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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4 장 | 요나 4장 15 개의 자세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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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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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4

제 4 장 …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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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10/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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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2(토) “요나 4:1-11” / 작성: 정인철

그런데 요나가 지금 악하다고 생각하며 분노했음을 나타내는 이 ‘라아’는 요나서 1장에서도 언급되었던 단어였습니다. … 여호와 앞에 상달되었던 니느웨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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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100church.org

Date Published: 7/28/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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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은혜를 배우다(욘 4) – 유평교회

본문 : 요나 4장. 설교자 : 이병권. 욘 4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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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achurch.or.kr

Date Published: 7/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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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말씀묵상. 11월 25일. 요나서 4장. – 하늘품은교회

요나서 4장.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1.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회개를 받으시고, 심판하지 않기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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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hapoom.or.kr

Date Published: 4/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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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4장 1-11절 말씀 묵상 – 네이버 블로그

요나4장 1-11절 말씀.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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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2/1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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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4장 성경공부 – Faithbook – 티스토리

요나서 4장 성경공부.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욘4:1) 니느웨는 회개했고 하나님도 이 도성을 향한 분노를 거두셨다. 하지만 요나의 반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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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faithbook.tistory.com

Date Published: 5/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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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4장 & 성경주석 – BIBLE STORY – 티스토리

<요나 4장 흐름정리>.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요나는 여기서 이 같은 왜곡된 인간 심성을 표출한다. 그는 국가적인 회개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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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ible-story.tistory.com

Date Published: 6/26/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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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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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요나서 4 장

  • Author: 공동체 성경 읽기
  • Views: 조회수 7,99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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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21. 1. 2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sXgkP3aWASc

요나 4

요나의 분노와 하나님의 자비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2019/10/12(토) “요나 4:1-11” / 작성: 정인철

본문 요나 4:1-11

찬송가 456장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선지자의 본분은 여호와의 신탁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하거나 감하지 않고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선지자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나는 자기 생각의 틀 안으로 하나님을 가두려고 했습니다.

불만을 담은 요나의 기도(1-4)

이러한 요나의 상태를 반영하기라도하듯,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싫어함과 분노였습니다. 그런데 ‘성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라아’는 ‘악하다’는 의미로도 번역이 됩니다. 따라서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를 받아 주시며 용서해주신 것에 대해 악하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는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지금 악하다고 생각하며 분노했음을 나타내는 이 ‘라아’는 요나서 1장에서도 언급되었던 단어였습니다.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여호와 앞에 상달되었던 니느웨의 악독이 ‘라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 속에서 니느웨의 악독함과 하나님의 용서를 같은 선상에 두고 있는 요나의 모습을 생각해볼 수 있고, 요나의 분노가 니느웨의 악독함과 같은 것임을 또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악으로 평가하는 요나는 기도를 통해 분노를 쏟아냅니다.

(2-3)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기에 다시스로 도망갔었고, 그대로 두었다면, 니느웨는 심판을 당했을텐데, 자신을 불렀기에 심판을 피하게 되었다고 불만을 섞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요나는 하나님께 죽음을 구합니다.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나는 민족의 원수, 니느웨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이 상황이 죽는 것보다 싫어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를 보며 아이러니한 것은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34장 6~7절에서 선포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며, 인애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정확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요나였지만, 원수를 향한 분노에 감정에 휩쓸려 냉정을 잃었습니다. 그저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행동이 자기의 뜻과는 같지 않으며, 이러한 상황이 죽도록 싫다고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를 향한 하나님의 권고는 외마디의 질문 뿐이었습니다.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는 자기가 분노한 지금의 상황으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했고,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요청했지만, 하나님은 그의 질문에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저 그의 분노가 옳은 것인지를 질문하셨습니다.

니느웨의 악독함과 요나의 분냄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요나 역시 니느웨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요나의 메시지를 들은 니느웨는 하나님 앞에 회개했지만, 요나는 그것마저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악을 행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도리어 심판을 받아야 할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 지금 요나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를 보며 우리의 모습을 또한 발견합니다. 먼저는 요나가 원수된 사람이 회개하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는커녕 원수의 회개마저도 달갑게 여기지 않은 것이 죄된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패더다임은 회개와 용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를 한없이 베푸시는 사랑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또한 요나의 모습 속에서 보게 되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을 램프의 요정처럼 생각하며, 필요할 때 찾으며, 필요 없을 때에는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우리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떼를 쓰듯 계속해서 기도를 합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겠다고 했으나, 정작 내가 서 있는 곳은 내 뜻에 닿은 곳일 때가 많이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걷고 있는 우리를 향해 “네가 옳으냐?”고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긍휼하신 하나님(5-11)

