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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 하는 자 | 김성수 외식하는 자 막7장6 9 빠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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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외식하는 자 뜻 – Colorful Story

外(바깥 외), 飾(꾸밀 식)을 씁니다. · 아예 완전히 다른 뜻이지요. ·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외식하는 자는 ‘겉으로 보기 좋게 꾸미어 드러내는 자’라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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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onbada.tistory.com

Date Published: 11/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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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는 자란 무슨 뜻인가요? – 묵상노트 – 티스토리

마태복음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하는 자여” 이 합성어는 연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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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ybiblenotes.tistory.com

Date Published: 1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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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는 자처럼 기도하지 말라 (마 6:5) – 유니게

말씀 외우기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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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eunice.kr

Date Published: 1/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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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외식, 외식하는 자의 마음 – 네이버 블로그

외식,외식하는자,성경의 외식 외식에서 벗어나십시요 은밀한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실것입니다. 마태복음 5,6,7장은 날마다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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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8/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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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사전/주석 – 두란노닷컴

구약성경에서 외식하는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 혹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욥 8:13; 15:34-35; 17:8; 사 9:17; 33:14),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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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uranno.com

Date Published: 6/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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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ὑπόκρισις에 대하여 : IBP 일점일획

외식하는 자(ὑποκριτής)는 공관복음서에 18번 쓰였는데, 마태복음에서 압도적 … 마태복음은 외식하는 자(ὑποκριτής)에 대한 주님의 엄중한 경고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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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ibp.or.kr

Date Published: 5/3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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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하는자? 이중 인격자? 이중 잣대? – life of doulos

마태복음을 읽다보니 주님이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을… … 이 영어 표현 보다 훨씬 더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Source: lifeofdoulos.wordpress.com

Date Published: 6/30/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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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과: “화 있을진저 …… 외식하는 [자들]이여”

(요한복음 12:17~18)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까이 오시자, 큰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께서 오시는 길바닥에 자신들의 겉옷을 펴 놓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예수님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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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2/1/2022

View: 5008

마태복음 강해 (17) –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 (마 6:1-8).

이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 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를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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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mbbc.co.kr

Date Published: 5/19/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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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외식하는 자   막7장6 9
김성수 외식하는 자 막7장6 9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외식 하는 자

  • Author: 박삼용
  • Views: 조회수 15,085회
  • Likes: 좋아요 277개
  • Date Published: 2016. 3. 2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XaYlVc0qOcM

성경에서 외식하는 자 뜻

성경에서는 ‘외식하는 자’라는 구절을 볼 수 있는데요. 정확히 외식하는 자는 무슨 뜻일까요? 오늘은 성경에서 의미하는 외식하는 자 뜻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성경에서 외식하는 자 뜻

외식하다는 크게 2가지가 존재합니다.

① 외식하다 (外食)

집에서 직접 해 먹지 아니하고 밖에서 음식을 사 먹다.

*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밖에서 음식을 사 먹는 것인데요. 그때의 외식은 한자를 보시면 外(바깥 외), 食(먹을 식)을 씁니다.

② 외식하다 (外飾)

겉만 보기 좋게 꾸미어 드러내다 / 바깥쪽을 장식하다.

그리고 성격에서 말하는 외식이란 겉만 보기 좋게 꾸미어 드러내다는 의미로 외식의 한자는 外(바깥 외), 飾(꾸밀 식)을 씁니다.

아예 완전히 다른 뜻이지요.

2. 외식하는 자 의미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외식하는 자는 ‘겉으로 보기 좋게 꾸미어 드러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외식’이라는 표현은 겉으로 무슨 ~체를 한다는 의미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데모데전서, 베드로전서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데요.

참고로 성경에서 나오는 ‘외식’은 본래 그리스어로 휘포크리노마이(ὑποκρίνομαι)로 ‘~인 체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전적으로는 가면을 쓰고 연극하는 연극배우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성경에서는 가식, 위선을 가리키는 표현을 사용된 것이지요.

3. 외식하는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

– 서기관 바리새인들

성경 속에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매우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보았을 때는 성경적인 지식을 중무장했으나 실제로는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지요.

