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Home » 삼국 시대 문화재 |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117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삼국 시대 문화재 |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117 개의 새로운 답변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당신은 주제를 찾고 있습니까 “삼국 시대 문화재 –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다음 카테고리의 웹사이트 kk.taphoamini.com 에서 귀하의 모든 질문에 답변해 드립니다: https://kk.taphoamini.com/wiki. 바로 아래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작성자 클래스로그 이(가) 작성한 기사에는 조회수 15,170회 및 좋아요 78개 개의 좋아요가 있습니다.

삼국 시대 문화재 주제에 대한 동영상 보기

여기에서 이 주제에 대한 비디오를 시청하십시오.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읽고 있는 내용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세요!

d여기에서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 삼국 시대 문화재 주제에 대한 세부정보를 참조하세요

삼국시대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권력과 영광, 부의 상징인 황금!
이런 황금이 발에 채일 정도로 너무 많았던 나라가 있었다는데?!
화려하고 찬란한 신라의 황금문명에 대해
영상을 통해 확인하세요~!
#황금의나라 #금관 #아랍인
수업의 클래스를 높이는 채널, 클래스로그
클래스로그 구독하기: https://www.youtube.com/channel/UCpmsbv_SZcLFoRE4OyP8qZg?sub_confirmation=1
원본 다시보기: http://home.ebs.co.kr/historye/replay/2/list?courseId=BP0PHPI0000000035\u0026stepId=01BP0PHPI0000000035
아이콘 저작권
1.University free icon \u0026 Building, Good Ware
https://www.flaticon.com/packs/building-13

삼국 시대 문화재 주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조하세요.

어린이·청소년 문화재청 | 학교에서 배우는 문화재 | 기념물

삼국시대의 불교유적을 찾아서(황룡사지, 익산미륵사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해진 불교는 우리 민족문화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kids.cha.go.kr

Date Published: 7/3/2021

View: 4358

삼국시대 문화유산 – 네이버 블로그

삼국시대 문화유산 · 1.미륵사지 석탑. 종 목 국보 제11호. 지 정 일 1962.12.20 · 2.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 3.무령왕릉 종 목 사적 제13호

+ 여기에 더 보기

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0/9/2021

View: 4773

3. 삼국의 문화 – 우리역사넷

삼국 시대에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토지 측량, 조세 징수 등 행정 실무와 고분, 성곽, 궁궐을 만드는 일에 수학 지식을 활용하였다. 그리고 금, 은, 구리, 철을 소재로 …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contents.history.go.kr

Date Published: 2/30/2022

View: 9032

삼국 시대의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삼국 시대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초기의 부족 연맹체적 특징과 함께 한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는 점과 고분 및 유물과 벽화로써 전해졌고, 불교 색채를 띤 유물 …

+ 여기에 표시

Source: ko.wikipedia.org

Date Published: 3/18/2022

View: 4956

국가문화유산포탈 | 3D 문화유산 검색

문화재 분류, 유물/불교조각/석조/불상. 지정등록일, 2004.08.31. 소재지, 충남 태안군. 시대, 삼국시대. 문화재정보 상세보기 …

+ 여기에 보기

Source: www.heritage.go.kr

Date Published: 8/7/2021

View: 9058

삼국시대 문화재 – 예스폼

삼국시대 문화재 서귀북초등학교 x학년x반 송주영 고구려의 문화재 광개토대왕릉비 장군총 수렵도 을밀대 대동문 백제의 문화재 석촌동 고분 몽촌 토성 무령왕릉 백제 …

+ 여기를 클릭

Source: www.yesform.com

Date Published: 2/25/2022

View: 9951

사라진 삼국 문화재 – Intel

삼국 시대 최고의 문화재. 최고의 문화재가 사라졌다. 그 최고의 문화재는? 그 문화재는 수렵도라고 생각한다. 수렵도란? 1)무용총에서 발견된 유물.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intel.com

Date Published: 9/20/2022

View: 8774

쇼미더 문화유산 – 삼국시대 불교 – 영상카드 뉴스

문화유산채널(K-Heritage.tv) 로고입니다. 통합검색, 문화재별, 시대별, 지역별, 유형별, 외부기관. 찾기.

+ 여기에 자세히 보기

Source: www.k-heritage.tv

Date Published: 10/21/2021

View: 5091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 삼국 시대 문화재

주제와 관련된 더 많은 사진을 참조하십시오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댓글에서 더 많은 관련 이미지를 보거나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삼국 시대 문화재

  • Author: 클래스로그
  • Views: 조회수 15,170회
  • Likes: 좋아요 78개
  • Date Published: 2019. 8. 22.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JGWzCANYRuE

어린이·청소년 문화재청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전해진 불교는 우리 민족문화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으며, 당시 나라의 질서를 완성해 나가던 국왕에게 큰 힘을 더해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여러 집단의 다양하던 사상을 불교로 통일함으로써 국왕은 한결 쉽게 자신의 권력 아래 나라를 통일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런 가운데 불교는 국왕의 보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당시 발전했던 불교의 모습을 아직도 남아 있는 웅장한 절터를 통하여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황룡사터 경주 황룡사지

(사적) 경주에 남아있는 황룡사 터는 동서 288m, 남북 281m의 대규모로서 당초 늪지를 매립하여 절터를 닦았다고 합니다. 이 절은 신라 553년(진흥왕 14)부터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진흥왕은 본래 반월성 근처에 궁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그 자리에 황룡이 나타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절을 세우도록 하였답니다.

이런 사연을 가진 황룡사는 645년(선덕여왕 14) 9층목탑을 마지막으로 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이는 4대 왕 93년간의 긴 세월과 정성이 들어간 대규모 건축물이었습니다. 이 절에는 진흥왕 때 솔거가 그렸다는 벽화가 유명합니다.

이 벽화의 소나무를 새들이 실제 나무로 알고 날아와 부딪쳤다는 유명한 일화가 남아 있지요. 그리고 이 황룡사의 중요한 건축물로는 바로 9층목탑을 들 수 있습니다. 백제의 유명한 장인인 아비지가 지휘하여 완성한 이 탑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돌로 만든 석탑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목탑입니다. 마치 9층짜리 거대한 한식 건물을 보고 있는 듯하지만 1238년에 몽고의 침략으로 불타고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신라의 역대 왕들은 이곳의 불사에 친히 참석하였고, 외국의 사신들도 들러 불상에 예배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 있어 황룡사는 신라의 가장 중요시되는 사찰로서 국왕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가며 크게 번성하였던 절이었습니다. 황룡사 복원모형도

미륵사터 익산 미륵사지

(사적) 미륵사터는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의 큰 절이 있었던 곳으로, 이 절은 백제 무왕(600~641)이 고구려와 신라의 침략을 불교의 힘으로 막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이 지역을 돌아보다가 이곳 용화산 아래 연못에 이르렀을 때, 미륵부처님이 나타나자 왕비의 부탁으로 이 연못을 메우고 절을 세웠는데 바로 그 절이 ‘미륵사’입니다. 익산 미륵사지는 3개의 금당(대웅전)과 3개의 탑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서탑만이 남아 있습니다. 사람들이 보통 미륵사지석탑이라고 부르는 이 탑은 지금은 전체 9층 중 6개 층만이 남아 있고 그나마도 일부가 파손된 채로 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300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모진 비바람과 전란을 겪은 역사의 흔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최근 들어 이 서탑을 본 떠 원래의 모습을 되살린 동탑을 새롭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최근에 끝난 발굴조사의 결과 이 절이 5만 평에 이르는 대규모였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절의 크기나 발견된 유물들이 백제, 통일신라, 고려시대에 걸쳐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미륵사지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가면서 오랜 동안 중요시되었던 절로 생각됩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복원 동탑

(사적)

삼국시대 문화유산

고구려의 문화유산

1.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종 목 국보 제119호

지 정 일 1964.03.30

소 재 지 서울 용산구 용산동 6가 국립중앙박물관

시 대 고구려

고구려와 관련된 글이 새겨져 있는 불상으로, 옛 신라 지역인 경상남도 의령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에 따르면 평양 동사의 승려들이 천불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전체 높이는 16.2㎝이다.