이제 요나는 니느웨 성읍 동편 밖으로 나가 자기를 위한 초막을 지어 거기에 앉았습니다. 초막은 가축의 우리나 원두막 같은 보호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초막은 조금 더 의미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막절은 광야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였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인 초막에 앉아서도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요나는 그저 하나님이 그 성읍에 무슨 일을 행하시는지를 지켜보는 관찰자의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요나가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한다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그 실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행동을 하실지를 지켜보는 감시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감시자가 된 요나는 하나님께서 성읍에 무엇을 하실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지금 하나님은 성읍이 아닌 요나에게 행동을 취하고자 하셨습니다. 6-8절에 ‘예비하사’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사역이 요나에게 향하고 있으며, 그 사역의 도구로 ‘박넝쿨’(6절), ‘벌레’(7절), ‘동풍’(8절)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에는 참 다양한 하나님 사역의 도구들이 발견이 됩니다. 1장에서는 ‘폭풍’과 ‘큰 물고기’가 사용되었는데, 4장에서는 또 다른 세가지 사역의 도구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돌이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역의 도구들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깨닫게 되며, 생명을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본 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6절은 요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역의 첫번째 사건이었습니다.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위해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박넝쿨의 은혜를 입은 요나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했다고 증언합니다. 1절에 하나님을 악하다고 평가하는 요나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니느웨에 임한 것을 보며 요나는 하나님을 악하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기에게 은혜가 임하자, 기쁘게 여겼습니다. 요나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다시 한번 지켜보게 만드는 행동이었습니다.

7-8절을 통해 이제 두번째와 세번째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7-8)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벌레를 통해 베푸셨던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셨습니다. 1장에서 잔잔한 바다 가운데 바람을 던져 풍랑을 일으키고 요나를 공격했던 것처럼, 박넝쿨 가운데 벌레를 통해 그것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두 사건은 방법에 있어 차이가 있었으나, 모두 초점은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박넝쿨이 말라 그늘을 잃은 요나에게 설상가상 뜨거운 동풍이 불어오고 해가 내리쪼았습니다. ‘쪼이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카’는 ‘치다, 때리다, 공격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역의 세번째 도구는 분명히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공격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공격에 요나는 응답합니다. 3절의 고백과 같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낫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이제 다시금 하나님은 요나를 향하여 질문합니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박넝쿨로 분노하는 것이 마땅한 것이냐?” 하나님의 이 질문은 1절의 요나의 분노를 반영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를 보며 요나는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요나는 박넝쿨을 준비하시고 또 그것을 제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분노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동에 대해 요나가 분노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를 물으시며, 그를 책망하시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강력한 책망에도 요나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인 신앙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가 분노로 인하여 죽는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옳다고 주장합니다.

끝까지 심중에 변화가 있지 않는 이 굳어버린 요나를 향하여,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10-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너’(요나)가 사랑한 ‘박넝쿨’과 ‘나’(여호와)가 사랑한 ‘니느웨의 12만여명의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대칭을 이루며 설명합니다.

하룻밤에 말란 버린 무력한 박넝쿨의 사라짐을 안타까워했던 요나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한 니느웨의 백성을 안타까워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나가 아무런 수고함 없이 자랐던 박넝쿨을 소중히 여기듯,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에 대한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까지 소중히 여기셨음을 이 선포를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너는 박넝쿨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느냐? 나는 니느웨 사람들을 소중히 여긴 것이다”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요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또한 발견합니다. 자기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물질, 박넝쿨을 소중히 여겼지만, 한 생명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반기지 않는 모습을 보며, 한 생명보다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물질을 더 귀하게 여기고 있는 역설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이러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비록 무지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본문 속에서 깨닫게 됩니다.

요나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는 자기 민족의 원수였던 니느웨에 찾아가 하나님의 신탁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무거워 자기의 감정과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는 달리 움직였고, 끝까지 하나님을 향해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뿐 아니라, 그러한 요나를 끝까지 사랑하시기에 이해시키고 이해시키시며, 주님의 말씀을 존중하도록 종용하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향하여 발을 떼는 우리의 걸음이 때로는 어리석어보이고 손해보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내게 주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라 여기며 기꺼이 발을 떼어 나아갈 때, 세상은 비록 우리의 인생을 덧없다 평가할지라도, 우리의 삶과 그 주변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가득해지고, 우리가 속한 공동체들이 변화의 물결에 함께 지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의 성읍 니느웨로 나아가,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을 허락해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그렇게 무거운 십자가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생각으로 멈추고 주님의 말씀을 더욱 존중하며, 기꺼이 한걸음 한걸음을 뗄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옵소서.

우리의 걸음을 보며 뒤에 있는 누군가가 손해보는 길이라고 말하며 어리석다고 여길지라도 앞서 걷고 계시는 주님만을 꿋꿋이 바라보고 주어진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그리스도인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꿋꿋한 시선과 묵묵한 이 걸음으로 인해, 우리가 속한 공동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역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뜻과 우리의 뜻이 다름을 알았을 때, 지난날 우리의 선택은 어떠했는지를 묵상해봅시다.

2. 우리의 선택과 달리 하나님의 뜻대로 진행됨을 보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를 묵상해봅시다.

3. 우리의 감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끝까지 사랑해주시며 기다려주신 경험이 있었습니까? 그러한 경험 이후, 삶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습니까?