율법을 잘 외고 잘 지키는 것이 그들은 믿음이라고 여겼으나 예수가 보았을 때는 그것은 그저 탐욕과 방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4. 오늘날 대한민국의 수많은 외식하는 자들.

우리나라는 매우 흥미로운 나라입니다. 본래 기독교는 어디서 왔나요? 우리나라가 전혀 아니지요. 당연히 일제 치하였던 1940년 이전에도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들은 별로 없었을 것이고요.

그리고 1950년 6.25를 겪고 당연히 그 직후에도 별로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매우 늦게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2021년 조사 자료에 의하면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쳐서 21%가 기독교를 믿고 있고 불교는 16%라고 합니다. 다섯 명 중에 한 명 꼴로 기독교 를 믿고 있는 건데요.

기독교나 천주교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꽤 문제가 많지요.

대표적으로 교회 세습, 부정부패, 부의 축적, 그리고 잊을 만하면 떠오르는 목사들의 성범죄지요.

그중에서도 목사들의 성범죄는 정말 경악스럽습니다. 성경의 교리를 닳고 닳도록 외운 사람들이 성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여성 신도 성폭행은 흔하고 심지어 친딸을 성폭행하고, 처조카 등 아주 다양한 대상을 자신의 욕정을 푸는 대상으로 삼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목사 한 명 잘못 생기면 기본적으로 피해자가 줄줄이 소시지처럼 몇십 명씩 나오는 형국입니다.

아주 많습니다. 그냥 검색만 해봐도 흔해 빠졌지요.

너무 많아서 리스트로 나열하기도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나라가 하도 교회가 많으니 짐승은 일부겠지만,

감히 목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짐승은 일부여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교회 내 성폭력 가해자의 29%가 담임목사라고 합니다. 교회 내에서 발생하는 성범죄의 1/3을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것이지요.

신앙은 고귀합니다.

그러나 신에 대한 신앙이 고귀한 것이지, 그것을 설파하는 사람은 믿지 마십시오. 어차피 인간일 뿐이니까요.

진짜 존귀하고 숭고한 성직자는 카르투시오 봉쇄수도원급의 성직자가 아니면 사람은 다 똑같다고 봅니다. 카르투시오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고 침묵하고 고독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듣고자 하는 성직자들이 있는 봉쇄 수도원입니다.

이 정도 되어야 진정한 성직자라고 생각합니다. 처자식도 있고 자기 재산 있는 사람이 신의 목소리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최근 2030 세대에서 무신론자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매우 환영하고 있습니다.

신을 믿으시되, 사람은 믿지 마세요.

사람 중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입니다.

TIP. 알아두면 좋은 상식 미쁘다 뜻 (feat. 하나님은 미쁘시다)

마무리

오늘은 성경에서 외식하는 자 뜻에 대해 살펴보았는데요. 교회를 다니신다면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이 외식하는 자인지 잘 살펴보십시오. 특히, 매우 깨끗한 척하는 사람일수록 외식하는 자일 확률이 높습니다.

외식하는 자란 무슨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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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외식하는 자여” 이 합성어는 연극무대에서 사용하는 말로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배우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판단하다”와 “아래서”라는 두 헬라어에서 왔습니다. 연극배우의 실제 삶과 무대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다른 것처럼, 이 단어는 행동하는 것과 삶이 서로 다른 사람을 가리킵니다(눅 18:9).

“또 예수님은 자기가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비유로 말씀하셨다.”(누가복음 18:9)

이러한 종류의 행위에 대한 좋은 실례를 아이러니하게도 다윗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참조, 삼하 12:1-9).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호평을 받은 보기드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때 그는 외식하는 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가 임신하자 그것을 숨기려고 전장에 나가있는 우리아를 불러들여 자신의 죄를 숨기려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를 전투에서 사망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여 마치 불륜이 아닌, 결혼하여서 생긴 아이인 것처럼 꾸밉니다. 완전범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의로운척 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나단이라는 선지자를 보내어 비유적인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죄를 지적하지만, 나단이 말하는 이야기속 악인이 자신인지도 모른체, 노발대발하며 그를 벌하겠다고 큰 소리를 칩니다. 얼마나 이중적인 모습인지요?

