계에 대하여는 보다 분명하게 하고 우리로 그 훈계를 완전히 지키게 하려고 한 설명적인 규례를 덧붙임으로써 그 훈계의 폭과 엄격성과 그 영적인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그는 제6계명의 참된 의도와 완전한 한계를 따라 그것을 설명하고 있다. Ⅰ. 여기에는 “그 명령 자체”가 규정되어 있다(12절). “우리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율법을 알고,” 모세의 글을 그들의 회당에서 각 안식일에 읽었던 자들에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살인치 말라”는 명령이 “그들에 의해,” 또는 난외에 있는 것처럼 “옛적의 그들에게,” 즉 너희의 조상들에게 말해진 것이었다고 들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은 새로이 갑자기 솟아난 법들이 아니라 옛 시대의 그들에게 전달된 법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고대법이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결코 낡아빠진 것이거나 쓸모 없이 되어가는 구식의 것이 아니다. 도덕법은 자연법이나 선악에 대한 영원한 규율들과 전제들, 즉 영원한 지성(Mind)의 올바름과 일치하고 있다. “살인,” 즉 자살을 하든지 다른 사람을 죽이든지 간에 간접적으로나 직접적으로 또는 그것에 공모함으로 생기는 모든 살인이 금지되어 있다. 하나님의 율법, 즉 생명의 하나님은 우리의 생을 보호하는 울타리이다. 그것은 노아의 규례 중 하나였다.(창 9:5, 6). Ⅱ. 유대인 교사들이 만족했던 이 계명의 주석. 이에 대한 그들의 주석은,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고의적인 살인자는 공의의 칼로 심판을 받기 쉬우며 우연한 살인자는 도피성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재판소는 그들의 주요 도시들의 문어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재판장들은 대개 23인이었으며 살인자들을 심문하고 정죄하고 처형하였다. 그러므로 살인한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었다. 이 계명에 대한 그들의 주석은 전적으로 잘못이었다. 그 이유는, 1. 그것은 제 6계명은 단지 외부적이며, 살인 행위 이상의 것을 금하지 않았고 “전쟁과 다툼이 나오는” 내적인 정욕에 대한 억제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법이 단지 죄악 된 행동만을 금지하였고 죄악 된 생각을 금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유대인 교사들의 실로 “근본적인 오류”(prw/ton yeu/doj)였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신뢰를 두려고” 하였으며, 그것의 영적 의미를 탐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지만 제10계명의 실마리를 통해서 신적 은혜가 모든 율법의 영적인 본성에 대한 지식을 그에게 주입해 주기까지는 율법의 영적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다.(롬 7:7, 14).

2. 그들의 또 다른 오류는, 이 율법이 단지 그들에게 “정치적이고 시정적(市政的)으로” 주어진 것이고 또한 그들의 법정에 필요한 규칙서로 의도된 것이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들만이 율법의 백성인 것처럼 행세했으며, 율법의 지혜도 그들과 더불어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였다. 그것은 제 6계명은 단지 외부적이며, 살인 행위 이상의 것을 금하지 않았고 “전쟁과 다툼이 나오는” 내적인 정욕에 대한 억제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적인 법이 단지 죄악 된 행동만을 금지하였고 죄악 된 생각을 금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은 유대인 교사들의 실로 “근본적인 오류”(prw/ton yeu/doj)였다. 그들은 율법의 “문자에 신뢰를 두려고” 하였으며, 그것의 영적 의미를 탐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지만 제10계명의 실마리를 통해서 신적 은혜가 모든 율법의 영적인 본성에 대한 지식을 그에게 주입해 주기까지는 율법의 영적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다.(롬 7:7, 14).그들의 또 다른 오류는, 이 율법이 단지 그들에게 “정치적이고 시정적(市政的)으로” 주어진 것이고 또한 그들의 법정에 필요한 규칙서로 의도된 것이며, 그 이상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치 그들만이 율법의 백성인 것처럼 행세했으며, 율법의 지혜도 그들과 더불어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였다. Ⅲ. 이 계명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석. 이 계명에 대한 그의 주석에 의하면 우리는 이후에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그 계명은 범위가 매우 넓으며,” 육신의 뜻이나 사람의 뜻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1.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성급한 분노는 마음속으로 살인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22절). “누구든지 이유 없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제 6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제”라고 언급된 사람은 그것이 비록 우리보다 비천한 사람들, 예를 들면 어린아이나 종들이라 할지라도 이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분노는 자연적인 격정이다. 물론 분노가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 없이 분노할 때는 “죄악”이다. eikh (“이유 없이” – 역주:어떤 사본에는 없으며,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이 말이 번역되지 않음)라는 단어는 sine causa, sine effectu et sine modo(이유 없이, 어떤 좋은 효력 없이, 경감 없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분노가 죄악일 때는,

(1) 어떤 정당한 도전 없이 성을 내는 경우인데, 아무런 이유 없이 정당한 이유 없이, 또는 크고 어울리는 이유 없이 성을 내는 것을 말한다.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쉽사리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거나 사소한 것인 경우, 쉽사리 범죄 할 수 있거나 자신에게 성을 내어서는 안 되는 경우에 어린아이나 종에 대해 성을 내는 것이 이에 속한다. 또한 우리가 근거 없는 추측에 근거하여 성을 내거나 말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모욕에 대해 분노하는 경우를 말한다.

(2) 어떠한 좋은 목적 없이 단지 우리의 권위를 나타내거나 야수적인 격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원한을 알도록 하거나 복수를 위해 감정을 폭발시키고 분노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상하게 하는 일이다. 한편 우리가 분노할 때는 언제나 범법자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도록 깨우치거나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시키는 경우에 한해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거나(고후 7:11) 다른 사람들을 경고하는 경우이다.

(3) 적당한 범위 이상으로 분노할 때, 우리가 격심하고 난폭하고 무분별하게 화를 낼 때, 우리가 불쾌하게 여기는 자들을 해하려고 성을 낼 때는 죄악이 된다. 이것은 제 6계명을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노를 내는 자는 그가 할 수만 있다면 살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을 향해 한 발자욱 발을 드려 놓았기 때문이다. 가인이 그의 동생을 죽인 것은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살의가 비롯되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살인자이다.(마 15:19).

2. 그는 그들에게, 형제에게 무례한 말을 하는 것은 즉 형제를 “라가”나 “미련한 자”라고 부르는 것은 혀로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온유함이나 좋은 목적을 위해 행해질 때는, 즉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허영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고 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야고보는 “오 어리석은 사람아,” 바울은 “너 어리석은 자여,” 그리스도는 “오 어리석고 마음이 더딘 사람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망과 무례한 말이 분노나 악의에서 비롯될 때는 지옥에서 켜진 지옥불의 연기이며 동일한 특성 아래 떨어지는 것이다.

(1) “라가”는 조롱하는 말이며, 교만에서 비롯된다. 즉 “너 머리가 텅빈 친구여”이다. 이 말은 솔로몬이 “망령된 자”(잠 21:24)라고 부르는 자에 해당되며, 우리의 형제를 짓밟으며, 그를 개와 같이 멸시하는 것이며,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요 7:49).

(2) “미련한 자”라는 것은 악의적인 말이며, 미움에서 비롯된다. 그를 비천하고 명예스럽지 못한 자로 여길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사랑 받지 못할 자로 여기는 것이다. “너 사악한 사람아, 무뢰한아 !” 전자는 분별없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성서 언어에서) 은혜 없이 말하는 것이다. 비난이 그의 영적인 상태에 영향을 주면 줄수록 그것은 더욱 악화되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의 형제에 대한 오만한 모욕이며,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그를 악의적으로 비난하며 정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6 계명을 범하는 일이다. 악의적인 중상과 비난은 ” 혀 아래에 있는 독”으로서 은밀하고 서서히 죽인다. “독한 말”은 갑자기 상처를 내는 “화살”과 같으며 (시 64:3). 뼈 속에 있는 검과 같다. 생명보다 더 좋은 우리 이웃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손상을 받고 말살되는 것이다. 이웃에게 악의를 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었다면 그의 생명을 해치려고 한 것과 같다.

3.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이 죄를 아무리 가볍게 여겨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를 “라가”라고 부르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인을 욕설한 것에 대해 산헤드린에 의해 형벌을 받게될 것이다. “미련한 욕설한 것에 대해 산헤드린에 의해 형벌을 받게될 것이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즉 불경스러운 놈,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박학자인 휘트비(Whitby)박사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유대인들의 여러 법정에서 사용된 형벌에 대한 암시에서 그리스도는 성급한 분노의 죄는 그 진척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낮고 높은 형벌에 처하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3가지의 사형법을 말하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위의 방법보다 더 악한 것이었다. ① 교수형은 재판에 의해 부과되었다. ② 돌로 치는 형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의해, ③ 화형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용되었고,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에서”집행되었다. 그러므로 성급한 분노와 비난할 만한 말은 저주스러운 죄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어떤 것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죄스럽다. 따라서 더 큰 정죄와 그들을 위해 예비 된 쓰라린 형벌이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가장 두려운 형벌이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가장 사악한 죄가 어느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성급한 분노는 마음속으로 살인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22절). “누구든지 이유 없이 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제 6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형제”라고 언급된 사람은 그것이 비록 우리보다 비천한 사람들, 예를 들면 어린아이나 종들이라 할지라도 이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한 혈통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분노는 자연적인 격정이다. 물론 분노가 정당하고 칭찬할 만한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유 없이 분노할 때는 “죄악”이다. eikh (“이유 없이” – 역주:어떤 사본에는 없으며, 우리말 개역성경에는 이 말이 번역되지 않음)라는 단어는 sine causa, sine effectu et sine modo(이유 없이, 어떤 좋은 효력 없이, 경감 없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분노가 죄악일 때는,어떤 정당한 도전 없이 성을 내는 경우인데, 아무런 이유 없이 정당한 이유 없이, 또는 크고 어울리는 이유 없이 성을 내는 것을 말한다. 어쩔 도리가 없는 것, 쉽사리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거나 사소한 것인 경우, 쉽사리 범죄 할 수 있거나 자신에게 성을 내어서는 안 되는 경우에 어린아이나 종에 대해 성을 내는 것이 이에 속한다. 또한 우리가 근거 없는 추측에 근거하여 성을 내거나 말할 가치가 없는 사소한 모욕에 대해 분노하는 경우를 말한다.어떠한 좋은 목적 없이 단지 우리의 권위를 나타내거나 야수적인 격정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원한을 알도록 하거나 복수를 위해 감정을 폭발시키고 분노하는 것은 헛된 일이며 상하게 하는 일이다. 한편 우리가 분노할 때는 언제나 범법자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도록 깨우치거나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저지시키는 경우에 한해야 한다. 즉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거나(고후 7:11) 다른 사람들을 경고하는 경우이다.적당한 범위 이상으로 분노할 때, 우리가 격심하고 난폭하고 무분별하게 화를 낼 때, 우리가 불쾌하게 여기는 자들을 해하려고 성을 낼 때는 죄악이 된다. 이것은 제 6계명을 범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노를 내는 자는 그가 할 수만 있다면 살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을 향해 한 발자욱 발을 드려 놓았기 때문이다. 가인이 그의 동생을 죽인 것은 분노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살의가 비롯되는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살인자이다.(마 15:19).그는 그들에게, 형제에게 무례한 말을 하는 것은 즉 형제를 “라가”나 “미련한 자”라고 부르는 것은 혀로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이 온유함이나 좋은 목적을 위해 행해질 때는, 즉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허영과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려고 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다. 야고보는 “오 어리석은 사람아,” 바울은 “너 어리석은 자여,” 그리스도는 “오 어리석고 마음이 더딘 사람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망과 무례한 말이 분노나 악의에서 비롯될 때는 지옥에서 켜진 지옥불의 연기이며 동일한 특성 아래 떨어지는 것이다.”라가”는 조롱하는 말이며, 교만에서 비롯된다. 즉 “너 머리가 텅빈 친구여”이다. 이 말은 솔로몬이 “망령된 자”(잠 21:24)라고 부르는 자에 해당되며, 우리의 형제를 짓밟으며, 그를 개와 같이 멸시하는 것이며,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요 7:49).”미련한 자”라는 것은 악의적인 말이며, 미움에서 비롯된다. 그를 비천하고 명예스럽지 못한 자로 여길 뿐만 아니라, 사악하고 사랑 받지 못할 자로 여기는 것이다. “너 사악한 사람아, 무뢰한아 !” 전자는 분별없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성서 언어에서) 은혜 없이 말하는 것이다. 비난이 그의 영적인 상태에 영향을 주면 줄수록 그것은 더욱 악화되는 것이다. 전자는 우리의 형제에 대한 오만한 모욕이며, 이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그를 악의적으로 비난하며 정죄하는 것이다. 이것은 제 6 계명을 범하는 일이다. 악의적인 중상과 비난은 ” 혀 아래에 있는 독”으로서 은밀하고 서서히 죽인다. “독한 말”은 갑자기 상처를 내는 “화살”과 같으며 (시 64:3). 뼈 속에 있는 검과 같다. 생명보다 더 좋은 우리 이웃의 이름은 이로 말미암아 손상을 받고 말살되는 것이다. 이웃에게 악의를 품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었다면 그의 생명을 해치려고 한 것과 같다.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이 죄를 아무리 가볍게 여겨왔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를 “라가”라고 부르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될 것이다.” 즉 이스라엘인을 욕설한 것에 대해 산헤드린에 의해 형벌을 받게될 것이다. “미련한 욕설한 것에 대해 산헤드린에 의해 형벌을 받게될 것이다.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즉 불경스러운 놈, 지옥의 자식이라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박학자인 휘트비(Whitby)박사도 이와 같이 생각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유대인들의 여러 법정에서 사용된 형벌에 대한 암시에서 그리스도는 성급한 분노의 죄는 그 진척의 정도에 따라 사람을 낮고 높은 형벌에 처하게 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은 3가지의 사형법을 말하고 있었는데 어느 것이나 위의 방법보다 더 악한 것이었다. ① 교수형은 재판에 의해 부과되었다. ② 돌로 치는 형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의해, ③ 화형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용되었고,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에서”집행되었다. 그러므로 성급한 분노와 비난할 만한 말은 저주스러운 죄임을 말해 준다. 그러나 어떤 것은 다른 것들 보다 더 죄스럽다. 따라서 더 큰 정죄와 그들을 위해 예비 된 쓰라린 형벌이 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가장 두려운 형벌이 무엇인가를 보여줌으로써 가장 사악한 죄가 어느 것인지를 보여 주고 있다. Ⅳ. 이상의 모든 사실에 미루어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추론되고 있다 즉 우리는 조심스럽게 우리의 모든 형제들과 더불어 기독자의 사랑과 화평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며, 만일 이것을 범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일의 본질에 따라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그의 용서를 빌며 배상을 하고 말이나 행위로 잘못 행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두 가지 이유에서 급히 행해야 한다. 1. 왜냐하면 이 일이 행해지지 않으면 거룩한 의식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23, 24절). 여기서 가정된 경우는, “너의 형제가 너를 대적하여 실제로나 그의 판단에 네가 그를 손상시키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네가 피해를 입은 당사자라면 제물 드리는 것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남을 거스렸다면 속히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를 용서하고(막 11:25), 그 손상을 용서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다툼이 네 편에서 시작되었다면 또한 잘못이 먼저나 후에나 너에게 있었다면, 그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너”와 싸웠다면 “네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다시 말하면 기도와 찬양, 말씀을 청종하는 것, 예식 등에서 엄숙히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가서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

(1) 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실행에 착수하고 있을 때 진지한 반성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다. “우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릴 때”는 기억되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 우리가 이전에 “형제를 거스린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되고 싶어지며 따라서 자신을 문책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종교적인 행위는 우리가 분노 가운데 이를 행하였다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기와 악의, 무정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죄악이므로 그들이 탁월하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그 어느 것도 그를 기쁘시게 할 수는 없다.(딤전 2:8), 분노 중에 드리는 기도는 쓰디쓴 것이다(사 1:15; 58:4).

(3) 사랑과 자비는 “모든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보다 더 나으므로” 하나님은 예물이 드려지기 전에 죄를 지은 형제와 화목하실 것이다. 우리가 범죄 아래 있고 다투는 데 분주하면,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오히려 그대로 두기를 좋아하시는 것이다.

(4) 비록 우리가 형제와 계속적인 다툼에 의해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는 데 합당치 않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의무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데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라. 그렇지 않으면 간 후에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는 시험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그들이 교회나 집회에 오지 못하는 이유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이웃과 불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의 허물인가? 왜냐하면 이 일이 행해지지 않으면 거룩한 의식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23, 24절). 여기서 가정된 경우는, “너의 형제가 너를 대적하여 실제로나 그의 판단에 네가 그를 손상시키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네가 피해를 입은 당사자라면 제물 드리는 것을 연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남을 거스렸다면 속히 그 일을 해야 한다. 그를 용서하고(막 11:25), 그 손상을 용서하는 것 이외에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그러나 만일 다툼이 네 편에서 시작되었다면 또한 잘못이 먼저나 후에나 너에게 있었다면, 그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너”와 싸웠다면 “네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다시 말하면 기도와 찬양, 말씀을 청종하는 것, 예식 등에서 엄숙히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가서 형제와 화목해야 한다.”우리가 어떤 종교적인 실행에 착수하고 있을 때 진지한 반성과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 좋다. “우리가 제단에 예물을 드릴 때”는 기억되어야 할 많은 일들이 있다. 우리가 이전에 “형제를 거스린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되고 싶어지며 따라서 자신을 문책하게 되기 때문이다.종교적인 행위는 우리가 분노 가운데 이를 행하였다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시기와 악의, 무정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죄악이므로 그들이 탁월하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그 어느 것도 그를 기쁘시게 할 수는 없다.(딤전 2:8), 분노 중에 드리는 기도는 쓰디쓴 것이다(사 1:15; 58:4).사랑과 자비는 “모든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보다 더 나으므로” 하나님은 예물이 드려지기 전에 죄를 지은 형제와 화목하실 것이다. 우리가 범죄 아래 있고 다투는 데 분주하면, 하나님은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오히려 그대로 두기를 좋아하시는 것이다.비록 우리가 형제와 계속적인 다툼에 의해 하나님과 교제를 가지는 데 합당치 않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의무를 생략하거나 무시하는 데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예물을 제단 앞에 두라. 그렇지 않으면 간 후에 다시 돌아오지 않으려는 시험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그들이 교회나 집회에 오지 못하는 이유로 삼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이웃과 불화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구의 허물인가? 어떤 죄가 다른 죄를 결코 변명할 수 없다. 오히려 그 범죄를 이중으로 만들 것이다. 자비의 결핍은 경건의 결핍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어려움은 쉽게 잊혀질 수 있다(극복될 수 있다).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들을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사화를 해야 하며,. 최소한 다정히 대해야 하며, 우정을 새롭게 하려고 원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잘못이 아니다. “그리고 오라. 와서 네 예물을 드리라.” 그러면 그 예물이 받아들여질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낮 동안 태양으로 하여금 우리의 분노 위로 지도록 하지 말라”(역주:해가 질 때까지 노를 품지 말라는 뜻).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 전에 기도하러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안식일에는 우리의 분노 위로 태양이 떠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날은 기도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2. 왜냐하면 이 일이 행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더 어려운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25, 26절). 우리가 화합을 위해 서둘러 행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

(1) 현세적인 이유에서, 만일 우리가 형제의 몸이나 물건, 명성에 있어서 그를 손상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그 형제가 이러한 손해들을 보상시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유발시킨다고 한다면 겸손한 순종과 올바르고 화평스러운 배상에 의해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우리 가족에 대한 의무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법으로 그것을 도로 찾을 것이요 종내 우리를 감옥에로 집어넣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타협하고 사화하는 것이 계속 버티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법과 다투는 것은 무익하며, 그것에 의해 짓구겨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재산과 직위를 잃는 것은 맨 처음에 약간 숙임으로써 화평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자기의 허물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보증할 경우에 솔로몬이 충고한 것을 보면,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라”(잠 6:1-5). 왜냐하면 이 일이 행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더 어려운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25, 26절). 우리가 화합을 위해 서둘러 행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현세적인 이유에서, 만일 우리가 형제의 몸이나 물건, 명성에 있어서 그를 손상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그 형제가 이러한 손해들을 보상시키기 위해 어떤 행동을 유발시킨다고 한다면 겸손한 순종과 올바르고 화평스러운 배상에 의해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우리 가족에 대한 의무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법으로 그것을 도로 찾을 것이요 종내 우리를 감옥에로 집어넣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타협하고 사화하는 것이 계속 버티는 것보다 낫다. 왜냐하면 법과 다투는 것은 무익하며, 그것에 의해 짓구겨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재산과 직위를 잃는 것은 맨 처음에 약간 숙임으로써 화평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을, 끝까지 자기의 허물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보증할 경우에 솔로몬이 충고한 것을 보면, “너는 곧 가서 겸손히 네 이웃에게 간구하여 스스로 구원하라”(잠 6:1-5). 타협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율법은 희생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만 우리의 이익을 방해하는 자들에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공의를 행해야만 한다. “타협하라. 그리고 너의 원수와 급히 사과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네 자신의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격노하게 되며, 끝까지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 할 것이며, 그가 맨 처음에 완화(감소)시키려 했던 계획을 취소할 것이기 때문이다.” 감옥은 그들 자신의 교만이나 방탕, 그들 자신의 고집이나 어리석음에 의해 투옥된 자들에게 불편한 장소이다.

(2) 영적인 이유에서, “가라, 그리고 네 형제와 화목하라. 그에게 공평 정대하게 대하라. 그와 친숙하라. 왜냐하면 다툼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네 예물을 제단에 가져오는 것이 적합치 않고 주님의 상으로 나아오는 것이 합당치 않은 것처럼, 죽기에도 적합지 않다. 만일 네가 죄 가운데 계속 생활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갑자기 채어감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 그의 심판을 너는 피하거나 제외시킬 수 없다. 만일 그 불법이 네 책임이 된다면 영원히 틀리게(망하게) 되는 것이다.” 지옥은 악의와 무자비 가운데 살다 죽은자들과 “당을 짓는 자”(롬 2:8)들을 위한 감옥이다. 그 감옥에서 구출되거나 도피할 수는 영원히 없다. 영적인 이유에서, “가라, 그리고 네 형제와 화목하라. 그에게 공평 정대하게 대하라. 그와 친숙하라. 왜냐하면 다툼이 계속되는 경우에는, 네 예물을 제단에 가져오는 것이 적합치 않고 주님의 상으로 나아오는 것이 합당치 않은 것처럼, 죽기에도 적합지 않다. 만일 네가 죄 가운데 계속 생활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갑자기 채어감을 당할 위험성이 있다. 그의 심판을 너는 피하거나 제외시킬 수 없다. 만일 그 불법이 네 책임이 된다면 영원히 틀리게(망하게) 되는 것이다.” 지옥은 악의와 무자비 가운데 살다 죽은자들과 “당을 짓는 자”(롬 2:8)들을 위한 감옥이다. 그 감옥에서 구출되거나 도피할 수는 영원히 없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는 큰 임무에 적용될 수 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위대하신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대적자(Avntidikoj-율법 대적자)이다. 그는 그들과 분쟁하셨고 거스리는 행동을 하셨다.

[2] 우리가 “화평을 이루도록” 그와 “타협하는 것,” 즉 그와 친분을 맺는 것은 우리가 할 중대한 일이다(욥 22:21; 고후 5:20).

[3] “우리가 길에 있을 때 급히” 이 일을 하는 것은 지혜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즉 “우리가 길에 있을 때”이 일을 행해야 한다. 죽은 후에는 너무 늦어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하기 전에는 네 눈을 감고 졸지 말아야 한다.