4.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작성 : 정인철)

요나, 은혜를 배우다(욘 4)

주제 : 요나, 은혜를 배우다

본문 : 요나 4장

설교자 : 이병권

욘 4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오늘까지 우리는 4번에 걸쳐서 요나서를 살펴봤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요나서를 간단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은혜를 가르쳐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4장은 요나에게 은혜를 가르쳐주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 특별히 더 돋보이는 장입니다. 요나는 참 어려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운 것 같습니다. 요나가 어떤 방식으로 은혜를 배우는지 “요나, 은혜를 배우다”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3장에서 요나의 선포로 인해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이것을 본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요나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그의 사명이고, 그는 평생에 가장 놀라운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요나는 지금 그 현장에 있습니다. 정말 어메이징한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기 오산에 나가셔서 복음을 전하는데 듣는 사람마다 꼬꾸라지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한다면, 그래서 오산시 전체가 다 하나님 말씀으로 뒤집어 진다면 여러분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요나는 그러한 일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가 감격합니다. 기뻐 날뛰면서 춤을 춥니다.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요나서 4장의 시작입니다. 맞습니까?

네! 이래야 하는데 그게 마땅한 일인데, 그런데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고 싫어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고, 화가 나는 겁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못마땅한 겁니다. 요나는 니느웨의 회개와 하나님의 용서라는 그 감격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화를 냅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니느웨에 은혜를 베풀 수가 있어? 하나님께서 어떻게 저런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용서해주신단 말인가?” 요나는 그들이 심판받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지 않아서 화가 난 겁니다. “그들을 용서하시다니!” 이게 요나를 분노하게 한 겁니다. 자기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제사를 드린다며 난리를 쳤는데, 다른 사람이 그 은혜를 받으니까 그건 아닌 것 같다며 정의롭지 않다며 하나님 앞에서 화를 내는 겁니다.

그런데 요나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도 그럽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그냥 좀 넘어갔으면 합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하나님이 그냥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그래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그랬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특히 내가 싫어하는 사람, 내게 상처 준 사람은 더 그렇습니다. 어떻게든 처벌당하기를 바라고 어떻게든 그 잘못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면 화가 나는 겁니다. 요나처럼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인가요? 요나인가요? 문제는 “요나”에요. 문제는요 “나”에요. 내가 문제입니다. 요나는 어쩜 이렇게 우리와 닮았을까요? 화가 난 요나는 하나님께 자신의 분노를 쏟아 붓습니다. 2절에서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요나는 이 기도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합니다. 먼저 자기가 했던 잘못을 정당화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줄 알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니느웨를 용서하는 이 같은 대형 사고가 일어날 줄을 예상하고, 자신은 이것을 막기 위해 도망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은혜로운 분이시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요나는 마치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잘못이라도 되듯이 하나님을 몰아붙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요나는 죽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살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이거는 좋게 말해 기도지, 보면 기도가 아니라 협박입니다. 요나가 얼굴이 빨개져서 씩씩거리며 하나님께 악을 쓰는 겁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들이밀면서 덤비는 겁니다. “하나님 그냥 나를 죽이세요!”

이거는 진짜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까부는 겁니다. 이런 요나를 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래? 그렇게 네가 죽기를 원한다면 뜻대로 해주마!” 라고 말씀하시면서 커다란 폭풍을 보내셔서 요나를 다시 바다로 던져버리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정말 훌륭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철없는 아이를 설득하는 부모처럼, 슬픔과 실망과 분노의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반항하는 십대 아이를 설득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요나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러면서 질문하십니다. “요나야 한번 생각해보아라. 네가 화를 낼 권리가 있는 거냐? 이 일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런데 이 질문에 요나가 어떻게 합니까? 요나는 대답도 안하고 성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완전히 막가자는 겁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훈계를 하는데 화가 난다고 확 나가면서 방문을 쾅 닫는 것과 같은 겁니다. 5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요나는 니느웨 성 바깥으로 나가서 자기를 위해 초막을 짓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40일 후에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기 위해 앉아있습니다. “하나님! 저 니느웨 백성들을 벌하시든지, 나를 죽이시든지 알아서 하세요.”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일인 시위를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런 요나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빨리 자라는 박넝쿨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요나는 편안함을 느낍니다. 표정이 풀어지면서 입가에 미소가 돕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갑자기 행복해졌습니다. 6절에 보면.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요나서에서 요나가 기뻐했다는 표현이 여기에 처음 나옵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를 봤을 때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나무 그늘 하나에 엄청 기뻐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는 요나입니다. 문제는요 “나”입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았을 때도, 성도를 섬기는 일을 할 때도, 누군가 구원받았다는 말을 들을 때도, 별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트에서 1+1 상품을 제대로 하나 건지면 엄청 기뻐하는 겁니다. 제가 최근에 크게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라면을 먹으려고 하는데, 다시마가 들어있는 라면 아시죠? 포장을 뜯었는데 다시마가 3개가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 일은 잘 없잖아요. 2개도 아니고 3개라니! 저는 사진을 찍으며 아내에게 자랑을 합니다. 이거보라고 3개나 들어있다고 그러면서 엄청 기뻐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책임이 주어져도 기뻐하지 않는 제가 손가락만한 다시마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저도 요나와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 그렇게 화를 내던 요나가 박넝쿨이 주는 그늘로 인해 기뻐합니다. 그게 다였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음 날 새벽에 벌레를 예비하십니다. 그래서 요나의 초막을 덮은 박넝쿨에 보내시고, 그것을 갉아먹게 하십니다. 박넝쿨은 시들어 죽어버립니다. 그늘은 사라졌고 요나의 미소도 사라집니다. 이제 불타는 햇빛이 요나의 머리에 바로 꽂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습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온갖 거를 다 준비하십니다. 큰 바람을 보내서 바다에 빠뜨렸다가 큰 물고기를 준비하셔서 건지시고, 박넝쿨을 준비하셨다가 이제는 벌레와 뜨거운 동풍까지 준비하셨던 겁니다. 철없는 요나를 돌이키고 가르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되는 겁니다.