다윗의 생애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누구든 외식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자기 의로 가득찬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마태복음에서만 여러차례에 걸쳐서 이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5:20; 6:2,5,16; 15:1,7; 23:13).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다른 그리스도인에 대해 우리의 배려가 마땅히 있어야 함을 나타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성도를 얕잡아보거나 자기 의를 내세우지 않을 것을 주문합니다. 오히려 그들을 창문이 아닌 거울로 삼아 자기 자신을 비춰봐야 합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이 보일 때 내 눈에는 대들보가 있을 수 있음을 알아 자신을 살피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비춰주십니다. 야곱에게 삼촌 라반은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사기꾼의 기질이 있던 야곱은 형과 아버지 이삭을 어머니 리브가와 공모하여 속였습니다. 그러한 그를 바로 잡기 위해 하나님께서 는, 그가 형의 칼끝을 피해 도망간 외삼촌 집에서 자기가 받을 품삯에 대해 열번이나 속는 끔찍한 일을 경험하게 합니다(창세기 31: 7). 어디 품삯뿐인가요? 심지어 아내도 바꿔치기 당하는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습니다.

“야곱이 아침에 보니 레아라”(창세기.29:25)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칠년을 하루같이 뼈가 부서지도록 일했는데(창세기 29: 18, 20), 그리고 마침내 첫날 밤을 맞이하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내가 바뀌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후 야곱은 진짜 사랑하는 아내 라헬를 얻기 위해 칠년을 무상으로 봉사해야만 했습니다. 야곱이 일찍 라반을 통해 자신을 보았다면 그는 훨씬 일찍 고통의 날들을 줄이고, 자신의 내면을 돌보고 성품을 가꾸는 일에 더 심혈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고만 있어야 하나요?

갈라디아서 6:1은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권면하고 고쳐줌에 있어서 가질 적합한 태도와 자세에 대해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했다면 성령님을 따라 사는 여러분은 온 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자신도 그런 시험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갈라디아서 6:1)

먼저 우리 자신을 살피는 거울로 삼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치 부모가 자녀를 대함같이, 내가 내 자신을 타이르고 바로 세우듯이 그렇게 형제에게 티끌에 대해(서만) 다가가야 합니다.

교회는 항상 그 지도자들과 각 구성원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며 권면해야 합니다.

•} 기도:

나의 하나님, 항상 저 자신을 먼저 살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남의 허물을 창문 삼아 타인을 쉽게 판단하고 비난하거나 정죄하지 않게 해주세요. 오히려 타인의 허물을 거울삼아 나 자신을 살피고 바로 잡는 은혜의 수단으로 일구게 해주세요. 혹 타인의 허물이나 단점을 말해야하거나 충고해야 할 때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하게 하시고, 늘 온유한 심정을 잃지 않게 하시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조심하여 행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곧 삶입니다. 삶은 이미 예배의 표현입니다.”- 라비 재커라이어스/ For the Christian, worship is co-extensive with life. Life is already an expression of worship.- Ravi Zachar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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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

성경의 외식, 외식하는 자의 마음

외식,외식하는자,성경의 외식

외식에서 벗어나십시요

은밀한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실것입니다.

마태복음 5,6,7장은 날마다 자신에게 적용시키며 묵상해야 할만큼

중요한 말씀입니다.

외식 …인 체하다 뜻으로

원래 가면을 쓰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을 가르키는 말이나 성경에서는 남에게 보이기위해 행동하는 가식적인 행동이나 위선을 뜻한다.

예수님은 이 외식하는 자들에게 자주 책망하셨는데 구제,기도,금식,판단이나 비판등에 있어 겉과속이 다름을 지적하셨다.

외식하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먼저 의식하기때문 이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사람들의 마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때문이며 간사하고 악한마음에서 나오는 결과이다.

외식하는자는 그 하는 일에 이미 자기 상을

다 받은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앞에서 상을 기대할수 없다.

성도는 마음을 늘 점검하여

외식에서 떠나 은밀히 살피시는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아야 한다.

선행이나 봉사를 할때 사람의 눈을 의식하진 않는가?

