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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 이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Here I Am) – Allen Pote 64 개의 베스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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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4일 제일영광교회 저녁 예배 호산나 찬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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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1-8) – 주일예배 설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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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dtynch.kr

Date Published: 10/1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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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13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1~13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우리의 신앙, 우리의 사역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감동시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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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novatochurch.com

Date Published: 3/6/2022

View: 7895

1월 18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 보스톤 한인교회

제목; 내가 여기 있나이다. 본문: 이사야 6:1-13.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의 ‘벼랑 끝으로 오라’라는 시입니다.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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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cboston.org

Date Published: 7/10/2021

View: 1654

설교말씀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양의문교회

이사야 6 장 1절: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절: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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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sheep.org

Date Published: 5/21/2022

View: 9596

제13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선지자 이사야

제13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선지자 이사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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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sspm.or.kr

Date Published: 4/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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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Here I Am) - Allen P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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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내가 여기 있나 이다

  • Author: 김정철
  • Views: 조회수 7,68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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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2016. 9. 9.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94FkdmgmZZY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1-8) – 주일예배 설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특별한 체험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체험은 이사야의 생애에 있어서 일대전환을 이루는 중대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체험을 통하여 참 신앙인, 선지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사야는 이 체험을 하기 이전에도 선지자였고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이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가 선지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살아 움직이며 역사하시는 실제적인 분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의 신앙은 지극히 관념적인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림책 등을 통하여 호랑이가 있다고 배운 아이들은 직접 그것들을 보지 않고도 호랑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러한 호랑이를 무서워하지는 않습니다. 왜입니까? 아이들이 아는 호랑이는 종이에 그려진 그림일 뿐 실제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들의 신앙이 꼭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기에 믿기는 하지만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기에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크게 두려움도 없습니다. 가슴에서 우러나는 기쁨도 없습니다. 그래서 믿기는 믿는데 믿는 것처럼 살지 않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이 밋밋할 수밖에 없고, 또 하나님을 믿어도 자기 성격대로, 생각대로 믿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면 그 삶이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실제로 산이나 들에서 호랑이를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두려워 온 몸이 마비되고, 숨 쉬는 것조차 힘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호랑이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한 사람은 이전의 밋밋하였던 신앙자세에서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때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먼저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에 대하여 강한 인식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몸서리치며 처절하리만큼 눈물콧물을 흘리며 간곡한 회개의 기도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로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이전에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의 재산이나 명예가 전부인 줄 알고 뛰어다녔으나 하나님을 체험한 후로는 이 세상의 허무함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재산이나 명예, 심지어는 생명보다도 귀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을 만나기 전과는 달리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영적능력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성경에 이사야 외에도 많이 등장합니다. 특히,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바울로 변화된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체험을 한 사람에게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도 바울은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르게 믿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만난 후로는 그 삶이 변했습니다. 교회 핍박자에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놀라운 복음의 일꾼으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의 그러한 변화가 있었기에 오늘날 세계 복음화의 초석이 다져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철저하게 믿는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 통해서만 진정한 신앙인다운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특별한 체험을 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실제적인 분으로 느껴지며 그 분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강력한 인식이 있습니까? 그리고 세상의 것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여러분의 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직 이러한 체험이 없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이 체험을 하기 위하여 힘써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이러한 체험을 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처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여 기도에 힘쓰는 사람, 불의한 세상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성실하게 사는 사람,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 하나님만이 참되고 유일한 소망임을 삶으로 나타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 바로 이러한 변화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로 시작합니다. 16세에 왕이 된 웃시야는 남유다의 몇 안 되는 훌륭한 왕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신앙적이었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고, 백성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려고 힘썼던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모든 일들이 잘 되어가니까 처음의 그 겸손한 마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서히 교만해지기 시작해졌고, 심지어 자기가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맙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의 고유한 직무인 하나님 앞에 분향을 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80명이나 되는 제사장들이 그를 말렸지만 끝까지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일인데 뭐 어떠냐고 하며 분향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형식을 무시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 설교에서 예배에 대하여 말씀드릴 때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형식과 마음이 조화를 이룬 예배’가 진정한 예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중 하나라도 소홀하면 바른 예배가 아닙니다.