뜨거운 동풍을 맞으며 뙤약볕 아래에 있는 요나는 정신이 혼미해졌습니다. 요즘말로 멘붕 상태에 빠진 겁니다. 그래서 요나는 또 화를 냅니다. 8절에 요나가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십시오. 물고기 뱃속에서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감사하다가, 니느웨가 회개하니까 화를 내며 덤비다가, 박넝쿨 때문에 좋다고 기뻐하다가, 이제 그게 없어졌다고 또 화를 내면서 죽겠다고 소리 치고 있는 겁니다.

죽는다는 게 무슨 비장의 무기에요. 뭐가 그렇게 대단한 목숨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걸핏하면 죽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요나가 원하는 대로 동풍의 온도를 300도로 올려가지고 요나를 바비큐가 되게 하셨습니다. 제 아내가 하나님이었다면 그렇게 요리했을 겁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여러분, 이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인내심이 한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4절에서 하셨던 질문과 같은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요나야, 이 일이 지금 네가 화를 낼 일이냐? 나의 말을 전하는 선지자인 네가 큰 성읍 니느웨의 회개를 직접 보면서도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화를 내며 죽기를 구하는 것이 어떠냐? 그런 일이 너에게 가당한 것이냐? 네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지 않느냐?”

그런데 요나의 대답은 정말 가관입니다. 9절을 다시 보면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요나가 대답합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정말 독이 제대로 올랐습니다. 못 말리는 수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나에게 마침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씀을 하십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이렇게 끝이 납니다. 이게 요나서의 끝입니다. 혹시 찝찝하게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분명하게 해주면 좋겠는데 뭔가 쓰다가 그만둔 거처럼 요나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요나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하셨다고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질문은 요나야 말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합니다. 요나는 집착할 가치도 없고 권리도 없는 것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하루살이와 같은, 그것도 자신이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은 박넝쿨을 아끼며 그것 때문에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들을 아끼는 것은 어떻습니까?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요나에게 그것을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요나는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니느웨까지, 자기가 원수로 생각하는 그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이 아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박넝쿨을 통해서 니느웨 백성들을 아끼시는 자신의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질문에 대한 요나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화를 냈던 요나가 어떻게 했을까요? 궁금하지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요나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라는 질문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요나서의 요나가요 “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은 은혜를 기억함으로 나도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삶으로 실천하는 겁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은혜로운 분이신지 알았습니다. 그가 2절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알고 있는 것이 자신의 삶과는 잘 안 맞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이고, 이스라엘의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데에 대해서 분노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렇게 넓고, 그렇게 파격적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이 회개하는 영적 축제의 현장에서 오히려 화를 냈던 겁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넓은지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시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도 되는데 저런 사람들은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은 안 돼,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면 화가 납니다. 내가 생각하는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이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요나처럼, 그리고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형처럼 화를 냅니다. 기뻐하지 못합니다. 나는 괜찮지만, 나는 받아도 되지만, 저런 사람들은 안 된다는 겁니다. 그것은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도 파격적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거기에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좀 받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바람을 일으키시고, 배, 물고기, 박넝쿨, 벌레 온갖 것을 다 동원하셨습니다. 요나를 바다에 빠뜨렸다가 건져내셨다가 다시 니느웨에 보내셨다가 훈계하셨다가 온갖 일을 다 하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넓은 것인지, 그것이 얼마나 어메이징한 것인지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니느웨 같은 죄인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요나를 위해 그렇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역사하셨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그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역사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는 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에게 니느웨는 누구입니까? 여러분 마음에 니느웨와 같은 사람이 있으십니까? 그 사람이 누구이든지, 아무리 내게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내 도덕적인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 생활 방식과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은혜를 베풀고, 용서하고, 두 번째 기회를 주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은혜 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가르쳐주길 원하셨던 그 놀라운 은혜를 우리도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 파격적인, 크고도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은혜로운 자가 되어 은혜를 베풀며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살벌합니까? 언제, 어디에서 맹수가 뛰어 나올지 모르는 밀림 속 같습니다. 서로 잡아먹으려고 경쟁하고 밟고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조금이라도 흠 잡을 것이 있으면 찍어 내리고 비난합니다. 나에게 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냥 막 인상을 쓰고 언성을 높이며 싸우고 그렇게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교회는 좀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가운데는 뭔가 관대함이 있고 너그러움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행한 대로 갚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품어 주고 안아 주고 함께 고통을 나누며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의 힘이고 우리의 경쟁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과 교회가 다른 것입니다. 세상에서 절대 경험할 수 없는 은혜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삶에 함께하셔서 앞서 준비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가 아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누군가의 삶을 도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매일말씀묵상. 11월 25일. 요나서 4장. > 매일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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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서 4장.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1.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회개를 받으시고 , 심판하지 않기로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인해 요나의 마음이 크게 상하였습니다 (1).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순종하여 선지자의 사명을 다했지만 , 요나는 이 사역의 결과를 매우 싫어했고 , 하나님께 성을 내기까지 합니다 .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2).”

