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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의 믿음 | [하용조 목사의 믿음] 11강.아브라함의 믿음 (히11:8-12) 26245 투표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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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하여” | 대전광역시청

지금의 기독교인들도 아브라함만큼은 하지 못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성경)을 각자의 믿음의 분량대로 지켜 행하려 노력해야, 가나안 땅(지금은 천국)을 유업으로 받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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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daejeon.go.kr

Date Published: 4/22/2021

View: 243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믿음은 어떤 것인가 – 늘푸른교회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던 갈대아 우르를 버리고 떠나 가나안으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 받아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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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vergreenpromising.org

Date Published: 8/6/2021

View: 9207

Sermon – 아브라함의 믿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보였습니다. 본 적도 없는 약속의 땅을 향해 자기의 시선을 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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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palomarkc.org

Date Published: 1/27/2021

View: 2632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 – 시사미래신문

가족과 함께 하란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면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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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sisamirae.com

Date Published: 6/8/2021

View: 3908

[오늘의 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 국민일보

[오늘의 설교] 아브라함의 믿음 기사의 사진. 히브리서 11장 17∼19절 창세기 22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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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news.kmib.co.kr

Date Published: 12/19/2021

View: 5797

로마서 4 KLB – 믿음으로 의롭게 된 아브라함 – Bible Gateway

이것은 그 약속이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 곧 율법을 지키는 사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주시는 선물이 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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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biblegateway.com

Date Published: 4/8/2021

View: 3439

“아브라함의 삶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고 하나님의 눈에 의롭게 여겨지게 했던 믿음(창세기 15)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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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gotquestions.org

Date Published: 5/23/2021

View: 4313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 – Faithlife Sermons

성경 인물 시리즈 :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통하여 현재의 신앙 생활을 돌아보고 결단하는 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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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ermons.faithlife.com

Date Published: 7/16/2021

View: 5819

믿음(6) 아브라함의 믿음(히11:8-10) – 열린교회

세계 인구의 거의 반절이 믿음으로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분이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여러 신앙의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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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yeolin.or.kr

Date Published: 1/14/2022

View: 8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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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용조 목사의 믿음] 11강.아브라함의 믿음 (히1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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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아브라함 의 믿음

  • Author: CGNTV하용조
  • Views: 조회수 36,511회
  • Likes: 좋아요 298개
  • Date Published: 2013. 7. 24.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FFd-4rflsro

아브라함의 믿음

성화 중에 두 발자국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해변을 따라 두 쌍의 발자국이 모래 위에 찍혀져 있습니다. 주님 품에 안긴 한쪽 발자국의 주인공이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 여기를 보세요 이때가 제 인생 중에 가장 어려운 때였습니다. 이때에 주님은 계시지 않았고 자기 혼자 걸었다며 원망 섞인 말을 합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발자국을 잘 보아라 이것은 네 발자국이 아니라 내 발자국이란다. 네가 제일 힘들었을 때에 내가 너를 안고 걸었단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한번 이 세상에서 나서 살다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흙으로 돌아갑니다. 해변을 걸은 사람이 모래 위에 흔적을 남기듯이 한번 살다가 간 인생은 흔적을 남기기 마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훌륭한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일을 많이 했다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아 후세에 귀한 믿음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난 주 살펴보았던 아벨, 에녹 그리고 노아에 이어 오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함께 살펴봅니다.

“믿음으로 … 나아갈 새”(11:1)

믿음은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동행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할 때부터 믿음의 여정은 시작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1-3). 그 말씀은 아브라함의 인생여정에 한 획을 긋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그에게 비전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담겨진 약속을 마음에 품으며 믿음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요즈음으로 따진다면 모태신앙도 아니요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하나님을 믿고 섬긴 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공회 중에 앉은 무리들에게 증언하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7:2-3)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살던 지역은 갈대아 우르로서, 바벨론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우상을 숭배하였고, 죄악이 만연한 곳이었기에 아브라함도 어려서부터 우상에 둘러싸인 채 살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있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더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되어 하란을 떠납니다. 아브라함 가족이 하란에 60년을 머물렀으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을 때는 15세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기에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전히 의미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섬기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기억하시고 인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데라가 죽은 후 하나님은 다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떠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때 믿음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사람들이 자기의 삶의 터전을 떠나 잘 알지 못하는 곳으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자칫하면 낭패를 당하거나 삶이 불안정하게 될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지금까지 살아온 이 세상의 방식을 떠나서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에 약속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란을 무조건 떠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 아니라 그에 따른 대가가 있다고 하시며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약속이 담겨 있습니까?

1) 너는 큰 민족을 이룰 것이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룬다고 하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 노년이 된 지금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실지 알 수 없었지만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은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영적인 자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조상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네 이름이 창대해질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물질의 복, 현세의 복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복, 신령한 복, 영원한 복을 포함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됨으로 그가 얻을 명예와 영광을 있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메시아가 날 것이며 그는 온 인류에게 복이 될 것입니다.

3)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축복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히 아브라함 편이 되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 똑같이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갈 3:9)는다고 했습니다.