[4] 하나님과 적대의 상태에서 계속 머무는 자는 그의 공의의 구류와 그의 분노의 무서운 소송에 계속적으로 처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심판자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그에게 넘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위탁되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거절한 자는 심판자에게서 피할 수 없다(계 6:16, 17). 어린양이 사자가 될 때 이와 같이 주 예수께 인계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천사들은 관리자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죄인들을 넘겨 줄 것이다.(마 13:41, 42). 마귀들도 그와 같은 일을 하며, 모든 불신자에게 대한 집행자로서 ”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히 2:14). 지옥은 하나님과 적대 행위를 계속하는 자가 던짐을 받게 될 감옥이다(벧후 2:4).

[5] 저주받은 죄인들은 영원히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들은 호리라도 남김 없이 다 갚기 전에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영원토록 그대로 있지도 않을 것이다. 신적 공의는 결코 만족된 적이 없지만 앞으로 영원히 만족될 것이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모든 죄인들에게 대적자(Avntidikoj-율법 대적자)이다. 그는 그들과 분쟁하셨고 거스리는 행동을 하셨다.우리가 “화평을 이루도록” 그와 “타협하는 것,” 즉 그와 친분을 맺는 것은 우리가 할 중대한 일이다(욥 22:21; 고후 5:20).”우리가 길에 있을 때 급히” 이 일을 하는 것은 지혜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즉 “우리가 길에 있을 때”이 일을 행해야 한다. 죽은 후에는 너무 늦어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행하기 전에는 네 눈을 감고 졸지 말아야 한다.하나님과 적대의 상태에서 계속 머무는 자는 그의 공의의 구류와 그의 분노의 무서운 소송에 계속적으로 처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심판자이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은 그에게 넘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심판은 아들에게 위탁되기” 때문이다. 구세주를 거절한 자는 심판자에게서 피할 수 없다(계 6:16, 17). 어린양이 사자가 될 때 이와 같이 주 예수께 인계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천사들은 관리자이며,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죄인들을 넘겨 줄 것이다.(마 13:41, 42). 마귀들도 그와 같은 일을 하며, 모든 불신자에게 대한 집행자로서 ” 죽음의 권세”를 가지고 있다(히 2:14). 지옥은 하나님과 적대 행위를 계속하는 자가 던짐을 받게 될 감옥이다(벧후 2:4).저주받은 죄인들은 영원히 거기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들은 호리라도 남김 없이 다 갚기 전에는 떠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영원토록 그대로 있지도 않을 것이다. 신적 공의는 결코 만족된 적이 없지만 앞으로 영원히 만족될 것이다.

5:27 간음, 이혼에 대하여 (마태복음 5:27-32) 여기에는 율법을 제정한 동일한 손(hand)에 의해 주어진 제7계명에 대한 해석이 있다. 따라서 이것은 가장 적절한 해석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전자에 뒤따르는 부정(不貞)에 대한 율법이다. “전자”가 죄악된 열정에 대한 금지 사항이라면, “후자”는 죄악된 욕망에 대한 금지 사항이다. 둘 다 언제나 이성과 양심의 지배 아래에 있어야만 하며, 만일 이에 빠질 때는 치명적이 된다. Ⅰ. 여기에 규정된 계명은 “간음치 말라”는 것이다(17절). 여기에는 불결한 모든 행동과 그 욕망에 대한 금지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계명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의 해석을 하기를, 이것은 간음의 행동 이상으로 확대시킬 수 없다(간음을 직접 행한 그 행동만을 간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또한 “불법이 마음에만 관계되고” 그 이상은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것을 유의하시지 않으시며 중시하시지도 않는다(시 66:18)고 추측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은 “간음자가 아니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눅 18:11). Ⅱ. 여기에서는 3가지 일들에서 이 계명의 엄격성이 설명되어 있다. 이것은 언제나 장로들의 유전에 의해 지배되었거나 그들이 가르쳤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명령(신탁)으로 여겼던 자들에게는 새롭고도 낯선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1. 여기에서는 “마음의 간음,” 즉 간음의 행동으로는 진행되지 않았던 음란한 생각이나 성벽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영혼에게 끼치는 불결(이것은 여기에서 매우 분명히 강조되고 있다)은 제7계명에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로 옷을 빨거나 옷을 씻었던” 율법 하의 많은 결례(역주:청결하게 하는 의식)에 내포되고 의도되어 있을 것이다. “여자(여기의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모든 여자가 여기에 포함됨)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절). 이 계명은 간음의 행동을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 그들에 대한 모든 욕망, 금지된 대상을 열망하는 모든 것을 금하고 있다. “욕심”(약 1:15)은 죄의 시초이며, 죄를 향한 잘못된 발걸음이다. 사소한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장성하면 죄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욕심을 지닌 마음이 행동하는 것이 곧 죄이다. 죄를 짓는 것은 형편이 좋은 기회가 그 결정적인 촉매제가 된다. “정신이 타락된다”(Adultera mens est─Ovid). 정욕은 좌절되거나 치우친 양심이다. 치우친 양심이란 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며, 좌절된 양심은 그것이 말하는 것에 설득되지 않는 것이다.

(2) 그것들을 향한 모든 접근들을 금하고 있다. 즉 금지된 열매에 대한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내가 색정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 목적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내가 색정을 일으킬 때까지 바라보거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바라보는 것을 금하고 있다. 눈은 이 종류의 많은 사악의 입구와 출구이다. 요셉의 여주인(창 39:7), 삼손(삿 16:1), 다윗(삼하 11:2)이 증거 한다. “음식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벧후 2:14)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는 “마음의 간음,” 즉 간음의 행동으로는 진행되지 않았던 음란한 생각이나 성벽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아마 이러한 것들이 영혼에게 끼치는 불결(이것은 여기에서 매우 분명히 강조되고 있다)은 제7계명에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물로 옷을 빨거나 옷을 씻었던” 율법 하의 많은 결례(역주:청결하게 하는 의식)에 내포되고 의도되어 있을 것이다. “여자(여기의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모든 여자가 여기에 포함됨)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8절). 이 계명은 간음의 행동을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그들에 대한 모든 욕망, 금지된 대상을 열망하는 모든 것을 금하고 있다. “욕심”(약 1:15)은 죄의 시초이며, 죄를 향한 잘못된 발걸음이다. 사소한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이것이 장성하면 죄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욕심을 지닌 마음이 행동하는 것이 곧 죄이다. 죄를 짓는 것은 형편이 좋은 기회가 그 결정적인 촉매제가 된다. “정신이 타락된다”(Adultera mens est─Ovid). 정욕은 좌절되거나 치우친 양심이다. 치우친 양심이란 죄에 대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이며, 좌절된 양심은 그것이 말하는 것에 설득되지 않는 것이다.그것들을 향한 모든 접근들을 금하고 있다. 즉 금지된 열매에 대한 안목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을 금하고 있다. 내가 색정을 일으킬 수 있도록 그 목적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내가 색정을 일으킬 때까지 바라보거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바라보는 것을 금하고 있다. 눈은 이 종류의 많은 사악의 입구와 출구이다. 요셉의 여주인(창 39:7), 삼손(삿 16:1), 다윗(삼하 11:2)이 증거 한다. “음식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벧후 2:14)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는 눈꺼풀을 왜 가지고 있는가? 부패한 것에 눈을 돌리지 않거나 그 더러운 인상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역시 정욕을 일으키는 그 밖의 감각들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과실을 유혹에 찬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금지되었다면 하물며 불결한 대화나 음탕한 희롱, 이 지옥불의 연료와 풀무가 어찌 금지되지 않으랴! 이 규례들은 청결한 마음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다(8절). 또한 만일 보는 것이 욕망이 된다면 남에게 보이려고 하거나 색욕을 일으키게 할 목적으로 몸을 치장하고 장식하며 남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이것은 마치 이세벨과 같은데, 그녀는 “눈은 그리고 머리를 꾸미고 창으로 내다보았다.” 왕하 9:30)도 역시 범죄이다. 범죄하는 것은 사람이지만 범죄를 하도록 유혹하는 것은 마귀이다. 2. 이렇게 보는 것이나 희롱하는 것은 영혼에 대해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이므로 범죄하여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보다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눈과 손을 잃는 것이 더 낫다. 이 교훈에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다(29, 30절). 타락한 본성은 이 말씀에 의해 지배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마음의 간음을 금지하는 사항에 대해 곧 반대를 제기할 것이다. 즉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지킬 수 있겠느냐? 혈과 육은 쾌감을 가지고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대상에 대한 정욕과 희롱하고픈 마음을 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이러한 구실은 이성으로는 제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물리쳐야 하며, 바로 이런 식으로 여기서 논박되고 있는 것이다.

(1) 여기에는 육적인 정욕을 금지시키기 위해 가혹한 시행이 서술되어 있다. 금지된 대상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또는 “실족하게 만든다면,” 음란한 희롱에 의해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또는 “실족하게 만든다면” 위에서 구실을 붙인 것처럼 눈과 손을 지배하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하다면 또한 이러한 사악한 행위에 매우 익숙해졌으므로 그것들을 억제할 수 없다면, 만일 그것들을 억제시킬 다른 방법이 없다면(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의 은혜를 통하여 억제시키는 방법이 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영혼을 파멸시키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차라리 보다 영예스럽고 유용한 “오른 눈”과 “오른 손”이라도 할지라도 “그 눈을 빼고,” “그 손을 짜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이것도 복종해야 한다면─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우리는 “몸을 제어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그만큼 더 단호한 결심을 해야 될 것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나 희롱하는 것은 영혼에 대해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이므로 범죄하여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하는 것보다 이러한 범죄를 저지르게 하는 눈과 손을 잃는 것이 더 낫다. 이 교훈에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다(29, 30절). 타락한 본성은 이 말씀에 의해 지배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마음의 간음을 금지하는 사항에 대해 곧 반대를 제기할 것이다. 즉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지킬 수 있겠느냐? 혈과 육은 쾌감을 가지고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런 대상에 대한 정욕과 희롱하고픈 마음을 금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이러한 구실은 이성으로는 제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물리쳐야 하며, 바로 이런 식으로 여기서 논박되고 있는 것이다.여기에는 육적인 정욕을 금지시키기 위해 가혹한 시행이 서술되어 있다. 금지된 대상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또는 “실족하게 만든다면,” 음란한 희롱에 의해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또는 “실족하게 만든다면” 위에서 구실을 붙인 것처럼 눈과 손을 지배하는 것이 참으로 불가능하다면 또한 이러한 사악한 행위에 매우 익숙해졌으므로 그것들을 억제할 수 없다면, 만일 그것들을 억제시킬 다른 방법이 없다면(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의 은혜를 통하여 억제시키는 방법이 있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영혼을 파멸시키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보다 차라리 보다 영예스럽고 유용한 “오른 눈”과 “오른 손”이라도 할지라도 “그 눈을 빼고,” “그 손을 짜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또한 만일 이것도 복종해야 한다면─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우리는 “몸을 제어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그만큼 더 단호한 결심을 해야 될 것이다. “오른 손을 찍어버리거나 오른 눈을 빼어버리는 것”은 다음과 같다. 즉 금욕이나 자기 부정의 생활을 하는 것, 우리 자신의 마음을 끊임없이 살피거나 정욕이나 타락의 마음이 처음 솟아오를 때 이를 단호히 억누르는 것, 죄의 기회를 피하는 것, 그것의 시초에 억제하는 것, 비록 이전에는 매우 즐거웠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 덫이 될 자들의 사귐을 정중히 거절하는 것, 우리가 그것들이 우리에게 대한 시험임을 알 때 해치는 길에서 벗어나, 정당한 방법을 사용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 하나님께 그의 은혜를 구하고 매일과 같이 그 은혜에 의존하는 것,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채우지 않도록 “성령 안에서 걷는 것,” 이러한 것들이 “오른 손을 찍어 버리거나 오른 눈을 빼어 내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마도 이것들은 혈과 육에는 매우 거슬리는 것일 것이다. 이것은 또 옛 사람의 파멸을 말한다.

(2) 이런 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논법은 아주 놀라운 것이다(29절). 또한 그것은 동일한 말로 반복되고 있다(30절).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귀에 거슬리는 일들은 듣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사 30:10). 비록 그것이 가장 귀중한 눈이나 손이든지 “네 지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복음의 사역자가 지옥과 저주에 대해 전파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아니, 그는 마땅히 그것을 “전파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그것을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장차 임박할 진노”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뢰에 신실치 못한 것이 된다.

[2] “두려워함으로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죄들이 있다. 특별히 “육적인 정욕”이 그러한 것인데, 이는 “천성이 야수적인 짐승들”을 저지할 수는 없지만 놀라게 함으로 저지할 수 있는 것처럼 또한 금지된 나무(선악과)에서 자신을 지킬 수는 없지만 “화염검”(그룹)으로 지킬 수 있는 것과 같다.

[3]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정하거나” 또는 “육적인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려는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유황불이 타는 불 못”에 영원히 있게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자들은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알거나 믿지 않는 자들이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비열하고 야수적인 욕망의 만족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불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되기를 자초하려고 할 것이다.

[4] 지옥에는 육체에 대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온 몸이 지옥에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요,” 온몸의 각 부분에 고통이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한 어떤 돌보심(치료)을 가진다면 그것은 “불결한 정욕에서가 아닌, 성화와 영예에서”일 것이다.

[5] 혈과 육에 대해 가장 불쾌한 그러한 의무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유익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가 우리의 이익이 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으신다.

3. 남자가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거나, 간음이 아닌 어떤 이유 때문에 이혼하는 것(유대인 가운데서는 묵인되고 실행되었다)은 간음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 같이 제7계명을 범하는 것이다(31, 32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

(1) 이 사실은 이제 이혼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또 일렀으되”[그는 앞에서와 같이 “옛 사람에게 말한바”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러한 것들처럼 규례는 아니었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이해하기를 원했던 것으로서(마 19:7) 단지 허락에 불과하였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다.” 즉 그가 격노할 때에 나온 말로 이혼을 한다고 생각지 말라. 증인의 입회하에 법적인 증빙에 의해 심사숙고하여 그것을 하도록 하라.” 만일 그가 부부의 결속을 취소한다면 그것을 엄숙히 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율법은 성급하고 경솔한 이혼을 금하고 있다. 아마 맨 처음 기록문서가 유대인 가운데서 그렇게 일반적이 아니었을 때 이혼은 아주 드물게 행해진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것은 매우 일반화되어 버렸고, 이혼에 대한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러한 지시가 어떤 이유에서는 그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마 19:3).

(2) 이 사실은 우리 주님에 의해 어떻게 수정되고 고쳐졌는가? 그는 결혼에 대한 규례를 그 원래적인 제정에까지 소급시키고 있다. “그들 둘은 한 몸이 될지니라.” 즉 쉽게 떨어지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이혼은 결혼 계약을 깨뜨린 간음의 경우 외에는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는 자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한 그녀가 이와 같이 이혼되었을 때 그녀와 결혼하게 될 자에게도 간음케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거나 그들을 그 안에 남겨 두는 자들, 또는 그들을 그것에 접하게 하는 자는 그들로 하여금 범죄케 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시 50:18).

이런 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논법은 아주 놀라운 것이다(29절). 또한 그것은 동일한 말로 반복되고 있다(30절). 왜냐하면 우리는 이러한 귀에 거슬리는 일들은 듣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사 30:10). 비록 그것이 가장 귀중한 눈이나 손이든지 “네 지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복음의 사역자가 지옥과 저주에 대해 전파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아니, 그는 마땅히 그것을 “전파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자신이 그것을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장차 임박할 진노”에 대해 경고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뢰에 신실치 못한 것이 된다.”두려워함으로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죄들이 있다. 특별히 “육적인 정욕”이 그러한 것인데, 이는 “천성이 야수적인 짐승들”을 저지할 수는 없지만 놀라게 함으로 저지할 수 있는 것처럼 또한 금지된 나무(선악과)에서 자신을 지킬 수는 없지만 “화염검”(그룹)으로 지킬 수 있는 것과 같다.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정하거나” 또는 “육적인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려는 시험을 받을 때 우리는 “유황불이 타는 불 못”에 영원히 있게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를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자들은 지옥이 어떤 곳인가를 알거나 믿지 않는 자들이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비열하고 야수적인 욕망의 만족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불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되기를 자초하려고 할 것이다.지옥에는 육체에 대한 고통이 있을 것이다. “온 몸이 지옥에 던지움을 받게 될 것이요,” 온몸의 각 부분에 고통이 있게 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에 대한 어떤 돌보심(치료)을 가진다면 그것은 “불결한 정욕에서가 아닌, 성화와 영예에서”일 것이다.혈과 육에 대해 가장 불쾌한 그러한 의무들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유익한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가 우리의 이익이 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않으신다.남자가 싫어하기 때문에 자기의 아내와 이혼하거나, 간음이 아닌 어떤 이유 때문에 이혼하는 것(유대인 가운데서는 묵인되고 실행되었다)은 간음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 같이 제7계명을 범하는 것이다(31, 32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보자.이 사실은 이제 이혼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또 일렀으되”[그는 앞에서와 같이 “옛 사람에게 말한바”라고 말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러한 것들처럼 규례는 아니었고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이해하기를 원했던 것으로서(마 19:7) 단지 허락에 불과하였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다.” 즉 그가 격노할 때에 나온 말로 이혼을 한다고 생각지 말라. 증인의 입회하에 법적인 증빙에 의해 심사숙고하여 그것을 하도록 하라.” 만일 그가 부부의 결속을 취소한다면 그것을 엄숙히 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율법은 성급하고 경솔한 이혼을 금하고 있다. 아마 맨 처음 기록문서가 유대인 가운데서 그렇게 일반적이 아니었을 때 이혼은 아주 드물게 행해진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그것은 매우 일반화되어 버렸고, 이혼에 대한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러한 지시가 어떤 이유에서는 그것을 허락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마 19:3).이 사실은 우리 주님에 의해 어떻게 수정되고 고쳐졌는가? 그는 결혼에 대한 규례를 그 원래적인 제정에까지 소급시키고 있다. “그들 둘은 한 몸이 될지니라.” 즉 쉽게 떨어지지 말지니라. 그러므로 이혼은 결혼 계약을 깨뜨린 간음의 경우 외에는 허용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자기 아내를 내어버리는 자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한 그녀가 이와 같이 이혼되었을 때 그녀와 결혼하게 될 자에게도 간음케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범죄 하도록 시험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거나 그들을 그 안에 남겨 두는 자들, 또는 그들을 그것에 접하게 하는 자는 그들로 하여금 범죄케 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는” 유일한 길이다(시 50:18).

5:33 맹세에 대하여 (마태복음 5:33-37) 여기에는 제3계명에 대한 주석이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해야만 되는 계명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음으로써” 이 계명을 깨뜨리는 자가 자신을 결백하다고 주장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죄 없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 계명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Ⅰ. 거짓 맹세나 위증, 서약 위반 등이 금지되고 있음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33절). 이것은 옛 사람에게 말해진 것이며, 제3계명의 참된 의도와 의미이기도 하다. “너희는 하나님의 이름(우리가 맹세로 하는 것처럼)을 망령되거나 거짓으로 사용하거나 취하지 말라.” 그는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한다”(시 24:4)). 거짓 맹세는 하나님께 대한 불경건과 사람에 대한 불법의 혼란으로서,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신적 진노를 매우 받기 쉽도록 하는 것으로 직각(直覺)으로 (by the lignt of nature) 정죄 된 죄악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한 죄에 대해 필연적으로 임하기 때문에 맹세의 형태는 일반적으로 증오나 저주로 돌려졌다. 맹세는 마치 “하나님은 나에게 이러 이러하게 행하소서”라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하나님이여 나를 이렇게 도우소서”하는 것과 같다. 만일 내가 거짓으로 맹세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도움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따라서 민족들의 동의에 의해서,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저주를 가져온 셈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들의 거짓에 대한 증인으로 엄숙히 내세운다면, 필경 하나님은 그때 그들을 저주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의 다른 구절, 즉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민 30:2)가 첨가되어 있다.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1. 하나님이 당사자가 되는 약속, 즉 하나님과 맺은 맹세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김없이 보상되어야 한다(전 5:4, 5).

2. 우리의 형제와 맺은 약속으로서 하나님이 증인이 되며 우리의 진지성에 호소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를 목표로, 그를 인하여 “주께 지켜야”한다. 왜냐하면 맹세로 약속한 확증에 의해 우리는 주님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확증한 약속을 깨뜨린다면 우리는 사람에게만 “거짓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 된다. 하나님이 당사자가 되는 약속, 즉 하나님과 맺은 맹세를 의미한다. 이것은 어김없이 보상되어야 한다(전 5:4, 5).우리의 형제와 맺은 약속으로서 하나님이 증인이 되며 우리의 진지성에 호소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를 목표로, 그를 인하여 “주께 지켜야”한다. 왜냐하면 맹세로 약속한 확증에 의해 우리는 주님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확증한 약속을 깨뜨린다면 우리는 사람에게만 “거짓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것”이 된다. Ⅱ. 여기에 첨가된 것은, 이 계명이 거짓 맹세를 금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급하고 불필요한 모든 맹세를 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34절, 약 5:12 절과 비교하라). 모든 맹세가 다 죄악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맹세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예배의 일부분이 되며, 그 맹세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다(신 6:13; 10:20; 사 45:23; 렘 4:2 을 보라). 우리는 바울이 필요한 경우에 이와 같은 엄숙함으로 그가 말했던 것을 확증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고후 1:23). 우리는 의심스럽거나 불확실한 일의 진실성을 서약(맹세)함으로 확실한 일의 진실성을 다짐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거짓 맹세를 한다면 더 큰 지식이나 높은 법정에 탄원하며, 의로우신 재판장의 보복을 비는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향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당하게 맹세를 해야 할 때, 우리의 형제에 대해 공의를 베풀거나 자비를 행할 때, 국가와 관계될 때 행하는 맹세는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히 6:16)이 된다. 우리는 맹세함을 당할 수는 있지만 맹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분쟁을 조정 받을 수도 있고 또한 분쟁을 해결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안 된다.

2. 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경솔하고 불손하게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거룩하므로 항상 진지해야 하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위엄에 어리석은 호소를 하는 것은 매우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거룩한 일들 중의 하나에 대한 큰 모독이다. 그것은 구실이나 변명이 없는 죄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적의가 지배하는 사악한 마음의 표식이다. “주의 원수는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나이다.”

3.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다 더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약속의 맹세를 특별한 방법으로 피해야만 한다. 확증적인 맹세의 영향은 우리가 신실하게 그 진리와 그 모든 진리를 발견했을 때 즉시 끝난다. 그러나 약속의 맹세는 오랫동안 묶이며, 시험의 권세와 같이 기습에 의해 깨어지기 쉬우므로 큰 필요성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자주 맹세하는 것은 기독자의 위신과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기독자는 모름지기 자신들이 행하는 침착한 말이 그들의 엄숙한 맹세와 같이 성스러운 것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의 신용이 널리 인정되어야만 한다.