머리는 삼국시대 불상으로는 유례가 드물게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다.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오른손은 앞으로 들어 손바닥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며, 왼손은 허리 부분에서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게 하여 아래로 내리고 있다. 왼손의 세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는 모습은 삼국시대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인 모습이다. 유난히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의 표현이 없지만, 전체적인 체구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새의 날개깃 모양의 옷자락은 좌우로 힘차게 뻗쳐 있는데, 날카롭고 힘있는 모습이 중국 북위 이래의 양식을 보여준다. 불상과 함께 붙여서 만든 광배는 앞면에 거칠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광배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도금까지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남아있는 글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볼 때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고구려 불상으로 보인다.

2.중원고구려비

종 목 국보 제205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시 대 고구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제위’·‘사자’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3.충주장미산성

종 목 사적 제400호

지 정 일 1997.11.1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외

시 대 고구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4.포천반월성지

종 목 사적 제403호

지 정 일 1998.02.20

소 재 지 경기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5-1외

시 대 고구려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

5.성석편

종 목 보물 제642호

지 정 일 1978.12.07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시 대 고구려

이것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쌓을 당시 비교적 평평한 자연석 위에 글자를 새긴 것이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도성으로 외성, 중성, 내성, 북성 등 4성으로 나누어져 있다. 성의 길이는 전체 15㎞로 성곽주변은 강으로 둘러싸여 평양시의 중심부를 이루고, 주로 내성벽은 돌로, 외성벽은 흙으로 축성되어 있다. 성의 내부에는 당시 고구려의 도시구획터가 아직도 남아있다. 이 성곽에서 현재까지 글자가 새겨진 4개의 성석(城石)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성석편은 두 번째로 발견된 것이다. 성석에 새겨진 글자 수는 모두 7행 27자로, 그 내용은 ‘기유년 5월 21일 이곳으로부터 아래쪽 동쪽을 향하여 12리 구간을 물성소형 배 ■백두(物省小兄 俳 ■百頭)가 구축한다’라고 풀이되어지고 있다.

이 성석의 현재 상태는 두 번째 행의 깨어져 나간 부분과 함께 전체 9조각으로 균열되어 있어 석고로 고정시켜 놓은 상태이다.

6.연천 신답리 고분

종 목 경기도 기념물 제210호

지 정 일 2005.10.10

소 재 지 경기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 17-42,17-43

시 대 고구려

봉토석실분은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이다. 고구려 봉토석실분은 평양으로 천도 이후 지배층의 묘제 양식이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으로 변화하면서 보편화되기 시작한다. 남한지역에서 나타나는 고구려계 봉토석실분은 그 수가 얼마되지 않아 그 정확한 성격을 알 수는 없으나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한 중요한 자료로 인식되고 있다.

7.동수묘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순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 북한 국보 제28호. 안악 제3호분이라고도 하며, 북한의 지정 명칭은 ‘하무덤’이다. 높이 7m, 남북 길이 33m, 동서 길이 약 30m에 이르는 방대원형의 토분으로, 1949년에 발굴 조사하였다. 널방 안에 진나라 때 사경체로 쓴 묵서가 있어 이 고분이 357년(고국원왕 27)에 조성된 한국 최고의 벽화고분임이 밝혀졌다.

8.장군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석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에는 광개토왕릉비와 고구려 최대형급의 무덤인 태왕릉, 사신총 등 석릉과 토분 1만 기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9.광개토대왕비

중국 지린성 지안현 퉁거우에 있는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 비신 높이 5.34m. 각 면 너비 1.5m.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큰 비석이다. 제1면 11행, 제2면 10행, 제3면 14행, 제4면 9행이고, 각 행이 41자(제1면만 39자)로 총 1,802자인 이 비문은 상고사, 특히 삼국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알려 주는 금석문이다.

10.태왕릉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 남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의 기단식 돌무지무덤.

현재는 분구의 대부분이 무너져내린 기단부와 그 위층의 방단부 일부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무덤의 동북 500m 거리에는 유명한 광개토왕릉비가 있다. 명문전의 내용, 무덤의 규모, 근처의 건물터, 광개토왕릉비 등을 근거로 광개토왕의 능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1.각저총

중국 지린성 지안현 여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

이 벽화고분은 다른 고분과는 달리 청룡 ·백호 ·주작 ·현무와 같은 사신그림이 없지만, 앞방에 들어가면 왼쪽과 오른쪽 벽에 커다란 나무 두 그루가 그려져 있고, 앞쪽 벽에는 눈동자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사나운 개가 그려져 있다. 널방의 동쪽 벽에는 이 이름이 붙여지게 된 씨름그림이 나무를 중심으로 그려져 있고, 북쪽 벽에는 묻힌 사람의 생전의 실내모습을 연출한 듯 지붕과 커튼을 친 집안에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쪽 벽에는 소가 끄는 수레와 안장을 얹은 말이 그려져 있으며, 천장은 화려한 불꽃문양과 인동당초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무늬 사이로 삼족오가 있는 해와 두꺼비가 있는 달이 있다. 벽의 네 모서리에는 두 팔을 치켜 들고 천장을 떠받치는 형상의 역사상을 배치하였다. 축조방식이나 시기 ·벽화의 내용 등이 무용총과 비슷하다.

12.무용총

광개토왕릉비의 북서쪽 약 1km 지점에 있으며 각저총과 나란히 있다. 기저의 한 면이 약 15m인 방추형 분구이며 높이는 3m 내외이다. 널방은 약 3m 사방의 널방과 가로로 긴 앞방, 이것들을 연결하는 통로 및 널길로 되어 있는데, 널방의 바닥면에는 오른쪽 벽에 치우쳐서 4장의 판석을 배열한 널받침시설이 있다.

널방은 괴석을 쌓았고, 모줄임천장이며 회반죽을 두껍게 칠한 벽면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주실 정벽의 접객도는 이 무덤의 주인공인 듯한 인물이 상궤에 앉아 있고 그와 대화하듯 두 사람의 삭발한 승려가 역시 상궤에 앉아 있으며, 이밖에 시동) 세 사람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벽은 수렵도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왼쪽 벽에는 주인을 표현한 인물의 기마도와 주방 등의 가옥 2동 외에 5명의 남녀 군무상, 9명의 합창대상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의 특이함에서 무용총이라고 명명되었는데, 천장에는 연화문 등의 장식문, 사신도·일월상도를 포함한 그림이 있다. 앞방의 벽화는 박락되어 가고 있다.