– 부르심에 순종합니다

믿음의 여정을 가려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믿음을 보였습니다. 본 적도 없는 약속의 땅을 향해 자기의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그의 떠남이 대단했던 것은 그가‘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노아도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했습니다. 모든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에 순종했습니다. 가야할 곳을 미리 보고, 가야 할 길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에 기꺼이 고향과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75세가 된 할아버지가 정든 고향, 삶의 터전을 떠나 낯선 곳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 커다란 모험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 그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모험을 하게 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믿음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확신을 가지고 행동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 하셨지만 아브라함은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몰랐습니다. 요즈음처럼 internet를 통하여 갈 곳을 미리 알아볼 수 없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거나 지도를 찾으며 사전 조사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오직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믿고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아직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것처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 말씀에 담겨진 약속을 붙잡습니다. 그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이루어 질 때까지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그러나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기다림입니다. 때로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의 갭이 너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눈앞에 놓인 현실을 인하여 의심하거나 그 약속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여정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같이 길을 떠났는데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 길을 가는 동기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갔고 롯은 그저 삼촌 아브라함을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지만 사람을 좇아갔던 롯은 낭패를 당했습니다. 나중에 롯은 아브라함과 헤어져 소돔 땅에 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비가 내릴 때 도망쳐 나오던 롯의 아내는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고, 소알이라는 작은 성에 피신했던 롯의 두 딸들은 아버지와 더불어 부끄러운 관계를 통하여 모압과 암몬이라는 두 아들을 낳고 영원히 저주받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에 기초한 소망을 가지고 길을 떠났기에 그는 복의 근원이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 장막에 거할 새”(11:9-10)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고향을 떠난 것도 믿음의 행위였지만 지시한 땅에 도착해서 삶을 시작한 것도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하였을 때 가나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그 땅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라고 말한다고 가나안 거민들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아브라함에게 호락호락 내어줄리 없습니다. 아내인 사라가 죽었을 때 매장할 곳을 확보하기 위해 헷 족속에게서 400세겔을 주고 막벨라 동굴을 구입했는데, 그것이 아브라함의 첫 소유지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거주한 것은 그곳이 그의 땅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에 집을 짓고 정착한 것이 아니라 ‘장막에 거했다’고 합니다. 텐트를 치는 것은 언제든지 걷고 떠날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그가 약속의 땅에서 나그네살이를 했음을 보여줍니다. 이삭과 야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자와 건축자가 되셔서 지으실 성(하나님 나라)이 있음을 믿었기에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믿음으로 …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11:11-12)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11절을 보면 누가 믿음이 있다는 것입니까? 사라입니까? 아브라함입니까? 개역성경은 사라가 믿음이 있는 것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본을 사용하였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집니다. 많은 성경들이 사라를 주어로 번역합니다. 성경에 따라서는 사라를 주어로 하거나 아브라함을 주어로 할 수 있다고 하며 두 가지 번역을 다 소개하기도 합니다. NIV가 그렇고 표준새번역이 그렇습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사라의 믿음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라는 그의 몸종인 하갈과 갈등을 벌어다가 두 번씩이나 그를 쫓아냅니다.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그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내가 늙었고 아브라함도 늙었는데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며 웃다가 들켜서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창 18:9~15). 또한 ‘잉태할 수 있는’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전형적으로 남성의 생식 능력을 가리키는 관용구입니다. 12절에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이라 할 때 ‘죽은 자’나 ‘한 사람’은 다 남성명사를 사용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주체로 하여 표준새번역에서 번역한 것을 보면 ‘비록 그는 늙고 그의 아내 사라 역시 단산하였지만, 믿음으로 그는 생식의 능력을 얻었습니다. 이는 그(아브라함)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한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수많은’후손이 생겨났습니다. 히브리서는 수많은 후손이 생겨난 것이 기적적인 일임을 강조하기 위해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늙었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후사를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라면 아무리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라도 이루어질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길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밝히 보여주실 때 믿음으로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11:13-16)

‘믿음을 따라 죽었다’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계속 믿음을 지녔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말할 때 주로 땅과 자손의 복을 뜻합니다. 그런데 족장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즉 땅과 수많은 후손을 죽기 전에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지만, 끝내 그 땅의 주인이 되지 못했고 여전히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원래 사라가 죽었을 때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한 매장지를 사기 위해 헷 족속에게 한 말에서 유래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창 23:4) 하면서 매장지를 팔라고 하였습니다. ‘외국인’이란 외지인을 뜻하고, ‘나그네’란 그 땅에 사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뜻합니다. 그들이 나그네요 외국인으로 살면서도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이 땅에 사는 동안 본향을 찾는 사람의 마음으로 살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갈대아 우르나 하란이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족장들의 믿음과 히브리서 공동체의 신앙을 동일시합니다. 족장들의 믿음도 이 땅에서는 완성되지 않을 미래의 소망에 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족장들이 바라본 것이 사실은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떠나온 본향을 생각했더라면 얼마든지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본향,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들의 하나님이라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성은 아브라함이 족장으로 살던 장막과 대조되는 영원한 성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까?

1)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라 명하셨습니다. 그 당시는 부족사회였습니다. 부족원들의 숫자가 많아야 힘이 강헤서 부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향과 친척 아버지 집은 아브라함 가족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였습니다. 따라서 그곳을 떠난다는 것은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믿음은 인생의 방향과 목표를 정함에 있어 자기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택과 결정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땅의 번영과 명예를 위해 우상을 만들지 않고, 장차 뵙게 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 없이 산 그들을 하나님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의 뜻과 지혜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지혜를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자기의 갈 바를 알지 모를지라도 자기를 인도하시는 분이 누구인가를 알기 때문입니다.