4. 우리는 어떠한 피조물로도 맹세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정중함(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때문에 이것으로 맹세하지 않고 “하늘이나 땅”등으로 맹세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여기에서 금하고 있으며(34절), 우리가 맹세할 수 있는 대상은 도무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만물들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여하간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으로 맹세하는 것이므로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말뚝에 놓여진 것은 피보물의 진리이다. 그것은 증거의 수단이 될 수는 없지만 “최고의 진리”(summum veturn)이신 하나님께는 그와 같이 간주된다.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도무지 맹세하지 말아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당하게 맹세를 해야 할 때, 우리의 형제에 대해 공의를 베풀거나 자비를 행할 때, 국가와 관계될 때 행하는 맹세는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히 6:16)이 된다. 우리는 맹세함을 당할 수는 있지만 맹세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분쟁을 조정 받을 수도 있고 또한 분쟁을 해결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을 위해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안 된다.우리는 일상 대화에서 경솔하고 불손하게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거룩하므로 항상 진지해야 하는 하늘의 영광스러운 위엄에 어리석은 호소를 하는 것은 매우 큰 죄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호와께 드리는” 거룩한 일들 중의 하나에 대한 큰 모독이다. 그것은 구실이나 변명이 없는 죄이며, 따라서 하나님께 대한 적의가 지배하는 사악한 마음의 표식이다. “주의 원수는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나이다.”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보다 더 특별히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약속의 맹세를 특별한 방법으로 피해야만 한다. 확증적인 맹세의 영향은 우리가 신실하게 그 진리와 그 모든 진리를 발견했을 때 즉시 끝난다. 그러나 약속의 맹세는 오랫동안 묶이며, 시험의 권세와 같이 기습에 의해 깨어지기 쉬우므로 큰 필요성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자주 맹세하는 것은 기독자의 위신과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기독자는 모름지기 자신들이 행하는 침착한 말이 그들의 엄숙한 맹세와 같이 성스러운 것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들의 신용이 널리 인정되어야만 한다.우리는 어떠한 피조물로도 맹세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정중함(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때문에 이것으로 맹세하지 않고 “하늘이나 땅”등으로 맹세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여기에서 금하고 있으며(34절), 우리가 맹세할 수 있는 대상은 도무지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대상들은 만물들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여하간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으로 맹세하는 것이므로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말뚝에 놓여진 것은 피보물의 진리이다. 그것은 증거의 수단이 될 수는 없지만 “최고의 진리”(summum veturn)이신 하나님께는 그와 같이 간주된다.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91) “하늘로도 말라.” “하늘이 있다는 사실이 확실한 것처럼 이것은 진리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곳에 거주하시며 보좌 위에 앉은 왕과 같이 특별한 방법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이것은 윗 세상의 분리할 수 없는 위엄이므로 너는 “하늘로 맹세할 수 없다.” 만일 하늘로 맹세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으로 맹세하는 것이 된다.

(2)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그는 이 아랫 세상의 활동들을 지배하신다. 그가 하늘을 다스리는 것처럼 땅을 지배하신다. 비록 그의 발 아래 있지만 땅은 그의 눈과 보호 아래 있으며, 그에게 속해있다(시 24:1). “땅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러므로 땅으로 맹세하는 것은 그 소유자로 맹세하는 것이다.

(3)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존경한 나머지, 맹세하는데 그곳보다 더 성스러운 곳을 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단지 땅의 일부분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 이외에 그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큰 임금의 성(시 48:2), 곧 하나님의 성”(시 46:4)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 성과 관계되어 있으며, 예루살렘으로 맹세할 때마다 하나님과 연관된다.

(4) “네 머리로도 말라.” 그것이 비록 네 가까이 있거나, 너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그것은 네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네 자신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네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만일 네가 머리로 맹세한다면 그것은 “네 머리의 생명,” 또한 그것을 “들어올리는 자”와 맹세하는 것이 된다(시 3:3).

5. 그러므로 모든 교제에 있어서 우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37절)로 대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일반적인 대화에서 우리가 확증할 때는 “옳다,” 그렇다라고만 말해야 한다. 확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두 번 중복해서 “옳다, 옳다,” 참으로 그렇다라고만 말해야 한다. “진실로 진실로”는 우리 주님의 “옳다, 옳다”였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부정할 때는 “아니라”고만 말하자. 부정을 반복해야만 할 때는 “아니라, 아니라”고 말하자. 우리의 신임이 알려진다면 그것이 신용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 또한 만일 그것이 의문시될 때 맹세나 저주함으로 우리가 말한 것을 강화하는 것은 이를 더욱 의심케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모독적인 맹세를 취소할 수 있는 자는 거짓말에 부심하지 않을 것이다.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그는 이 아랫 세상의 활동들을 지배하신다. 그가 하늘을 다스리는 것처럼 땅을 지배하신다. 비록 그의 발 아래 있지만 땅은 그의 눈과 보호 아래 있으며, 그에게 속해있다(시 24:1). “땅은 여호와의 것이다.” 그러므로 땅으로 맹세하는 것은 그 소유자로 맹세하는 것이다.”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존경한 나머지, 맹세하는데 그곳보다 더 성스러운 곳을 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은 단지 땅의 일부분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 이외에 그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큰 임금의 성(시 48:2), 곧 하나님의 성”(시 46:4)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 성과 관계되어 있으며, 예루살렘으로 맹세할 때마다 하나님과 연관된다.”네 머리로도 말라.” 그것이 비록 네 가까이 있거나, 너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그것은 네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만드셨고 그것의 모든 원동력과 힘을 조성하셨기 때문이다. 한편 네 자신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만들 수 없다. 그러므로 너는 “네 머리로 맹세”할 수 없다. 만일 네가 머리로 맹세한다면 그것은 “네 머리의 생명,” 또한 그것을 “들어올리는 자”와 맹세하는 것이 된다(시 3:3).그러므로 모든 교제에 있어서 우리는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37절)로 대답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일반적인 대화에서 우리가 확증할 때는 “옳다,” 그렇다라고만 말해야 한다. 확증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두 번 중복해서 “옳다, 옳다,” 참으로 그렇다라고만 말해야 한다. “진실로 진실로”는 우리 주님의 “옳다, 옳다”였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부정할 때는 “아니라”고만 말하자. 부정을 반복해야만 할 때는 “아니라, 아니라”고 말하자. 우리의 신임이 알려진다면 그것이 신용을 얻기에 충분할 것이다. 또한 만일 그것이 의문시될 때 맹세나 저주함으로 우리가 말한 것을 강화하는 것은 이를 더욱 의심케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모독적인 맹세를 취소할 수 있는 자는 거짓말에 부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현저하다. 비록 그것이 맹세의 불법 행위에 상당하지는 않지만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쫓아 나느니라.” 그것은 “악한 자(마귀)에게서 나온다” (ek tou Diabolou 고대 사본에는 이렇게 되어있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한 성품, 격정과 격렬, 마음속에 세력을 떨치는 허무와 성물(聖物)에 대한 멸시에서 비롯된다. 또한 그것은 사람들 안에 있는 사악함에서 비롯된다. “모든 사람들은 거짓말장이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을 내걸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를 불신하며 그들이 없이는 신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독자는 그들 종료의 신용을 위하여 악 그 자체를 피해야 할뿐만 아니라 “악으로 쫓아나는 것”이나 그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을 피해야 한다. 그것은 사악한 원인에서 비롯되는 사악한 일로 의심될 수 있을 것이다. 맹세란 의술이요, 미술이란 질병을 전제로 한다.

5:38 무저항에 대하여 (마태복음 5:38-42) 기 구절들에는 복수법이 해설되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폐지되고 있다. 이에 대해 살펴보면, Ⅰ. 남을 손상시켰을 때 “구약은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여기에서는 단지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로 되어있다. 이것은 이전에 이혼에 대한 명령에서 “또 일렀으되”나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라는 구절과 다르다. 이 계명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계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필요에 따라 이를 정당한 것으로 주장하였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동일한 구절이 출애굽기 21장 24절, 레위기 24장 20절, 신명기 19장 21절에 있다. 이 모든 구절들에서 보면 그런 일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고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롬 13:4)인 재판관들이 할 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한 손으로 남에게 손해를 주는 것에 두려움을 주고 또 다른 손으로 그들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손발을 끊어버리는 경우에 가하는 형벌에 관하여 유대의 재판장들에게 지시한 것이었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적절한 것보다 더 큰 형벌에 대해 주장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것은 “눈에는 생명, 이에는 손발”(역주:눈은 생명으로, 이는 손발)이 아니며 그 비율을 말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벌금은 돈으로 보상될 수 있다고 암시되어 있다(민 35:31). 왜냐하면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라”는 구절이 있는 것을 보면 “손발을 짜를 자들”을 위해 금전상의 이해가 허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동정심이 없었던 냉정한 어떤 유대인 교사들은 이러한 보복은 사사로이 그들 자신에 의해서도 시행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그들을 용서하거나 배상을 받아들이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로마 통치자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어 그들의 사법적인 법이 밑바닥에 떨어진 지금까지도 그들은 여전히 거칠거나 가혹하게 보였던 어떤 것에는 매우 열심이었다. 지금까지도 땅의 선하고 건전한 법을 따라 악행자의 두려움과 눌린 자의 변호를 위해 공의의 검을 사용하는 것은 통치자에게 대한 명령으로서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Ⅱ. 손상을 입혔을 경우에 “신약은 이에 대해 어떻게 교훈하고 있는가?” 그 자신이 할 일은 불평이나 투덜거리지 말고 자기에게 가해진 “손상을 용서하는” 것이며, 공적인 선에는 반드시 필요한 그것에 대한 형벌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계율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그의 멍에의 유순함과 일치된다. 1. 우리는 복수심에 불타서는 안 된다(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즉 너희에게 손상을 입히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악한 공격를 해오는 것에 대해 반항하는 것을 일반적이고도 명백하게 금지시키고 있다. 우리는 복수심에 불타서는 안 된다(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즉 너희에게 손상을 입히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여기에서는 우리에게 악한 공격를 해오는 것에 대해 반항하는 것을 일반적이고도 명백하게 금지시키고 있다. 이것은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에게 거스리는 것”(롬 13:2)을 금지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보호의 법이나 우리가 가족에 대한 배려를 폐지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의 안전에 꼭 필요하다면 “악을 피하거나” 그것에 “대항할 수”있다. 그러나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되며, 원한을 품거나 보복하거나 우리를 불친절하게 대하는 자들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들을 용서함으로써 초연해야 한다(잠 20:22; 24:29; 25:21, 22; 롬 12:17). 복수법은 사랑의 법과 일치되어야 한다. 만일 누가 우리를 상하게 한다면 이를 갚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의 진노하심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 때로는 대리자의 손을 통해 화평을 도모하는 일도 있다. 우리가 형제와 더불어 싸울 때 그가 먼저 시작했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잘못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툼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두 번째 타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손상을 입었을 때 그것은 우리가 그에게 타격을 가하는 정당한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용서함으로 우리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들임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3가지 일들에 대해 상술함으로써, 기독자가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자들과 다투지 말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굴복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1) “빰을 치는 것”은 내 몸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이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다시 말하면 칠 뿐만 아니라 모욕과 냉대를 하거든(고후 11:20), 만일 사람이 분노와 조소로 너를 학대한다면 “왼편도 돌려 대라.” 즉 “그 상해에 복수하는 대신에 다른 편을 준비하라.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참아라. 그가 하는 것처럼 지지 않고 되쏘아 붙이지 말라. 그를 대적하거나 거스리지 말라. 만일 공중의 화평을 위해 그가 행동을 삼가도록 서약시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것을 통치자(치안 판사)에게 맡겨라. 그러나 네 편에서는 그것을 지나가 버리거나 더 이상 유의하지 않는 것이 대개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 뼈가 뿌려지거나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면 그것을 용서하고 잊어 버려라. 만일 교만한 바보가 너를 나쁘게 생각하거나 비웃는다면 모든 현명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하여 너를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높게 생각하며 존경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자였으나 그의 뺨을 쳤던 자를 때리지 않았다”(미 5:1). “빰을 치는 것”은 내 몸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이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다시 말하면 칠 뿐만 아니라 모욕과 냉대를 하거든(고후 11:20), 만일 사람이 분노와 조소로 너를 학대한다면 “왼편도 돌려 대라.” 즉 “그 상해에 복수하는 대신에 다른 편을 준비하라. 그리고 그것을 끝까지 참아라. 그가 하는 것처럼 지지 않고 되쏘아 붙이지 말라. 그를 대적하거나 거스리지 말라. 만일 공중의 화평을 위해 그가 행동을 삼가도록 서약시키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그것을 통치자(치안 판사)에게 맡겨라. 그러나 네 편에서는 그것을 지나가 버리거나 더 이상 유의하지 않는 것이 대개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 것이다. 뼈가 뿌려지거나 큰 손상을 입지 않았다면 그것을 용서하고 잊어 버려라. 만일 교만한 바보가 너를 나쁘게 생각하거나 비웃는다면 모든 현명한 사람들은 그것을 인하여 너를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로 높게 생각하며 존경을 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심판자였으나 그의 뺨을 쳤던 자를 때리지 않았다”(미 5:1). 다른 사람이 나쁜 생각을 가지고 언젠가 우리에게 같은 모욕을 주었다면, 사실상 그것이 우리가 “다른 뺨을 내 돌리는 것”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으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말고, 우리가 할 일 계속 하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의 섭리에 맡기도록 하자. 하나의 피해를 복수하면 또 하나의 피해를 입게 될 경우라도, 그것을 용서하면 다른 또 하나의 피해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저항하면 더욱 격노할 자들도 혹 그들에게 순복해 주면 스스로 굴복하고 마는 자도 있다.(잠 25:22). 어쨌든 우리에 대한 보상은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으니, 그는 우리가 이렇게 꾸준히 견디는 수치를 영원한 영광으로 갚아 주신 것이다.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양심 때문에 또는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조용히 참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때문일 것이다.

(2) “속옷의 손실”은 내 재물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다.(40절). “속옷의 손실”은 내 재물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다.(40절). 그것은 어려운 경우이다. 큰 손상에 대해 법적인 소송이 행해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비록 재판관이 의롭고 신중하다고 할지라도 맹세나 서약에 아무런 도덕 관념이 없는 사악한 사람이 법적인 절차에 의해 등뒤로 속옷을 강제로 벗기는 일은 능하다. “그 일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전 5:8). 그러나 이 경우에는 보복의 방법에 의해 소송하기 위해 가는 것보다, 반소장(狀)을 나타내 보이는 것보다, 너희의 확실한 옳음을 변명하려고 끝까지 버티는 것보다, “네 겉옷까지도 그에게 주도록 하라.” 만일 그 사건이 우리의 가족들에게 두드러지게 손상을 입히지 않고 손실된 작은 것이라면 화평을 위해 그것에 순응하는 것이 좋다. “법적 소송에 의해 그것을 찾는 데 소비되는 것 보다 다른 겉옷을 사는 편이 더 비용이 적게 들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공정한 수단에 의해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그에게 그것을 넘겨주는 것이 더 낫다.”

(3) 억지로 오리를 가는 것은 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41절).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를 위해 심부름을 가게 하거든 또는 그를 시중하게 하거든, 그것을 꺼려하지 말고 그와 다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와 십리를 동행하라.” “내가 강제로 그것을 하도록 시킴을 받지 않았다면 그것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강요되는 것을 싫어한단 말이야”라고 말하지 말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니까”라고 말해야 한다. 네 자신의 교만과 보복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그를 섬기는 것이 더 낫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기를, 현자(賢者)의 제자들이나 법률을 연구하는 생도는 공공적인 사무를 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데는 다른 사람들처럼 왕의 관리들에 의해 제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자들로 하여금 이 특권을 주장하도록 하지 않았으며, 권세들을 거스리기 보다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기독자는 소송하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손상은 허용되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유의를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손상이 우리로 하여금 배상금을 요구케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좋은 목적을 위하거나 보복의 생각 없이 행해져야 한다. 비록 우리가 손해를 입히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을 정중하고 상냥하게 대해야 하며 또한 그들에게 순응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혈기와 육신은 이러한 모욕을 도저히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기억케 하라. 즉 “혈기와 육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할 것이라”고.

1. 우리는 자비롭고 관대해야만 한다(42절). 우리의 이웃을 헤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데까지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해야 한다.

(1) 우리는 주려고 해야 한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만일 네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가난한 자의 요구를 너에게 구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라.” 참된 자선의 대상이 나타난다면 즉시로 베풀어야 한다. “일곱 몫을 주어라. 또한 여덟 몫까지도 주어라.” 그러나 우리의 자선은 “공의(분별있게)로 행해져야 한다”(시 112:5). 그렇게 함으로써 꼭 받아야만 하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줄 것을 게으르고 무가치한 자에게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바, 곧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라는 말씀을 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에게 말해야 한다.

(2) 우리는 빌려주려고 해야 한다. 이것은 때로 주는 것만큼의 큰 자선이 된다. 단지 그들을 현재의 급박한 사정에서 구출해줄 뿐만 아니라 빌리는 자에게 배려와 산업과 정직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먹을 것이나 장사할 것을 위해 빌리려는 자에게서 돌이키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을 피하지 말라. 또한 그들을 떨쳐 버리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하지 말라. 또한 “빌리려는” 자에게 용이하게 접근하라. 비록 그가 수줍어하고 그의 처지를 알리거나 호의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Exorabor antequam rogor; honestis precibus occurram – 즉 너는 그의 필요와 요구를 알고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내가 탄원하기 전에 나는 이기게 될 것이다. 나는 합당한 간구를 기대할 것이다. Seneca, De Vita Beata). 이와 같이 선행에 앞장서는 것은 우리에게 합당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르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경청하시며, 또한 “그의 선(善)의 축복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이다.

억지로 오리를 가는 것은 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41절).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를 위해 심부름을 가게 하거든 또는 그를 시중하게 하거든, 그것을 꺼려하지 말고 그와 다투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와 십리를 동행하라.” “내가 강제로 그것을 하도록 시킴을 받지 않았다면 그것을 하려고 했는데 나는 강요되는 것을 싫어한단 말이야”라고 말하지 말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날 것이니까”라고 말해야 한다. 네 자신의 교만과 보복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것보다 그를 섬기는 것이 더 낫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기를, 현자(賢者)의 제자들이나 법률을 연구하는 생도는 공공적인 사무를 보기 위해 돌아다니는 데는 다른 사람들처럼 왕의 관리들에 의해 제자를 받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제자들로 하여금 이 특권을 주장하도록 하지 않았으며, 권세들을 거스리기 보다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라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기독자는 소송하는 것을 좋아해서는 안 된다. 사소한 손상은 허용되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유의를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 손상이 우리로 하여금 배상금을 요구케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좋은 목적을 위하거나 보복의 생각 없이 행해져야 한다. 비록 우리가 손해를 입히지 않았을지라도 그들을 정중하고 상냥하게 대해야 하며 또한 그들에게 순응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혈기와 육신은 이러한 모욕을 도저히 그대로 지나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기억케 하라. 즉 “혈기와 육신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물려받지 못할 것이라”고.우리는 자비롭고 관대해야만 한다(42절). 우리의 이웃을 헤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데까지 선행을 베풀려고 노력해야 한다.우리는 주려고 해야 한다.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라. 만일 네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가난한 자의 요구를 너에게 구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라.” 참된 자선의 대상이 나타난다면 즉시로 베풀어야 한다. “일곱 몫을 주어라. 또한 여덟 몫까지도 주어라.” 그러나 우리의 자선은 “공의(분별있게)로 행해져야 한다”(시 112:5). 그렇게 함으로써 꼭 받아야만 하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줄 것을 게으르고 무가치한 자에게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바, 곧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라는 말씀을 우리의 가난한 형제들에게 말해야 한다.우리는 빌려주려고 해야 한다. 이것은 때로 주는 것만큼의 큰 자선이 된다. 단지 그들을 현재의 급박한 사정에서 구출해줄 뿐만 아니라 빌리는 자에게 배려와 산업과 정직을 베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에게 먹을 것이나 장사할 것을 위해 빌리려는 자에게서 돌이키지 말라.” 다른 사람들이 너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을 피하지 말라. 또한 그들을 떨쳐 버리려고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려고 하지 말라. 또한 “빌리려는” 자에게 용이하게 접근하라. 비록 그가 수줍어하고 그의 처지를 알리거나 호의를 구하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Exorabor antequam rogor; honestis precibus occurram – 즉 너는 그의 필요와 요구를 알고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내가 탄원하기 전에 나는 이기게 될 것이다. 나는 합당한 간구를 기대할 것이다. Seneca, De Vita Beata). 이와 같이 선행에 앞장서는 것은 우리에게 합당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르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경청하시며, 또한 “그의 선(善)의 축복으로” 우리를 이끄시기 때문이다.

5:43 원수 사랑에 대하여 (마태복음 5:43-48) 여기에는 끝으로 둘째 돌비에 새겨진 가장 근본적인 법칙, 즉 율법의 완성이었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 대한 주석이 있다. Ⅰ. 여기에서 이 율법이 유대인 교사들에 의해 어떻게 와전되었는가를 살펴 보라(43절). 하나님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이웃”을 단지 그들 자신의 마을이나 국가, 종교에 소속된 자들만을 일컫는다고 이해하였다. 또한 그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친구로 여겼던 자들만을 “이웃”으로 알았다. 그러나 이것은 최악의 것은 아니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에서부터 그들은 하나님께서 결코 의도하시지 않았던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을 추론하려고 하였다. 또한 그들은 누구든지 자기들이 원하기만 하면 원수로 여겼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율법에는 그와 정반대로 나타나 있었지만(출 23:4, 5; 신 23:7)자신들의 유전에 의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계명을 공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너는 에돔인이나 애굽인을 미워하지 말라.” 비록 이 민족들이 어느 민족들에 못지 않게 이스라엘에게는 더욱 원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정하여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멸망시키려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들과 더불어 동맹을 맺지 말라고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렇게 해야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즉, 이스라엘을 위해 통로를 비우기 위한 것과 그들이 이러한 가나안 족속들에게 “유혹 당하지 않도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이 그들 자신의 원수들을 미워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추론하는 것은 매우 비뚤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방의 도덕적 철학은 이것을 허락하였다. Nemini nocere nisi prius lacesitum injuria, De Offic- 즉 이전에 손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누구도 손상하지 말 것은 시세로의 규범이다. 인간의 타락된 감정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지원을 받거나 “계명을 이용하는 데”에 얼마나 약삭 빠른가를 보라. Ⅱ. 이 계명은 다른 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가르치시는 주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얼마나 명백하게 되어져 있는가를 살펴보자. 즉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느니, 나 곧 큰 평화의 조성자, 총체적인 화목자가 되려고 왔고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라”(44절). 비록 사람이 이전에 나쁜 사람이고 또한 우리를 매우 멸시하는 태도로 대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종족과 동족에게 대한 사랑의 큰 빚을 면제할 수는 없다. 우리를 미워하고 저주하는 자에게 손상을 입히려는 경향을 가지나 적어도 선하게 대하려는 데는 매우 냉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의 근저에 있는 것은 뽑혀져야 하는 쓰라림의 뿌리이며, 은혜가 정복해야 할 타락한 성품의 찌꺼기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기독자들의 큰 의무이다. 우리는 공개적으로 사악하고 모독하는 자에게 만족감을 가질 수 없으며, 또한 우리가 사기적이라고 아는 자에게 신뢰감을 둘 수 없으며,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존경해야 하며 “모든 사람을 영예롭게” 해야 한다. 우리는 원수들에게까지도 즐거움으로 유의해야만 한다. 비록 그들이 우리의 원수들이라 할지라도 현명함과 선한 기질, 학식, 도덕적인 덕, 친절함, 신앙 고백으로 대해야 하며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동정심과 선의(善意)를 가져야 한다.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교훈 되고 있다. 1. 우리는 그들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한다. 즉 “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역주: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음). 우리가 그들에게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욕설을 정중하고 다정스러운 말로 대답해야만 하며, “욕설을 욕설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칭찬할 만한 것을 들어 칭찬해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해 모든 좋은 것을 말할 때 더 이상 어떤 것을 말하려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벧전 3:9 을 보라). 혀가 “친절의 법칙”인 자들은 그들에게 나쁜 말을 하는 자들에게 좋은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우리는 그들에게 좋은 일을 행해야 한다. “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라. 그리하면 그것이 좋은 말보다 더 나은 사랑의 증거가 될 것이다.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참된 친절함을 그들에게 베풀려고 하라. 또한 그들의 신체와 부귀, 이름, 가족들에 있어서 그것을 행하는 기회에 대해 즐거워하라. 특히 그들의 영혼에 대해 선행을 베풀라.” 대 주교 크랜머(Crammer)에 대해, 그를 친구로 만드는 방법은 그에게 나쁜 짓을 행하는 것이었다고 말해졌다. 그는 자기에게 불친절하였던 자들을 많이 도왔다.

3. 우리는 “그들의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가장 탁월한 성도들이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미움과 저주와 핍박을 받은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와 같이 취급을 받았다.