웃시야 왕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경건’을 잃은 것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웃시야를 치셨습니다. 그 대단한 왕이 나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끝내 나병을 앓다가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웃시야 왕이 죽던 해, 그 해를 가리킵니다.

웃시야 왕은 믿음이 좋은 왕이었습니다. 그러한 웃시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큰 복을 내려주셔서 무려 52년간 안정적이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태평성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1장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웃시야가 범죄한 이후에 유다는 신앙을 버리고 급격하게 향락과 사치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깊이 타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보시면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타락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던 손을 놓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던 손을 놓으시니까 어떻게 됩니까? 여지없이 이방나라들의 악행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압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웃시야 왕이 죽을 무렵 태평성대의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국제사회에서는 심각한 대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앗수르가 신흥 강대국이 되면서 주변나라들을 침탈하여 분위기가 아주 심각해졌고,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애굽도 세력을 키워가는 앗수르를 주시하며 경계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시대적 상황속에서 사람들은 깊은 우울함에 빠졌습니다. 이제 이 나라는 어찌될까? 하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또한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쪽에 가서 붙어야 할까? 남쪽 애굽에 붙어야 하나? 아니면 북쪽 앗수르에 붙어야 하나? 하고 눈치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찌 지금 우리나라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영적 어두운 시대적 상황에서 이사야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러한 영적인 불신의 시대 속에서도 한 가지를 놓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타락한 조국의 상황을 보고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1절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여러분, 이사야가 무엇을 보았습니까? 절대 권력인 왕은 죽고, 나라가 혼란하고, 모든 사람들이 절망하고 있던 그 때에 성전에서 눈을 들어 위를 보니 하나님이 여전히 계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깊은 절망과 좌절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는 그런 깊은 혼란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통로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죽겠다 죽겠다’ 합니다.

절대적으로 의지할 곳이 무너졌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명예입니까? 지식입니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배경입니까? 아니면 건강입니까?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가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뵈었던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분, 이 모든 우주와 만물을 친히 만드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2-3절 말씀에 이사야는 스랍들이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서서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찬양 할 때에 4절에 성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는 것을 보게 됩니다.

순간 이사야는 그 놀라운 모습에 감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계셨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하나님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그런데 그는 갑자기 겁이 났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는 하나님을 뵈었을 때 놀라운 감동과 동시에 너무나도 추악한 자신의 죄된 모습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게 되면 그 영광 앞에 압도되어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너무 깨끗한 곳 앞에 가면 내가 더러워서 조심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탄식하며 고백합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사야는 자기 혼자 잘 믿는 사람처럼 살았고, 또 지금도 타락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며 탄식하며 그들의 죄악을 고하며 하나님 앞에 무릎 끊었는데, 하나님을 뵙고 보니 죄인중의 괴수는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자, 스랍중의 하나가 그를 향하여 뜨거운 숯불을 가져다가 입술에 대면서 말했습니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그리고 이 놀라우신 하나님의 긍휼 앞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이사야에게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그 때 그 음성 듣고 있던 이사야는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무엇 때문에 살고, 내가 왜 살아야 되고, 내가 무엇을 해야 사람 노릇 제대로 하다가 살 수 있는지 고민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주 앞에 겸손하게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만나주시고 지금껏 알지 못하던 새로운 카이로스의 시간, 은혜의 시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세계가 놀랍게 펼쳐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내가 헛살았구나! 진짜, 부끄럽구나! 나는 뭐하고 살았나!” 자기의 재발견이 이루어집니다.

또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나를 사랑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알지도 못할 때부터 이미 나를 사랑하고 계셨구나… 나는 부끄러운 죄인이로구나!”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누가 나를 위해 갈꼬….”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 사명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 시작됩니다. 내가 뭐하고 살아야 할 것인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목적과 가치관이 분명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 고백은 똑똑하고 잘나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부끄럽고 죄송하지만, 이제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고 싶습니다. 나 혼자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나는 설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내가 누구의 손에 붙들려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면, 이제부터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나를 붙들어 이 자리에 앉혀 놓으신 분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구나! 내 생명의 주인이신, 나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셨구나! 그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게 이사야의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시옵소서.”