2)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

하나님은 이미 늙어 경수가 끊어진 사라의 몸에서 약속의 씨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했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은 사라가 잉태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 은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얻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죽은 자와 같던 늙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와 같은 후손들이 배출되었습니다. 아무리 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지라도 믿음을 가지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음은 나라를 만들고 민족을 이루는 위대한 생명의 역사를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주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항상 기뻐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3)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만 붙들고 가나안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런 기업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약속의 땅은 여전히 이방인들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떠나온 고향에 비하면 불편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지탱해 준 것은 그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다는 점입니다. 그는 더 나은 본향, 하늘에 있는 기업을 사모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족장들뿐 아니라 바로 당신의 백성을 위해 한 성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성에 들어갈 자격도, 능력도 없는 인간을 위해 그분을 믿을 때 그 성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갔듯이 성도들은 이 땅에서 새 예루살렘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은 참된 안식이 있는 곳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리라는 것과 자신이 믿음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 믿음의 이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며 하늘의 본향을 향해 가는 사람의 삶을 깨닫습니다. 우리도 이 땅의 것을 버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믿음을 가진다면 세상을 향한 미련과 욕심을 버리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단지 나그네요 외국인임을 고백한다면 지금 정리하고 비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아직 나타나지 않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확신하는 참 믿음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과 올바른 교제가 있을 때 믿음의 진보가 이루어지고 믿음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언제나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하여 믿음으로 반응했던 사람들입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기도하고 헌신하는 가운데 때를 따라 임하는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함께 모든 성도들이 아브라함과 같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의 삶을 통하여 주님과 동행하며 훌륭한 믿음의 발자취를 남기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

아브람의 믿음을 본받자(창세기12:1-9)

우리가 보통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갈라디아서 3장 7절에서 유래되었는데요, 거기에 보면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는 말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 믿음의 아버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유된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은 또한 믿음생활에 모범이 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나 믿음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이 모범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에 대한 기록은 창세기 11장 27절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데라가 가족들을 데리고 갈데아 우르에서 메소포타미아의 하란으로 이주를 합니다.

데라는 본래 가나안 땅까지 가려고 했는데(31절) 거기까지는 가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게 되고 거기서 205세의 생을 마치게 됩니다. 가족과 함께 하란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에게 어느 날 여호와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러면서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땅으로 갔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에 대한 여러 가지 요소를 만나게 되는데요, 오늘 본문을 통하여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이 보여주는 믿음의 내용이 무엇일까를 살펴보며 나눌 때 크신 은혜와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Ⅰ.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불러주시는 데서 시작합니다.

성경은 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택하셨는지, 거기에 무슨 자격이 있고 무슨 이유가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먼저 선택하여 섬겼다는 말은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말할 때 세상의 많은 종교 중에서 내가 기독교를 택하였다, 세상의 많은 신들 중에서 내가 하나님을 선택하여 섬긴다는 말을 합니다만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환경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였다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진리입니다.(행7:2-4, 수24:2-3))

그래서 예수님도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시고 예수를 믿게 하셨다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이런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요 섭리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누군지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찾으며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하나님을 믿어야하겠다는 마음도 주셨고 믿는 마음으로 교회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어떤 사건이나 사람, 아니면 매체가 중간역할을 하였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섬길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요 역사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바울도 그렇고 저와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다.

Ⅱ.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찾아오신 여호와가 하신 말씀은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신앙을 떠나야 하고 옛 생활을 떠나야 하고 옛 습관을 떠나야 믿음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떠날 것을 떠나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라고 한 것도 고향에서 그들에게 매여 있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장사라고 합니다(수24장 참고).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도 나의 옛 신앙과 옛 생활과 옛 생활방식을 떠나야 합니다.

신앙적으로 더 성장하고 더 성숙하기 위해서도 신앙에 방해되는 것을 과감하게 떠나는 노력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익숙했던 것하고 헤어진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이 정말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결단이었겠습니까?

당시 아브라함은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5절에 아브라함의 일행을 소개할 때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었다는 말을 보면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매우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어서 이대로 살면 평안하고 별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는데 그것을 포기하고 떠나야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75세에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시대는 지금보다 오래 살던 시절이었고 아브라함도 그로부터 100년을 더 살고 175세에 죽었습니다만 그렇다 할지라도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 떠났던 고향도 돌아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적지 않은 나이에 고향땅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대는 씨족 중심사회였기 때문에 가족들의 보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시대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아브라함은 그 어려운 결단을 하였습니다. 할렐루야.

Ⅲ. 믿음은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2절 말씀을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했습니다.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떠나야 할 것들을 떠날 뿐 아니라 아울러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고 가라는 곳에 가는 순종이 또한 필요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데 나중에 보면 그곳이 가나안 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곳을 향해 어렵고 힘들고 위험해도 가야하고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을 위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책임져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는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하셔야 합니다.

가는 길에 함께 하셔서 지켜주시고 위험 속에서도 보호하시고 그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야 합니다. 함께 하심의 은혜가 우선할 때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일 수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위험한 여정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함께 하심을 확신을 가질 때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기 바랍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마28:20)는 하나님의 임재의 약속을 믿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믿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지 않으면 떠나야 할 것을 떠날 수 없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모두가 이 믿음으로 승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이 믿음으로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 믿음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물리치고 약속하신 땅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 믿음으로 골리앗과 대항하여 그를 넘어트리고 나라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리빙스턴은 이 믿음으로 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을 이기고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이 제시하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포기하는 것은 새로운 것을 붙잡기 위함이고 떠나는 것은 새로운 축복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떠나지 않고 새로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갖기 위해서는 이미 가지고 있던 것을 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떠날 것을 떠나라고 하고 새로운 곳에 가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이미 복이 되었습니다. 복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 복을 확신하면서 여러분의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Ⅳ. 믿음은 복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과 복 주심을 믿고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께서 다시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얼마나 든든하였겠습니까?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이제까지의 힘듬과 어려움도 눈 녹듯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까지 나와 함께 하셨고 여기까지 나를 인도하셨고 현장에서 나를 축복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 예배는 사실 쉬운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넘어 체험의 신앙 순교적인 신앙의 표현입니다.

6절 하 반절에 보면,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드린 예배는 가나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과 다른 제단을 쌓고 그들과 다른 신께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선교초기에 선교사들이 와서 우리와 다른 예배를 드리고 다른 신을 섬긴다고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했습니까?

아브라함의 경우도 이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땅에 왔으면 우리가 섬기는 신을 섬기고 우리가 섬기는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아브라함은 그들과 다른 신을 다른 방식으로 섬겼습니다.