(2) 우리가 이러한 대우를 당할 때는 언제나 우리를 이와 같이 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계명과 그리스도의 모범에 일치함을 보여 주는 기회로 삼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 대한 사랑을 달리 입증할 수가 없다면, 우리는 이 방법을 아무런 겉치레 없이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본심을 속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과 그들이 우리를 거스리는 일 때문에 잘 안 되는 일이 없도록, 또한 우리와 화평하게 지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렇게 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플루타크(Plutarch)는 그의 저서 『라코니크 아포프테굼』에서 아리스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좋게 “말해야” 한다. 즉 “너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라”(역주: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음). 우리가 그들에게 말할 때 우리는 그들의 욕설을 정중하고 다정스러운 말로 대답해야만 하며, “욕설을 욕설로 대항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칭찬할 만한 것을 들어 칭찬해야 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해 모든 좋은 것을 말할 때 더 이상 어떤 것을 말하려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벧전 3:9 을 보라). 혀가 “친절의 법칙”인 자들은 그들에게 나쁜 말을 하는 자들에게 좋은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우리는 그들에게 좋은 일을 행해야 한다. “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라. 그리하면 그것이 좋은 말보다 더 나은 사랑의 증거가 될 것이다.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참된 친절함을 그들에게 베풀려고 하라. 또한 그들의 신체와 부귀, 이름, 가족들에 있어서 그것을 행하는 기회에 대해 즐거워하라. 특히 그들의 영혼에 대해 선행을 베풀라.” 대 주교 크랜머(Crammer)에 대해, 그를 친구로 만드는 방법은 그에게 나쁜 짓을 행하는 것이었다고 말해졌다. 그는 자기에게 불친절하였던 자들을 많이 도왔다.우리는 “그들의 위해 기도”해야만 한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가장 탁월한 성도들이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미움과 저주와 핍박을 받은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그와 같이 취급을 받았다.우리가 이러한 대우를 당할 때는 언제나 우리를 이와 같이 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우리가 계명과 그리스도의 모범에 일치함을 보여 주는 기회로 삼아야만 한다. 만일 우리가 그들에 대한 사랑을 달리 입증할 수가 없다면, 우리는 이 방법을 아무런 겉치레 없이 할 수 있으며 우리의 본심을 속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과 그들이 우리를 거스리는 일 때문에 잘 안 되는 일이 없도록, 또한 우리와 화평하게 지낸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렇게 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다. 플루타크(Plutarch)는 그의 저서 『라코니크 아포프테굼』에서 아리스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클레오메네스에게 “선한 왕이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기를, “친구에게는 선으로, 원수에게는 악으로 돌리는 것이다” (To.uj me.n fivlouj euvergetei/n to.uj de. evcqrouj kakw/j poiei/n). 그는 말하기를, “우리의 친구에게는 선을 베풀고 우리의 원수를 친구로 삼는 것” (To.uj mevn fi,louj euvergetei/n to.uj de. evcqrouj fi,louj poiei/n 은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이것은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을 올려놓는 것”이다. 이 “원수 사랑에 대한 명령”(이것은 매우 거칠게 들린다)을 시행하기 위해 두 가지 이유가 여기에 제시되어 있다. 우리가 그것을 해야만 하는 것은,

[1] 우리가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과 같게 되기” 위함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보다 나은 복사를 본받아 쓸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신다”(45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다음과 같다.

(1) “해와 비”는 세상에 대한 큰 축복이며,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빛을 비취는 “해”는 그의 것이며, 비는 그에 의해 내려진다. 그들은 진로를 따라서나 우연히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

(2) 공통적(일반적)인 자비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실예와 증거로 평가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은 이것들에서 그 자신이 인류(그들은 이러한 은혜가 없이는 매우 비천할 것이며, 전적으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가 될 것이다)의 세상에 인자스러운 은인이심을 보여 주시고 있다.

(3) 이러한 일반 섭리의 선물은 “악인”이나 “선인,” “불의한 자”나 “의로운 자”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것에 의해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알 수 없고, “우리 안에”있는 것에 의해 알 수 잇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머리 위에 태양이 비취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의(義)의 태양이 떠오르는 것에 의해 알 수 있다.

(4) 가장 악한 사람은 비록 그들이 그것들을 남용하고 그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지만 다른 사람들과 공통으로 이 세상의 위로에 참여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의 놀라운 본보기이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 해가 애굽인에게 비취는 것을 금하셨는데, 그 때에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만 빛이 비췸을 보았다.” 하나님은 매일 이러한 구분을 하실 수 있으셨다.

(5)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악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함의 선물은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베풀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특별히 생각한다면 비록 우리 안에는 하나님께 적의를 지닌 육적인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의 자비에 참여할 수 있다. (6) 그러한 자들만이 특별히 하나님, 특히 그의 선하심을 본받으려고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접될 것이다.

[2]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46, 47).

(1) “세리도 그들의 친구를 사랑한다.” 본성이 그들로 하여금 그것을 하게 한다. 관심이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지시한다. 우리들에게 선행을 하는 자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인간성의 공통적인 일부분이며, 그것은 유대인이 미워하거나 멸시하였던자들까지도 최고의 좋은 증거를 나타내 보일 수 있었다. 세리들은 좋은 평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위치에 자기들을

마태복음 5장 : 네이버 블로그

마태복음 5장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무리를 보시고. [산상 설교, 마 5:1~8:1눅 6:17~49. 주요 주석: 마태복음. 참조 예수의 생애와 봉사, 지도 5; 도표 7]. 이 “무리”는 예수가 갈릴리의 여러 성읍과 촌락을 다닌 첫 번째 주요 선교 여행 후에 그를 따른, 4:25에 나타난 “허다한 무리”임이 분명하다. 산상 설교는 아마도 3년 반 선교 봉사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AD 29년 늦여름경(산상보훈, 2, 45)에 행한 것이다. 누가는 분명히 산상 설교를 열두 제자의 임명과 안수에 결부시켜 생각하며(눅 6:12~20; 참조 산상보훈, 3, 4), 그 특별한 날에 있었던 사건들의 정확한 순서를 보존한다. (1) 기도로 밤을 보냄, (2) 열두 제자 안수, (3) 평지로 내려감, (4) 설교(참조 시대의 소망, 298). 그는 예수가 “산에 올라가(다시)”셨다는 사실에 대한 보도만을 생략하고 있는데(5:1), 이 생략 때문에 어떤 이들은 누가복음에 기록된 설교가 마태복음에 기록된 설교와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행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한편 마태는 열두 제자 임명과 안수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지만, 몇 개월 후 제3차 전도 여행 기사와 관련시켜 말한다(10:1~5). 그러나 마태는 예수를 따르던 무리에 대한 언급의 서론으로 갈릴리 호숫가에서 제자들을 부른 일을 먼저 언급한다(4:18~25). 예수가 어디를 가든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보살필 잘 훈련된 일꾼들이 필요하여 열두 제자를 임명했다는 것은 복음서의 여러 기사들을 볼 때 분명해진다.

열두 제자 임명은 곧 기독교 조직의 첫 번째 단계였다. 그리스도는 새로운 은혜의 왕국의 왕이었으며(참조 23절 주석), 열두 제자는 그 왕국의 설립 위원 또는 신하였다(참조 막 3:14 주석). 열두 제자가 그 왕국의 설립 위원이 되던 바로 그날 왕은 취임연설을 했으며, 취임사에서 그는 왕국 시민의 조건들을 공표하고 법률을 선포했으며 그것의 목적을 설명했다(참조 시대의 소망, 298; 산상보훈, 3, 4). 그러므로 산상 설교는 은혜의 왕국의 왕인 그리스도의 취임사이자 그 왕국의 헌법이다. 공식적인 왕국의 설립과 헌법 선포 직후에 제2차 갈릴리 여행이 시작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예수는 왕국과 그것의 원칙들 그리고 그 왕국의 능력이 백성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설명했다(참조 눅 7:1, 11 주석).

산에. 8:1과 비교하라. 이곳은 그가 기도로 지난 밤을 보내고, 이튿날 아침 산상 설교가 있기 조금 전에 열두 제자를 안수한 바로 그 산이었다(참조 시대의 소망, 290, 298,; 막 3:14 주석). 여기서 언급한 산은 어디를 말하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십자군 시대 이래, 고대 디베랴 바다 서쪽 8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쿠른 핫틴(Kurn Hatti^n) 즉 “핫틴의 뿔들”이 그 장소로 지적되어 왔으나, 그러한 전승은 십자군 시대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것이므로 신뢰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산상 설교를 했던 산을 “신약의 시내산”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내산이 유대 민족과 관계있는 것처럼, 이 산은 그리스도 교회와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율법을 반포한 곳은 시내산 위였다. 예수가 하나님의 율법을 다시 확인하고 그것의 참된 의미를 더 상세히 설명하고, 그 율법의 교훈을 일상생활의 문제들에 적용하여 해설했던 곳이 바로 이곳 갈릴리의 어느 이름 없는 산 위에서였다.

앉으시니. “자리를 잡고 앉으시니”라는 의미이다. 옛 풍습에 따라 예수가 가르치거나 말씀하실 때 평소처럼 앉았다고 진술한 것은 합당하다(참조 마 13:1; 24:3; 막 9:35; 눅 4:20 주석). 이것은 랍비들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선생은 가르치는 동안 앉아 있어야 했다. 어떻든 이 경우에는 무리들도 풀밭에 앉았다(시대의 소망, 298).

제자들이. 물론 여기에는 그날 아침 일찍 임명하고 안수했던 열두 제자가 포함된다(참조 막 3:13, 14 주석; 눅 6:12~19). 그들은 예수의 가장 친밀한 동료로서, 그의 중추 그룹(inner circle)을 이루었으며, 따라서 그들이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것은 당연했다. 그렇지만 그들 외에도 그를 따랐던, 제자로 알려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시대의 소망, 488; 참조 막 3:13 주석). 또한 적어도 그의 선교 봉사 후기에 그를 수행하고 제자들의 필요를 보살펴 주었던 몇몇 여인들이 함께 있었다(눅 8:1~3; 참조 마 27:55). 열렬하고 경건한 이 여인들 가운데 몇 사람이 필시 거기에 참석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중의 대부분은 농부와 어부로 구성되어 있었다(시대의 소망, 299; 산상보훈, 39). 정탐꾼들도 그곳에 있었다(시대의 소망, 307; 산상보훈, 47; 참조 4:12 주석).

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입을 열어. 누가는 예수가 말씀을 시작할 때 “눈을 들었다”(눅 6:20)고 말한다. 마태와 누가가 보도한 대로 산상 설교와 그 주변 상황에 대한 두 기사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들이 동일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다. 유사성이 두 기사 가운데 나타난 외관상의 차이점을 훨씬 능가하며, 그 차이점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외관상의 차이일 뿐이다. 설교는 틀림없이 여기에 기록된 것보다 훨씬 길었을 것이며, 두 기자는 그 설교를 독자적으로 요약한다.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통해 포함된 특징들을 자신들의 개요에 따라 표현한다. 따라서 두 기사는 상호 배타적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보완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복음서 기자가 언급한 모든 사항들을 수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때 예수가 말씀한 것에 대하여 어느 한쪽만 제공하는 기사보다 훨씬 완벽한 기사를 갖게 된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 3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2를 참조하라.

산상 설교에 대한 마태의 기사는 실제적으로 누가의 기사보다 세 배나 길다. 이것은 누가보다는 마태가 예수의 가르침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특별한 지면을 할애했다는 사실에서 기인되었을 것이다. 누가는 서두에서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듯이(1:1~4) 주로 역사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있었다. 산상 설교에 대한 마태의 기사는 누가가 언급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누가도 마태가 생략한 사건들을 보도한다. 주된 유사점들은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에 언급된 것과 같은 산상 설교의 많은 다른 부분들이 누가복음 도처에 산재해 있는데, 그리스도가 똑같은 사상을 봉사 후기의 여러 경우에 되풀이했다. 참조 눅 6:17~49 주석.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그의 왕국의 본질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그는 또한 유대 지도자들이 백성들의 마음에 주입한 메시야의 왕국에 대한 그릇된 사상을 논박했다(산상보훈, 1; 참조 3:2; 4:17 주석). 산상 설교는 기독교의 특성과 그리스도 당시 유대주의의 특성을 현저하게 대조시켜 설명한다.

산상 설교의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각의 원칙을 개별적으로 이해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원칙이 전체와 갖는 관계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 강화(講話)는 일반 독자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는 전체적인 통일성으로 결합돼 있다. 아래 나타난 개요는 이러한 본질적인 통일성을 강조하고, 강화의 각양한 부분들이 전체적인 설교와 맺는 관계를 보여 준다.

산상 설교의 개요

천국 시민의 특권과 책임

1. 천국 시민의 목표, 품성의 완전, 5장.

(1) 천국 시민이 되는 법, 5:3~12.

(2) 천국의 원칙들에 대한 살아있는 표본으로서 천국 시민, 5:13~16.

(3) 천국에서의 행동 표준, 5:17~47.

(4) 천국 시민의 목표, 품성의 변화와 완전, 5:48.

2. 바른 삶의 동기와 모범적인 시민의 자격, 6장.

(1) 예배, 봉사 그리고 인간관계의 바른 동기, 6:1~18.

(2) 삶의 목적: 천국을 위한 계획과 생활, 6:19~24.

(3) 하나님께서는 천국을 먼저 구하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할 것임, 6:25~34.

3. 천국 시민의 특권과 책임, 7장.

(1) 황금률과 그것을 적용하는 능력,

7:1~12.

(2) 천국 시민의 시금석, 순종과 자기훈련, 7:13~23.

(3) 결단성 있게 행동하라는 부름.

7:24~27.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한 자. 헬라어 프토코스(pto-chos). “웅크리다”, “위축되다”를 의미하는 프탓소(ptasso-)에서 파생한 말로 극심한 가난을 지칭한다(참조 막 12:42; 눅 4:18; 6:20). 여기서 프토코스는 비참한 영적 가난에 처한 자들 그리고 천국이 공급해야 할 것들에 대해 필요를 예민하게 느끼는 자들을 가리킨다(참조 사 55:1 주석; 행 3:6). 자신의 영적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자들은 하늘에서 볼 때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한” 사람들이다(계 3:17). “심령이 가난한” 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밖의 모든 사람들은 하늘의 부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며, 따라서 하늘의 축복을 거절한다.

복이 있나니. 헬라어 마카리오이(makarioi). 단수는 마카리오스(makarios). “행복한”, “행운 있는”을 뜻함. 히브리어로는 아쉬레(’as∨re, 참조 시 1:1 주석). 아쉬레와 마카리오스는 때때로 “행복한”(happy)으로 번역되었지만(왕상 10:8; 시 127:5; 잠 29:18; 요 13:17; 행 26:2; 벧전 3:14), 「제임스왕역」에서는 일반적으로 모두 “복 있는”(blessed)으로 번역되었다. 현대 영어의 용법에서 “복 있는”이라는 단어는 의미상 헬라어 율로게토스(euloge-tos, 눅 1:68; 벧전 1:3 등)에 더 가깝다. 이것은 “칭찬하다”, “찬송하다”, “경의를 표하다”라는 뜻을 가진 어근 율로게오(eulogeo-)에서 파생되었다(마 5:44; 21:9; 26:26; 롬 12:14).

영어의 “지복”(至福, beatitude)이란 단어는 라틴어 베아티투도(beatitudo)에서 비롯되었다. 라틴어 「불가타역」에서 산상 설교의 첫 부분에 나타난 진술들은 각각 마카리오이에 해당하는 베아티(beati)로 시작한다.

마카리오스란 단어는 3~11절에 9번 나타난다. 그러나 10, 11절은 그리스도인 경험에서 같은 국면을 언급하며, 따라서 하나의 복으로 간주되어 구복보다는 팔복이 된다. 누가는 네 개의 복만 언급하는데(눅 6:20~23) 마태의 첫 번째, 네 번째, 두 번째 그리고 여덟 번째 복을 차례로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상응하는 네 개의 화를 첨가한다(24~26절).

산상 설교의 서두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있는 최고의 욕망, 곧 행복에 대해 연설한다. 이 욕망은 창조주가 친히 인간 속에 심었고, 본디 그것은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 협력을 통해 참 행복을 발견하도록 이끌기 위해 정해진 것이다. 인간이 행복을 최종 목적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순종을 무시하고 지름길로 그것을 달성하려고 꾀할 때 죄가 수반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의 왕으로서 그리스도는 취임 연설의 서두에서, 왕국의 주요 목적은 잃어버린 에덴의 행복을 인간의 마음에 회복하는 것이며, 따라서 “좁은” 문과 “협착”한 길로 들어가기를 선택한 자들(7:13, 14)이 참 행복을 찾을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들은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킬 때만 이르러오는 영혼의 참되고 영원한 만족, 곧 내적 평강과 기쁨을 발견할 것이다(빌 4:7). 그리스도가 아버지께로 갈 때 그는 바로 이 평안, 곧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요 14:27)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남겼다. 행복은 하나님(참조 롬 5:1)과 그들의 동료(참조 미 6:8)들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자들, 곧 사랑에 관한 위대한 두 계명을 좇아 행하는 자들의 마음에만 이르러 온다(참조 22:37~40). 이러한 생각과 마음의 성향은 오직 은혜의 왕국의 참된 백성들만 소유한다.

천국. 참조 마 4:17; 눅 4:19 주석. 그리스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미래에 있을 영광의 왕국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가르침 속에서 가라지, 겨자씨, 누룩, 그물의 비유(13:24, 31, 33, 47) 그리고 그밖의 많은 비유(참조 산상보훈, 8, 108)를 통해 예증한 것처럼, 종종 그의 주권을 받아들인 자들의 심령에 건설된 은혜의 왕국에 대해 다루었다. 유대인들은 천국을, 이 지상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는 힘에 기초한 왕국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와서 세운 왕국은 사람의 심령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삶에 침투하고, 역동적이고 강력한 사랑의 능력으로 다른 사람들의 심령과 삶으로 흘러 들어가는 왕국이었다.

저희 것. 자신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 들어가는 첫 번째 조건이다(참조 산상보훈, 7, 8). 비유 가운데서 세리가 “자기를 의롭다고 여긴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으로 내려 간 것”은 자신의 영적 필요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다(눅 18:9~14). 천국에는 교만한 자들, 자족하는 자들 그리고 자기를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을 위한 여지는 없다. 그리스도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난을 그의 은혜의 부요함으로 바꾸라고 명한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헬라어 펜쎄오(pentheo-). 이 단어는 좀 더 일반적으로 “슬퍼하다”를 뜻하는 뤼페오마이(lupeomai)와 대조적으로(마 14:9; 벧전 1:6), 강한 슬픔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자들”(참조 5:3 주석)의 깊은 영적 빈곤은 4절에 묘사된 사람들의 깊은 애통과 잘 조화된다. 사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만나는 불완전함 때문에 “애통하”게 되는 것은 영적 필요에 대한 깊은 의식에서 나온다(참조 산상보훈, 9; 시대의 소망, 300). 그리스도는 여기서 영적 가난 속에서 완전의 표준에 달하기를 열망하는 자들을 지칭하고 있다(참조 사 6:5; 롬 7:24). 또한 여기에 실망과 사별 혹은 또 다른 슬픔 때문에 애통해하는 자들을 위한 위로의 기별이 있다(참조 산상보훈, 10~12).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헬라어 파라칼레오(parakaleo-). “곁으로 부르다”, “도움을 청하다”, “불러들이다”, “부르러 보내다”를 뜻하며, 따라서 “권고하다”, “북돋우다”, “위문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를 의미한다. 변호를 위해 호출된 친구를 파라클레토스(parakle-tos, 보혜사)라고 하며, 그의 봉사를 파라클레시스(parakle-sis, 간구)라 한다. 요일 2:1에서 그리스도는 파라클레토스(대언자)로 불린다. 그가 떠날 때 “다른 보혜사”를 보낼 것을 약속했는데(참조 요 14:16 주석), 보혜사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 곧 영원한 친구로 우리와 함께 있을 성령을 뜻한다.

하나님은 영적 부족감을 하늘의 은혜의 부요함으로 채우는 것처럼(참조 3절 주석), 죄에 대한 애통함을 용서받은 죄의 위로로 충족시킨다. 먼저 부족함에 대한 느낌이 없다면 그 부족한 것(이 경우는 품성의 의)에 대한 애통함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애통은 자신을 천국 지원자로 소개하는 자들에게 이르러오는 두 번째 필요조건이며, 그것은 순서상 첫 번째 단계 이후에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헬라어 프라에이스(praeis). 단수는 프라우스(prau..s). “온화한”, “상냥한”, “온유한”을 뜻함.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해 “마음이 온유(프라우스)하고 겸손”하다고 말했다(11:29). 그리고 그가 그러한 분이기 때문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28절) 그에게 와서 영혼의 쉼을 얻을 수 있다. 프라우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나우(’anaw) 또는 아니(’ani)인데 “가난한”, “고통받는”, “겸손한”, “온유한”이란 의미다. 이 히브리어 단어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한 모세를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민 12:3). 그것은 또한 사 61:1~3의 메시야에 관한 구절에 나타나며(참조 5:3 주석), 시 37:11에도 “온유한”이란 말로 옮겨졌다.

온유는 성화의 길을 준비하는 마음과 정신과 삶의 태도이다. “온유한” 심령은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다(벧전 3:4). 종종 신약의 기자들은 온유를 그리스도인의 기본 덕목으로 언급한다(참조 갈 5:23; 딤전 6:11). 하나님을 향한 “온유”는 우리가 그분의 뜻과 선대하심을 받아들이고, 범사에 주저함 없이 그에게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산상보훈, 15).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완전히 통제한다. 우리의 첫 번째 부모는 자아를 높임으로 그들에게 위탁된 왕국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온유함을 통해 되찾을 수 있다(산상보훈, 17). 참조 미 6:8 주석.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시 37:11과 비교하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5:3)은 천국의 부를 얻을 것이며, “온유한 자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온유한 자들”이 현세에서는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고 오히려 교만한 자들이 그것을 얻는다. 그렇지만 적당한 때에 이 세상 왕국은 성도들, 곧 겸손의 미덕을 배운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다(참조 단 7:27). 그리스도는 스스로를 겸손하게 하는 자들, 즉 온유함을 체득한 자들이 결국 높임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참조 23:12 주석).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 헬라어 디카이오쉬네(dikaiosune-). 이 단어는 어근 디케(dike-)에서 파생되었으며 “관습”, “관례” 그리고 관례에 의해 결정된 “올바름”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약에서 천국의 원칙들에 의해 결정된 “올바름”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에 사용된 모든 용례에서(94번) “의”로 번역되었다. 헬라인들에게 “의”는 공인된 어떤 관례에 일치하는 데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유대인 전승에 해석된 율법의 요구 조건에 일치하는 문제였다(참조 갈 2:16~21).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의는 더 넓은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의를 확립하는 대신, “하나님의 의를 복종”(롬 10:3)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빌 3:9) 의를 추구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입혀 주고 나눠 주신 의다. 입혀 주는 의는 칭의를 나타낸다. 그러나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자는 은혜 안에서 성장한다. 그는 내주(內住)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예수가 친히 교훈과 모본으로 보여 준 대로 도덕적 율법의 요구에 일치시킨다. 이것이 곧 나눠 주신 의다(참조 실물교훈, 310~312). 이것은 그리스도가 청중들에게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을 생각하라고 권할 때 염두에 둔 것이었다(참조 5:48 주석). 바울은, 예수의 완전한 생애로 인해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롬 8:4).

주리고 목마른. 특별히 이 은유는 연평균 강우량이 66센티미터 이상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설득력이 있었다(참조 창 12:10 주석). 팔레스타인에 해당되는 사항은 일반적으로 근동의 넓은 지역에도 해당된다. 팔레스타인은 넓은 사막지역에 접해 있으며, 거주민이 많은 지역까지도 비가 적은 반건조성 지역이다. 지금 예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갈증의 고통을 경험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하갈과 이스마엘의 예증에서처럼, 길을 잃거나 도중에 몇 개 안 되는 샘 가운데서 하나를 놓친 여행자는 자신이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참조 창 21:14 주석).