13.을밀대

평양특별시 중구역 금수산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누정.

사허정이라고도 한다. 북한문화재 사적 제7호이다. 을밀대라는 이름은 옛날에 을밀선녀가 이곳에 내려와 놀았다는 전설에서 생겼다고도 하고, 고구려 때 이곳을 지킨 을밀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14.보통문

평양특별시 중구역 보통문동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성문.

지정번호 북한 국보 제2호

소재지 평양 중구역 보통문동

시대 고구려시대

크기 홍예문 높이 4.55m, 너비 4.4m, 문루 정면 3칸(14.8m), 측면 3칸(9.15m)

종류 성문

북한 국보 2호이다. 6세기 중엽 고구려가 평양성을 쌓을 때 성의 서문으로 세웠으며, 현재 건물은 조선시대인 1473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이 문은 평양성 서북쪽 방향으로 통하는 관문으로 국방상·교통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시대부터 고려·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시되었다.

15.평양성

평양특별시 중구역과 평천구역에 있는 고구려 후기의 도성.

지정번호 북한 사적급 문화재 제1호

소재지 북한 평양 중구역과 평천구역

시대 고구려 후기

종류 도성

북한의 사적급 문화재 제1호이다. 평지성의 장점과 산성의 장점을 종합하여 축성하였다. 내성·외성·북성·중성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벽의 길이는 23km이다. 내성은 대동문 아래에서 서북쪽으로 남산고개를 지나 만수대까지이고, 외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둘러싼 평지성이며, 북성은 만수대 북쪽으로 모란봉을 둘러싼 부분이고, 내성 남쪽으로 대동교에서 안산까지 연장된 성이 중성이다.

백제의 문화유산

1.미륵사지 석탑

종 목 국보 제1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

시 대 백제

백제 최대의 절이었던 익산 미륵사터에 있는 탑으로, 무너진 뒤쪽을 시멘트로 보강하여 아쉽게도 반쪽탑의 형태만 남아 있다. 현재는 6층까지만 남아 있으며, 정확한 층수는 알 수 없다.

기단은 목탑과 같이 낮은 1단을 이루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각 면마다 3칸씩을 나누고 가운데칸에 문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내부가 통하게 만들었으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형 기둥을 세웠다. 1층 몸돌의 네 면에는 모서리기둥을 세웠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볼록한 목조건축의 배흘림기법을 따르고 있다. 기둥 위에도 목조건축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재료인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본떠 설치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살짝 치켜 올려져 있다. 2층부터는 탑신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화되며, 지붕돌도 1층보다 너비가 줄어들 뿐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탑이 세워진 시기는 백제 말 무왕(재위 600∼641)대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반쯤 무너진 곳을 시멘트로 발라놓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되고 커다란 규모를 자랑하는 탑으로,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2.정림사지 오층석탑

종 목 국보 제9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379

시 대 백제

부여 정림사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기단은 각 면의 가운데와 모서리에 기둥돌을 끼워 놓았고,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세워놓았는데, 위아래가 좁고 가운데를 볼록하게 표현하는 목조건물의 배흘림기법을 이용하였다. 얇고 넓은 지붕돌은 처마의 네 귀퉁이에서 부드럽게 들려져 단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좁고 얕은 1단의 기단과 배흘림기법의 기둥표현, 얇고 넓은 지붕돌의 형태 등은 목조건물의 형식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단순한 모방이 아닌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을 보여주며, 전체의 형태가 매우 장중하고 아름답다. 익산미륵사지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며, 세련되고 정제된 조형미를 통해 격조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3.무령왕릉

종 목 사적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시 대 백제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으로 1971년 7월 7일부터 동년 10월 28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됨으로써 그 전모가 드러났다. 송산리 제5, 6호분과 서로 봉토를 접하고 있다. 분구는 지름 약 20m의 원형 플랜을 가지며 널방의 바닥면에서 분정까지 7.7m이다. 널방은 연화문전·문자전 등으로 쌓여진 단실묘로 평면 4.2m×2.72m의 크기인데 북으로 축선을 둔다.

천장은 아치를 성하고 바닥면으로부터의 최고값은 2.93m이다. 벽면에는 제6호분과 똑같은 모양의 소감과 그 아래에 연자창 모양으로 된 것을 북쪽 벽에 1개 동·서벽에 각각 2개를 만들고 각 감내에는 등잔이 들어간다. 출토된 유물은 백제고분으로서 전례없을 정도로 풍부하고 화려하다.

널길에서 발견된 한 개의 뿔을 가진 철제 석수, 청자육이호 동제의 발·시·오주전과 함께 이 분묘의 피장자가 무령왕 부부임을 밝히는 각자석판 2장이 나왔다.

널방에는 청자사이병·청동용기류·철모·현금 등의껴묻거리와 금·은의 식금구가 달린 흑칠이 칠해진 목관이, 왕의 것은 동쪽에, 왕비의 것은 서쪽에 매치되어 있었다.

붕괴된 관 안에는 목침·족좌·동경·단룡환두의 칼, 울두와 동제의 용기류 화염형관식·수식·이식·과대·식리·팔찌 등의 꾸미개가 들어 있었다. 또한 왕비의 제3대구치가 출토되었다.

4.서산 마애삼존불상

종 목 국보 제84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2-10

시 대 백제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층암절벽에 거대한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흔히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조금 파고 들어가 불상을 조각하고 그 앞쪽에 나무로 집을 달아 만든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연꽃잎을 새긴 대좌 위에 서 있는 여래입상은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띤 입 등을 표현하였는데, 전체 얼굴 윤곽이 둥글고 풍만하여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인상을 보여준다. 옷은 두꺼워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으며, 앞면에 U자형 주름이 반복되어 있다. 둥근 머리광배 중심에는 연꽃을 새기고, 그 둘레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머리에 관을 쓰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입상은 얼굴에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는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는 옷을 벗은 상태로 목걸이만 장식하고 있고, 하체의 치마는 발등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왼쪽의 반가상 역시 만면에 미소를 띤 둥글고 살찐 얼굴이다. 두 팔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왼쪽 다리 위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왼손으로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 오른쪽 손가락으로 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세련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반가상이 조각된 이례적인 이 삼존상은『법화경』에 나오는 석가와 미륵, 제화갈라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의 묵직하면서 당당한 체구와 둥근 맛이 감도는 윤곽선, 보살상의 세련된 조형 감각, 그리고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는 쾌활한 인상 등에서 6세기 말이나 7세기 초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곳은 백제 때 중국으로 통하는 교통로의 중심지인 태안반도에서 부여로 가는 길목에 해당하므로, 이 마애불은 당시의 활발했던 중국과의 문화교류 분위기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라 하겠다.