얼마나 위험하고 위태한 상황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이 일을 한 번이 아니고 가는 곳마다 가나안의 똑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에서도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고 이 믿음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가끔 달리다가 잠시 멈추게 될 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과 가고 있는 길이 바로 가고 행하고 있는가? 라고 말입니다. 기본과 처음 그리고 조상을 생각해 봅니다. 특별히 아브라함과 믿음의 선진들과 예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은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떠날 것을 떠나고 포기할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복 주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이 보여준 올바른 믿음의 모습이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자세입니다

우리 가는 길이 아브라함이 갔던 믿음과 복된 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질문

아브라함의 삶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변

모세를 제외하면 신약성경에서 아브라함보다 더 많이 언급되는 구약의 인물은 없습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벗”(야고보서 2:23)이라고 부르는데, 이 호칭은 아브라함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사용되지 않는 호칭입니다. 모든 세대의 신자들을 “아브라함의 자손”(갈라디아서 3:7)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중요성과 아브라함이 구속사에 끼친 영향력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아브라함의 삶은 창세기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합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11:26에 처음 언급된 뒤로 아브라함의 죽음이 기록된 창세기 25:8까지 내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만, 우리는 아브라함의 탄생이나 어린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처음 등장할 때, 그의 나이는 이미 75세입니다. 창세기 11:28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페르시아 만과 오늘날의 바그다드 시의 중간쯤에 있는 유브라데(유프라테스) 강에 위치한 남부 메소포타미아의 강한 도시인 우르에 살았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데라가 그의 가족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출발했지만 가나안까지는 가지 않고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하란(고대 바빌론에서부터의 무역로에 있으며 니느웨와 다메섹의 중간쯤에 위치)에 정착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창세기 12장 초입부 부터 갑자기 흥미로워집니다. 처음 세 구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세기 12:1-3).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하란에 있는 그의 집에서 부르시고 그에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아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약속을 하십니다. 1) 아브라함의 것이 될 땅에 대한 약속, 2) 큰 나라를 이루어 주시겠다는 약속, 3) 복을 주시리라는 약속. 이 약속들은 향후에 아브라함 언약으로 불리게 될 언약(창세기 15에서 제정되고 창세기 17에서 비준됨)에 대한 기초를 형성해 줍니다.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특별한 점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2:4는 하나님께서아브라함을 부르신 후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여러 차례 아브라함을 믿음의 예시로 사용하며, 특히 인상적었던 믿음의 행함을 언급합니다:“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브리서 11:8).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목적지도 모르는 채 출발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 당시의 사람들에게 가족이란 모든 것을 뜻했습니다. 그 당시 가족 단위는 강하게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가족이 서로 수백 마일 떨어져 사는 것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가족이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기 전에 어떤 종교적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우르와 하란 사람들은 고대 바벨론의 만신전 풍습을 따라 숭배했으며, 특히 달의 왕인 ‘신’을 섬겼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교적 문화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부르심을 알게 된 후 주저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했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는 그의 아들 이삭의 출생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녀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문화에서는 정말 수치스러운 상황),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아들을 가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세기 15:4). 이 아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으로 주신 막대한 재산을 상속할 아들이 될 것이었으며, 더 중요하게는 약속의 상속자가 되어 셋의 경건한 가계를 이어갈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그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의롭다 여김을 받았습니다(창세기 15:6). 하나님은 창세기 17에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을 되풀이하시고, 아브라함의 믿음은 창세기 21에서의 이삭의 탄생으로 보상받습니다.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아들 이삭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모리아 산 꼭대기에서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이 명령에 속으로는 어떻게 반응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이 방패이시자(창세기 15:1) 이때까지는 아브라함에게 매우 은혜롭고 선하게 대해주신 하나님을 충실히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집과 가족을 떠나라는 이전 명령에 순종한 것처럼 이번에도 아브라함은 순종하였습니다(창세기 22:3). 우리는 이 이야기가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시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붙잡으시는 결말을 맡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어떻게 느꼈을지 상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수십 년 동안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를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던 하나님이 아이를 데려가려고 하신 것입니다. 요점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의 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컸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이삭을 희생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데려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히브리서 11:17-19).분명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와 마찬가지로) 실패와 죄악의 순간들을 겪었고,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숨김 없이 밝힙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잠재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었던 지역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사라와의 관계에 대해 거짓말을 한 적이 최소한 두 번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창세기 12:10-20; 20:1-18). 이 두 가지 사건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복 주십니다. 우리는 또한 아이를 낳지 못한 좌절감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사로잡았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종 하갈을 통해 아이를 갖자고 제의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에 동의했습니다(창세기 16:1-15). 이스마엘의 탄생은 아브라함의 어리석음과 신앙의 결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탄생을 허락하고 심지어 이스마엘에게 복을 내리기까지 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아브람과 사래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마엘이 열세 살 되었을 때, 하나님은 할례의 언약과 함께 아브람에게 새 이름을 주셨고, 사래를 통하여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다시 주시며 새라에게도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창세기 17). ‘높은 아버지’를 뜻하는 아브람이 ‘열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은 많은 육신적인 후손을 가지게 되었으며,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으로 여겨집니다(갈라디아서 3:29). “믿음의 조상”에게도 의심과 불신의 순간은 있었지만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믿음의 삶의 예시로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습니다.아브라함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분명한 교훈은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을 성실하고 진실하게 증명했던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대동해 우리를 찾아오시거나 불타는 떨기나무를 통해 말씀하시거나 바닷물을 가르셔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사건을 초월적인 관점에서 계획하시고 조율하십니다. 때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의 삶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 사실이라는 증거입니다. 아브라함의 실패조차도, 우리가 우리 죄의 결과를 겪게 될 수는 있으나 은혜롭게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어긋나지 않음을 입증해 줍니다.아브라함의 삶은 또한 우리에게 단순한 순종이 가져다주는 복을 보여줍니다. 그의 가족을 떠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떠났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순종했습니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순종에는 망설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우리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이런 결정들을 놓고 고뇌했겠지만, 행동할 때가 되었을 때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참된 부르심을 알게 되거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지시를 발견하게 되면 우리는 행동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는 순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우리는 또한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과 적극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즉시 순종하되,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 부부들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 약속은 믿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는 궁금해 했습니다(창세기 17:17-23). 창세기 18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중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죄인이 있다는 이유로 의인을 멸하실 수는 없다고 단언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50명의 의인만 있어도 죄악된 소돔과 고모라를 구해달라고 간구했고, 그 수를 계속 줄여 10명까지 낮췄습니다. 결국 소돔에는 10명의 의인조차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해주셨습니다(창세기 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 성읍들을 멸망시키기 전에 미리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다는 것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질문에 기막혀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는 하나님의 계획과 관련해 하나님과 소통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신뢰하며,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줍니다.아브라함의 믿음 생활에서의 실수, 특히 하갈과 이스마엘의 상황과 관련한 실수는 문제를 우리 손에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들을 약속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사라는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들이 계획해 후계자를 두겠다는 생각을 했다가 역풍을 맞았습니다. 첫째로는 사라와 하갈의 갈등이 일어났고, 그 후 이스마엘과 이삭 사이에서 갈등이 생겨났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은 나중에 구약의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의 숙적이 되었습니다. 그 갈등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에 인접한 아랍 국가들 사이의 분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은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 교훈을 우리 삶에 적용할 구석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신실하게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삶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의 교리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본보기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중요한 교리의 예로 아브라함을 두 번이나 사용합니다. 로마서 4장 전체를 할애하여 아브라함의 삶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롭게 되됨을 설명합니다.갈라디아서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이방인들이 유대인과 더불어 아브라함의 복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갈라디아서 3:6-9, 14, 16, 18, 29). 이것은 창세기 15:6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인이라고 선포하실 정도였으며, 그로 인해 로마서 3:28의 원리가 입증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의를 얻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으로 충분했습니다.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구약 성경의 극 초반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과 죽음으로 시작하지 않고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창세기 3:15에서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짓밟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이 성경에서의 복음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이라고 믿습니다. 구약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셋을 시작으로 약속의 계보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 역사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창세기 4:26).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구속사의 일부일 뿐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갈라디아서 3:8)고 말씀하셨을 때 복음이 아브라함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말해줍니다.아브라함의 삶으로부터 배우는 또 다른 것은 믿음을 물려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9, 누가복음 3:8, 요한복음 8:39에서 우리는 육신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으로는 구원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다가 아니며, 타인의 신앙에 기초해서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거나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나무랄 데 없는 그리스도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의무가 없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아브라함으로부터 난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로마서 9:7).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구원을 받을 사람들을 선택하시지만, 그 구원은 아브라함이 그의 삶에서 보여준 것과 동일한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끝으로,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삶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시로 사용합니다(야고보서 2:21). 야고보가 사용하는 예는 모리아 산에 있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단순히 복음의 진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살아있는 신앙을 보여주는 순종의 선한 행위들을 낳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고 하나님의 눈에 의롭게 여겨지게 했던 믿음(창세기 15)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희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그의 믿음은 그의 행함으로 증명되었습니다.마지막 분석을 보면 아브라함이 모범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신앙심이나 삶이 완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아브라함에게도 결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많은 진리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상에 있는 수백만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축복의 대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구속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하셨고, 이는 예수님의 탄생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소망의 살아있는 본보기입니다(히브리서 11:8-10).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날들이 끝나갈 때 아브라함의 믿음과 닮은 우리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믿음(6) 아브라함의 믿음(히11:8-10)