<기도> 하나님아버지,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친히 뵙지 못했을 때에는 백성들의 죄가 눈에 보이고, 그들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며 기도했었는데, 하나님을 친히 뵙고 보니 진정한 회개의 대상이 바로 자기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회개하는 이사야의 죄를 사해주시고, 그를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복음의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도 다 이사야처럼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저희들도 친히 만나주셔서, 저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며, 그 가운데 생명을 살려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1월 18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제목; 내가 여기 있나이다.

본문: 이사야 6:1-13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의 ‘벼랑 끝으로 오라’라는 시입니다.

“그가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대답했다.

‘우린 두렵습니다.’

그가 다시 말했다.

‘벼랑 끝으로 오라.’

그들이 왔다.

그는 그들을 밀어 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날았다.”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을 밀어내쳤을 때 도리어 그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놀라운 재능을 발견하게 되나 봅니다. 날수 있는 놀라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훨훨 날면서 벼랑 끝에 서길 잘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벼랑 끝으로 오라고 할 때 갈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2015년 세번째 주일예배를 드립니다. 송구영신예배를 드린지 18일째 되는 날입니다. 송구 영신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집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았습니다.

“교우님들이 송구 영신 예배를 무척 중요시 여기나봐. 요즘 보면 항상 성탄 이브 예배 보다 많이들 오시거든.”

성탄 이브 예배는 7:30분에 시작하고 송구 영신 예배는 11:30분에 시작해서 자정을 넘기니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런데 최근 경향을 보면 송구 영신 예배에는 더 많은 교우들이 참석하십니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아마 새 해에는 날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물론 좋은 바램입니다. 하나님은 송구 영신 예배에 참석하신 분들의 마음의 소원을 다 기억하시고 또 이루어주실줄 압니다.

그런데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인의 표현에 의하면 날기 위해서는 벼랑 끝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벼랑 끝에 가 선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닐줄 압니다. 삶의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송구 영신 예배는 참석할수는 있어도 벼랑 끝에 가 설수 있는 분들은 극히 드물지 않을까요? 그러면 벼랑 끝에 가지 않고도 날을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의 내용은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가 부름을 받는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환상 중에 하늘 성전을 가득 메우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은 죽을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이사야는 고백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곧 이어 하나님 보좌를 섬기는 스랍 천사가 나타납니다. 제단에서 집은 핀 숯을 이사야의 입에 대면서 말합니다. 7절 말씀입니다.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이사야가 죄사함을 받았으니 목숨은 건졌습니다. 8절 말씀을 보면 곧 이어 이사야는 주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에 죽음을 간신히 면한 이사야가 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아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벼랑으로 이사야를 보내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어떻게 생각하면 벼랑입니다. 그러나 저는 벼랑 보다는 다르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계속 살펴 볼까요? 10절 말씀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성경 말씀 중에 종종 이해하기가 어려운 귀절들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귀절 중 하나가 바로 9, 10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도 후에 인용합니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이유는 백성들로 하여금 더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기 위함으로 해석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사실이고 또 어떤 면에서는 사실이 아닙니다. 먼저 사실이 아닌 점을 설명해 드린다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 멀어진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를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께 더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 아닌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문맥을 보면 분명히 멀어지게 하기 위한 뜻이 담겨져 있음을 간과할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을까요?