5.금동대향로

종 목 국보 제287호

지 정 일 1996.05.30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산16-1 국립부여박물관

시 대 백제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 서쪽의 한 구덩이에서 450여점의 유물과 함께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높이 64㎝, 무게 11.8㎏이나 되는 대형 향로로, 크게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들이 4∼5겹으로 첩첩산중을 이루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피리와 소비파, 현금, 북들을 연주하는 5인의 악사와 각종 무인상, 기마수렵상 등 16인의 인물상과 봉황, 용을 비롯한 상상의 날짐승, 호랑이, 사슴 등 39마리의 현실 세계 동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밖에 6개의 나무와 12개의 바위, 산 중턱에 있는 산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폭포, 호수 등이 변화무쌍하게 표현되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별도로 부착된 봉황이 목과 부리로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힘있게 서 있는데, 길게 약간 치켜 올라간 꼬리의 부드러움은 백제적 특징이라 하겠다. 봉황 앞 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에서 향 연기를 자연스럽게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피어난 연꽃을 연상시킨다. 연잎의 표면에는 불사조와 물고기, 사슴, 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몸체의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문 채 하늘로 치솟 듯 고개를 쳐들어 떠받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되어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6.익산 연동리 석불좌상

종 목 보물 제4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삼기면 연동리 산220-2

시 대 백제

이 불상은 머리만 없어졌을 뿐 불신, 대좌, 광배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백제의 작품이다. 지금의 머리는 요즘 새로 만든 것이며, 불상의 현 신체 높이는 156㎝이다.

당당한 어깨, 균형잡힌 몸매, 넓은 하체 등에서 서툰 듯 하면서도 탄력적이고 우아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자락은 길게 내려져서 사각형의 대좌를 덮고 있는데, 앞자락은 U자형, 좌우로는 Ω형의 주름이 대칭으로 2단씩 표현되어 있다. 왼손은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가슴에 대고 오른손은 세번째와 네번째 손가락을 구부려 다리에 올려놓은 특이한 손모양을 하고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둥근 머리광배가 볼록 나와있고 그 안에 16개의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바깥에는 방사선으로 퍼진 특징이 있다. 몸광배도 볼록하게 나와있고 바깥부분에는 불꽃무늬를 배경으로 7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다.

이 석불상은 대좌의 모습과 광배에 새겨진 무늬를 볼 때 장중하면서도 세련된 특징을 보여주는 600년경의 희귀한 백제시대 불상으로 그 의의가 높다.

7.부여 성흥산성

종 목 사적 제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 산1-1

시 대 백제

성흥산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가 쌓았다고 전하는데, 당시 이곳이 가림군이었으므로 가림성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

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8.공주 송산리고분군

종 목 사적 제1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시 대 백제

공주시 금성동에 있는 웅진 백제시대 왕들의 무덤이 모여있는 곳이다.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

9.익산쌍릉

종 목 사적 제8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익산시 석왕동 산55, 산56

시 대 백제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무덤으로, 남북으로 2기의 무덤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 쌍릉이라고 부른다.

무덤 안의 구조는 백제 후기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이며, 무덤의 봉분과 돌방의 크기가 큰 북쪽의 것을 대왕묘라 하고, 남쪽의 작은 것을 소왕묘라고 부른다. 크기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2기 모두 원형의 봉토무덤으로 흙을 높이 쌓아 만든 봉분 이외에 별다른 장식이 없다.

1916년 조사할 당시 무덤은 이미 도굴이 되어 유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행히 대왕묘 안에서 나무로 만든 관이 일부 발견되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무관은 바닥면보다 위쪽 면이 약간 넓고, 뚜껑의 윗면이 둥근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관고리에는 8쪽의 꽃잎을 가진 연꽃무늬가 있었던 것도 확인되었다.

출토유물은 없지만 무덤 안의 구조로 보아 백제 후기의 것이 틀림없으며, 근처에 미륵사가 있어서 미륵사를 처음 만든 백제의 무왕과 그 왕비인 선화공주의 무덤일 것으로 짐작되고 있으나, 뚜렷한 증거는 없다.

10.증산성

종 목 사적 제156호

지 정 일 1967.03.25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성리 산86

시 대 백제

흰 돌을 사용하여 쌓은 성이 마치 시루를 올려놓고 시루테를 바른 듯 하다고 하여 시루메산성이라고도 부르는 백제 산성이다.

성왕 16년(538)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나서 수도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둘레는 약 600m이고 높이는 2∼3m 정도로 거의 무너진 상태이지만, 성의 남쪽부분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서쪽·남쪽·북쪽에 각각 문이 있던 흔적이 남아있다. 성벽은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쌓았지만 다른 성에 비하면 정교하지 못한 편이다. 성 안에는 백제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동쪽에는 우물터가 있다. 은산면에 있는 이중산성·서쪽의 옥녀봉산성과 서로 바라 보면서 연결 되어있다.

증산성은 신라 문무왕 12년(672) 정월에 백제 고성성을 쳐서 이겼다는 기록에서 나타나는 고성성으로도 여겨지이며, 백제 부흥운동군의 한 거점으로도 여겨지는 중요한 산성이다.

11.파사성

종 목 사적 제251호

지 정 일 1977.07.21

소 재 지 경기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산8-10

시 대 백제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재위 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암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여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현재는 동문이 있던 자리와 남문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성의 일부가 한강변에 나와있어 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좋은 요새이다.

12.몽촌토성

종 목 사적 제297호

지 정 일 1982.07.22

소 재 지 서울 송파구 오륜동 88-3

시 대 백제

한강의 지류인 성내천 남쪽에 있으며, 둘레가 약 2.7㎞ 되는 백제 전기의 토성이다.

자연 지형을 이용해 진흙으로 성벽을 쌓고, 나무 울타리로 목책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자연 암반층을 급경사로 깎아 만들기도 하였으며, 성을 둘러싼 물길인 해자도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문터와 집자리,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고, 출토유물로는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과 여러 종류의 토기류, 철제 무기류 등이 나왔다. 특히 동전무늬가 찍힌 자기조각은 중국 서진(265∼316)대의 유물이어서 시대 확인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백제의 도성인 위례성이라는 견해와 방어용 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볼 때 백제 초기 군사적·문화적 성격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유적이며, 주변에 풍납토성과 백제 석촌동 무덤들을 비롯한 백제 전기의 유적이 있어 역사적으로도 가치있는 곳이다.

13.이천 설봉산성

종 목 사적 제423호

지 정 일 2000.09.16

소 재 지 경기 이천시 사음동 산 24번지외

시 대 백제

설봉산은 이천의 진산으로, 이 산의 7∼8부 능선, 속칭 칼바위를 중심으로 한 약 3만여 평에 달하는 고원지대가 바로 옛 산성터이다.

계곡을 감싸안고 쌓은 포곡식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았으나 돌로 쌓은 석축도 군데군데 있다.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내렸거나 매몰되고 있는데, 아직도 정상 아래 부분에는 3∼10m의 석축의 흔적이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는 곳도 있다.