믿음(6) 아브라함의 믿음

히11:8-10

성경에는 인류의 조상 세 분이 나옵니다. 첫 번째는 인류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입니다. 둘째는 홍수로 모든 인류가 다 죽었을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아와 그 가족입니다. 셋째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성경에 나오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민족의 아버지로 믿고 있습니다. 이슬람교도 자신의 뿌리를 아브라함으로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믿음의 조상으로 믿고 있습니다. 다른 점은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나 기독교은 메시아로 믿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의 거의 반절이 믿음으로 조상이라고 믿고 있는 분이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여러 신앙의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면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가장 많은 분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벨이나 에녹이나 노아는 한 구절로 그들의 믿음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8부터 19절까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도 11:27-25:18절까지 무려 14장에 걸쳐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다루는 로마서에서도 4장 한 장을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아브라함은 신앙생활에서 믿음의 표본이 된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대, 그가 어느 지역의 사람이나 본받을 수 있는 믿음의 원리들을 잘 보여 주는 믿음의 모본, 전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믿음을 설명할 때 믿으려면 아브라함처럼 믿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로 믿음의 생활을 하려면 어떤 목사처럼 믿으라. 장로로 믿으려면 어떤 장로처럼 믿으라. 권사로 믿음 생활하려면 어떤 권사처럼 믿으라”라고 할 정도로 믿음의 모범이 된 사람입니다. 당시 핍박과 유혹으로 믿음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믿으려면 아브라함처럼 믿으라고 샘플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믿음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믿고 살려면 아브라함처럼 믿으라고 믿음의 모델로 우리게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1. 떠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한 믿음입니다.