어느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전도의 경험이 있으신 분들 많이 경험하셨을줄 압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도를 하면 할수록 마음을 닫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아예 복음을 안 들었으면 그렇게 마음을 안 닫을텐데 복음을 들었기에 더 닫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많이 접한 사람이 도리어 복음 전도에 크게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최근 이 곳에서 유학생 목회에 관심이 많은 분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요즘 유학생들중 많은 학생들이 복음에 마음의 문을 닫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복음을 들었기에 더 문을 닫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 지금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더 멀어져 갈 것을 미리 경고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경고를 받은 이사야는 가만히 있을리가 없습니다. 11절 말씀입니다.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이사야의 질문은 당연하죠. 말씀을 전하면 전할수록 하나님께 더 멀어지게 하는 이 고통의 시간을 언제까지 지속하시겠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께서 대답하십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는 황당한 답변을 받습니다. 복음을 거절해서 더욱 황폐해지고 더 황폐해질수가 없을 때까지라고 답변을 하십니다. 이사야는 아마 너무 황당하여 무어라 말할지를 잊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부르신 이유는 말씀을 전해서 더 이스라엘이 빨리 망하도록 하기 위함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자기로 인해서 더욱 망가지는 이스라엘을 보는 안타까운 운명의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요나처럼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자기 입으로 고백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혼자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때 왜 내가 그런 고백을 하였나…?”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것도 어쩔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자기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산 사람이 없는데 스랍 천사가 숯을 입술에 대어주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무슨 말은 못합니까? 그래서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얼떨결에 자기가 대답을 하였다고 해도 이사야는 자기가 보냄을 받아서 말씀을 전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 올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하나님은 반대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사야는 슬픈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부르셨고 자기는 서원을 했으니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아마 이사야의 마음은 참으로 참담했을줄 압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서원을 무를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선지자로서 소명을 다하자니 자기로 인해 더욱 하나님께 멀어져 갈 사람들이 눈에 보입니다. 이 때 이사야는 어떤 결심을 하였을까요? 물론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가장 가까이 추측할수 있는 자료는 이사야의 고백에서 밖에 찾을수 없습니다. 저는 이사야의 고백 안에서 실마리를 잡고자 합니다. 이사야는 참담한 가운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지?” 그러면 그럴수록 이사야의 뇌리에는 자신의 고백이 자꾸 울려 퍼집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사야는 무릎을 치면서 일어납니다. “‘여기’를 사랑하는 선지자가 되어야지.”

사실 선지자는 바로 ‘여기’를 사랑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어디론가 보냅니다. 보내어진 곳에 가면 그 곳은 ‘저기’가 아닙니다. 그곳은 ‘여기’가 됩니다. 이사야는 자기의 고백 안에 자기의 사명을 새롭게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사야는 자기로 인해서 자기가 보내어 진 곳이 더욱 황폐해 갈지라도 바로 자기가 서 있는 황폐한 ‘여기’를 사랑하기로 결단했을 것입니다. 이 때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이 새로이 들립니다. 13절 말씀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 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물론 처음에는 남은 십분의 일도 마저 황폐하게 될 것이라는 비보를 듣습니다. 그러나 곧이어 희망의 멧세지가 들려 옵니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나무들마다 특징이 있지만 밤나무와 상수리나무의 특징은 제 아무리 짤려도 그루터기만 있다면 새로이 가지가 솟아나옵니다.

이사야가 보내진 ‘여기’라는 현장의 마지막은 새 싹이 돋아나오는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그 후 이사야는 자기가 보내진 현장 곧 ‘여기’를 사랑하며 충성된 선지자가 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어디로 보내시던 자기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인생을 사는데 두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는 순례자의 삶입니다. 또 하나는 피난민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

2015년도를 우리는 순례자로 살던지 피난민으로 살던지 할 것입니다. 순례자는 하늘나라를 목표로 향하여 살아 갑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로 가는 동력은 바로 여기를 사랑함으로 얻습니다. ‘여기’의 삶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늘나라로 향하는 순례의 길이 아름답게 가꾸어집니다.

피난민은 여기가 싫어서 여기를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피난민은 ‘여기’가 아닌 곳을 찾아 항상 떠납니다. 떠나려 합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여기’가 됩니다. 그래서 항상 목표 없이 어디론가 떠나려고만 하는 사람들이 피난민입니다.

피난민이 순례자가 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 있습니다. 물론 목표를 하늘나라로 삼아야 겠죠. 그런데 그것 보다 더 중요한 조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있는 여기를 사랑할 때 도리어 하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목표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가는 곳마다 새로운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루터기에서 새 가지가 피어 오릅니다.

이런 분들의 이야기는 쉽게 찾을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이 언젠가 소개해드렸던 작고하신 장영희 교수님이죠.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라서 세상에서 사랑을 받지 못합니다. 원하는 학교에 가기도 너무 어렵습니다. 이 때 어떤 결심을 합니까?