그래서 예수는 심령의 주림과 목마름에 대하여 말했다(참조 시 42:1, 2). 음식의 결핍으로 굶주린 사람 또는 물의 부족으로 허덕이는 사람의 간절한 열망으로 의를 갈망하는 자들만이 그것을 얻을 것이다. 물질적 풍요든지, 심오한 철학이든지, 육체적 욕망의 만족이든지, 명예나 권력이든지, 세상에 속한 어떤 것도 심령의 주림과 목마름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한 후에 솔로몬은 “모든 것이 헛되다”라는 결론을 내렸다(참조 전 1:2, 14; 2:1, 15, 19; 3:19; 11:8; 12:8 등). 어떤 것도 모든 인간의 마음이 갈망하는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전도자는 창조주를 인정하고 그분과 협력하는 것만이 항구적인 만족을 가져다 준다고 결론을 맺는다(전 12:1, 13).

산상 설교를 한 지 6개월 또는 8개월 후에(참조 예수의 생애와 봉사, 도표 7) 예수는 생명의 떡(요 6:26~59)에 관한 또 하나의 위대한 강화를 했는데, 여기서 간략하게 설명한 원칙을 좀 더 충분하게 논했다. 인간이 갈망해야 하는 “떡”은 바로 예수이다. 인간은 그 떡을 먹음으로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으며, 심령의 굶주림을 충족시킬 수 있다(참조 요 6:35, 48, 58).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하늘의 공급자에게 와서 “돈 없이 값 없이”(사 55:1, 2) 물과 양식을 얻으라는 은혜로운 초청을 받는다. 사람의 심령에 의에 대한 갈망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미 그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산상보훈, 19)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헬라어 엘레에모네스(elee–mones). “동정적인”, “자비로운”, “자애로운”을 의미함. 그리스도는 “자비하고(엘레에몬, elee-mo-n) 충성된 대제사장”(히 2:17)이 되었다. “자선이나 시혜(施惠)에 관계된 혹은 그것에 바쳐진”을 의미하는 영어의 “eleemo- synary”(자선을 베푸는)란 단어는 이 말에서 라틴어를 거쳐 파생되었다. 그리스도가 여기서 말하는 긍휼은 인간을 향한 능동적인 선행이다. 그것은 자비로운 행위의 형태를 취할 때까지는 거의 가치가 없다.

25:31~46에 자비의 행위는 영광의 왕국에 들어가는 시금석으로 제시되어 있다. 야고보는 자비의 행위를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약 1:27)으로 정의한다. 미가는 하나님과 동료에 대한 의무를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6:8)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으로 요약한다.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미가도,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사람들을 향한 자비를 함께 언급하고 있음을 주시하라. 이것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22:40)이 되는 두 계명과 비교될 수 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은 하나님이나 사람들에게 똑같이, 지금이나 심판의 날 모두에 적용될 것이다. 황금률의 원칙(7:12)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과, 그 보답으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취급하는 방식에 모두 적용된다. 잔인하고 몰인정하고 야비한 사람은 동료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로운 취급을 거의 받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필요와 감정을 잘 보살펴 주는 사람들은, 세상이 그들에게 같은 방법으로 보상해 주는 것을 얼마나 자주 보는가.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마음”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지성(13:15), 양심(요일 3:20, 21), 숨은 사람(벧전 3:4) 등을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사용한 의미로 볼 때, 마음의 청결이란 성적인 순결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산상보훈, 25). 그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것을 제외한, 바람직한 모든 품성의 특성을 포함한다. “마음이 청결”하게 된다는 말은 성도들이 차려 입은 “세마포”(계 19:8; 참조 마 3:18, 19),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것 곧 품성의 완전을 의미한다.

예수가 염두에 둔 것은 의식적(儀式的) 청결이 아니라(15:18~20), 마음의 내적 청결이다. 동기가 순결하다면 생활도 순결할 것이다.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삶의 지배적인 원칙인 죄를 포기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 남김 없이 봉헌되었다(참조 롬 6:14~16; 8:14~17).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동기가 옳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과거의 잘못에 등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의 목표를 향해 좇아가는 것을 의미한다(빌 3:13~15).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리스도는 현재 인간의 마음속에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에 역점을 두지만, 그렇다고 내세의 영원한 영광의 왕국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참조 3절 주석). 그러므로 “하나님을 볼 것이다”라는 말은 육체적 시각뿐만 아니라 영적 시각도 가리키는 것임이 분명하다. 자신의 영적 필요를 느끼는 자들은 지금 “천국”에 들어간다(3절).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자들은(4절) 지금 위로를 받는다. 마음이 온유한 자들(5절)은 새 땅의 소유권을 지금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6절)은 지금 배부르게 된다. 긍휼히 여기는 자(7절)는 지금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 이와 같이 마음이 청결한 자는 믿음의 눈을 통해 지금 하나님을 보는 특권을 갖는다. 그러므로 결국 영광의 왕국에서 그를 대면하여 보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 될 것이다(요일 3:2; 계 22:4). 더욱이 현 세상에서 하늘의 통찰력을 계발시키는 자들만이 내세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될 것이다.

육체적 최면제나 마취제와 마찬가지로, 죄의 첫 번째 결과는 마음과 정신의 고등 기능을 어둡게 하는 것이다. 하와가 “그 실과를 따먹은” 것은 뱀이 하와를 미혹하여 그녀의 영혼의 눈으로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것을 본 후(창 3:6)이다. 뱀이 “너희 눈이 밝아지리라”고 말했을 때 그는 비유적인 시력을 언급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밝아진” 결과는 선과 악을 아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창 3:5). 먼저 마귀는 죄의 경험이 더 밝은 시력을 제공한다는 것을 믿도록 설득하여 사람들을 눈멀게 한다. 그러나 죄는 더욱더 맹목(盲目)으로 끌고 간다. 죄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렘 5:21; 참조 사 6:10; 겔 12:2).

일편단심 신실한 자들만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영혼의 “눈이 성”할 때 삶은 “빛”으로 가득 찰 것이다(6:22, 23).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한 쪽 눈은 하늘 가나안에, 다른 쪽 눈은 “죄악의 낙”(히 11:15)과 애굽의 “고기 가마”(출 16:3)에 둠으로써 사팔뜨기가 되었다. 우리의 유일한 안전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첫째로 하는 원칙에 입각하여 사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의 것들이 “탐스럽다고” 보는 자들, 곧 그들의 관심이 사단이 전시하는 세상의 번쩍이는 싸구려 장난감에 고정된 자들은 결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서 더 큰 가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려”면 영혼의 창문을 청결히 해야 한다.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 헬라어 에이레노포이오이(eire-nopoioi). 이 단어는 에이레네(eire-ne-), “화평”과 포이에오(poieo-), “만들다”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리스도는 여기서 특별히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에 대해 언급한다(시대의 소망, 302~305; 산상보훈, 2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롬 8:7). 그러나 평화의 주인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들의 원수가 아님을 보여 주기 위해 왔다(참조 산상보훈, 25).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다(사 9:6, 7; 참조 미 5:5).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온 평화의 사자이며 그를 통해 “믿음으로 의롭게 되어”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롬 5:1) 되었다. 예수는 위임받은 사업을 완수하고 아버지께로 돌아 갈 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 참조 살후 3:16)고 말씀할 수 있었다.

그리스도가 “화평케 하는 자들”에 관해 말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이해하려면 셈족의 사고와 언어에 나타난 화평의 의미를 살펴보면 큰 도움이 된다. 헬라어 에이레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완성”, “건전함”, “번영”, “안녕(安寧)한 상태”, “평화” 등을 의미하는 샬롬(s∨alom)이다. 그리스도와 일반 백성들이 히브리어에 매우 가까운 아람어를 사용한 사실에 비추어 보아, 틀림없이 예수는 셈어의 의미를 함축한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화목해야 하고(살전 5:13),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아야 한다(히 12:14). 그들은 화평을 위해 기도하고 화평을 위해 일해야 하며 사회의 평화스런 상태에 공헌하는 여러 활동에 건설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다(신 14:1; 호 1:10 등).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좇는 개념이다(요일 3:1).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분의 품성을 닮는 것을 뜻한다(요일 3:2; 참조 요 8:44).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동료들을 그분과 화목하도록 인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핍박을 받은. 여기서 그리스도는, 주로 천국을 위해 세상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박해를 말한다. 죄가 들어온 이래 그리스도와 사단, 천국과 세상 왕국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과 사단을 섬기는 자들은 “원수”가 되었다(창 3:15; 계 12:7~17). 이 투쟁은 “이 세상 나라가 우리의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계 11:15; 참조 단 2:44; 7:27). 바울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행 14:22). 천국 시민들은 이 세상에서 환란당할 것을 예기하는바(요 16:33), 이는 그들의 성품, 이상, 열망 그리고 행동이 모두 현 세상의 악을 거스르는 무언의 증언을 하기 때문이다(참조 요일 3:12). 하늘 왕국의 원수들은 왕 되신 그리스도를 핍박했고, 또한 그의 충성스런 백성들을 핍박할 것이다(요 15:20).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와 동일한 약속이 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졌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딤전 2:12; 참조 단 7:18, 27). 그리스도를 위해 큰 고통을 당한 자들이 그분이 그들을 위해 당한 고통을 가장 잘 헤아릴 수 있다. 첫 번째와 마지막 복에 하늘 시민의 자격 보증이 포함되는 것은 적절하다. 여기에 열거된 하늘 시민을 위한 여덟 가지 자격을 경험한 자들은 천국에서 한 자리를 얻을 가치가 있다.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나를 인하여. “나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지닌 이름 곧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통당한다. 초기교회 시대와 마찬가지로 모든 시대를 통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행 5:41; 참조 벧전 2:19~23; 3:14; 4:14).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10:22)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고 덧붙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위하여 고난받을 것”(빌 1:29)을 예기해야 한다.

욕하고. 헬라어 오네이디조(oneidizo-). “비난하다”, “중상하다”, “모욕하다”를 의미함. 참조 눅 6:22 주석. 4:11, 12은 부가적인 복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순히 나타날 수도 있는 박해 자체의 여러 형태에 대한 설명이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기뻐하고. 생애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롬 8:28)을 알고 기뻐해야 한다(빌 4:4). 고난이 천국 시민에게 필수적인 인내와 그밖의 품성의 특성들을 계발시키며, 이것은 시험 즉 시련에도 마찬가지다(약 1:2~4).

즐거워하라. 누가의 진술 “기뻐하고 뛰놀라”(6:23)와 비교하라.

너희의 상이 큼이라. 참조 눅 6:24~26 주석.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상에 대한 생각이 최우선은 아니다(실물교훈, 398). 그는 천국에 들어갈 목적만으로 규칙들에 순종하지는 않는다. 그는 최고의 목표와 실존의 기쁨을 창조주와 협력하는 데서 찾기 때문에 순종한다. 희생도 클지 모른다. 그러나 상 또한 크다. 인자가 영광으로 올 때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아줄 것”이다(마 16:27; 참조 계 22:12).

너희. 헬라어에서 대명사 “너희”는 강조용법으로 사용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 설립위원들로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할 열두 제자에게 이 말씀을 역설했음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참조 1~3절 주석). 다른 사람들 즉 농부들과 어부들이 경청하고 있었으며(산상보훈, 39), 바리새인들이 보낸 첩자들도 참석했다(시대의 소망, 307; 참조 막 2:6 주석).

선지자들. 아합과 이세벨에게 추적당한 엘리야(왕상 18:7~10; 19:2)나 자신의 동포들에게 박해받은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렘 15:20; 17:18; 18:18; 20:2 등). 박해는 삶을 정화시키고 성품에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에 이바지한다(참조 욥 23:10).

당황할 필요가 전연 없음―참으로 훌륭한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을 연구해 보면 주께서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신 사람들의 특성들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가 있다(마 5:1-12 인용)

그렇게 분명한 지시들이 신자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몇 마디 말씀 가운데 포함된 교훈 밖에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로 인해서 아무도 당황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귀한 교훈으로 가득한 성경전서가 있다. 어느 누구도 확신이 없거나 어두운 가운데 있을 필요가 없다. 믿음과 기도와 열렬한 성경 연구로 여기에 나타나 있는 덕목들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행하지 않는 사람들과 쉽게 구분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고집스럽게 거절한 일에 대하여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다(편지 258, 1907).

질적으로 아주 다른 말씀들―그리스도는 마치 하늘 빛의 밝은 광채 속에 감싸여 있던 사람처럼 팔복의 산에서 그의 축복을 선언하였다. 그가 하신 말씀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는 전연 다른 성질의 말씀이었다. 그분이 “복이 있도다”라고 하신 사람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선포한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는 그 큰 군중들에게 그가 원하면 누구에게나 영생이라는 보물을 나누어 줄 수 있다고 선언하셨다. 비록 그의 신성은 인성으로 옷입기는 하였지만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는 것을 신성을 도둑질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이와 같은 공개적인 방법으로 영생의 상급을 함께 누릴 사람들의 속성들을 묘사하였다. 그는 특별히 그의 이름을 위하여 핍박을 받을 사람들을 지적해 내고 그들은 크게 축복을 받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될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자들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클 것이다(원고 72, 1901).

선의 보고(寶庫)―그리스도는 세상을, 하늘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채우시기를 간절히 원하셨다(마 5:1-12 인용).

그는 명쾌하고도 힘 있게 “선함”이라는 이름의 보물로서 우리 시대에까지 전해져 내려 올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들은 참으로 귀한 말씀이며, 격려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거룩한 입술에서 확신에 가득찬 음조로 축복을 말씀하셨으니 이는 그분 자신이 바로 모든 선의 근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이었다. 더구나 거기에 참석한 모든 사람의 마음에 깊은 감명을 끼치고 축복하는 것이 그의 특권이었던 것이다. 그는 그의 독특하고, 거룩한 직분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원한 보물들이 그의 수중에 있었고, 이 보물들을 그가 한 없이 풀어 놓은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하실 일을 그가 하는 것은 신성을 도둑질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축복 속에 그는 이 세상에서 그의 나라를 조직해야 할 사람들을 포함하였다. 그는 모든 영혼의 행복과 기쁨에 필수적인 축복들을 세상으로 가져 왔다. 그리고 그는 그 큰 군중들 앞에 풍성하신 하늘의 은혜로우시며 영원하시고, 무궁토록 살아 계시는 아버지께서 쌓아두신 보물들을 제시하셨다.

여기에서 그분은 누가 그의 하늘 왕국의 신민이 될 것인가를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나 세속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늘 왕국의 왕족이 될 특별한 백성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품성의 모든 특질들을 그들 앞에 제시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될 사람들, 그리스도 자신과 공동 상속자가 될 사람들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는 그가 택하신 신민들을 공개적으로 발표하시고 자신과 연합함으로서 그를 섬길 때 그들이 서야 될 자리를 배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자세히 가르쳐 주신 그런 품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돌려질 존귀와 영광과 축복을 그리스도와 함께 나눌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별되고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주의 선물들을 이용할 것이므로 한 특별한 백성이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을 위하여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무한대의 권위를 가지신 분의 권위를 가지시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를 구주로 받아 들이는 사람들에게 주실 하늘의 모든 좋은 것들을 가지신 분이시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 위대하신 권위를 침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을 인정치 않으신다. 그들은 권위의 찬탈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억제할 수 없는 힘과, 자신의 위대성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능력으로 그의 말씀을 가슴에 사무치게 하는 권위로서 말씀하셨고, 인간 대리자들은 그들 앞에 계신 분과 비교해 볼 때,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들의 마음에 그분은 지극한 영광 가운데서 내리셨던 명령을 반복하고 계신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분이 세계를 소환해 놓고 그의 말씀을 듣게 하실 때 그들은 홀린 듯 하였고 환상을 보는 듯 하였으며 마음에는 깊은 깨달음이 있었다. 모든 말씀은 말씀 자체의 힘으로 제자리를 잡았고 그 말씀을 듣는 자들은 그 말씀을 믿고 받아 들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말씀을 거절할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말씀하시는 모든 말씀은 듣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생명과도 같아 보였다. 그는 그가 세상의 빛이요, 교회의 권위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었으며 그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나신 분임을 주장하고 있었다(원고 118, 1905).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소금. 팔레스타인에서 소금은 해변의 습지나 내륙의 호수에서 거둬들인다. 소금 수확을 위한 조잡한 시설 때문에 많은 불순물들이 남게 된다. 습기와 접촉하거나 비에 노출되면 순도 높은 가용성 소금 자체는 씻겨 나가고 싱거운 불순물만 남는다.

천국 시민들을 소금에 비유한 사상의 근저에 있는 것은 방부제로서의 소금의 특성이다(참조 산상보훈, 35). 냉동장치나 기타 음식을 보존하는 현대적 방법이 나타나기 전에 소금과 향료는 주로 어떤 것을 보존하는 데 사용했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소금은 거의 이 목적을 위해서나 음식의 맛을 내는 조미료로만 사용되었다(참조 욥 6:6).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인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대리자가 됨으로써 세상에서 부패를 방지하고 정화하는 영향력을 발휘한다. 제자들은 동료들의 구원을 그들의 제일 의무로 인식하였다. 그들은 박해(참조 5:10~12)나 기타 이유 때문에 사회로부터 물러설 수 없었으며, 그들의 동료들과 밀접한 접촉을 계속 유지해야 했다.

누가는 산상 설교에 관한 그의 기사에 5:13~16의 내용을 포함시키지는 않지만, 다른 경우에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비슷한 진술을 인용한다(눅 14:34, 35). 마가도 다른 상황에서 제자들에게만 말씀하신(막 9:50) 비슷한 구절을 기록하는데, 이것은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하는 특성에 적용된다. 복음서 기자들이 동일하거나 비슷한 예수의 말씀을 그분의 봉사 기간 중 각기 다른 시기에 한 것으로 인정한 사실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다소 우연히 또는 독단적으로 그분이 실제로 진술한 시기와 상관없이 그것들을 다른 시기에 할당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예수가 어떤 특정한 개념을 그의 봉사 기간 중에 단 한차례만 표명했다는 단순한 견해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여러 시기에 새로운 청중들에게 그리고 아마도 똑같은 청중에게 그의 말씀을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반복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가정할 만한 확실한 이유가 전혀 없다.

그 맛을 잃으면. 즉 “싱겁게 되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리 소금이라고 해도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본질적인 특성을 잃어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의 명목상 천국 시민권은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불과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떠한 신앙 고백을 하든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짜게 하리요. 기능이 회복된 소금의 본질적이며 유용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음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 능력 그리고 의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에서 상실될 때 그는 자신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돌아갈 다른 원천이 없는 것이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소유하지 않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줄 수 없다. 소금은 고대의 제사의식에서 모든 제물에 첨가되었으며, 그것이 빠진 제사는 가납될 수 없었다(레 2:13; 스 43:24; 막 9:49). 여기서 소금은 그리스도의 의를 표상한다(참조 시대의 소망, 439).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롬 12:1)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로 인해 보존되고 맛을 내야 한다(참조 갈 2:20).

아무 쓸데없어. 삶에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을 잃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아무 쓸데없”다. 더욱이 그는 왕국의 원칙들을 잘못 나타내는 생활을 함으로 왕국의 대의에 실제적인 방해물이 된다.

밟힐 뿐이니라. 청중들은 자신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쓸모 없어 버려진 소금으로 하얗게 덮인 길을 볼 수 있었다(산상보훈, 36, 37).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너희. 헬라어에서 이 대명사는 강조를 나타낸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세상. 헬라어 코스모스(kosmos, 참조 4:8 주석).

빛. 빛은 항상 신의 임재의 상징이었다(참조 창 1:3; 3:24 주석). 요한은 예수를 이 세상의 어두움 가운데 비치는 “사람들의 빛”이라고 칭한다(1:4~9). 예수는 봉사를 마칠 즈음에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말했다(참조 요 8:12; 9:5 주석).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세상의 빛으로 받아들인 후에 부르심에 충실하다면 그는 그 빛의 반사자가 된다. 메시야 예언에서 예수는 “큰 빛”(사 9:2)과 “의로운 해”(참조 말 4:2; 눅 1:79 주석)로 칭해진다. 참 빛이 사람들을 비출 때 그들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사 60:1~3)는 권고를 받는다.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자들은 현세와 내세에서(참조 13:43) “해”(삿 5:31) 같은 존재로 묘사된다. 그리스도가 말씀할 때는 이미 아침이 되어(산상보훈, 38) 해가 천정(天頂)을 향해 오르고 있었다(참조 시 19:4~6). 이와 마찬가지로 열두 제자들과 장차 왕국의 시민이 될 모든 이들은 나가서 그들의 빛을 발하여 죄의 어둠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길에 대한 무지를 몰아내야 한다. 참조 요 1:4, 7, 9 주석.

산 위에 있는. 고대 팔레스타인 도시들은 오늘날 그것들의 폐허가 증명하는 것처럼 주로 산 위에 있었다. 그러한 도시는 상당한 거리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와 허다한 무리들이 앉아 있었던 곳에서 주변의 산 위에 자리한 많은 도시들과 촌락들을 볼 수 있었다(산상보훈, 39).

겸손한 사람들은 세상의 소금(마 15:9; 22:29)―그리스도의 교훈 중에 그는 그의 제자들을 그들이 익히 아는 물질 곧 빛과 소금에다 비유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그는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몇 안되는 가난하고 비천한 어부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청중들 가운데 있었지만 이 사람들은 주께서 말씀하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모든 학문과 율법의 신비에 대한 그들의 잘못 생각된 교훈, 그리고 하나님을 아노라고 주장하는 그들의 모든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었다. 이 지도자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위탁해 오셨지만 그리스도는 그들이 믿을만한 교사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이 교사들에게, “너희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친”다고 하시고,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고 하셨다. 그분은 이 사람들에게서 돌아서시고 비천한 어부들을 향하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다(리뷰 1899. 8. 22).

스스로 발하는 빛이 아님―예수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비추는 빛은 자기들 스스로 발하는 빛이 아니다. 그 빛은 모두 다 세상의 생명이요, 세상의 빛이신 분에게서 온 빛이다. 그분은 이 빛을 일으키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모든 사람이 그를 섬기는 일을 할 때에 사용해야 하는 불까지도 그분께서 붙이신다. 그리스도는 빛과 생명과 거룩함이요, 모든 믿는 사람들의 성화이다. 성도들은 이 빛을 받아들여야 하며, 착한 일을 행할 때도 이 빛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여러 다른 많은 방법으로 그분의 은혜는 세상의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소금이 어느 곳에서 그 일할 곳을 찾던지, 그 곳이 가정이건, 사회이건 간에 그것은 선한 것을 보존하는 능력이요, 나쁜 것을 파괴하는 힘이 된다(리뷰 1899. 8. 22).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등불. 헬라어 뤼크노스(luchnos).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양초는 아니다. 고대의 등은 종종 받침 접시 모양의 진흙이나 철로 만든 사발로 구성되었으며, 심지는 기름에 떠있었고 빛을 발하는 부분이 사발의 측면에 달려 있거나 특별한 구멍을 통해 튀어 나와 있었다. 막 4:21과 눅 8:16; 11:33에 나오는 비슷한 진술과 비교하라.

말. 헬라어 모디오스(modios). 곡식을 담을 수 있는 대략 8.8리터의 용기. 그것은 가정에서 밀가루를 담는 통으로 사용되었다. 그 당시 보통 가정의 방에 대개 말이 하나만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그 “말”(the bushel)로 언급했다. 그것은 보통 토기였다. 한 민족으로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빛을 “말” 아래 감추어 두고 있었다(참조 사 60:1). 예수는 그들에게 위탁된 빛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임을 지적했다.