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이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시작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순종으로 반응하면 믿음이 되고 불순종으로 반응하면 불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 반응은 순종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시점에 반응은 조건 없는 순종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4은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쫓아갔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종하여’ 로 번역된 ‘휘파쿠오’는 ‘~아래에서(under)’라는 의미의 전치사 ‘휘포’와 ‘듣다(hear)’라는 의미의 동사 ‘아쿠오’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의 아래에서 듣다’ 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말씀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인도할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주권이나 자신의 주권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길을 물어 볼 때 우리 하나님께서 “내가 함께 갈게”라고 할 때 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순종입니까? 인격적인 하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아갔다는 것입니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가갔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어진 명령을 좇아서 어디론가 가고 있지만 그곳에 대한 어떤 정보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나침반이나 지도, 레비게이션이 없이 그저 하나님만 믿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하게 하는 믿음을 주도적으로 누가 가지게 해 주십니까? 아브라함보다는 하나님이 은혜로 그렇게 그런 순종하고 나가고 나가게 하는 믿음을 가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탐구하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창세기에 자세히 나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래 갈대아 우르 사람입니다. 그가 어떤 가정에서 살았는지 그런데 여호수아 24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수24:2)” 아버지가 데라인데 아버지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셈의 후예였지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숭배한 사람입니다. 외경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만들어 파는 우상 장사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의 신앙을 그대로 따랐겠지요. 지금도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불교인이 되고,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유교인이 되고, 이슬람교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슬람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은 어떻게 부르셨습니까?

첫 번째 하나님의 부름은 갈대아 우르 메소보다미아에서 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행7:2-3)” 어디에서 말씀하셨습니까? 아브라함의 고향 메소보다미아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무엇에서 떠나라는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고향, 친척입니다. 여기에서는 아버지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 때 상황이 창세기 11장 31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은 아버지 데라가 주동이 되어 떠납니다. 어느 날 아들이 어떤 신이 나타나 떠나라고 했다고 말을 들을 때 그는 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런 말에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당시는 과학이 중심이 시대가 아니라 종교가 중심인 시대이기 때문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아브라함, 나홀, 하란 이렇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하란이 죽은 것입니다(창11:27,28). 그런데 아브라함은 결혼은 했는데 아들이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길하게 생각했겠습니까? 아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으면 별별 생각을 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입니다(11:30). 아주 심리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던 상황입니다. 아들만 낳으면 죽는 집에 와서 어떤 스님이 절에 나와야 이 집안에 아들이 생깁니다라고 하면 대부분 절에 나가 시주를 합니다. 과학이 발달된 지금도 어떤 도사가 청와대에 들어가 살면 급살맞는다고 하면 그 집에 절대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연초에 토정비결을 볼 때 8월에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면 일부러 8월에 물에 들어갈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나 5복을 원합니다. 수로 장수하고 부로 부유하여 풍족하며, 강령으로 일생동안 건강하게 살고, 유호덕으로 덕 좋은 사람으로 살며, 고종명으로 평안히 일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는 “빛”혹은 “불”이라는 뜻입니다. 불을 숭상하고 빛을 숭배하는 지역입니다. 다 5복을 누리기 위해 섬기는 신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고향을 떠나라는 것은 달과 별을 숭상하는 우상 종교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기 위해 이런 환경으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아버지 데라에게 말했을 것이고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그 뜻을 잘 모르지만 아들을 위해 가족을 이끌고 고향을 떠난 것입니다. 결국 누가 주체가 되어 떠나게 한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하란에 왔습니다. 국경도시입니다. 거기서 데라는 머묾입니다. 강을 건너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가는 것입니다. 이민을 완전히 가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데라가 망설입니다. 그렇게 되자 아브라함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으면 많은 이익이 있고 편리함과 기쁨이 있습니다. 하란은 ‘교차로’란 뜻입니다. 이 지역은 교통의 요충지로 번성했던 곳이고 상업과 문화가 발달한 지역으로 갈대아 우르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이 두 지역에 공통의 신이 있었는 데 그게 달신(月神)입니다. 이 달신의 아내 이름이 ‘사라이’, ‘사래’입니다. 아브람의 아내 이름이 ‘사래’입니다. 이것은 달신의 아내의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우상 숭배 가문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아브람 가문은 우상 숭배 문화에 깊숙이 놓여 있었습니다. 200년 동안 젖은 문화에서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떠나지 못하니까 아브라함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로 결단하는데 이것이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휴머니즘입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못하고 지체하니까 하나님은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셔서 아버지 데라를 데려가셨습니다. 데라는 ‘지연시키다’, ‘지체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는데는 지연시키고 지체시키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끝까지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별이라는 슬픈 방법으로 아브라함을 재촉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거두어감으로써 모든 의존을 의도적으로 끊으신 것입니다.