2.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요나의 고백은 매우 옳은 표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러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이스라엘에게만 부어주셔야지 , 이스라엘을 멸망하려고 침략하는 니느웨에 그 긍휼하심이 부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니느웨가 돌이키기를 바라셨지만 ,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랐던 것이죠 . 그래서 요나는 너무나 분했습니다 . 그래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기까지 합니다(3).

3. 이때 하나님께서는 ‘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 네가 성낼 권리가 있느냐 ’ 물으십니다(4).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하면서도 , 조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 하나님께 성을 내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고 , 그런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노력하고 열심히 했을지라도, 하나님께 성낼 권리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4.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 요나는 니느웨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자리를 잡습니다 (5). 5절의 동사들을 주목해보십시오. ‘나가서’,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의 무대를 벗어나려고 합니다. ‘앉아서’와 ‘보려고’, 그리고 ‘앉았더라.’는 이제 요나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 하나님의 일을 하는 대신에 ,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구경꾼으로 전락했음을 시사합니다 .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리고 ‘그늘 아래에’라는 표현은 요나가 다시 이전의 안락함을 추구하는 삶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5. 이렇게 성질을 내고 있는 요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 박 넝쿨을 예비하셔서 , 요나에게 큰 그늘을 만들어주심으로 요나의 괴로움을 덜어주십니다 (6). 분노로 온통 마음이 뒤집어진 요나의 마음은, 이 작은 박 넝쿨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였다’고 말합니다.

6. 박 넝쿨로 인해 요나는 조금 편안해졌습니다 . 그런데 이튿날 새벽 , 요나가 기뻐했던 박 넝쿨이 사라져버렸습니다 . 하나님께서 작은 벌레를 예비하셔서, 박 넝쿨을 밤새 갉아먹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뜨거운 동풍은, 아침 해를 더욱 뜨겁게 요나에게 비추었고, 요나는 다시 죽기를 구할 만큼 고통스러워합니다(8).

7. 다시 하나님께서는, 박 넝쿨이 없어진 것으로 네가 성낼 권리가 있냐고 물으십니다. 요나의 대답은 그 마음의 상함이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이게 인간입니다 . 우리는 하나님께 화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주셔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이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오래 참으심으로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10~11).”

8. 우리도 요나처럼 하나님께 이것저것을 요구하거나 ,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실 때 화를 낼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요 ? 하나님보다 내가 더 옳다고 생각하면서 , 하나님을 가르치려 들 때도 있지 않을까요 ? “ 하나님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셔야죠 !”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좋아하지만, 그 은혜와 사랑이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나타나지 않을 때 우리는 분노합니다. 성을 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 니느웨 성에 사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아끼셨습니다 .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지만 , 나만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 그럼에도 하나님은 불순종하고 반항하는 요나를 아끼십니다. 요나와 함께 배를 탔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도 아끼시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니느웨의 사람들에게 마저도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넓고 넓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아십니까? 그것은 감히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것이며, 측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내 머리하나 가려줄 박 넝쿨을 소중하게 여기는 작고 작은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요나서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질문으로 끝이 납니다 . “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 이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 이 은혜로 인해 우리가 구원받지 않았습니까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을 봅니다. 그러면서 저희의 작고 좁은 마음도 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품지 못하는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기꺼이 이웃을 섬기며,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아버지의 아들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요나4장 1-11절 말씀 묵상