등경. 헬라어 뤼크니아(luchnia). 일반 서민들의 가정에서 이것은 대개 토기(土器)로 된 높이가 낮은 등대(燈臺)를 가리킨다. 다른 경우에는 지붕을 지탱하는 돌이나 목재로 만든 지주 위의 선반이 등불 놓기에 알맞는 등경으로 사용되었다(참조 출 25:31; 히 9:2; 계 1:12; 11:4 등).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등경 위에 잘 놓인 등불을 통해 집안의 모든 사람이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위탁한 진리의 빛을 통해 온 인류의 가정이 유익을 얻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참조 창 12:3; 신 4:60; 사 60:1~3 등). 잃어버린 동전을 찾기 위해 사용된 “등불”과 비교하라(참조 눅 15:8 주석).

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 빛을…비취게 하여. 진리의 빛은 하늘에서 온다(요 1:4). 그러나 그 빛이 우리 자신의 삶을 조명할 때 우리의 빛이 된다(사 60:1~3; 엡 5:14). 그러므로 최근 임명된 열두 제자는 기독교 사상 첫 번째로 위탁받은 빛의 전달자였다. 제자들이 진리의 빛과 하나님의 사랑을 효과적으로 나타냈다는 것이, 그들을 “본래 학문이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예수와 함께 있던 줄”(행 4:13) 알고 있던 그들의 철천지원수들에게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늘의 빛을 세상에 널리 비추신 분은 예수였다(요 1:4). 유대인 통치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이보다 더 큰 찬사를 보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의 효과에 대하여 이보다 더 크게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결코 꺼지지 않는 불을 밝혔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등불은 빛의 밝기와 강함으로 자신을 알린다. 등잔에 있는 등불의 기름은 방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등불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름이 공급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사탄은 항상 하늘 아버지를 오도하려고 애써왔다. 그리스도는 흑암을 몰아내고 아버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왔다. 그리스도는 이와 동일한 일을 제자들에게 위탁했다. 빛이 비치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 빛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빛을 비추되,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매혹되기보다는 생명의 빛이신 그리스도와 더 가치 있는 것들에 매혹되도록 비추어야 한다(마 6:31~34; 요 6:27; 참조 사 55:1, 2).

마태는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언급하는데, 그가 이후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이다(5:45, 48; 6:1, 9 등).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람을 그분의 자녀로 보는 개념은 구약에 자주 나타난다(신 32:6; 사 63:16; 64:8; 렘 3:4 등). 그러나 그리스도는 부자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실물교훈 141, 142,). 유대문학에서 하나님은 종종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묘사된다.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율법. 헬라어 노모스(nomos, 참조 롬 3:19 주석). 히브리어 토라(torah)에 해당하는 이 말은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뜻을 포함한다(참조 시 119:1, 33; 잠 3:1 주석). “율법과 선지자”라는 표현은 구약의 두 부분을 나타내는 말이다(참조 마 7:12; 11:13; 22:40; 눅 16:16; 요 1:45; 롬 3:21). 이러한 분류는 고대 유대문학에서도 발견된다(참조 마카베오 Ⅳ 18:10 ). 그러나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세 부분 곧 율법, 선지자, 시편(눅 24:44) 또는 히브리 성경의 표제에 따라 “율법, 선지자, 글들”로 구분하는 것이 더 보편적이다. 문맥이 가리키는 바에 의하면, 아마도 예수가 여기서 일차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모세의 책들에 포함되고 선지자들이 확인한 도덕적 율법과 국가법일 것이다(시대의 소망, 307; 산상보훈, 45). 5:21~47에서 예수는 십계명(참조 21, 27절)과 모세의 율법(참조 33, 38, 43절)에서 몇 개의 법을 선별하여 그것들에 대한 자신의 해석과 율법의 공식적인 해설자요 교사인 서기관들의 해석을 대조시킨다(참조 막 1:22; 2:6, 16; 눅 5:17 주석).

그리스도는, 율법을 파괴하고 유전으로 그것을 무익하게 만든 것은 자신이 아니라 서기관들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15:3, 6). 율법으로부터 인용한 예증들(5:21~47)은 이 경우에 예수가 말한 것(참조 2절 주석) 가운데 일부만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의 강론의 범위는 훨씬 더 넓었을 것이다. 그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말했을 때 그는 전 성경을 통하여 자신과 모든 메시야 예언의 성취를 가리키는, 의문의 율법에 나타난 표상의 성취를 강조한 것 같다(참조 눅 24:44). 그는 자신이 친히 주었고(벧전 1:11; 빛을 전한 사람들, 366) 자신에 관해 증거하는(요 5:39; 참조 눅 4:21) 성경의 어떤 부분도 폐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와 서기관들 사이에 있는 큰 논쟁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해석하는 수단으로 삼는 전통과 관계가 있다(참조 막 1:22, 44; 2:19, 24; 7:1~14; 눅 6:9 주석). 유년시절부터 예수는 구약에 전혀 근거가 없는 이러한 랍비들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행동했다(시대의 소망, 84). 그가 지금 파기한 것은, 서기관들이 성경에 가한 잘못된 해석(시대의 소망, 307)이지 율법 자체가 아니다.

생각지 말라. 그분의 봉사 기간의 마지막 2년 동안 거의 모든 경우(참조 막 2:6; 눅 6:11 주석)에, 그리스도의 활동을 조사하여 보고하기 위해 선정된 첩자들이 참석해 있었다. 심지어 그가 말씀하는 도중에도, 그들은 그가 율법을 무시한다고 구경꾼들에게 속삭이고 있었다(시대의 소망, 307; 산상보훈, 47). 그러나 다른 많은 경우에(막 2:8; 눅 4:23; 6:8), 예수는 그들의 생각을 알고(시대의 소망, 307) 그들이 제기하는 반대에 답했으며 그렇게 함으로 자신의 신성을 입증했다.

폐하러. 헬라어 카탈뤼오(kataluo-). 문자적으로는 “느슨하게 하다.” 집이나 천막 등을 “못쓰게 만들다”, “철폐하다”, “폐지하다”를 의미한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선포하신 분은 그리스도였다. 그런데 왜 그가 지금 그것을 폐지하려 하겠는가?(참조 부조와 선지자, 366). 참조 23:23 주석.

온. 여기서 예수는 아버지께로부터(요 16:28) 세상에(18:37) 온 것을 가리킨다.

완전케 하려. 헬라어 플레로오(ple-roo-). “완전케 하다”, “가득 채우다.” 산상 설교에서 율법의 창시자는 그 법도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의 원칙들이 그가 와서 건설하려고 한(참조 사 59:7 주석) 왕국 시민들의 생활과 사상에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을 밝혔다. 지금 위대한 율법의 시여자가 시내산에서 선포한 것은 그의 신민이 될 사람들에게 여전히 구속력을 가지고 있음을 친히 재확인하고, 누구든지 가르침이나 행동으로 율법을 폐지하려고 생각하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고 선포했다.

그리스도가 도덕적 율법을 완전케 함으로써 그것을 폐지했다는 주장은 문맥상 그리스도의 진술과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이러한 해석은, 사실상 그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려” 함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함으로 “폐지”하려 한다고 모순되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가 분명히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와 배치된다. 그 해석은 알라(alla, 그러나)라는 단어에 포함된 강한 대조를 무시하고 있으며, 그 두 개념을 실제적으로 유사한 개념으로 만들어 버린다! 율법을 완전케 함으로, 그 동일한 율법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게”(플레로오, ple-roo-)(롬 8:3, 4)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모본을 사람들에게 보여 줌으로 그리스도는 단순히 율법의 의미를 “충만하게 채웠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진실로. 헬라어 아멘(ame-n). 히브리어 아멘(’amen)에서 나왔음. “확고한”, “확립된”, “확실한”을 의미함. 히브리어 용법에서 아멘은 다른 사람의 말에 확실하고 강한 응답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민 5:22; 신 27:15, 16 등). 같은 용법이 신약으로 넘어왔다(고전 14:16). 아멘은 또한 신약에서 송영(doxology) 끝에 자주 나타난다(롬 1:25; 갈 1:5 등). 그러나 예수 자신의 말을 확증하고 강화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아멘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의 말 가운데 많은 부분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6:2, 5, 16; 등) 또는 요한복음에서처럼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요 3:3, 5, 11 등; 참조 마 1:51 주석)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막 13:31; 눅 16:17과 비교하라.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과 하나님의 구원의 표현인 구속의 경륜은 모두 결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

일점. 헬라어 이오타(io-ta). 헬라어 자모의 아홉 번째 글자로 히브리어 자모 중 가장 작은 글자인 요드(y)에 해당한다.

일획. 헬라어 케라이아(keraia). 문자적으로 “작은 뿔”이란 의미며, 아마도 히브리어 글자 와우(w)의 구부러진 부분 혹은 그밖의 다른 글자를 그와 비슷한 글자와 구별하는 데 필요한 어떤 글자의 일부분을 가리킨다. 히브리어 글자 베트(b, b)와 카프(k, k), 달레트(d, d)와 레쉬(r, r), 그리고 헤(h, h)와 헤트(j, h.)의 모양을 보면 다양한 히브리어 글자들의 상세한 부분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유대인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율법의 지극히 작은 글자 하나라도 없애려고 애쓸지라도 그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승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큰 범죄 행위가 되어 결국 세상이 파멸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반드시. 이것은 헬라어에서 강한 부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도덕법은, “변역지 아니하”(말 3:6)는 하나님의 품성이 바뀔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결코 변경될 수 없다. 도덕법의 원칙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심처럼 영원하다.

다 이루리라. 헬라어 기노마이(ginomai). “~이 되다”, “발생하다”, “확립되다.” 하나님은 자신이 나타낸 뜻을 수정하거나 바꾸지 않을 것이다(참조 17절 주석). 그분의 “말씀”은 그분의 선한 목적을 이룰 것이며 “형통”할 것이다(사 55:11). 인간의 뜻에 일치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법을 변경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법의 모든 가르침, 민법과 의식법(儀式法)을 포함하는 모세의 율법 그리고 그들이 친히 만든 법규들을 상대적인 중요도에 따라 매우 세밀하게 배열했는데, 이것은 율법의 요구가 서로 상충될 때 덜 중요한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율법의 요구에 의해 폐기될 수 있다는 추정에 근거한다. 이러한 편협한 율법주의로 인해 하나님의 율법의 가장 분명한 요구도 교묘하게 회피하는 수단을 고안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원칙을 적용하는 실례들에 대해서는 마 23:4, 14, 17~19, 23, 24; 막 7:7~13; 요 7:23을 참조하라. 어떤 행동은 “허락하고” 어떤 행동은 “금지하는” 것은 랍비들의 특권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는 사람들을 도덕법의 가르침에서 벗어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의 공식적인 해설자인 서기관과 랍비보다 훨씬 엄격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든지 결코 예외를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동등하게 영원한 구속력을 갖는다.

버리고. 헬라어 뤼오(luo-). “풀다”(참조 18:18), 율법을 “깨뜨리다”, “폐지하다”, “취소하다.” 카탈뤼오(kataluo-, “폐하다”, 5:17)는 뤼오의 강조 형태이다. 그리스도가 좀 더 약한 형태인 뤼오를 사용한 것은, 아마도 율법의 사소한 부분을 소홀히 여기는 것도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는 평판을 얻을 이유가 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 “저도 범죄하고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로보암”(왕상 14:16)과 비교하라.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지극히 가치가 적은 자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계명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가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다고 암시하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율법을 파기한 자들에 대해 천국이 취할 태도, 곧 그들의 품성에 내릴 평가를 분명히 진술한다. 이 점은 20절에 분명히 나타난 대로, 계명을 버리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천국으로부터 단호히 배제된다.

지극히 작은 자―(마 5:17-19 인용) 이것은 하늘 왕국에서 선고한 심판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 사람도 거기에 있을 것이지만 가장 낮은 지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것은 틀린 생각이다. 죄인들은 환희로 가득찬 그 세상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자,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느냐, 그 율법을 범하느냐 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가르치면서 율법을 범하는 자와 연합하는 모든 자에게 온 우주가 말하기를 그들은 인간 대리자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들이라고 말할 것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본인들이 하나님께 불충성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게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지식을 가졌노라고 말하지만 그들의 가르침과 모본으로 다른 영혼들을 암흑과 혼미 가운데 빠뜨리는 사람들 위에 심판을 선고하신다(리뷰 1898. 11. 15).

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 그리스도께서 지금 새로 임명된 측근 제자들, 특히 열두 제자들과 새로 건설된 천국의 장래 시민들에게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참조 1절 주석). 그리스도는 여기서 천국 시민의 높은 표준을 분명한 언어로 말하고 있다.

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율법의 자구(字句)에 대한 외적인 집착에 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근본 원칙들을 간파하고 그것들과 협력하기를 요청한다. 현대의 어떤 사이비 신앙가들처럼, 서기관들은 인간 본성의 약함을 고려하여 죄의 심각성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 쉽게 불순종하게 만들었으며, 사람들로 그렇게 하도록 부추긴 격이 되었다(참조 각 시대의 대쟁투, 572). 그들은, 사람은 자신의 행위의 분량에 의해 심판받는다고 가르쳤다. 다시 말해, 만일 그의 “선한” 행동이 악한 행동을 능가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판결한다(Mishnah Aboth 3. 16, Soncino ed. of the Talmud, 38, 39). 그들은 악한 행동을 보충하기 위해 행함에 의한 의(義)의 제도를 규정했으며, 그것에 의해 사람은 자신의 행동 기록에서 불리한 면을 능가할 만큼 충분한 공로를 얻을 수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행함에 의한 의의 제도를 일종의 하늘 가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사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바리새인이 된 이유였다. 여기서 예수는 그들의 제도가 사람들을 천국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 없게 만들 만큼 부적합한 것이라고 규명한다. 형식적인 행동이나 공로로 생각되는 행위를 통해 의를 얻으려는 노력은 극히 무가치한 것이다(참조 롬 9:31~33).

서기관과 바리새인. 참조 제10권, 참고 논문 “기독교 첫 세기의 유대인.”

더 낫지 못하면. 천국 시민의 “의”는 율법의 공식적인 해설자인 서기관과 최고의 경건을 가장한 바리새인들의 의를 능가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운동경기에서 아마추어 제자들이 전문 직업 선수들이나 챔피언과 맞서 싸우는 격이며, 어떻든 그들이 해야할 최소한의 일은 그 챔피언들을 능가하는 것이다.

결단코. 헬라어 우 메(ou me-). 이중 강조 부정.

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옛 사람에게. “옛 사람에게” 즉 “고대인들에게.” 헬라어는 어느 쪽으로든 읽을 수 있다.

말한바. 율법의 초기 해설자들을 권위의 근거로 인용할 때, 랍비들은 종종 그들의 소견을 예수가 여기서 사용한 말들로 시작했다. 랍비들의 저술에서 이 말은, 성경으로부터 인용문을 끌어들일 때도 사용되었다.

살인치 말라. 십계명의 여섯째 계명(참조 출 20:13 주석).

심판을 받게 되리라. “기소를 면할 수 없다”는 의미. 계획적인 살인[謀殺]과 구분되는 우발적인 살인인 경우에 율법은 살인자를 보호했다(참조 민 35:6; 신 19:3 주석). 물론 이곳의 인용문은 고의적인 피흘림과 그에 따른 법의 정당한 판결과 형벌을 언급한 것이다.

너희가 들었으나. 이제 예수는 그의 율법 해설에 대한 특유의 실례를 준다. 율법의 창시자인 그는 곧 율법의 유일한 참 해설자이다. 예수는 랍비식 궤변의 쓰레기를 일소하고 진리가 본래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영광을 회복시켰다.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표현은 이 경우 청중들의 대다수가 스스로 율법을 읽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당연했다. 그들 대부분이 평범한 농부와 어부들이었기 때문이다(산상보훈, 39). 예수는 후에 학식 있는 제사장과 장로들과 이야기할 때 “너희가 성경에(서)…읽어 본 일이 없느냐”(21:42)라고 물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성전 뜰 안에 있던 한 무리의 평민들은 예수에게 “우리는 율법에서 들었거늘”(요 12:34)이라고 말했다.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랍비들은 율법의 해설을 위한 권위의 근거로 전통을 인용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권위로 말씀했으며, 사람들이 재빨리 알아챈 것처럼(참조 마 7:29; 눅 4:22 주석)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랍비들의 가르침과 뚜렷하게 구별되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란 표현은 마 5장에 여섯 번 나타난다(참조 w/5/22e, 28, 32, 34, 39, 44절). 예수는, 자신의 요구들은 율법의 단순한 형식을 훨씬 능가하며 그것들은 단순한 형식에 불과했을 것들에 생명과 의미를 부여하는 영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는 외적 행동과 그런 행동을 유발시킨 동기를 명확히 구별해 주는 여섯 가지 구체적인 실례를 들었다. 산상 설교를 통해 하나의 금실처럼 이어지는 이러한 대조로 인해 이 강론은 그리스도인 생활 철학의 최고 성명서, 곧 모든 시대의 윤리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해설이 되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율법의 요구가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지적했으며, 율법에 대한 단순한 외적 순종은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역설했다.

형제에게 노하는 자. 살인은 분노의 최종적 결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동료들에게, 심지어 분노를 유발시킨 사람에게도 숨길 수 있다. 법정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일은 분노로 인해 발생한 행동들을 처벌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사건의 뿌리를 볼 수 있으며, 노여움 자체에 대해 사람을 심판하고 처벌할 수 있다.

심판. 이것은 아마도 마을이나 성읍의 지방 법정의 평결을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협박이나 행동으로 표현되었음을 암시한다.

[이유 없이]. [이 구절은 「개역한글판」에는 생략되어 있음-역자 주]. 어떤 본문의 증거는 이 구절이 생략된 것을 지지한다(참조 산상보훈, 55). 이 말은 분노를 일으킬 만한 어떤 일을 행한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을 그리스도가 용인했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 따라서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마음 속에 증오심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라는 가르침(44절)에 상반되는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 성경은, 죄에 대한 노여움이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의분이 단지 악 자체에만 향할 때(참조 출 32:19; 30:27; 42:25; 단 9:16 등) 정당화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다(참조 막 3:5 주석). 하나님이 분노했다고 할 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다(참조 민 25:4; 사 13:9; 요 2:14~17 등). 따라서 하나님을 모욕한 행동이나 무죄한 사람에게 상해를 끼친 행동에 대한 의분은 정죄받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시대의 소망, 310).

라가. 헬라어 라카(rhaka). 아람어 레카(reqa’, 히브리어 reqah)의 음역. “무가치한”, “미련한” 등을 의미함. 그것은 강한 경멸의 표현이다. 랍비들의 문헌에서 레카는 자신에게 경례하지 않은 부하에게 장교가 소리지르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무지하고 지위가 낮은 자들에게까지도 존경과 친절로 대할 것이다(산상보훈, 57).

공회. 헬라어 쉬네드리온(sunedrion). 여기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대(大) 산헤드린이 아니라 지방 산헤드린 즉 지방 의회를 말함.

미련한 놈. 헬라어 모로스(mo-ros). “둔한”, “미련한”, “어리석은.” 모로스는 “다투기 좋아하는”, “완고한”, “반역적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마라(marah)와 동계어라는 제안이 있어 왔다. 라카가 사람의 지성에 대한 경멸이나 그것의 부족을 표현하는 반면, 여기서 사용한 모로스는 사람의 동기에 대한 경멸도 포함하는 것 같다. 첫 번째 경우에는 “미련한 자”라고 일컬어지고, 두 번째 경우에는 악의까지 함축한 “불한당”으로 일컬어진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마귀에 대해서도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않았다면(유 9절), 우리 역시 동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사람의 동기를 비난하고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탈무드에 의하면(K.iddushin 28a, Soncino ed., 133) “노예”라는 모멸적인 언사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비방한 죄를 범한 사람은 30일 동안 회당에서 축출되었으며, 다른 사람을 “개자식”이라고 부른 자는 매를 40대 맞아야 했다. 다른 사람을 “나쁜 자식”이라고 부른 사람의 경우에는, 모욕을 당한 사람이 그 사람과 “겨루거나” 그의 생명을 “해칠 수도” 있었다(그의 생계 등을 박탈함으로).

지옥 불. 문자적으로 “불의 게헨나”(헬라어 게엔나[geenna]), 즉 “불의 지옥.” 지옥을 뜻하는 게엔나는 “힌놈의 골짜기”를 뜻하는 히브리어 게 힌놈(ge’ hinnom) 또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를 뜻하는 게 벤 힌놈(ge’ ben hinnom, 수 15:8)의 음역으로, 그 골짜기는 다윗성 남쪽의 기드론 골짜기와 실로암 연못이 직접 만나는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있다(참조 렘 19:2 주석). 악한 왕 아하스는 이사야 시대에 힌놈의 골짜기에 있는 도벳(Tophet)이라 불린 산당(대하 28:3; 참조 선지자와 왕, 57)에서 몰렉에게 어린아이를 태워 제사드리는 야만적인 이교 의식을 소개한 것 같다. 이러한 반역적인 의식들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묘사에 대하여는 레 18:21; 신 18:10; 32:17; 왕하 16:3; 23:10; 렘 7:31 주석을 참조하라. 아하스의 손자 므낫세가 이 의식을 회복시켰다(대하 33:1, 6; 참조 렘 32:35). 수 년 후에 선한 왕 요시야가 이런 섬뜩한 형식의 예배가 행해졌던 힌놈의 골짜기에 있는 산당들을 공식적으로 더럽힘(왕하 23:10)으로 그것을 정지시켰다. 이것과 기타 악에 대한 징벌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힌놈의 골짜기가 언젠가는 “이 백성들의 시체들”로 인해 “살육의 골짜기”가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렘 7:32, 33; 19:6; 참조 사 30:33). 따라서 힌놈의 불은 마지막 큰 심판의 날에 있을 소멸하는 불과 악인의 징벌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참조 사 66:24). 부분적으로는 헬라 철학에서 유래한 유대인의 종말론적 사상에서 게헨나(Gehenna)는 불경건한 자들의 영혼이 마지막 심판과 보상의 날까지 형벌 아래 머물러 있는 장소였다.

게헨나 골짜기를 쓰레기 소각 장소로 만들어 마지막 날의 불의 전형이 되게 한 전승은 12세기와 13세기 유대인 학자 랍비 킴히(Kimchi)에게서 비롯된 것 같다. 이러한 사상은 고대 유대 문헌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초기 랍비들은 마지막 날의 불의 전형으로서 게헨나 사상의 근거를 사 31:9에 둔다(참조 Strack and Billerbeck, Kommentar zum Neuen Testament, vol. 4, 1029, 1030).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 헬라어 도론(do-ron). 일반적으로 선물 또는 특별한 제물에 적용됨. 제단의 예물에 부여된 의식적(儀式的) 중요성은 23:18, 19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네 형제. 산상 설교를 경청하던 자들은 “형제”는 곧 동료 유대인을 가리킨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형제란 동료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이 용어는 이런 저런 방법으로 서로 밀접하게 교제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후에 그리스도는 인종이나 신조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형제임을 분명하게 밝혔다(참조 눅 10:29~37).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개인적인 “예물” 즉 희생제물을 드리는 행위는 모든 종교적 행위 가운데서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상황 아래서는 그것까지도 두 번째로 고려되어야 한다. 여기에 언급된 “예물”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얻기 위하여 드려진 희생제물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기 전에 먼저 동료들과 바른 관계를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참조 마 6:15; 요일 4:20). 더 중요한 의무가 그것만 못한 의무에 우선한다. 화목은 제사보다 더 중요하다. 생명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원칙에 입각한 삶(갈 2:20)은 하나님의 눈에는 종교적 형식을 실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참조 딤후 3:5).

화목하고. 참조 6:12; 18:15~19 주석.

25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송사하는 자. 헬라어 안티디코스(antidikos). “적대자.” 여기서 적대자는 소송에서 적대자를 뜻한다. 이 문맥이 시사하는 바에 의하면, 이 경우 송사하는 자는 “고소인”이며, 그리스도가 “사화하라”고 말하는 사람은 피고인이다. 눅 12:58, 59와 비교하라.