데라가 205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두 번째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보십시오. 다시 반복하여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아버지를 언급합니다. 이제까지 의지했던 아버지가 죽었으니 하나님이 인도를 전적으로 믿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고향을 떠나고 아버지를 떠났지만 여전히 친척을 떠나지 못합니다. 아들이 없는 그는 조카 롯을 아들처럼 생각하고 떠나지 못합니다. 나이 75세였는데 아이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돌아가셨으니 지금으로 말하면 중년기입니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롯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떻게 합니까? 13장 6절을 보십시오. 소유로 말미암아 서로 싸우게 됩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나게 만드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창세기 22장에 보면 이삭을 바치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떠남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입니다. 이삭을 바침으로 철저히 떠나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백성을 결국 철저히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르시고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결국 떠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서를 받고 있는 사람들도 유대교를 떠나지 못해 망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핍박이 오니까 다시 유대교로 가버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익도 기쁨도 편리도 없다고 생각하면 다시 옛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며 전도합니다. 그래서 마지 못해 교회에 나와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교회에 나오면 좀더 유익한 이야기 좀더 편한 이야기, 좀더 기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하는데 한 달 두 달 나와도 매 주마다 성경 이야기, 구름잡는 이야기, 비현실적인 이야기, 시대에 공감이 안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얼마 나오다가 너무 교회는 비현실적이라고 교회 방학을 해 버립니다.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동화같이 들리고 공감이 되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영안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해 보십시오. 얼마나 귀를 세우고 들으려고 합니까? 그것이 안 되니까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립니다. 사탄은 생명 구원사역을 집요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가지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도 끝까지 우리를 붙들고 떠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떠나 버려야 합니다. 떠나지 않아도 결국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자기 숭배가 부르심을 방해한다면 과감하게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자아실현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데 방해가 된다면 단호하게 내려놓아야 합니다. 담배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떠나 버려야 합니다. 도박이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절단하는 것입니다. 스마트 폰 중독이, 컴퓨터 게임 중독, 텔레비전 중독이, 스크린 중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단호하게 떠나 버려야 합니다. 과소비가, 낭비가, 게으름이, 술중독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미련두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그것 없으면 못살 것같지만 그것 없어도 하나님을 따르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본토를 떠나고 아비를 떠나고 친척을 떠난다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보통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우물쭈물 하고, 주저 할 때 빨리 결단 내리고, 한발 앞서 가고, 용기 있게 일어서서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고기를 잡고 있는 베드로 형제에게 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까 그들은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했습니다. 바로 버려야 할 것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요셉이 종으로 팔려가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았습니다. 그 때 여주인이 하룻밤 같이 자자고 유혹합니다. 이 때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우물쭈물하지 않습니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버려버리는 것입니다.

엘리사를 보십시오. 밭을 갈며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와서 “나를 따르라” 고 합니다. 이 때 어떻게 합니까? 그는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집으로 가서 쟁기를 부수고 소를 잡아서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고 엘리야를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 끝까지 따라 다닙니다. 롯의 부인을 보십시오. 떠나지 못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떠나지 못합니다. 신앙의 역사는 떠남과 분리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어차피 떠날 것들이라면 과감하게 떠나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떠나지 않으면 죽이고 싸워서라도 떠나게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2. 이 땅을 나그네로 사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해를 돕기 위해 새번역 성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9절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류하여 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약속의 땅에 갔지만 이방의 땅에 있는 것같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사갈 준비를 하면서 순례자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땅이 전부인 줄 알고 그 땅에 뿌리를 내려서 집착하거나 연연하며 살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모형으로 영구히 거류하는 땅이 아니라 언제 이사갈지 모르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약속을 받은 자식과 손자와도 영구적인 궁궐이 아니라 언제 수시로 이사가는 텐트에 거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식과 손자와 함께 나그네처럼 테트를 치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 가나안 땅으로 순종하여 왔지만 그곳이 영구히 거할 때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치 이방 땅에 거하는 것처럼 약속의 땅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의 매장지 막벨라 굴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헷족속에게 자신을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소개했습니다. 자신의 말대로 평생 하나님을 의지하며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인도에 따라 산 광야 백성처럼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한 아브라함은, 땅을 소유할 수 없는 이방 나그네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비굴하고 비참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헤브론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창 23:6)라고 평가할 정도로 세상에 영향력을 주며 살았습니다. 본토인들에게 존경을 받고 살았습니다. 나그네라고 아무렇게나 산 것이 아닙니다. 약속붙들고 충실하게 산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브라함이 그렇게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분명하게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지시할 땅은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 여기서 ‘보여 줄’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합니다.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 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합니다. 땅을 약속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약속한 땅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입니까? 구체적인 하나님의 약속 세가지는 무엇입니까? 12장 2절 3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세 가지를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첫째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지금 후손도 땅도 없는데 큰 민족을 이루는 씨앗이 되겠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케 하여 그 이름이 길이 회자(膾炙)되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열국의 아비(17:4, 5), 선지자(20:7), 하나님의 방백(23:6), 여호와의 종(시 105:5, 6) 하나님의 벗(약 2:23)으로 살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始祖)로서, 또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이 단지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 붙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가 가나안에 가서 어떻게 살았는지 창세기 12장 5절을 보십시오. 약속을 믿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곳에 가서 제단을 쌓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칩니다. 거기서 영구히 삽니까? 아닙니다. 9절을 보십시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그 땅에 기근이 듭니다.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면 풍년이 들고, 자식들이 출세하고, 질병에서 즉각 치유되고, 건강하게 살아야 하는데 인생의 기근이 듭니다. 그것도 심한 기근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합니까? 먹고 살기 위해 애굽으로 이민을 갑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 버립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살기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아내가 외모가 아름다웠습니다. 당시 왕이 얼마든지 취할 수 있기 때문에 아내라고 말하면 자신을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같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만 얼마나 자기 혼자 잘 살겠다고 배신을 합니까? 신문에 보니까 보험금을 타려고 남편을 물에 빠뜨려 죽인 여인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비슷한 인간입니다. 바로가 궁전으로 사래를 불러 들여 아내로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래가 낳은 아들이 아브라함의 씨인지 바로의 씨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날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립니다.