이 일대에서는 석축·석편·토기편은 물론, 건물터 임을 알리는 정면 9m, 측면 6.30m의 인공 주춧돌 9개가 정연히 배치되어 있어, 이 곳이 웅장한 규모의 삼국시대 산성터 임을 알려 준다. 정상 밑 서쪽 능선 평평한 부분에는 주춧돌이 원형대로 남아 있어 장대지로 추정되며, 군기를 꽂았던 홈을 판 바위와 돌싸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도 3곳 남아 있다. 또 산성의 필수요건인 우물터 2곳, 수구와 인접한 북문의 흔적도 남아 있다.

축성연대는 대략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한강 이남을 점유하고 이 곳에 처음으로 남천현을 설치한 고구려 장수왕 63년(475)에서 신라·백제세력이 이 곳을 다시 수복하던 신라 진흥왕 12년(551)사이에 고구려군이 쌓은 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산의 정상에 서면 주변 지역이 한눈에 들어와,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세력 다툼이 있었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대의 역할을 하였던 성으로 여겨진다.

14.논산 노성산성

종 목 사적 제393호

지 정 일 1995.08.02

소 재 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송당리 산1-1외 13필지

시 대 백제

백제 때 산 정상부분을 돌로 둘러쌓아 만든 테뫼식 산성이다.

산 지형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거의 완벽하게 쌓았고 동쪽면, 북쪽면, 서쪽면은 돌을 네모 모양으로 다듬어 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성 둘레는 590m, 높이 2.4m이다.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는 장수의 지휘대로 보이는 터(장대지)가 있으며 동쪽벽으로 조금 내려오면 봉화를 올리던 봉수대로 보이는 곳이 있다. 성 안에는 4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토기, 기와같은 여러 유물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연산에 있는 황산성과 함께 백제와 신라가 서로 마주했던 마지막 방어지에 해당하는 산성으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사용한 주요 방어지역이었던 곳이다.

15.금제관식<왕>

종 목 국보 제154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서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다. 출토된 유물들은 백제 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그 중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가운데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확실히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16.금제관식<왕비>

종 목 국보 제155호

지 정 일 1974.07.09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웅진동 360 국립공주박물관

시 대 백제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관(冠) 장식으로, 모양과 크기가 같은 한 쌍으로 되어 있다.

높이 22.6㎝, 너비는 13.4㎝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비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에 무늬를 뚫어서 장식하고 밑에 줄기를 달았다. 예리한 도구로 도려내어 무늬를 만들었는데 좌우대칭으로 정돈되어 매우 정연한 느낌을 준다. 중심부의 연꽃받침 위에 놓인 병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덩굴무늬가 있고 병 위에는 활짝 핀 꽃 한송이가 있다. 중간부터 위쪽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가 표현되어 있다. 무령왕릉 안에서 같이 발견된 왕의 관(冠)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구슬 등의 장식이 달려있지 않아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령왕릉은 백제 25대 무령왕(재위 501∼522)과 왕비의 무덤으로, 벽돌을 이용해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이며,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이들은 백제문화의 수준과 풍속의 일면을 알려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중 최초로 무덤에 묻힌 주인과 만든 시기를 밝혀주는 자료가 되고있다.

신라의 문화유산

3. 삼국의 문화

학습 개요 삼국의 문화는 귀족 생활과 불교 신앙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특히, 불교는 삼국의 발전과 국민의 정신적 통일에 이바지하였고, 학문과 예술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삼국의 문화는 회화, 조각, 공예, 건축 등 미술 분야에서 뛰어났는데, 각각 특색 있는 문화적 전통을 이루었다. 고구려의 예술품은 힘찬 기상이 서려 있고, 백제의 예술품은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신라의 예술품은 소박하면서도 조화의 미를 지니고 있다. 또, 삼국 시대에는 야금술, 천문학, 수학 등 과학 기술이 발달하여 훌륭한 문화 유산을 남겼다. 이러한 삼국 문화는 일본으로 전해져, 일본 고대 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습 문제 1. 불교의 전래는 삼국의 문화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 2. 삼국의 과학 기술 중에서 천문학, 역법 등이 발전하였던 이유는 무엇인가? 3. 삼국의 문화는 어떠한 분야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는가? 4. 삼국의 미술은 각기 어떠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가?

종교

삼국 시대에 민간에서는 천신을 비롯한 여러 자연신을 섬기는 무속, 점술 등의 토속 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국왕은 시조에 대한 제사를 받들면서 천신의 후손으로 자처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그러나 중앙 집권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이러한 여러 신앙을 가지고서는 확대된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없었다. 이에 삼국은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때에 전진으로부터, 백제는 침류왕 때에 동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신라에는 이보다 늦은 눌지왕 때에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전해졌으나, 뿌리 깊은 고유 신앙과 귀족의 반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다가, 법흥왕 때에 이르러 이차돈의 순교가 있은 후에야 비로소 공인되었다(527). 이후, 불교는 국가를 수호하는 데에 유익한 종교라고 생각되어 왕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국가적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신라에서는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여 부처의 가족으로 자처하면서 왕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다.

불교의 전래 불교의 전래

또, 삼국은 황룡사, 미륵사 등과 같은 거대한 절을 짓고, 대규모의 불교 집회를 열어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빌기도 하였다. 자장의 건의로 세워진 황룡사 9층탑은 9개국을 정복하려는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상징물이었다. 그리고 원광은 세속 5계를 통해 사회 윤리와 호국 사상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전북 익산) 익산 미륵사지 석탑(전북 익산)

불교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삼국은 불교를 통하여 음악, 미술, 과학 기술 등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 과정에서 중국과 서역의 문화가 우리 나라에 전해져서 민족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삼국 사회에는 도교 신앙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사신도나 백제의 산수무늬 벽돌, 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 등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말기에는 불교 세력을 억압하는 데에 도교 세력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과학 기술

우리 나라에 한자가 전래된 것은 고조선 시대부터였지만, 삼국 시대에 들어와서 한자가 널리 사용되면서 학문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한자는 주로 귀족층에서 사용하였는데, 설총은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한자의 음과 훈을 따서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를 정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때에 수도에 태학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고, 그 후 지방에는 경당을 세워 청소년들에게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광개토 대왕릉 비문을 살펴보면, 고구려에서는 한학이 매우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백제에서는 의박사, 역박사, 오경 박사 등의 박사 제도를 두어 여러 분야의 학문과 기술을 진흥시켰으며, 논어와 천자문 등을 일본에 전해 줄 정도로 한학의 수준이 높았다. 세련된 문장으로 쓰여진 부여 출토의 사택지적 비문은 당시 백제의 한학 수준을 알려 주고 있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 순수비를 통해서 당시 신라의 한학 수준을 살펴볼 수 있다.

사택지적비 사택지적비

왕권이 강화되고 한학이 발달함에 따라, 자기 나라의 역사를 정리하려는 의식이 싹텄다. 고구려에는 일찍이 유기 100권이 전해져 왔었는데, 영양왕 때 이문진이 이를 간추려 신집 5권을 편찬하였다.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때 고흥이 서기를, 신라에서는 진흥왕 때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하였다.

한편, 한학이 널리 보급되면서 천문학, 의학, 수학 등 과학 연구도 활발하였고, 건축, 토목, 공예 등 기술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보였다.