“세상이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나를 세상을 짝사랑하리라.”

그 후로 자기를 받아주지 않는 세상을 짝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영문학 박사가 되어서 서강대 교수가 됩니다.

장 교수님은 바로 ‘여기’를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그뿐입니까? 대한민국 축구 대표 선수였던 박지성 선수가 자서전을 펴냈습니다. 자서전 제목은 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스스로 준비를 마쳤다고 해서 세상이 기회의 문을 선뜻 열어 주지 않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일들 속에서 날 지키기 위한 확실한 한 가지는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었다.”

박지성 선수가 기독교인임을 잘 아실줄 압니다. 박지성 선수가 그처럼 훌륭한 선수가 될수 있었던 것은 믿음 안에서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여기에 대한 확신과 애정이 있었던 것임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한 사람만 더 소개해 드릴까요? 최근 한국에서 오신 분들은 잘 아실줄 압니다. 총각네 야채 가게의 대표 이영석 씨가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만서 가난에 쪼달립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조금씩 비뚤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군인이나 경찰관이 되겠다는 현실적인 꿈을 가집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시련이 찾아옵니다. 고3때 자신이 선천성 척추 기형임을 알게 됩니다. 경찰이나 군인이 될수도 없었습니다. 절망한 이 때 담임 선생님이 찾아 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너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영석아, 세상은 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니 네가 세상을 받아들여라.”

그 후 세상에 마음을 열었고 대학을 졸업하고 끝내 남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총각네 야채가가를 열어 큰 기업의 대표가 됩니다.

자기를 받아드리지 않는 ‘여기’를 사랑한 결과가 아닐까요?

교우 여러분,

벼랑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벼랑을 싫어합니다. 저도 저희집 지붕이 낮지만 겁이 나서 올라가지 못합니다. 저도 벼랑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벼랑에 겁 없이 설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이사야의 고백을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자기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 여기가 황폐한 곳일지라도 우리가 있기에 더 황폐해질수밖에 없는 곳일지라도 바로 자기가 서 있는 곳을 사랑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여기를 사랑하는 자를 저기로 보내십니다. 그들은 저기를 다시 여기로 생각하여 그곳을 사랑합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찾고 계십니다.

사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그가 거하는 곳이 어떻게 보면 더 황폐해 갔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더 악해져 갔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가 계신 곳을 사랑하셨습니다. 여기를 사랑하시기에 끝내 십자가에서 외치신 것이 아닐까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한편 예수님의 이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주님처럼 ‘여기’를 사랑하는 자가 되어 갑니다. 이사야처럼 죄 씻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죄 씻김을 받으셨습니까? 우리가 있는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자꾸 사회 경제적으로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어려워질지 알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때문에 더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여기’를 사랑하십시다. 언젠가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피어날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께 고백하십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말씀을 거둡니다.

안토니오 반데라스라는 분이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 시인이 말했다.

‘길은 없다. 당신이 걸어가며 만드는 것이 길이다.”

언제 길이 만들어질까요? 자기가 처한 ‘여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여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저기’로 가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교우 여러분,

2015년도 각자를 위한 아름다운 길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멀리 보고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가 처한 곳을 사랑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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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 장

1절: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절: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절: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절: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절: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절: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절: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9절: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절: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11절: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12절: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 말씀요약 —-

선지자 이사야와 이사야 시대의 유다의 영적 형편(사 1-5장)

이사야(Isaiah) 선지자는 이사야서의 저자로(사 1:1),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구원, 또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입니다. 이사야는 남왕국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이 통치하던 시대(주전 740-680년)에 예언하였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이사야는 웃시야 왕과는 사촌 간으로, 웃시야 왕의 아버지 아마샤와 이사야 선지자의 아버지 아모스는 서로 형제지간으로 왕궁에서 함께 살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웃시야 왕은 비교적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하여 하나님을 구한 왕이었습니다. 웃시야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신앙적인 조언을 잘 받았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시므로 상당 기간 태평성대를 맞아서, 경제적 번영과 물질적인 풍요를 누렸습니다(대하 26:5).