아브라함은 비겁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자기 살겠다고 아내 팔아먹는 진상입니다. 그것도 성경에 보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으로 훈련시켜 진정 나그네로 살게 만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 대하여 사도행전 7장 5절에서 스데반이 설교 할 때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라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너의 유업이라는 말입니다. 인생살이 생사화복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약속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니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축을 소유하고 부자로 살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가나안 땅에 한 조각의 땅덩어리도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아내를 장사지낼 때 은 사백 세겔을 주고 사서 아내의 무덤을 만듭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땅에 대한 약속은 받았지만 아직 실현되지 않았던 때에 그 약속이 반드시 실현될 것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이사실을 히브리서 11장 13-14절에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을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삶으로 나그네인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들은 모두 나그네였습니다. 그것도 남의 땅에서 나그네가 아니라 ‘자기 땅에서 나그네’ 요 ‘자기 고향에서 외인들’ 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서 그들은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왜 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습니까? 그들이 ‘본향’을 찾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땅에서 내 당대에 하나님께서 약속한 축복이 다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초라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나그네로 살았다고 초라하게 살았습니까? 성경은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성경이 만든 부자들1.2(이채윤 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위대한 믿음을 유산으로 남겨 준 사람들입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미국의 기본을 세운 믿음의 사람 벤저민 프랭클린, 신실한 믿음으로 백화점 신화를 만든 사람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 후반전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믿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큰 부자가 된 데이비슨 록펠러, 믿음으로 성직자와 같은 비즈니스맨으로 산 존 템플턴 등 여러 사람들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이분들 다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그네로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부의 복음을 실천한 사람 앤드류 카네기가 나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가 아버지는 책상 보자기를 파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공장에 나가서 16시간이나 일을 해야만 했답니다. 아들 카네기도 공장에서 일을 하고 들어오면 저녁까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어머니는 한 벌 밖에 없는 아들의 옷을 빨아서는 밤새도록 그것을 말려서 다음날에 입혀서 보내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 미국 최고의 재벌 중의 하나가 되었고 또한 미국 최고의 사회사업가가 되었습니다. 방직공장직공, 전신국 하급직원, 전신기사 등을 거치며 갖은 고생을 하였지만 그는 세계의 강철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의 사회 환원”이 기업가의 궁극적 목표가 돼야 한다며 “카네기재단”을 설립하여, 정부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공공 복지사업을 펼쳐 나갔습니다. 45억 달러를 드려 3천개의 도서관을 설립했고, 8천대의 오르간을 기증했습니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부의 복음”과 “인간관계론”라는 책을 써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생활이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믿음은 신비하게도 세상을 이기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세상 이기네(357장)”

3.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입니다.

자기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시는 터, 영원한 천국이 있음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에 나그네로 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결코 어기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다 실행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 후손에 대한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으니까 롯을 붙들고 갑니다. 롯을 자식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롯이 떠난 후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창세기 13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자손이 땅의 띠끌같게 하니니” 누가 주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도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15장 2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종을 상속자로 생각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5장 4-5절을 읽어 보십시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믿음의 의의 증표로 무엇을 합니까?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삼년된 암소와 암염소, 수양을 가져다 반절을 쪼갭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렇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이를 누가 지나갑니까? 언약 당사자들이 지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만 지나가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형식은 쌍방 언약이지만 내용은 하나님 스스로 절대주권을 가지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나이 85세가 되었습니다. 10년을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아이가 없는 것입니다. 16장 2절을 보십시오. 아담이 하와의 말을 듣고 넘어진 것처럼 아브라함도 똑같이 사래의 말을 듣고 첩을 얻습니다. 이 후로 13년 동안 하나님이 침묵하십니다. 아브라함 99세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17장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영원한 언약을 이룰 이삭을 낳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내가”입니다. 약속하시고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땅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약속된 땅입니다. 창세기 12:1에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는 땅에 대한 약속이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이 약속 붙들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던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12:7). 막연히 보이던 땅에 대한 약속이 확실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구체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롯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롯과 헤어져 돌아오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의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창세기 15장에서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의 4대 후에는 차지하라 것을 공식적인 언약으로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17장 19절에서는 그 유업의 영원함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 후 야곱의 후예들이 애굽에 건너갔다가 거대한 민족이 되어 애굽을 나와서,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그 땅에 정착하게 됨으로 언약이 성취되었습니다.

신명기 30:19-20에 의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강 건너 가서 땅을 정복할 때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느헤미아 9:7,8에서도 같은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 번째, 복의 근원이 되는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인간들은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명성”,”신망”,”우월”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위해 창세기 6:1-4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설쳤고 창세기 11:4에서는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었고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언약해 주었습니다. 모든 민족을 위한 복의 근원,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리고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리니”라고 말씀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해 복을 얻을 것이니라”고 약속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2:16-18에서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축복의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창3:15)인 메시야가 나오리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누구를 말씀할까요? 갈3:16절을 보십시오(신약 305쪽).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갈 3:16)”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의 백성 많아지고 예수님을 통하여 복의 근원이 될 것을 말씀합니다.

갈3: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갈 3:8)”

결국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부름받은 성도의 믿음을 통해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천국도 이렇게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비록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천국에 대한 약속, 부활에 대한 약속, 재림에 대한 약속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목동인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는 약속을 주시고 결국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살인하고 도망간 모세를 찾아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결국 그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 롯이라도 붙드는 상황입니까? 종이라도 붙드는 상황입니까? 첩이라도 붙드는 상황입니까? 앞이 안보입니까? 약속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시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시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 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20)”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얻지 못하였습니다.(행7:5)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죽을 때까지 보지 못하였습니다. 동일한 약속을 받은 이삭과 야곱도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막에 거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정착된 생활이 아니라 나그네 같은 세상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하는 절망적 상태에 있었습니다. 당시 이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 참 평안과 행복을 누릴 줄 알았는데 예수 믿는 것 한 가지 이유로 집을 빼앗기고 때로는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가족이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기도 했습니다.

히브리서가 기록된 때는 AD 60-70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때는 기독교인을 무참하게 핍박할 때였습니다(10:32-36 12:4 60-70) AD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게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하고, 원형 경기장에 끌려 들어가 사자들의 밥이 되어야 하고,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땅굴에 들어가 숨어살아야 하고, 화형을 당하여 밤의 횃불이 되어야 할 때였습니다. 지금 이들을 향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고 사는 삶입니다.

아브라함 때나 히브리서가 기록될 때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과학 문명이 조금 발달했을 뿐이지 삶의 방식은 동일합니다. 믿음으로 살기 힘든 세상에서 우리 성도님들은

떠나도록 부르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22.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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