요나4장 1-11절 말씀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요나4장 1-11절

요나4장 1-11절 말씀 묵상

표준새번역,,,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1절>그는 주께 기도하며 아뢰었다. “주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가 서둘러 다시스로 달아났던 것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2절>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3절>주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책망하셨다.<4절>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 못 마땅했습니다. 매우 싫어하고 성이 날 정도입니다. 그는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실 줄을 알아서 다시로 갔다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위고 자비로우셔서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자기에게 니느웨에 가서 멸망한다고 전하라고 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구원하실 마음이셨다는 것을 알았기에 자기로써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였습니다.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참혹하게 사람들을 죽인 그들은 마땅히 멸망 받을 사람이지 결코 용서받아서는 안될 사람들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용서 받고 구원 받는 것을 보는 것은 죽기보다도 싫은 일이였습니다. 요나는 차라리 자기의 생명을 거두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화를 내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십니다. 비록 인간적인 생각에 받아 들일 수 없어도 선지자라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더구나 물고기 뱃속에서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면 다시스로 도망할 때와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는 자기의 잘못을 알고는 있었지만 돌이켜서 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이 아직은 부족했나 봅니다. 그만큼 그는 니느웨 사람들을 증오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여러번 들으면서도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로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이 옳으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요나 는 그 성읍에서 빠져 나와 그 성읍 동쪽으로 가서 머물렀다. 그는 거기에다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다. 그 성읍이 어찌 되는가를 볼 셈이었다. <5절>주 하나님이 박 넝쿨을 마련하셨다. 주께서는, 그것이 자라올라 요나 의 머리 위에 그늘이 지게 하여, 그를 편안하게 해주셨다. 박 넝쿨 때문에 요나 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6절> 그러나 다음날 동이 틀 무렵, 하나님이 벌레를 한 마리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박 넝쿨을 쏠아 버리니, 그 식물이 시들고 말았다.<7절> 해가 뜨자, 하나님이 찌는 듯이 뜨거운 동풍을 마련하셨다. 햇볕이 요나 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그는 기력을 잃고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8절>하나님이 요나 에게 말씀하셨다. “박 넝쿨이 죽었다고 네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 가 대답하였다. “옳다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9절>주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10절>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 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11절>

요나는 끝까지 자기 뜻을 꺾지 않고 성읍을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나 보려고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아마도 사십일이면 무너질 것이라고<3;4절>선포했으니 이들이 회개가 중도에라도 그치고 멸망 받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기다리듯이 끝까지 지켜 보려는 것입니다 . 그런 요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예비하사 그의 머리에 그늘이 지게 하여 주셔서 요나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여 주셨는데 요나는 그 그늘로 인하여 크게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다음 날 새벽에 벌레를 예비하사 갉아 먹게 하시고 해가 뜰 때에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시고 해가 요나의 머리에 쪼이게 하시니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사는 것이 죽는 것이 내게 낫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이 박 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마땅하냐고 물으십니다. 요나는 박넝쿨 때문에 너무 기분이 좋았는데 벌레가 갉아 먹어 버린 것을 보고 화가 난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서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옳다고 대답합니다. 뜨겁고 괴롭고 화가 나고 하나님께도 성을 내고 있습니다. 고집도 세고 성질도 고약하고 말도 듣지 않는 선지자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요나에게도 그의 고백처럼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계십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경험하기를 원하시기에 끝까지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부드럽게 대하시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수고도 하지 않았고 재배도 하지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늘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한 자가 십이만 명이요 가축도 많으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자기 민족만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받아야 하고 자기들에게 잘못한 원수들은 멸망 받아야 한다는 지극히 편협하고 인간적인 생각에 똘똘 뭉쳐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나에게 하나님은 모든 민족이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시기에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원하셨습니다. 요나를 보니 우리들도 하나님께서 끝까지 참아 주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사55;7-9절은 ”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우리는 더 깊이 깨닫고 더 깊이 알아야 합니다. 요나서는 여기서 끝이지만 요나는 변화했을까요? 땅에 사는 우리들도 요나와 같을 수 밖에 없기에 날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땅에서 하늘로 옮겨 주시고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우리의 마음을 넓혀 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승리하시기를 기도하며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요나서 4장 성경공부

요나서 4장 성경공부

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욘4:1) 니느웨는 회개했고 하나님도 이 도성을 향한 분노를 거두셨다. 하지만 요나의 반응은 심상치 않다. 요나의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히브리 단어는 앞에서 니느웨 사람들의 악한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던 단어이다.

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라.”(욘4:2)

3. 요나는 하나님께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요나의 이러한 반응은 요나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어리둥절한 대목이다. 생각해보면, 요나 입장에서는 최악의 우려가 현실이되었다. 요나 입장에서는 그가 상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상황이 펼쳐졌다. 사력을 다해 저지하려 했던 일이 벌어졌다.

4.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은혜는 이방인에게까지는 해당되지 않아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과 하나님의 행동이 모순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만의 상자 안에 담아 두려 했다. 어쩌면 하나님보다 자신의 신념을 더 믿었을지 모른다.

5. 모든 사람은 무엇인가를 예배한다. 그것이 신이건 물건이던 내가 의지하는 대상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만일 내가 섬기는 대상을 잃으면 절망을 느낀다. 예를 들어, 외로움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섬긴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무의미한 인생을 구원해줄 것이라 믿는다.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존중 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인맥, 외모, 차량, 수입 등을 섬긴다. 이런 것들에 의지해 존재 가치를 인정 받으려 한다. 쓸모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국 경력이나 업적을 섬기게 된다.

6. 우리가 섬기는 모든 것의 배후에는 그것이 없어지면 끝장이라는 두려움이 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의 대용물을 만들어낸다. 만일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먼저 자신이 섬기는 우상을 찾아내야 한다. 만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요나처럼 순종하면서도 하나님을 피해 달아날 수 있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욘4:4)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되 물으신다. 이 말은 화를 내는 표현이라기 보다는 상황판단을 정확히 한 것인지 되물어 보는 표현이다. 성난 요나는 ‘너의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은 후 자신이 옳을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나는 떠나지 않고, 니느웨를 관찰한다.