삼국 시대에는 주요 산업인 농업의 발전과 관련하여 천문학, 역법 등이 발달하였다. 경주의 첨성대는 신라의 발달된 천문학 수준을 반영한 것이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 된 천문대로서, 우리 민족의 우수한 창조물이다. 삼국인들은 수시로 일식, 월식, 혜성, 지진 등 천문 기상을 세밀하게 관측하였고, 천체 현상의 이변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삼국 시대에는 국가 운영에 필요한 토지 측량, 조세 징수 등 행정 실무와 고분, 성곽, 궁궐을 만드는 일에 수학 지식을 활용하였다. 그리고 금, 은, 구리, 철을 소재로 하는 제련술, 용접술, 주조술이 발달하여 우수한 무기, 장신구, 그릇 등이 만들어졌다.

고분 벽화

삼국 시대에는 귀족 중심의 미술이 발달하였으며, 특히 고분 미술과 불교 미술이 뛰어났다.

고구려의 미술은 힘과 정열이 넘쳤고, 백제의 미술은 우아하고 세련되었으며, 신라의 미술은 소박한 가운데 조화 있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이와 같이 삼국의 미술은 그 국가의 성격에 따라 각기 차이가 있었으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점차 많은 공통성을 지니게 되어, 후에 민족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삼국은 고분을 통하여 많은 예술품을 남겼는데, 고분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정신과 지혜가 담긴 예술의 보고이다.

고구려의 미술은 옛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성 부근에 있는 고분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은 초기에는 돌을 쌓아올린 돌무지무덤이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만주 집안에 있는 장군총이다.

후기에는 흙으로 덮은 봉토 내부에 돌방이 있는 굴식 돌방무덤이 주류를 이루었다. 굴식 돌방무덤의 일부 돌방 안에는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쌍영총, 무용총, 강서 고분 등이 유명하다. 여기에는 풍속도, 수렵도, 무용도, 사신도 등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인의 씩씩한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강서 고분의 돌방에 그려진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 중에서도 높은 회화 수준을 보여 주는 것으로, 힘과 패기가 넘쳐 흐르고 있다.

강서 대묘 현무도(평남 강서) 강서 대묘 현무도(평남 강서)

백제의 고분은 서울, 공주, 부여에 많이 남아 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백제 고분은 고구려 초기의 고분과 비슷한 돌무지무덤이다. 이를 통하여 백제 왕실이 고구려와 깊은 관련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공주의 무령왕릉은 봉토 안의 방을 벽돌로 쌓아올린 무덤인데,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령왕에 대한 기록인 지석과 함께 금제 관식, 무기, 그릇, 구리 거울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당시의 발달된 공예 기술을 엿보게 해 준다.

백제의 고분에도 고구려의 고분과 같이 벽화를 그린 것이 있는데, 부여 능산리 고분의 사신도는 매우 세련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 부여 능산리 고분 벽화

한편, 신라의 고분은 수도인 경주 부근에 많이 남아 있다. 신라의 고분은 4세기 이후 거대한 돌무지 덧널무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고분에서는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 장신구, 유리 제품, 생활 도구 등 많은 껴묻거리가 발견되어 신라 공예품의 보고가 되고 있다. 특히, 금관총, 천마총 등지에서는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에서는 천마도가 발견되어 신라 미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불교 미술

삼국은 중국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그 문화의 폭을 넓히는 동시에, 큰 절과 탑을 세우고 불상을 만드는 등 불교 미술을 크게 발전시켰다. 따라서, 불교 미술은 고분 미술과 함께 삼국 시대 미술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삼국의 건축물 중 대표적인 것은 탑으로서, 처음에는 목탑이 많이 세워졌으나, 후에는 주로 석탑이 만들어졌다. 백제의 석탑으로는 목탑의 건축 양식을 따른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과 부여의 정림사지 5층 석탑이 유명하다. 특히,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균형이 잘 잡히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걸작품이다. 신라의 탑으로는 전탑의 형식을 따른 분황사 모전 석탑이 남아 있으며, 황룡사 9층탑은 국력을 기울여 세운 것이었으나, 고려 때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다.

분황사 모전 석탑(경북 경주) 분황사 모전 석탑(경북 경주)

삼국의 불상으로는 신라의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 밖의 불상으로는 독특한 개성을 보여 주는 고구려의 연가 7년명 금동 여래 입상, 친근감 있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백제의 서산 마애 삼존불상이 유명하다.

서산 마애 삼존불상(충남 서산) 서산 마애 삼존불상(충남 서산)

한편, 최근 부여의 백제 절터에서 발견된 금동 용봉 봉래산 향로는 백제 문화의 우수성과 독창성이 한층 돋보이는 걸작품으로, 백제의 사상과 공예 기술의 참맛을 보여 주고 있다.

시가와 음악

우리 민족은 예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했는데, 음악은 삼국 시대에 이르러서 중국 음악과 불교 음악의 영향을 받아 더욱 발달하였다.

고구려의 시가로는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와 을지문덕이 지은 5언시가 전해지고, 백제의 시가로는 정읍사와 지리산가 등이 전해지며, 신라의 시가로는 혜성가, 서동요 등의 향가가 전해진다.

한편, 삼국에서는 여러 가지의 악기가 만들어졌고, 노래도 지어져 음악이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에는 관악기, 현악기, 타악기 등 많은 악기가 있었고, 왕산악은 7현금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고 100여 곡을 작곡하였다. 백제의 음악은 고구려와 비슷하였으며, 일본에 전해져서 고대 일본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의 악기로는 거문고, 가야금, 비파, 피리 등이 있었다. 옥보고는 거문고를 잘 타서 신라 음악에 맞는 30여 곡을 지었으며, 백결 선생은 방아타령을 남겼다. 또, 대가야 출신의 우륵은 진흥왕 때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작곡, 보급하였다.

삼국 시대의 문화

삼국 시대의 문화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초기의 부족 연맹체적 특징과 함께 한자 문화권에 편입되었다는 점과 고분 및 유물과 벽화로써 전해졌고, 불교 색채를 띤 유물과 유적이 많다는 점이다.

초기의 문화 [ 편집 ]

부족 연맹체적 성격을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삼국의 문화는 현존하는 것이 적어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삼국 시대인은 원시 사회의 유풍을 일면 답습하면서도 그들의 생활 모습을 차츰 달리해 간 것 같다. 삼국 초의 문화에서는 시조신(始祖神)에 대한 제사 의식이 행해졌으며, 또한 제천 의식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어 갔던 것 같다.

삼국이 정립(鼎立)되어 가기 훨씬 이전에 벌써 그들의 생활을 표현하는 노래가 나타났다. 추수감사제에 온 씨족원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음주와 가무(歌舞)를 즐겼다는 것은 벌써 가사(歌辭)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이며, 특히 고구려 유리명왕이 지었다는 〈황조가〉는 유명하다. 또 서기 28년에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도솔가(兜率歌)를 지으니 이것이 가락(歌樂)의 시초라는 기록이 있으나[1] 확실치 않으며, 유리왕 9년(32년)에는 오늘날의 한가위(秋夕)가 처음으로 마련된 듯하다.