한사람이라도 나의 수고를 알아주기를 원하는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한지는 언제인가?

우리는 왼손이 모르게 선행한 일이 언제이며

아무도 모르게 골방에서 기도하는모습이 언제 였는지 더듬어보며

철처히 외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나야 한다.

외식하는자여… 너무나 두려운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강해 (17) –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 (마 6:1-8). > 주일설교

본문

마태복음 강해 (17) – 외식하는 자가 되지 말라. (마 6:1-8).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1).

주님은 산상 수훈을 통해서 위선이 아닌 참된 경건의 모습에 대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 유대인들의 삼대 경건은 주님이 언급하신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인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경건한 생활을 자신들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면서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외식하는 자’ 가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를 의미합니다. 외식은 헬라어로 ὑποκριτής 입니다. 이는 헬라 시대에는 연기하는 자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 연기를 하는 자였습니다. 즉, 자신의 참된 모습을 감추고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연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참된 인격이나 믿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고 그가 연기하는 배역을 보고 웃고 우는 연출을 하게 됩니다. 위선자는 자신의 내면의 믿음과 생각을 감추고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다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선자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자신의 실제 모습과 사람 앞에서의 모습이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인용하시면서 외식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책망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막 7:6). 주님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떠나 있는 그들을 향하여 헛되이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입술로는 고백하지만,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난 삶은 하나님 앞에서 위선적인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경건이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의 모습에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고 인정받으려는 모습을 질책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대로 주님을 섬기면서 주님을 바라보기 보다는 어느 순간부터 사람을 의식해서 자신을 나타내려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유혹이 찾아오면 자신의 행동이나 말을 부풀리게 되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이는 악한 죄의 길에 들어서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위선의 죄에 빠지지 않고, 참된 경건의 삶을 살아가는 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1. 우리는 구제할 때에 사람 앞에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1).

주님은 구제할 때의 외식에 대하여 지적하셨습니다. 구제 자체는 성경적이며 경건한 삶의 모습입니다. 야고보서는 참된 경건은 고와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약 1:27). 스스로 부양할 힘이 없는 고아나 과부, 그리고 장애자들을 돕고 섬기는 것은 내적인 믿음이 삶으로 드러내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는 마음의 경건에 대하여 가르치신다면, 6장에서는 삶에서 표현되어지는 경건에 대하여 가르치십니다. 내적인 믿음의 표현이 구제와 같은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구제를 경건의 소중한 가치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잠언은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잠 3:27) 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구제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자를 구제하기 위한 함인 구제함을 의로운 함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도 행전에서 도르가는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녀는 과부들을 위해서 속옷과 겉옷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녀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울며 통곡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서 도르가를 살려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과부들을 위해서 구제하는 일을 많이 하였고,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에 기근이 찾아오자 구제 헌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가 스스로 부양할 수 없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대외적으로 어려운 교회들에게 선교 헌금으로 구제 사역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구제를 하면서 사람에게 보여주고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했던 모습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 6:2-4).