길에 있을 때에. 이것은 법정으로 가는 도중일 때를 의미한다. 예수는 법정 밖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사화하라. 헬라어 유노에오(eunoeo-). “(어떤 사람에게) 마음이 기울다.” “호의적인”, “친절한”, “다정한”을 의미하는 유노오스(eunoos)와 동계어이다. 따라서 “사화하다”는 이전의 “송사하는 자”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암시한다.

관예. 헬라어 휘페레테스(hupe-rete-s). “하속 관리.” 신약에서 이 용어는 회당 조력자(참조 눅 4:20 주석), 바울과 바나바의 수종자 마가 요한(행 13:5) 그리고 복음의 일꾼들(눅 1:2; 행 26:16; 고전 4:1 등)에게 사용된다.

26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진실로. 참조 18절 주석.

호리. 헬라어 코드란테스(kodrante-s). 이것은 라틴어 콰드란스(quadrans)에 해당하며 과부의 “두 렙돈”과 거의 맞먹는 액수이다(참조 막 12:42).

결단코. 헬라어 우 메(ou me-). 이중 부정이며, 따라서 강조 용법이다.

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간음치 말라. 출 20:14에서 인용함(참조 신 5:18).

너희가 들었으나. 참조 21절 주석.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참조 22절 주석. 근본적으로 결혼관계와 그 의무에 대한 예수의 강론은 창 2:22~24에 진술된 것처럼,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본래의 계획(참조 19:8)에 근거한 것이지 모세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참조 신 24:1~40). 그 계획에서 결혼은 교제의 필요를 충족시키고(창 2:18) 태어날 아이들에게 가정과 적절한 훈련을 제공하기 위해 의도되었다(참조 창 1:28; 18:19; 잠 22:6; 엡 6:1~4). 따라서 가정은 부모와 자녀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배우고 그들을 창조한 하나님의 목적에 나타난 본래의 고결한 이상에 부합되는 품성을 계발시키는 이상적인 환경으로 설립되었다.

여자를 보고. 여성의 미는 모든 참된 미를 사랑하는 자애로운 창조주에게서 온 하나의 선물이다. 그 미에 대한 순수한 감상은 바르고 타당하다. 더욱이 다른 성에 대해 갖는 매력은 창조주가 남자와 여자의 마음속에 심었으며, 하나님이 정한 한계 내에서 이루어질 때는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이고 악한 이익을 위해 악용될 때 세상에서 가장 강한 파괴력이 있다.

음욕. 헬라어 에피쒸메오(epithumeo-). “(어떤 것에) 마음을 두다”, “열망하다”, “탐내다”, “바라다.” “음욕”은 “갈망”이나 “쾌락”을 의미하는 고대 앵글로색슨 단어이다. 어떤 것에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강렬하고 간절한 욕망을 체험하는 것을 말한다. 에피쒸메오는 선한 의미와 악한 의미에 모두 사용된다. 예수는 열두 제자에게 그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에피쒸미아[epithumia]) 원했다(에피쒸메오[epithumeo-])”라고 말했다(눅 22:15). 에피쒸메오는 또한 마 13:17; 눅 17:22; 히 6:11; 벧전 1:12에서 좋은 의미로 나타난다.

“욕망”을 뜻하는 동계어 명사 에피쒸미아는 빌 1:23; 살전 2:17에서도 좋은 의미로 사용된다. 에피쒸메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가운데 하나는 “열망하다”, “쾌락을 즐기다”를 의미하는 하마드(h.amad)이다. 하마드는 열 번째 계명(출 20:17)에서 “탐내다”로, 신 5:21과 사 53:2에서는 “흠모하다”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에 대해 경고할 때 필시 열 번째 계명을 생각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자신의 성정과 의지를 열 번째 계명과 잘 조화하여 규제하는 사람은 그로 인해 일곱 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부터 보호된다.

마음. 헬라어 카르디아(kardia). “마음.” 여기서는 지성, 감정, 의지를 말한다.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 23:7). 그리스도는 품성이, 외적 행동보다는 오히려 그 행동을 유발시키는 내적 태도에 의해 결정된다고 지적한다. 외적 행동은 다만 내적 태도를 반영하고 촉진시킨다. 발각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잘못을 범하는 사람과 다만 발각이 두려워서 잘못을 억제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기에는 유죄다. 죄는 다름 아닌 이성, 선택하는 힘, 의지(참조 잠 7:19 주석) 곧 마음의 고등 능력으로부터 비롯된 어떤 행동이다. 외적인 행동은 단지 내적 결심의 연장에 불과하다.

하늘 책에 그려져 있는 품성의 모습들(계 20:12)―하나님의 율법의 적용 범위는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물론이요, 감정과 동기에까지 이른다. 그것은 어둠 속에 숨겨진 것들 위에도 빛을 비추기 때문에 마음에 숨겨진 비밀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모든 생각과 목적과 계획과 동기를 아신다. 하늘의 책에는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범했을 죄들도 적혀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은밀한 일과 함께 모든 드러난 일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분은 율법을 가지고 모든 사람의 품성을 측정해 보고 계신다. 화가가 사람의 얼굴을 화폭에다 그리듯이 각 사람의 품성의 모습들이 하늘 책에 그려진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품성의 완벽한 사진을 갖고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이 사진과 율법을 비교해 보신다. 그분은 각 사람에게 그의 삶을 망쳐 놓은 결점들을 드러내어 보이시고 회개하고 죄에서 돌아서라고 호소하신다(사인즈 1901. 7. 31).

29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네 오른 눈. 18:8, 9과 비교하라. 5:28에서 그리스도는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 곧 행동의 원인이 된 태도나 마음의 구조에 주의를 돌리기 위해 행동 이면을 살폈다. 여기서 그는 죄가 삶 속으로 들어오는 통로인 감각신경계를 가리키기 위해 동기나 태도의 이면을 살피고 있다. 대부분 죄의 가장 강력한 유인은 시각신경, 청각신경 그리고 기타 감각신경을 통해 마음에 이르러 온다(사도행적, 518).

죄를 연상시키는 것들을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만지는 것을 거절한 사람은 죄된 생각을 멀리할 수 있다. 순간적으로 악한 생각이 자신의 의식에 번뜩일 때 즉시 그 악한 생각을 물리치는 사람은, 기회가 생겼을 때 죄를 범하도록 마음에 조건반사를 일으키는 습관적인 사고양식의 발달을 피한다. 그리스도는 “사단의 궤변에 반응할 아무것도 그 속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죄 없는 생애를 살았다(시대의 소망, 123).

실족케 하거든. 헬라어 스칸달리조(skan- dalizo-). “올가미를 놓다”, “함정에 빠지게 하다”, “걸려 넘어지게 하다.” 올가미를 움직이는 데 사용하는 막대기를 의미하는 스칸달론(skandalon)에서 파생함(참조 롬 11:9; 14:13; 요일 2:10; 계 2:14).

빼어 내버리라. 어떤 의미에서 영생을 잃는 것보다 이 세상을 장님이나 불구로 살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여기서 비유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신체의 절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의 통제를 요구한다. 악한 것을 보려 하지 않는 것은 완전히 자신을 장님이 되게 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으며, 시력이 보존되고 그것을 좋은 것들에 사용할 수 있는 부가적 이익을 얻는다. 여우는 발이 덫에 단단히 걸려 있을 때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자신의 발을 물어 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마뱀은 자신의 꼬리를 희생시키고, 바닷가재는 자신의 집게발을 희생시킬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눈을 빼어버리거나 손을 찍어버리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악을 경계하기 위해 의지가 동반되어야 하는 결연한 행동을 비유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눈과 언약을 세운” 욥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 현명하다(욥 31:1; 참조 고전 9:27).

지옥. 헬라어 게엔나(geenna, 참조 22절 주석).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네 오른손. 그것은 곧 악한 욕망의 도구를 의미한다(참조 29절 주석).

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버리거든. 헬라어 아폴뤼오(apoluo-). “놓아주다”, “해방시키다.” 여기서는 “이혼하다”라는 의미.

이혼 증서. 헬라어 아포스타시온(apo- stasion). “분리하다”, “갈라놓다”의 의미를 가진 아피스테미(aphistemi)에서 파생함. 영어 단어 “배교”(apostasy)도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후에 그리스도께서 지적한 것처럼, 이혼은 하나님의 원래 계획의 일부가 아니었으나 남성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모세의 율법에서 잠정적으로 승인한 것이다(19:7, 8). 이혼에 관계된 모세의 율법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는 신 24:1~4 주석을 참조하라.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제도화하지 않았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모세가 결혼의 악용을 막기 위해 그것을 묵인하고 규정을 만들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신 24:1이 아니라, 창 2:24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하였으나. 참조 21절 주석.

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음행. 헬라어 포르네이아(porneia). 일반적으로 부정한 성관계에 적용되는 용어. 자유주의적인 힐렐(Hillel)학파는, 남자는 아내가 그의 음식을 태운 것과 같은 아주 사소한 이유로도 이혼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Mishnah Git.t.in 9. 10, Soncino ed. of the Talmud, 436, 437; 참조 산상보훈, 63). 그러나 좀 더 보수적인 샴마이(Shammai) 학파는 신 24:1에 나타난 “수치 되는 일”이란 표현을 “천박한” 또는 “음란한”이란 의미를 함축한 “어떤 온당치 못한 일”을 뜻한다고 해석했다(Mishnah Git.t.in 9. 10, Soncino ed. of the Talmud, 436). 그러나 예수는 간음한 경우를 제하고는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다. 결혼관계가 죄로 인하여 곡해되었으며, 예수는 창조주가 제정한 결혼관계에 원래의 미와 순결을 회복시키기 위해 왔다(참조 신 14:26 주석).

결혼제도는 인간에게 복을 주고 향상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로 계획되었다. 남편과 아내의 교제는 그리스도인 품성을 완성시키기 위한 이상적인 환경으로 하나님이 제정했다. 결혼생활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성격 조정과 이 일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딪히는 곤경들은 자기억제의 훈련과 희생을 요구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 그리스도인들이 결혼관계에 들어갈 때 여기에 진술된 원칙들을 적용할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이 원칙들을 적용하는 남편과 아내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자신들의 생활 속에 그러한 원칙들을 기꺼이 시행하려고 하는 자들은, 아무리 심각하게 보이는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은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성격이 서로 맞지 않을 경우 그리스도인의 해결 방법은 자신의 성질을 바꾸는 것이지, 결코 배우자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간음함이니라. 버림받은 아내는 당연히 새 가정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함으로 이전 결혼관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게 결말지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간음을 행한 것이 된다(참조 막 10:11, 12). 그리스도는 그 당시 랍비들의 전통, 특히 어떠한 경우든 이혼을 허용한 힐렐 학파(위의 항목 “음행”을 참조하라)의 전통을 대담하게 파기했다. 미쉬나 시대의 유대인들 사이에는, 남편이 갑작스럽게 법적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결혼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왔다. 예수는, 결혼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올바르게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비준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하나님이 함께 맺어준 것을 어떤 랍비의 전통이나 관습이 나눌 수 없다.

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또. 이것은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적인 해석의 세 번째 실례다.

말한바. 다음에 나오는 말은 정확한 인용이 아니고 레 19:12; 출 20:7; 민 30:2; 신 23:22의 가르침의 요약이다.

헛맹세를. 헬라어 에피오르케오(epiorkeo-). “거짓 맹세하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말한 것에 대한 진실 또는 어떤 행동의 실행에 대한 약속을 확언하는 엄숙한 진술을 가리킨다. 그는 일반적 의미의 신성모독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맹세, 특히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맹세함으로 그 이름을 수치스럽게 모독하는 거짓 맹세에 대하여 말한다.

네 맹세한 것을…지키라. 그리스도는 여기서 약속, 특히 하나님께 한 약속에 대하여 말한다. 하지만 그는 약속한 것이 무엇인가보다는, 그것이 무엇이든 약속은 선히 이루어져야 함을 중요시한다. 그는 약속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약속이 이행되는 방식을 강조한다. 하나님께 한 서원의 엄숙함과 파기할 수 없음에 대해서는 레 19:12; 민 30:2; 신 23:21 주석을 참조하라.

너희가 들었으나. 참조 21절 주석.

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참조 22절 주석.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예수는 엄숙한 법적인 선서(산상보훈, 66; 참조 26:64 주석)가 아니라 유대인들 가운데 보편적인 맹세를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확언하는 말 앞에 “내가 맹세한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 그 진술이 맹세가 된다. 그러나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맹세로 수락한 의무들로부터 자신들을 면제하기 위한 여러 방책들을 고안해 냈다. 종종 유대인들의 맹세에 포함된 궤변에 대한 그리스도의 태도는 23:16~22에 훨씬 상세히 설명돼 있다.

가야바 앞에서 그리스도 자신도 맹세로 대답했다(26:63, 64). 바울은 거듭 자신이 말한 것이 진실임을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웠다(고후 1:23; 11:31; 참조 살전 5:27). 십계명이 금하는 것은 서약이 아니라 거짓 맹세다(출 20:7, 16). “맹세하에 시종일관 모순되지 않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곧 그리스도인이다”(산상보훈, 67).

진실을 말하려는 의향이 사람의 마음속에 있을 때 맹세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맹세하는 관례는 어떤 사람이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말하는 것이 다른 때에 말하는 것보다 더 신뢰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모든 관계에서 진실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은 햇빛처럼 투명해야 한다”(산상보훈, 68).

하늘로도 말라. 랍비들은,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거슬리지 않게 대체하거나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로 맹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난할 것이 못된다고 주장했다(Mishnah Shebu‘oth 4. 13, Son- cino ed. of the Talmud, 202, 203).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35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사 66:1과 비교하라. 하나님과 비교할 때 그 땅과 그 땅 거민들의 하찮음을 강조하는 하나의 시적 표현이다(참조 사 57:15; 전 5:2; 애 2:1).

큰 임금. 하나님을 의미한다.

36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네 머리로도. 또 다른 맹세의 관용적 표현.

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너희 말은. 엡 4:29과 같은 성경 구절들과 비교하라.

옳다 옳다. 약 5:12과 비교하라. 그리스도인들, 즉 말을 존중하는 사람들에게 옳다 또는 아니다라는 단순한 대답은 중대한 선언만큼이나 큰 비중과 신뢰성을 갖는다.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또는 “악한 자로 좇아 나느니라”(참조 마 13:19; 요일 3:12).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눈은 눈으로. 이 율법이 제정되었을 때 그것은 고대에 보편화된 피의 보복법 제도를 능가하는 하나의 큰 진전이었다. 피의 보복법 제도 아래서는 받은 상해를 복리(複利)로 보복하는 것이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그 율법은 시민법이었으며, 그 처벌은 법정의 지시에 따라 실행되었다. 그것은 개인적인 보복을 정당화하지 않았다(산상보훈, 70). 함무라비법에 나타난 유사한 규정에 대해서는 제1권, 716, 717을 참조하라.

너희가 들었으나. 참조 21절 주석. 그리스도는 율법의 정신에 대한 네 번째 예증을 율법의 단순한 외형적 순종과 대조해서 제시한다. 38~42절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의 손에 상처를 입었을 때 취해야 할 태도와 관련된다.

이 구절의 인용은 출 21:24; 레 24:20; 신 19:21에 근거한다(참조 출 21:24 주석).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참조 22절 주석.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이것은 부당하게 받은 고통에 대해 보복하지 말라는 말이다. 예수는 여기서 소극적인 저항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적개심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악”은 사람에게 행한 악과 사람에 의해 행해진 악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인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길 것”이며(롬 12:21), 그렇게 함으로 그에게 해를 끼친 자의 머리에 “핀 숯을 놓는” 셈이 된다(잠 25:21, 22).

뺨. 21~47절에 열거된 모든 다른 예증과 마찬가지로, 예수는 행동 자체보다는 행동을 유발시킨 정신에 더욱 관심을 갖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 그는 상처를 가할 기회를 찾기보다는 상처를 감수한다. 예수는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행하지는 않았지만 몸소 이 명령의 정신을 완전히 준수했다(요 18:22, 23; 참조 사 50:6; 53:7). 바울도 문자적으로 지키지는 않았다(행 22:25; 23:3; 25:9, 10).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자신에게 고통을 가한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께 요청했을 때(눅 23:34), 자신이 여기서 말한 그 정신을 나타냈다.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너를 송사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서.” 헬라어의 의미로 볼 때 아직 재판이 시작되지 않았고, 단순히 법적인 조치를 취하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속옷. 헬라어 키톤(chito-n). 살갗에 직접 착용하는 셔츠 같은 속옷.

겉옷. 헬라어 히마티온(himation). 이것은 키톤과는 대조적으로 보통 밤에 이불로 사용하는 “외투” 곧 겉옷을 말한다. 가난한 자들은 때때로 대여를 위한 담보물로 제공할 것이 “망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채권자가 그 옷을 담보물로 밤새도록 보유하는 것을 금한다(출 22:26, 27). “겉옷”을 “속옷”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겉옷을 아무 저항 없이 양도한다는 것은, 특히 율법이 사람에게 그 옷에 대한 어떤 권리를 부여한 사실로 볼 때 대단한 양보를 나타낸다.

가지게 하며. 그리스도인은 잠잠하고 온유하게 부당 행위를 감수한다.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억지로. 헬라어 앙가류오(aggareuo-). “억지로 봉사하게 하다.” 동계어 명사 앙가로스(aggaros)는 “말 탄 관리”를 뜻하는 페르시아어에서 차용한 말이다. 페르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이 단어는, 그들이 놀라울 만큼 효율적인 제도로 발전시킨 제국의 우편 일에 종사한 궁정 관리를 가리킬 때 사용했다(참조 에 3:13 주석). 로마 시대에 앙가류오와 앙가로스는 병기를 수송하는 강제 노역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에픽테투스(Epictetus, iv. 1. 79)는 이 노역에 대해 충고한다. “만일 징발이 있어서 병사가 그것을(그대의 나귀) 강탈하려 한다면, 내버려두라. 저항하거나 불평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먼저 얻어맞고, 결국 나귀도 잃게 될 것이다.” 저항은 잔인한 행위를 불러온다. 마 27:32와 막 15:21에서 앙가류오는 시몬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라고 강요할 때 사용된다.

예수는 로마 병사가 강제로 징발된 유대 민간인에게 법에 규정된 대로 자신의 짐을 1.6킬로미터까지 지고 가라고 강요한 상황(참조 눅 3:14)과 같은 실례를 언급했다. 그리스도인은 법이 요구하는 봉사의 두 배를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다. 가버나움은 로마 수비대의 주둔 도시였으므로 예수가 말할 때 청중들은 로마 병정들이 길 가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산상보훈, 70).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오만을 꺾어주길 바랐으며 그렇게 믿었다. 여기서 예수는 로마의 권위에 복종하라고 권면했다.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거절하지 말라. 천국 시민은 너그러운 마음을 갖고, 너그러운 마음을 좇아 행동해야 한다(참조 눅 6:30 주석).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네 이웃.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태생에 의해서나 유대교로 개종함으로 동포가 된 이스라엘 사람이었다. 심지어 혼혈인 사마리아 사람들도 동포 중에서 제외되어 이방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29~37)에서 예수는 만민 형제, 이웃관계를 선포함으로 이런 편협한 생각을 일소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인종이나 신조가 무엇이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한다. “이웃”은 문자적으로 “가까이 거주하는 사람”을 뜻한다.

사랑하고. 헬라어 아가파오(agapao-). 영어의 “사랑”(love)이라는 단어는 아가파오가 본래 갖고 있는 의미의 풍부함을 충분하게 반영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사랑”은 너무도 다른 많은 것들을 의미하고 너무도 많은 다양한 생각들을 전달하기 때문에 이 말로는 아가페(agape)의 참 의미가 흐려진다. 헬라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표현하려는 사상을 전달할 수 있는 세 단어가 있다-아가판(agapan), 필레인(philein), 에란(eran).

필레인은 일반적으로 정서나 감정에 근거한 감상적인 애정을 묘사한다. 그것이 감정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의 기복에 따라 변화되기 일쑤다. 에란은 열정적이고 관능적인 “사랑” 곧 본질적으로 육체적인 면에 작용하는 사랑을 나타낸다. 어떤 형태의 도취도 이러한 “사랑”의 다양성 아래 분류될 수 있다. 에란은 신약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아가판이 신약에서 필레인과 대조적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존경과 경의에서 나온 사랑을 말한다. 아가판은 원칙이 감정을 지배한다는 측면에서 감정에 원칙을 더한다. 또한 정신과 지성이라는 더 높은 힘을 유발한다. 필레인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만을 “사랑”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아가판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까지 사랑을 확대한다. 에란은 순전히 이기적이며 필레인도 때때로 이기심으로 훼손될 수 있지만, 아가판은 이기심이 전혀 없다.

명사형인 아가페는 거의 성경에만 국한되어 있다. 신약의 아가페는 가장 고결하고 순수한 형태의 사랑이다. 이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는데, 곧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다(요 15:13).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의와 동료 인간에 대한 존경을 함축한다. 그것은 품성을 변화시키고 충동을 억제하고 격정을 제어하고 애정을 품위 있게 하는 사상과 행동의 거룩한 원칙이다(참조 눅 6:30 주석).

네 원수를 미워하라. 이것은 레 19:18에서 인용한 구절의 일부가 아니고, 널리 알려진 격언임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거나 경멸하는 것은 자아 속에 있는 교만의 자연스런 발로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생각하고(요 8:33; 참조 마 3:9 주석),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하게 여김으로(참조 눅 18:11) 모든 이방인을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수는 마치 “율법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한다”(참조 5:44)라고 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그는 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이며(45~48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마 5:45; 요일 3:1, 2).

하였다는 것을. 참조 21절 주석.

너희가 들었으나. 참조 21절 주석.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참조 22절 주석.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롬 12:20과 비교하라. “사랑”을 뜻하는 아가판(agapan)은,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참조 5:43 주석) 정서적 사랑을 묘사하는 필레인(philein)과는 대조적으로 존경에서 나온 사랑을 나타낸다. 만일 그 명령이 사람들에게 원수를 필레인하라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명령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직계 가족들에게 느끼는 것과 똑같은 정감어린 애정의 온기를 원수에게는 느낄 수 없으며 기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필레인은 자발적이고 감정적이어서 신약 어디에도 명령되지 않은 사랑이다. 이와 반대로 아가판은 명령되어야 하고, 명령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지의 통제 아래 있기 때문이다.

[축복하며]. “악한 목적으로 너희를 이용하는”이란 말뿐만 아니라, 이 선언의 두 번째와 세 번째 구절을 생략한 본문상의 증거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이런 고대 증거를 따른다면 그리스도는 단순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한 것이 된다. 눅 6:27, 28과 비교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늘에 계신. “하늘에 계신 나의(너희의) 아버지”라는 표현은 마태의 특징이다.

너희 아버지의 아들. 문자적으로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 그들은 아버지의 품성을 닮는다(산상보훈, 75; 참조 43, 48절 주석).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평가 기준은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요일 4:20).

악인과. 예수는 천연계에서 뽑은 명백한 예증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죄인들에게는 복을 거둬들인다는, 유대인들에게 널리 퍼진 잘못된 생각을 일축했다(참조 요 9:2 주석). 유대인들은 하나님에게도 그들이 느끼는 것과 똑같이 죄인과 비유대인을 증오하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의 축복이든 구원의 축복이든,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행 10:34, 35)신다.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를 사랑하는. 참조 43절 주석.

무슨 상이 있으리요.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특별한 명예가 되겠는가? 그것에 대해 특별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참조 마 7:12; 눅 6:32, 35 주석.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평화”를 의미하는 동양의 보편적인 인사인 샬롬(s∨alom) 또는 살라암(salaam)은 문안받는 사람이 모든 영적 및 물질적 축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뚜렷한 소망을 나타낸다. 참조 9절 주석.