사회 체제가 점차 정비됨에 따라 삼국의 각 사회에는 그 신분을 나타내는 표시로 복장의 모양과 빛깔이 각각 달리 제정되었다. 또 장례하는 풍습은 원시적인 유습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나, 지배층의 무덤은 그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장대하게 구축되었고 많은 부장품을 매장하였다.

사회 구조의 변화는 일상생활 전체에 걸쳐서 생활을 점차 제약하게 되었다. 부족의 족장 세력이 왕권에 흡수됨에 따라 귀족층이 형성되어 갔고, 이들은 자기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그들 신분 사이에서만 혼인하였다.

문화의 발전 [ 편집 ]

한문학의 발전 [ 편집 ]

삼국 시대에는 [한자]가 널리 보급되었다. 한자가 처음 전래된 것은 중국의 철기 문화와 함께였다고 여겨진다. 기원전 2세기에 진국에서 한나라에 외교 문서를 보내려는 것을 위만조선이 가로막은 일이 있었다. 보다 더 구체적인 예로서 기원전 1세기 유적인 경상남도 창원시 다호리의 무덤에서 붓이 출토되어, 이미 한자가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한자를 사용해 본격적으로 문자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삼국 시대부터였다. 삼국이 자체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운영해 나가기 위해 능동적으로 선진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함에 따라 한자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율령의 반포와 함께 한문 소양이 관리에게 필수적인 요소가 된 것이다. 특히 불교가 수용되어 한역(漢譯) 불경이 보급됨으로써 한문에 대한 이해가 촉진되었으며, 승려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한문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고구려에선 372년에 세워진 태학(太學)과 청소년 조직의 경당(扃堂)에서, 그리고 신라에서는 화랑도(花郞徒)에서 한문 경전을 가르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전해지는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 백제의 북위에 보낸 국서(國書),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등은 5~6세기 삼국의 한문학 수준을 보여준다.

백제의 귀족인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만년에 불당을 세운 것을 기술한 바와, 고구려의 유명한 장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전장에서 수나라의 장수에게 보낸 한시는 삼국 말기 귀족들 사이에서 한문학 소양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삼국 시대 한문학의 대표적인 것은 사서(史書)이다. 백제에선 4세기 중엽 고흥(高興)이 처음 《서기(書記)》를 편찬하였고, 백제 말기까지 여러 사서가 편찬되었다. 이러한 백제의 사서들은 일본에 전해져 큰 영향을 끼쳤다. 신라에서도 545년 거칠부(居柒夫)가 《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고구려에서는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사서가 편찬되었고, 600년에는 이문진(李文眞)이 《신집(新集)》을 편수하였다. 이 시기 편찬된 사서는 기본적으로 왕실의 내력과 국가의 성장 과정을 기술하여, 그 정통성과 존엄성을 합리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을 것이다. 또한 왕실과 귀족 집안의 내력을 보여주는 각종의 신화와 설화가 풍부히 기술되어 있어 고대 문학의 호수와 같은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시기에 사서가 편찬된 것은 고대 국가의 성장을 말해주는 기념비적인 것으로, 이들 사서 가운데 현전하는 것은 없으나, 그 내용은 몇 단계의 전승을 거쳐 기록된《삼국사기》와 그밖에 후대 사서의 기사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한편 한문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언어생활의 이중성이 초래되었다. 중국어와 고대 한국어의 언어 구조가 판이하고 한자가 표의 문자이기 때문에, 구어(口語)와 문어(文語)가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불편함을 완화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차자 표기법(借字表記法)으로, 이는 한자의 음과 훈(訓, 새김)을 빌려서 고대 한국어를 기록하는 방법이다. 이런 표기법은 고구려에서 먼저 생겨났고, 신라에 전해져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인명이나 지명·관명 등 고유 명사를 표기하는 데 사용되다가, 이어 고대 한국어의 토씨를 한자로 다는 형식이 나타났고, 뒤에는 고대 한국어의 어순에 따라 한자를 배열해 서술하는 형태로 발달하였다. 이런 표기법을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이라 하였다.

이런 이두로 씌어진 신라의 시(詩)가 곧 향가(鄕歌)이다. 현전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향가는 진평왕(眞平王) 때에 씌어졌다.

미술의 발전 [ 편집 ]

고구려 강서대묘 에서 볼 수 있는 사신도 중 하나인 백호도

현존하는 삼국 시대의 미술품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벽화이고, 다른 하나는 불상과 탑 등 불교 미술품이다.

고분 벽화는 고구려의 것이 대부분이고 백제·신라·가야의 것은 많지 않다. 4세기 이후 출현한 고분 벽화는 처음에는 죽은 이의 생시의 생활상을 담은 것이 많았으며, 이어 불교 신앙을 강하게 반영한 것이 나타났다. 6세기 이후에는 점차 신선도(神仙圖)와, 사방을 진호(鎭護)한다고 여긴 상상의 동물인 청룡(靑龍)·백호(白虎)·주작(朱雀)·현무(玄武) 등을 그린 사신도(四神圖)가 중심이 되어갔다. 초기에는 무덤의 돌방(石室)의 벽면과 천장에 흰 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으나, 후기에는 벽면의 돌을 잘 다듬은 뒤 그 위에 직접 그렸다. 화려하고 강렬한 채색과 약동하는 힘을 담은 고구려 고분 벽화는 같은 시기 동아시아 회화 중에서 빼어난 예술성과 역사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고분 출토 유물로는 금관을 비롯해서 다양한 금속 공예품과 유리 제품·토기 등이 있다. 그 중 신라 금관은 그 양식이 시베리아의 샤먼의 관과 통하는 점을 지니고 있어, 불교 수용 이전 시기 신라 문화의 성격의 일면을 전해 주고 있다. 유리 제품은 유리의 질과 제품의 양식이 서남아시아 지역의 것과 연결되며, 토기 양식 중에도 그러한 요소가 보인다. 이런 유물들을 통해 삼국 시대의 문화가 지닌 국제성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불상은 양식 면에서 북중국의 그것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점차 이를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개성적인 면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 시기의 다양한 불상 중 신비의 미소를 머금은 채 한쪽 다리를 무릎에 올려놓고 사색에 잠긴 모습으로 앉아 있는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빼어난 걸작품이다. 또한 서산에 있는 백제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의 소박하고 티 없이 해맑은 웃음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갖게 한다.

탑은 초기엔 다층의 목탑이었는데, 7세기 이후로 이 땅에 풍부한 화강암을 재료로 한 5층과 3층의 석탑이 세워졌다. 익산에 있는 미륵사 다층석탑은 목탑의 구조를 그대로 지닌 석탑으로서,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삼국 시대의 주요 건축물로서 성을 빼놓을 수 없다. 성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구조물이었다. 삼국의 영역 내에 현전(現傳)하는 성만도 수백 개에 이른다. 당시의 성에는 평지성과 산성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자연 지세를 이용해 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한 산성이며, 쌓은 재료에 따라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으로 나뉜다. 현존하는 일부 석성의 위용을 통해, 당시 발달한 토목·건축 기술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불교 신앙 [ 편집 ]

불교가 고구려에 전해진 것은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였다. 백제에는 이보다 조금 뒤에 남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 양국에서는 불교가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아 별다른 마찰 없이 수용되었다. 이와는 달리 신라의 경우 불교가 고구려로부터 전해졌으나 상당한 마찰과 진통을 거친 후 6세기 전반 법흥왕(法興王) 때에 와서야 공인되었다.