주님은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하듯이 회당과 거리에서 자신이 구제하는 경건에 대하여 나팔을 불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적인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구제하는 것은 위선적이며 이미 자기 상을 사람들로부터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구제할 때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이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아버지가 갚으실 것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욱 의식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받기를 좋아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의 칭찬이 경건의 동기였기에 자신의 경건에 대하여 나팔을 불며 자랑했습니다. 그는 회당과 거리에서 구제를 하는 시간에는 나팔을 불어 자신이 어려운 자를 돌아보고 있는 것이 얼마나 영적인가를 자랑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신이 행하는 구제에 대하여 겸손히 행하며 그것에 대하여 사람에게 자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구제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구제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교만을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주로,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구제하는 것은 자기 만족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제하는 모습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구제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구제가 은밀히 되는 원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제하는 것입니다. 개인이 직접 하는 것은 지체들과의 관계에서 주님보다 사람을 더욱 의지하고 높이는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성도님이 구제헌금을 매달 무명으로 지목하셨습니다. 저도 누가 구제헌금을 헌신했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것입니다. 당시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정에 전달할 때에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며 교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주의할 점은 구제할 때에 직접 자신의 이름으로 구제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이 높임을 받게 되고 하나님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기도해야 합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기도는 경건한 사람의 소중한 영적 생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영적인 대화를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우리의 마음을 토로하면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자신의 영적인 삶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홀로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지목하기 전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과 함께 늘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도 기도는 소중했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오전 9시, 정오, 그리고 오후 3시에 맞추어 회당과 같은 곳에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외출 중에 기도하면 길가에 서서 기도하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순수한 의도가 사라지고 외식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즉,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으로 명성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로부터 영적이며 경건하다는 칭찬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마 6:5) 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먼저,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6). 주님은 골방에 들어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그들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7). 중언부언은 ‘말더듬이’를 뜻하며 똑같은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반복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이방인들이 우상을 숭배할 때에 반복적인 마술적 주문을 하면서 신들을 부르려는 모습을 지적한 것입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 숭배자들은 하루종일 같은 말로 기도를 합니다.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열상 18:26). 그들은 하루종일 바알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를 했습니다. 나중에는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에 상처를 내며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이 행하는 기도였습니다. 에베소에서 아데미 신상 앞에서 아데미 숭배자들이 두 시간을 외치며 기도합니다. “저희는 그가 유대인인 줄 알고 다 한 소리로 외쳐 가로되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하기를 두 시간 동안이나 하더니.” (행 19:34). 그들은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 라는 소리를 두 시간이나 반복해서 외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즉, 같은 말을 반복해서 하는 기도입니다. 아프리카 부족의 의식에서 수십 명의 사람들이 두 세 시간을 같은 말을 반복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발을 점프하며 수시간을 기도하는 모습에서 자신의 힘이 아닌 악령에 사로잡힌 모습을 느낀적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자신들의 신이 들을 줄 알고 큰 소리와 반복으로 자기 황홀경에 빠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무슨 기도하는 줄을 알지 못하고 단지 영적으로 황홀경에 빠져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그런 기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주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자신의 자아를 굴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중보 기도를 통해서 교회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의 영적 생활과 필요를 위해서 간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라 분명한 언어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도 이미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부각시키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구하며 그 분의 임재 가운데 교제하며 그 분의 영이 충만이 임하는 임재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우리는 금식할 때에 자신의 의를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 6:17).

금식은 음식을 절제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금식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나아가는 기도의 모습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나아갈 때에 수산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자신을 위하여 사흘동안 금식하도록 부탁합니다. 그리고, 에스더도 사흘동안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며 ‘죽으면 죽으리라’ 고 고백합니다. 에스더와 유다인들의 금식 기도로 인하여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하만이 죽고 유다인들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이는 금식 기도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금식하셨고, 느헤미야도 이스라엘을 위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도와 금식은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금식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합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 58:11).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금식은 물 댄 동산 같이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처럼 은혜가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의 금식에 대하여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위선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16). 외식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금식을 보여주려고 자기의 얼굴에 재를 뿌리고 머리를 풀어헤쳤습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금식을 하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경건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저희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 6:17) 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금식할 때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재를 뿌리고 머리를 풀어 헤침으로 자기의 영성을 자랑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보이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상을 주실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금식을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면서 서로 다투고 악한 주먹으로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금식하면서도 오락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은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에게 자유를 주고, 주리고 벗은 자에게 식물과 입을 옷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사 58:8-9).

금식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경건의 회복에 있습니다.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벗고 굶주린 자에게 양식과 의복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금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응답하시며 부르짖을 때에 가까이서 들으시며 도우시는 것입니다. 금식은 믿는 자에게 필요한 영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금식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금식은 오히려 해가 될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는 금식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 상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자랑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사람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나님만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의를 드러냄으로 자신이 더욱 영적인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위선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사역이 자신을 자랑하는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구제와 봉사, 그리고 기도와 전도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히 섬기는 자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는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자들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러한 곳에는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5). 우리는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빈다. 우리는 자신의 구제와 봉사가 드러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며, 자신의 기도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골방에서의 기도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금식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금식이며 하나님의 의를 삶에서 회복하는 금식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경건을 인정하시고 그 상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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