8. “요나가 성읍에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업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4:5) 요나는 성읍 안에 위치하지 않았다. 그는 도성 밖으로 나가 혼자 있는 쪽을 선택했다. 왜 일까? 성 안에서 확인하는 것이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임에도 요나가 성읍 바깥에 위치한 것은 혹시라도 니느웨가 자신의 신념대로 무너질 가능성을 염두한 영적 교만함일 것이다.

9. 그러던 중에 뜨거운 태양 볕을 피할 수 있는 박 넝쿨을 발견하여 요나는 기뻐했다. (욘4:6)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욘4:7) 게다가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4:8) 라고 말했다.

10. 시로코(Sirocco)라고 불리우는 동풍은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열풍이다. 시로코가 불면 기운이 급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 대낮의 기온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하며, 공기 중의 습기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가 당기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D.Baly). 이런 현상이 나타나면 사람들의 불쾌 지수가 높아져서 아무리 온순한 사람이라도 까다로와지고 신경질적이 되어 아무 이유 없이도 서로 싸우며, 온갖 초목은 메말라 버린다.

11.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9) 라고 물으신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앞에서(4절)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보고 성냈을 때, 질문했던 단어와 똑같다. 즉,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자기 입장에서 니느웨의 구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로 박 넝쿨이 시들자 이것도 못마땅하게 여긴 점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는 점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다.

12. 하지만 요나의 대답은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4:9) 였다. 요나는 하나님께 항복하기보다 지상의 삶을 포기하는 싶어 해 보인다. 그는 솟아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고 있지 못한다. 그는 현재의 분노와 자신의 이해되지 않음으로 인해 지금까지의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를 모두 망각해버렸다. 그는 분노 앞에, 의리도, 신의도, 그리고 믿음도 잊었다.

1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 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4:10-11) 요나서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이다. 대답 없는 질문으로 불쑥 끝나버린다. 막은 내린 셈이고, 갑작스러운 엔딩은 이 이야기의 적용을 독자에게로 넘긴다.

14. 성경에서 대부분의 선지서들은 선지자의 메시지에 그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요나서는 선지자의 메시지가 아니라 선지자에게 초점을 맞춘 유일한 선지서이다. 그러므로, 요나의 모습, 요나의 삶이 곧 독자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메시지는 요나와 동일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15. 학자들에 의하면 요나서의 시기는 기원전 약 760년경,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멸망은 722년 그리고 그로부터 110년 뒤 앗수르도 무너졌다. 이 세상에 하나님을 제외하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하나님을 등져가며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16.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근거를 그 분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의 실적에 두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내 삶에서 혜택을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분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도를 정의 내린다. 하지만 이것은 옳지 않다. 돌아보면 하나님은 이미, 그리고 충분히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을 나타내시며 우리를 도우셨다.

17.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분노는 지나간 은혜를 망각하는 모습과 하나님보다 앞선 자신의 신념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요나 같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께 아쉬움을 토로하기 전에 우리가 고백해야 할 감사의 제목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혹시 나 혼자만의 하나님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요나 4장 & 성경주석

<요나 4장 흐름정리>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요나는 여기서 이 같은 왜곡된 인간 심성을 표출한다. 그는 국가적인 회개를 통해 심판이 연기된 니느웨 성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이스라엘의 대적국인 니느웨에 은혜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아직도 만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속 계획을 깨닫지 못하고 편협한 국가 이기주의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은 박 넝쿨을 통해서 요나의 오해를 지적하셨다.

<요나 4장 줄거리>

1. 요나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불평함.

4. 요나가 박 넝쿨 표상을 통해 질책을 받음.

<요나 4장 개역한글>

1.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2.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니라

5.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7.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 넝쿨을 씹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

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 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요나 4장 성경주석>

4:1 싫어하고.

첫 번째 구절은 문자적으로 “그것은 요나에게 악, 곧 커다란 악이었다”이다. 제4장은 인간의 마음의 조급함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현저하게 대비하여 나타내 준다. 요나는 싫어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뜻을 돌이키”신 것에 대해 몹시 분개했다(3:10).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하는 니느웨 사람들을 용서해 주었음을 기뻐하는 대신, 그는 자기의 이기적이고 죄된 자존심 때문에 분개함을 나타냈다. 자기가 예언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거짓 선지자로 간주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에게는 앗수르 수도에 사는 모든 영혼들보다도 자기의 명성이 더욱 소중했다. 그는 성취되지 않은 그 예언 때문에 이방인들 가운데서 미래를 아시는 여호와의 능력이 불신을 받게 될 것이라고 추론했을지도 모른다.

4:1 노하여.

. 니느웨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는(3:10) 요나를 격분하게 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그가 불순종했을 때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건만, 하나님께서 동일한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베푸셨을 때 그는 그것을 질투했다.

4:2 기도하여.