불교가 처음 삼국에 수용되었을 때, 그 초기 신앙 형태는 교리에 대한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는 주술적이고 현세기복적(現世祈福的)인 성격이 두드러진 것이었다.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라는 391년의 고구려 고국양왕(故國壤王)과 392년 백제 아신왕(阿莘王)의 하교(下敎)는 그러한 불교 이해의 일면을 보여준다. 화를 피하고 복을 부르는 것은 삼국의 재래 무속 신앙에서도 공통된 요소로서, 불교는 전래 초기 이런 측면에서 이해되고 수용된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당시 사원 건축물의 배치 구조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498년에 세워진 금강사(金剛寺)로 여겨지는 평양의 청암동 절터의 경우를 보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중문(中門)·탑·금당(金堂)이 있고, 탑과 금당의 평면적의 비율이 0.7 대 1이다. 탑은 평면적의 비율이 후대의 그것에 비해 매우 높고, 사원의 구조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6세기의 백제와 신라의 사원에서도 비슷한 면이 확인된다. 이런 가람 배치와 탑의 비중은, 석가모니의 사리(舍利)나 그와 연관된 물건을 봉안하는 곳으로 여겨진 탑이 당시인의 주요한 신앙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또 당시의 신앙이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과 해탈을 위한 자신의 수행보다는, 사리의 영험에 의거하려는 신비적이고 기복적인 면이 강했음을 말해준다. 삼국 시대에 불교의 한 유파로서 주술성이 강한 밀교(密敎)가 크게 성행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삼국 시대 불교의 또 다른 주요 특성은 왕실 불교 내지는 국가 불교적인 면이다. 불교가 수용될 무렵 삼국은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삼국의 지배층은 확대된 영역 내에 포괄된 여러 주민 집단이 지녀온 재래의 잡다한 신앙과 고립적인 의식의 공간을 한 단계 고양된 차원에서 융합하고, 강화된 왕권의 정통성을 합리화하며 이를 장엄하게 수식해줄 수 있는, 보편성을 지닌 종교가 필요하였다. 그 때문에 삼국의 왕실은 불교의 진흥을 적극 지원하였고, 불교 승려들은 왕권의 존엄을 강조하고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함양하는 일에 능동적으로 임하였다. 이 같은 점은 전래될 당시의 불교의 성격에 의해 촉진되었다.

원래 인도에서는 국가의 불교의 관계가 불교 교단은 정법(正法, Dharma)을 지키고 전승하며 국가는 그 법을 활용하는 것이었는데, 양자는 정법을 통해 연결되었다. 그래서 불법(佛法)은 왕법(王法)과 공존하며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불교 전래 초기부터 양자 간에 갈등이 빚어지다가 불법이 왕법 아래 굴종케 되었다. 특히 4세기 이래 북중국에서 전개된 혼돈과 전란의 와중에서, 승려들은 호족(胡族) 출신 왕조와 밀착하여 그 보호 밑에서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에 따라 승려는 왕권 아래에 굴종하였으며 ‘왕즉불(王卽佛)’의 논리로써 왕실의 존엄과 신성함을 찬양하는 데 복무하였다. 북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에선 불교가 전래 초기부터 왕실과 밀착하였고, 국가 불교적인 색채가 농후하였다. ‘왕이 곧 부처’라는 주장은 왕이 천손(天孫), 즉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재래의 관념과 연결되어 쉽게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그런 면은 삼국 중 상대적으로 후진(後進) 지역이었던 신라에서 더 현저하게 나타났다. 신라의 왕실이 석가모니 집안의 환생(還生)이라고 하거나, 진흥왕(眞興王)을 정법을 펼치는 위대한 정복 군주의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고 한 것은 대표적인 예이다.

6세기 전반의 법흥왕에서 7세기 전반의 진덕여왕(眞德女王)에 이르는 신라 왕의 이름이 모두 불교식이었다. 신라의 승려들은 당시 가장 앞선 지식층으로서 왕을 수행하며 조언을 하고, 군대에 종군하기도 하였으며,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등 정치·군사적인 면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였다. 또한 사찰에서는 외적으로부터 국가가 보호되고 전사한 이들의 영혼이 왕생극락하기를 기원하는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와 같은 법회들을 국가적 행사로 개최하였다.

곧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불교 교의와 의례를 통해 함양하고 일체감을 도모하였다. 청소년 조직인 화랑도에 승려가 배치되어 낭도의 정신적인 교화를 담당하였는데, 그 교화의 내용도 이와 같은 차원의 것이었을 것이다. 즉 신라에서 호국(護國)은 호법(護法)과 동일시되었다. 고구려나 백제도 비슷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신라의 백고좌회와 팔관재회가 고구려에서 넘어온 승려 혜량(惠亮)에 의해 처음 열렸다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같이 보기 [ 편집 ]

각주 [ 편집 ]

↑ 삼국사기 》〈 유리이사금 條 〉 是年 民俗歡康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이 해에 백성의 풍속이 즐겁고 편안하여 비로소 도솔가(兜率歌)를 지었다. 이것이 가악(歌樂)의 시초이다.”

삼국시대 문화재

원삼국시대의 주조철기에 대한 연구

.x Ⅰ. 머리말 Ⅱ. 연구배경 x. 고대주철 제작기술 x. 제강기술의 발전과 주철탈탄강 x. 조사방법 Ⅲ. 연구사례와 가평 대성리 유적Ⅱ 분석결과 x. 연구사례 x. 가평 대성리 유적Ⅱ 분석결과 Ⅳ. 맺음말 양 석 우 * 김 혜 선 ** *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유물관리팀 연구원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유물관리팀 연구원 .x 국문요약 원삼국시대는 B.C. x세기부터 A.D. x세기에 해당하는 시기로“ 당시의 철기문화는 고대국가의 성 립과 발전 과정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시기에는 세력 간의 대립이 빈번하여 강력한 철제 무기

키워드에 대한 정보 삼국 시대 문화재

다음은 Bing에서 삼국 시대 문화재 주제에 대한 검색 결과입니다. 필요한 경우 더 읽을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의 다양한 출처에서 편집되었습니다. 이 기사가 유용했기를 바랍니다.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사람들이 주제에 대해 자주 검색하는 키워드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 역사채널
  • 지식채널
  • 역사교육
  • ebs
  • 한국사
  • 국사
  • 유물
  • 문화재
  • 국보
  • 보물
  • 황금문화
  • 스키타이
  • 신라금관
  • 삼국통일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YouTube에서 삼국 시대 문화재 주제의 다른 동영상 보기

주제에 대한 기사를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국시대] 역사채널e – 황금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라, 신라의 황금문명 | 삼국 시대 문화재, 이 기사가 유용하다고 생각되면 공유하십시오, 매우 감사합니다.

See also  소규모 전력 중개 사업 | 지금부터 알아두면 좋은 신재생에너지 지식, 전력중개사업🔍 11521 명이 이 답변을 좋아했습니다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