이방인들. 다른 모든 사람들도 행하는 일이라면 칭찬받을 이유가 없다. 참조 6:7.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러므로…너희도…하라. 아마도 48절이 43~47절에 있는 사상의 흐름과 좀 더 밀접하게 관련돼 있겠지만, 그리스도는 이 말로 21~47절에 언급된 천국법의 더 높은 영적 적용인 여섯 가지 예증에서 이끌어낸 결론을 소개한다. 이 모든 예증을 통해 그리스도는 자신이 와서 건설하려는 천국에서 품성의 완전을 결정하는 것은 내적인 태도와 동기이지 외적인 행동만이 아님을 보여 준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본다(삼상 16:7).

온전하라. 헬라어 텔레이오스(teleios). 문자적으로 “목표에 도달한 사람” 또는 “완전한”을 뜻하며 “끝”, “성취”, “완성”, “한계”를 의미하는 텔로스(telos)에서 왔다. 헬라 문헌에서 텔레이오이(teleioi)는 흠 없는 희생제물, 충분히 성숙한 동물,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 잘 훈련되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전문가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바울은 “온전한 자들”(고전 2:6)과 “온전히 이룬 자들”(빌 3:15)에 대해 말한다. 동시에 그는 도달해야 할 새로운 고지가 있다는 것과 자신은 아직 궁극적 완전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텔레이오이는 신약에서 육체적 및 지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나타내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고전 14:20, “장성한 사람”; 히 5:14, “장성한” 자). 이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탐(tam)에 대해서는 욥 1:1; 잠 11:3, 5 주석을 참조하라.

예수가 여기서 다룬 것은 금생에서 절대적인 무죄함이 아니다(참조 정로의 계단, 62; RH March 18, 1890). 성화는 점진적으로 이뤄질 사업이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고 행함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피곤하게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빈틈없는 율법주의로 인해 그것의 자구(字句)적인 세목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므로 율법의 정신에는 완전히 눈멀게 되었다(참조 23:23). 산상 설교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의 관심을 밀 껍질에서 밀알로 환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율법을 목적 자체로 만들었으며, 다시 말해 그 자체를 위해 지켜야 할 어떤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의 목적이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과, 인간 동료를 향한 자아 희생적인 사랑의 높은 이상으로 시선을 끌어올리는 것임을 망각했다(22:34~40).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의는 악한 행위를 초과한 선한 행위가 하늘에 있는 각 사람의 계정에 기입되는 데 있다고 가르쳤다.

48절과 45절(5장)의 관계를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45절)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온전하”게 되는 것(48절)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품성 건설의 완성―주님은 그의 구속받은 가족들에게 완전을 요구하신다. 그는 품성 건설의 완성을 요구하신다. 아버지된 자들과 어머니들은 자녀들이 하나님과 협력하도록 그들을 훈련시키는 최선의 방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남자들과 여자들 그리고 청년들과 소년 소녀들은 그들이 가정 생활에서 나타내 보이는 그대로 하늘 저울에 나타난다. 가정에서 그리스도인이면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인이다. 가정 생활에서 실천하는 신앙은 헤아릴 수 없는 감화를 끼친다(원고 34, 1899).

완전한 사람의 생활―우리의 구주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참된 인간 관계를 맺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딸들이다.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법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인도하시는대로 따라가야 한다. 근 30년 동안을 그 분은 최고의 완전의 표준을 따라서 완전한 사람의 생애를 사셨다(편지 69, 1897).

~마라나타~

산상보훈 (마태복음 5: 1-12) 칼빈 주석 번역

산상보훈 (마태복음 5: 1-12) 칼빈 주석 번역

마태복음 5장 1-12절 산상보훈 말씀 칼빈 주석 번역

출처: https://www.ccel.org/ccel/calvin/https://www.ccel.org/ccel/calvin/comment3/comm_vol31/htm/ix.xli.htmcomment3/comm_vol31/htm/ix.xli.htm

산상보훈 성경 본문

마태복음 5:1-12 산상수훈 누가복음 6:20-26

마태복음 5 장

제 5 장

복이 있는 사람(눅 6:20-23)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누가복음 6:20-26

복과 화를 선포하시다(마 5:1-12)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산상보훈에 대한 칼빈 주석

마태복음 5:1

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경건하고 겸손한 독자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의 요약을 보며 기뻐할 것이다. 그 첫번째 가르침은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그가 말씀하신 것이다.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진정한 행복에 대하여 말씀하셨을까 보자. 우리는 대부분 사람들이, 지식있는 사람들까지도, 불편이 없고, 원하는 것을 다 가졌고, 기쁘고 안이한 삶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오류를 붙든다. 적어도, 일반적 견해는 행복은 현재 형편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이 십자가를 지는데 익숙하게 하기 위하여, 육신을 따라서 쉽고 번창하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드러내신다. 십자가와 환란의 고통을 감해주고 달콤하게 만드는 유일한 위로는 비참함 가운데서도 우리의 인내가 주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고, 행복한 결과가 곧 있을 것이라서 우리는 행복하다는 신념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보통 견해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의 행복과 다르며,육신의 정욕과 다른 철학을 배워야 한다. 육신의 이성은 그리스도께서 여기 가르치시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 가르침의 주된 목적은 악한 자들의 비난에 눌렸을 때, 또 갖은 재앙에 놓였을 때, 불행하지 않는다는 것 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현 상황에 의해서 인간의 행복을 가늠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며, 경건한 자들의 고통이 곧 변해서 낳아질 것을 증명할 뿐 아니라, 그의 백성들을 인내하라고 격려하며 보상의 소망을 붙들라는 것이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누가복음 6:20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많은 사람의 가난은 저주받은 것이요, 불행하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의도를 더 명백하게 드러낸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눌리나, 속으로는 교만하고 잔인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고통을 받고 연단되고 복종하며,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내적 겸손함을 가지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보호받기 위하여 맡기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를 자기 것으로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고, 육신의 모든 자신을 전적으로 비워 그들의 가난을 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누가와 마태의 단어들은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난한 자들이란, 환난으로 인하여 눌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가르킨다. 유일한 차이는 마태는 행복을 십자가 훈련 아래 겸손하기를 배운 자들에게 국한 시킨다는 점이다.

천국이 그들의 것이니라.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 자신의 백성의 마음을 근거 없는 믿음으로 부풀게 하지 않고, 스토익들 같이 감정 없는 완악함으로 강퍅하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영생의 소망으로 기쁘게 하며, 그들에게 확신을 줌으로 인내하게 일깨워서 그들로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은 우리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 자신 안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한다. 한편, 심령이 상하고 절망으로 가득해서, 하나님께 불평하는 자들은 교만하고 오만한 영을 가진 자들이다.

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문장은 그 앞에 말씀과 가까이 연결되어 있어, 그 말씀의 부속이거나 확증 같은 것이다. 보통 관점은 재앙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항상 애통과 슬픔을 가지고 다닌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실제로, 어떤 것도 행복과 애통함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불행하지 않다고 주장하신다. 그는 보여주시기를, 그 애통함 자체가 행복한 삶에 기여한다고 한다. 이는 그들이 영원한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준비하기 때문이며, 하나님으로부터만 진실한 위로를 흥미를 가지고 추구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말한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로마서 5:3-5).

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함으로 그가 뜻하는 것은 부드럽고 젊잖은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데, 이들은 쉽게 상처로 하여 화내지 않고, 어떤 것도 참아내면서, 악한 자들의 행동을 따라 하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사람들에게, 우리에게는 매우 바보스럽게 보이지만, 이 땅을 기업으로 약속하신다. 어떤 공격도 따끔히 물리치며, 그들의 손은 상함 받은 것을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 오히려 그들 스스로 땅을 다스릴 자라고 주장하지 않을까? 경험상으로 볼 때 악한 자들의 악을 친절하게 대응하면, 그들은 더욱더 대담해지고 무례해 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친히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심으로 당당하게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음으로, 해를 받으면 무섭게 응징한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을 “전쟁 무기”를 가지고 지킨다 (에스겔 32:27).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만이 우리 생명의 보호자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서 남아 있는 모든 것을 그의 날개 그늘 아래 숨겨야 한다 (시편 17:8). 만약 우리가 그의 양 떼에 속하려면, 우리는 양이 되어야 한다. 방금 말한 것이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반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섭게 흉포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불안감으로 어떻게 흔들리는지 생각해 보라고 나는 제안할 수 있다. 그들이 폭풍 같은 삶을 살면서, 그들은 백 번도 더 땅의 주인 노릇을 했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면에 그들이 자기 발을 자기들의 것이라는 것에 두지 못해도, 그들은 땅에서 조용한 삶의 거처를 누린다. 이것은 상상적인 소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거주하는 땅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임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하나님의 손은 그들을 악한 자들의 폭력과 분노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 간섭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갖가지 종류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고 악한 자들의 악의에 대상이요, 여러 가지 위험에 둘러 싸여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안전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첫 맛을 이미 적지만 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날 세상의 상속자로 소유하기까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을 칼빈은 수사학적 표현으로 보고, 그 뜻하는 바는 가난을 경험한다는 것과 생활에서 필요한 것이 없는 것과 심지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것까지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마태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라고 말하는데, 그렇게 하여 한 종류의 사람이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한다. 비록 그들이 염려하거나, 신음하거나, 합당한 것을 갈망해도 그들이 부적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그는 강조한다.

“비록 그들의 바램이 지극히 겸손하며, 그들이 합당한 것 외에 어떤 것도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더라도, 그들은 배고픔으로 굶주린 사람들처럼 말라가는 현상에 여전이 놓여있는 바로 그들이 복되도다.” 비록 고통스러운 고민이 그들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도, 이는 행복을 위한 준비라는 것이다. 이는 마침내 그들은 만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신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정당한 욕망을 곧 만족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가 성처녀의 노래에서 배우듯이, 그는 배고픈 자를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이다 (누가복음 1:53).

7.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역설은 또한 사람의 판단과 상반된다. 세상은 자기의 안위를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을 복되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고통을 견디도록 준비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하는 사람들, 비참한 사람들을 돕고, 고통 받는 자들과 기꺼이 함께 하며, 자신들을 그들과 같은 사랑으로 옷 입고, 그들을 더 잘 돕기 위하여 기쁘게 노력하는 자들을 복되다고 하신다. 그는 덧붙인다.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 하나님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행을 실천하도록 허락하신 사람들 가운데서도 그렇다. 비록 온 세상이 감사를 모르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최악의 보상을 할 때도 있지만, 기억할 것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며 선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위해서 은혜를 베푸셨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때에 은혜롭고 긍휼이 풍성하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시편 103:8; 145:8).

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리스도께서 여기 하신 말씀이 모든 사람의 판단과 조화를 이루는지에 대하여 공곰히 생각하게 된다. 마음의 청결이란 모든 덕의 어머니와 같이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 명의 한 명도 빠짐없이 가장 귀한 덕의 자리에 궤휼을 앉힌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보통 복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속임수를 성공적으로 사용하는데 천재성을 발휘하며, 그들과 교제하는 사람들을 간접적 방법으로 기술 좋게 이용한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적 이성과 전혀 동의하지 않으시고, 오직 속이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 사람들과 신실하게 대화하는 사람, 그들의 마음에 느끼지 않는 말이나 표정을 짓지 않는 사람을 복되다고 하신다. 단순한 사람들은 주의력이 부족하다고, 그리고 자신들을 더 예리하게 관찰하지 않는다고 조롱을 받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더 높은 것을 바라보게 이끄시며, 만약 그들이 이 세상에서 속이는 꾀를 가지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즐거워하게 될 것을 생각하라고 명하신다.

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라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평화를 구할 뿐 아니라, 그들의 능력 안에 있기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과 사이에서 차이를 잘 해결하려고 노력해서, 논쟁을 피하며,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도록 충고하는 자들이며, 증오와 싸움의 모든 기회를 제거하는 자들을 뜻하신다.

이 말씀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자들을 화해시키는 것은 힘들고 귀찮은 일이지만, 부드러운 성품을 지닌 사람들은 화평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연구하며 모든 방향에서 오는 비방과 불평과 항의를 듣는 치욕을 견뎌내어야 한다. 그 이유는 각자 대변자들을 가지기 원하며, 자기의 송사를 변호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총애를 의지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평화를 진작시켜나갈 때, 비록 사람들에게 우리의 노력이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우리를 자녀라고 여기시는 그의 아버지의 심판만을 바라보라고 명하신다. 이는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기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이 것임이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가르침이 크게 필요하다. 그리고 육신이 너무 힘들어 하고 싫어할수록 더 진지하게 우리는 이 주제를 묵상해야만 한다. 우리는 세상의 큰 부분이 증오로 우리를 대항하여 일어나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기까지 추격해 오는 데까지 이르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없다. 사탄은 세상의 왕자로,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대항하여 증오심을 가지도록 분노로 그 추종자들을 채우는 것을 결코 쉬지 않을 것이다. 의로운 삶을 살아가려고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는 방법으로 공격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게 되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괴상하고 부자연스럽다. 그래서 베드로는 말한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베드로전서 3:13)

그러나 세상의 고삐 풀린 악의 결과로 그러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 선한 사람들이 의를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을 통해서, 불경건한 자들의 진노가 그들을 향하여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말하듯이, 보통 그리스도인들의 운명은 사람들 대다수에게 미움을 받는 것이다. 육신은 복음의 가르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악덕을 책망 받는 것을 아무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

이는 그들을 대항하여 악한 자들이 증오의 불을 붙이며, 진노를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선하고 바른 일을 하는 진지한 욕망을 통해서 그들은 그들의 능력 가운데 있는 한에서, 나쁜 일들을 대적하며 선한 일들을 옹호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첫 지위를 정당하게 가진다. 따라서, 이러한 표지로,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순교자들과 죄수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구별한다.

칼빈은 방금 말한 것에 다시 돌아간다. 곧 모든 경건하게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은, 바울이 예고한 것처럼, “핍박을 받을 것이다.” (디모데후서 3:12). 이 경고는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주어진 일반적 언급이다. 그러나 만일, 어느 때나, 주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아끼셔서, 불의한 자들이 우리를 그들이 원하는 것만큼 괴롭히지 못하게 하신다면, 그러한 휴식과 여가 기간에, 우리는 이 가르침을 묵상하고 필요할 때 언제나 전투에 나갈 준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경건한 자의 형편은 그 생애 전체를 통해서 매우 비참함으로, 그리스도께서 합당하게 그들을 천국의 소망으로 불러 주신다. 여기 그리스도의 역설은, 각자는 그 마음에 만족해야 한다고 명하며 그의 행복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스토익들의 부르짖음과 전적으로 다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행복을 형체 없는 상상 위에 세워 놓지 않으시고 미래의 보상의 소망 위에 세월 놓으신다.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누가복음 6: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을 위로하려고 하셨다. 세상의 눈에 그들이 미워하는 자로, 그들이 자신들이 비췰 때도 용기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교회 밖으로 불경건하고 세속적이라고 파문을 당하는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유혹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위선자들처럼 독이 가득한 자들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복음의 원수들이 분노가 가득한 광기를 가지고 자신의 적을 경멸하고 공격할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확실한 방비로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큰 비방이 그들을 놀라게 할지라도 항복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이 그들의 회당에서 쫓아내었드이, 교황이 파문해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그 뜻은 구원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당한 비방에 의해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의 마음을 천국을 향하여 들면, 우리는 거기서 슬픔을 몰아낼 기쁨의 큰 근거를 바라보게 된다.

교황주의자들의 게으른 합리화는 “보상”에 있다. 그러나 보상과 공로와의 사이에 그들이 몽상하는 상호관계는 없다. 오히려 보상의 약속은 거저 주시는 것이다. 이 밖에도, 만약 최선의 사람들이 행한 어떤 선한 일들 속에서라도 불안전함과 잘못들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셔서 보상을 받을 만한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한 번 더 주의를 돌려서 두 구절을 살펴 보자. 나 때문에, 혹은 인자 때문에 (누가복음 6:22), 그리고 거짓말을 하며, 너를 대항하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 자기의 잘못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은 (베드로전서 2:20) 그가 그리스도의 순교자라고 자랑하지 못할 것이다. 고대의 도나티스트들은 재판관들이 그들을 대적했을 때, 단순히 이 한 가지 근거로 그들 자신이 기뻐했다. 우리 시대에는 재침례파들이, 교회를 그들의 헛소리로 소란하게 하며 복음을 비방하면서도,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으나, 그들은 정의롭게 정죄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의를 위하여 부르심 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은 복되다라고 선포하신다.

이 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사도들은 승리하기 위하여 노력과 경쟁을 겪어야 했고, 핍박을 당할 때 실패하지 않을 것을 확실히 약속해 주셨다. 모든 것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성경에 어디서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들은 어리석게 그리스도의 나라를 부와 사치로 가득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경고하는데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위치로 성공하는 순간, 그들은 선지자들이 이전에 관여했던 같은 투쟁을 해야만 하였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

이것은 그들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시간적으로 먼저 되어서 존경하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그들이 그들 자신과 같은 동류였음을 뜻한다. 그래서 그들의 본을 받아야 했다.

누가복음 6:24 부한 자들은 화가 있으리로다. 누가는 네 가지 축복을 말했다. 이제 그는 네가지 저주를 대조시킨다. 그래서 그 구절들은 서로 대응한다. 이 대조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공포를 줄 뿐 아니라, 믿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들이 세상의 속이는 헛되고 텅빈 유혹에 잠들지 않게 하려 함이다.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번영에 중독되는지, 아첨에 잘 넘어 가는지 알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주 타락한 자들이 모든 일에 번영하고 잘 나가는 것을 시기한다.

그는 부한 자들에게 저주를 발한다. 모든 부한 자들이 아니라, 세상에서 안위를 받고 장차 올 삶을 잊고 있는 부한 자들을 저주한다. 부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멀다. 부는 자주 그들을 파멸하는 도구가 된다.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부한 자들은 천국에서 소외되어 있지 않다. 만약 부가 그들을 유혹하게 허락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땅에 그들의 소망을 고정하면 천국은 그들에 대하여 닫힌다. 이것을 어거스틴은 자세하게 증거한다. 그는 부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고 보여주면서, 그는 독자들에게 가난한 나사로가 부자 아브라함의 품에 영접되었음을 상기 시킨다.

25. 배부른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지금 웃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같은 맥락으로, 주께서는 배부르고 만족한 자들에게 저주를 발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재 삶에 주신 복을 의지하여 교만하고 하늘의 축복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이 웃음에도 적용된다. 이는 웃는 자들이란 에피큐러스적인 쾌락을 좇는 육신의 즐거움에 빠진 자들을 가르키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갖가지 고난을 비웃기 때문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를 칭찬하면 저주가 있을찌어다.

마지막 저주는 야망을 고치려고 의도하는 교훈이다. 이는 인간의 칭찬을 구하는 것처럼 천한 것이 없기 때문이요, 이는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그런 길을 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주께서 사람의 칭찬은 그들의 파멸이라고 지적한다. 이 경고는 특별히 선생들을 가르치는데, 그들은 야망을 어떤 염병보다 더 싫어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갈라디아서 1:10) 하나님의 순전한 가르침을 부패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에서, 모든 사람들을 언급하셔서,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자녀들을 의미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의 칭찬은 속이는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가르침을 가진 신실한 자들과 양심 있는 사역자들은 선한 사람들의 칭찬과 사랑을 즐거워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악한 호의를 여기서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바울이 우리에게 알려 주듯이 (갈라디아서 1:10),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의 종”이 될 수 없다.

마태복음 5장

<마태복음 5장 흐름정리>

널리 알려진 감람산에서의 설교, 즉 산상 설교의 내용으로 7장까지 이어진다.1~16절은 팔복으로, 산상 설교 전체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을 뿐아니라 천국 시민의 대헌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님은 천국 시민의 요건(특징)과 그에 대한 상급을 약속하고 있다. 이어 모세 율법의 몇 가지 특징적인 규례들(살인, 간음, 이혼, 맹세 등)이 언급되며 이에 대한 주님의 새로운 해석과 명령이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 율법을 철페하지 않으면서도(율법의 연속성) 율법의 완성자로서의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마태복음 5장 줄거리>

1. 그리스도가 산상 설교를 시작함.

3. 팔복을 선포함.

13. 세상의 소금.

14. 세상의 빛, 산 위에 있는 동네.

15. 등불.

17.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오심.

21. 살인.

27. 간음.

33. 맹세.

38. 악에 대해 인내하라고 권고함.

44.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권고함.

48. 온전을 추구하라고 권고함.

<마태복음 5장 도움말>

* 1절 : 무리를[사람들을] 보시고.

이 무리는 예수가 갈릴리의 여러 성읍과 촌락을 다닌 첫 번째 주요 선교 여행 후에 그를 따른, “허다한 무리”임이 분명하다. 산상 설교는 아마도 3년 반 선교 봉사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AD 29년 늦여름경에 행한 것이다. 산상 설교는 은혜의 왕국의 왕인 그리스도의 취임사이자 그 왕국의 헌법이다. 공식적인 왕국의 설립과 헌법 선포 직후에 제2차 갈릴리 여행이 시작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예수는 왕국과 그것의 원칙들 그리고 그 왕국의 능력이 백성들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방법들을 생생하고 완벽하게 설명했다.

* 6절 : 주리고 목마른.

특별히 이 은유는 연평균 강우량이 66센티미터 이상이 되지 않는 나라에서 설득력이 있었다. 팔레스타인에 해당되는 사항은 일반적으로 근동의 넓은 지역에도 해당된다. 팔레스타인은 넓은 사막지역에 접해 있으며, 거주민이 많은 지역까지도 비가 적은 반건조성 지역이다. 지금 예수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청중 가운데 많은 사람이 갈증의 고통을 경험했을 것임이 분명하다.

* 8절 : 마음이 청결한[마음을 깨끗이 한].

청결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삶의 지배적인 원칙인 죄를 포기했으며, 따라서 그들의 삶은 하나님께 남김 없이 봉헌되었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은 사람이 절대적으로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동기가 옳고 그리스도의 은혜로 과거의 잘못에 등을 돌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의 목표를 향해 좇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 9절 : 하나님의 아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좇는 개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분의 품성을 닮는 것을 뜻한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동료들을 그분과 화목하도록 인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 12절 :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생애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고 기뻐해야 한다. 고난이 천국 시민에게 필수적인 인내와 그밖의 품성의 특성들을 계발시키며, 이것은 시험 즉 시련에도 마찬가지다.

* 13절 :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리 소금이라고 해도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본질적인 특성을 잃어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이름만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의 명목상 천국 시민권은 우스꽝스러운 연극에 불과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품성을 반사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떠한 신앙 고백을 하든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 16절 : 너희 빛을 사람들에게 비취게 하여.

진리의 빛은 하늘에서 온다. 그러나 그 빛이 우리 자신의 삶을 조명할 때 우리의 빛이 된다.

* 18절 : 진실로.

헬라어 아멘(ame-n). 히브리어 아멘(’amen)에서 나왔음. “확고한”, “확립된”, “확실한”을 의미함. 히브리어 용법에서 아멘은 다른 사람의 말에 확실하고 강한 응답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 22절 : 라가.

그것은 조롱하고 욕할 때 사용하는 강한 경멸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장 무지하고 지위가 낮은 자들에게까지도 존경과 친절로 대할 것이다.

* 22절 : 공회[산헤드린 법정].

산헤드린, 유대인들의 최고 회의. 각 지파에서 6인씩 뽑힌 72인의 회의로서, 제사장, 장로, 바리새인, 서기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대 산헤드린이 아니라 지방 산헤드린 즉 지방 의회를 말함.

* 46절 : 세리.

당시에 세리들은 유대인들로부터 무거운 세금을 징수하여 일정액은 로마 제국에 바치고, 나머지는 착복하였기 때문에 동족들로부터 매국노로 낙인 찍혔고, 종교적으로는 죄인 취급을 당하였다. 본서의 저자인 마태도 이러한 세리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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