2장의 기도와 비교할 때 이 기도를 드릴 때의 상황은 얼마나 다르며, 이 기도를 하게 만든 그 정신은 얼마나 다른가! 그때 그는 생명을 달라고 기도했지만, 여기서는 죽음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때 그는 겸손했지만 지금은 화를 낸다.

4:3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나님께 드리는 요나의 간청은 모세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모세는 죄를 범한 자기 백성을 살리기 위해 진정한 자기희생 정신으로 기꺼이 자기의 이름을 지워버려 달라고 호소했다(참조 출 32:31, 32). 요나는 완전히 낙담에 빠졌다.

4:4 성냄.

요나의 성냄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을 쫓아내실 때에 나타내신 것과 같은 고결한 분노(참조 요 2:13~17)가 아니라 전적으로 이기심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그 선지자는 자기의 성급한 정신으로 인해 스스로 큰 축복을 빼앗겼다(참조 잠 14:29; 16:32).

4:5 보려 하니라.

어떤 이들은 요나가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절)라는 질문을 자기가 하나님의 의도를 성급하게 오판했으며 니느웨가 아직도 멸망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했다고 제시했으나, 다른 이들은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진지하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벌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제시했다. 그러나 오히려 요나의 반응은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경고하셨던 것처럼 실행하셔야 한다는 요나의 완고한 태도와 주장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4:6 박 넝쿨.

히브리어 키카욘(qiqayon). 알려지지 않은 식물. 아주까리, 일종의 오이 등 여러 가지가 그 정체로 제시되었다. 그 식물은 기적적으로 성장했으며, 비록 이것이 그 지역에서 잘 알려진 악갓어로 쿡카니투(kukka-ni-tu)라고 하는 미확인된 종류의 식물일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구태여 그 정체를 빠르게 성장하는 어떤 알려진 식물로 확인할 필요는 없다.

4:6 준비하사.

. 히브리어 마나(manah), “지정하다.”

4:6 괴로움.

.히브리어 라아(ra‘ah). 악, 불운, 고생, 불행 등을 의미하는 일반적인 단어. 요나의 불편함은 육체적인 것이었기보다는 그가 당하고 있다고 느낀 속상함과 모욕과 실망으로 인한 정신적이며 영적인 것이었다.

4:7 준비하사.

참조 6절 주석.

4:7 시드니라.

. 인생의 경험에서 얼마나 자주 기쁨과 즐거움의 새 날이 시작되는 것처럼 보일 때, 어떤 불행이나 슬픔의 벌레가 와서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 버리는가!

4:8 뜨거운.

히브리어 하리쉬트(h.aris∨it). 단지 이곳에만 나오는 단어로 “태우는 듯한”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개정표준역」은 “찌는 듯이 더운”이라는 의미를 제시한다.

4:8 준비하셨고.

.참조 6절 주석.

4:9 내가…합당하니이다.

선지자는 성급하고 완고하게 자기가 성내고 죽고자 결심한 것이 옳다고 항변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속에 사리에 맞는 태도를 일깨우려고 애쓰고 계셨다.

4:10 네가 아꼈거든.

히브리어에서 “네가”는 강조형이다. 화가 난, 동정심이 없는 선지자 요나는 자기가 아무런 노동이나 수고를 들이지 않은 별 가치 없고 하찮은 박 넝쿨에는 기꺼이 동정심을 나타내고 아까워했으나, 큰 도성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배려를 나타내고자 하지 않았다. 「70인역」은 이 절의 처음 부분을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네가 그것을 위해 고생하지도 않고 네가 그것을 기르지도 않은 박 넝쿨에 동정심을 가졌다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것에 대해 화를 냈고(1, 4절), 하나님께서 박 넝쿨을 시들도록 허락하셨을 때도 화를 냈다(9절). 얼마나 왜곡된 가치관인가!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보다도 박 넝쿨을 더 소중하게 생각했다.

4:11 분변치 못하는.

어떤 이들은 이 표현을 아직 나이가 어려서 어느 쪽 손이 더 강하고 유용한지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이들에게 적용시켰다. 만약 그런 어린이들이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구성한다고 가정할 경우 니느웨는 약 600,000명의 인구를 가진 도성이었을 것이다. 그런 수치는 그 고대 도성의 알려진 크기와 조화될 수 없는 너무나도 큰 숫자이다. “분변치 못하는”이라는 표현은 선과 악에 대해 불완전한 지식을 소유한 자들을 지칭하는 은유적인 내용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더 좋은 것으로 보인다. 만약에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 보아야 한다면 니느웨와 함께 그 주변 성읍들도 포함되었을 것이다(참조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

4:11 십이만여 명이요.

. 니느웨의 인구에 대하여는 제1장에 대한 추가적 설명을 참조하라.

4:11 아끼는 것이.

. 히브리어 후스(h.us), “유감스럽게 여기다”, “~에 동정심을 나타내다.” 후스는 10절에서 “아꼈거든”으로 번역되었다.

참고자료

–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성경주석」 제8권, 시조사.

– 「열린노트성경」, 아가페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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