이사야는 바로 이 웃시야 시대에 태어나 살다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사 6:1). 하지만 그때 유다의 영적 형편은 한마디로 영적, 도덕적, 사회적, 국가적으로 극심하게 해이해지고 혼란하고 타락한 상태였습니다. 유다의 상황은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사 1:5)이었습니다. 조금 평안하고 물질적으로 잘 사니까, 사람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해이해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거역하고, 소돔과 고모라처럼 악을 행하였으며, 그들의 예배는 지극히 형식적이었습니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강도의 소굴처럼 더럽혀졌습니다(1장). 그들은 사치하고 먹고 마시고 입고 꾸미는 것에 온통 관심을 기울였습니다(3:16-24).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시온에 불을 던져서 성을 깨끗하게 하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1:24-31). 물론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청결하게 하시고 나면 그곳은 다시 아름답고 영화로운 곳이 될 것입니다(4장). 하지만 유다의 형편은 여호와의 포도원에 심겨진 극상품 포도나무가 들포도를 맺고 있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 포도원을 황무하게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5장).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의 시대는 매우 위태로운 시대였습니다. “시온의 딸이 마치 포도원의 움막같이 오이밭의 원두막같이 포위된 성읍같이 겨우 남았다”(사 1:8)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언제 어떻게 넘어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나도 천하태평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니,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다.’ 하는 그런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위험한 시대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 마시고 사고 파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들도 하나님께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뜻, 자신의 영적인 형편, 이 시대의 영적인 형편에는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있으면서도 자신은 언제나 건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탄식하시며, 교회를 청결하게 하셔야 하는 이 시대는 위험한 시대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소명(사 6장)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시대에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셨습니다. 말씀을 전할 사람이 가장 필요한 때에 이사야를 부르신 것입니다. 누군가 죄를 책망하고 깨우쳐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켜주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망가지고 헝클어진 교회, 가정을 회복시키실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에, 또한 그 말씀을 전할 대언자가 항상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대마다 그의 말씀의 종들, 선지자들을 일으키시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말씀의 종들을 찾으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사용하시는 구원의 방도입니다. 특별히 어두운 때, 선과 악이 뒤바뀌고, 모든 것이 인본주의로 흐르고, 영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혼란할 때에, 이런 말씀의 종들이 더욱 필요하고 더욱 귀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가장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말씀의 일꾼들, 선지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낼 선지자를 찾으셨던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실 때에 두 가지 일을 이사야에게 행해주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사 6:1-3). 이사야는 여섯 날개를 가진 천사들이 하나님의 위엄에 압도되어 그 앞에서 찬송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요 12:39-41).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들어 사용하시기 전에 그의 죄와 무능력을 깊이 인식하게 하셨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6:5) 하는 탄식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 그의 죄가 용서함 받아 정결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6:5-8).

이제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체험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 6:8)라고 하셨을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안락함과 왕족으로서의 특권을 모두 뒤로 던지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일보다 더 필요한 일은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이사야는 잘 알았습니다. 이사야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면서, 하나님이 어디로든 보내시면 자기는 가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를 바라보시면서도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시대가 혼탁하고 또 위태롭습니다. 망가지고 헝클어진 가정과 교회를 다시 세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본 자들, 죄 용서함을 먼저 경험한 자들만이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 사역(사 7-66장)

보냄을 받은 이사야는 얼마나 귀한 말씀의 사역을 감당하였는지 모릅니다. 이사야 7장부터 66장까지에는 이사야가 전한 말씀의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다 가서 모든 말씀을 가감 없이 다 전했습니다. 아하스 왕에게 가라고 하시면 아하스 왕에게, 열방을 향해 경고하라고 하시면 열방을 향해, 히스기야 왕에게 가라고 하시면 히스기야 왕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 사역에 큰 열매가 없을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사 1:9). 하지만 이사야는 낙망하지 않고 경고와 심판의 말씀도 전하였고(1-39장), 또한 회복과 구원과 위로의 말씀도 전하였습니다(40-66장). 이사야는 메시아이신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셔서 만방에 그 빛을 비취실 것과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다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위태로운 시대에도 이런 이사야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사야는 왕궁의 귀족생활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말씀을 전할 종들을 찾으실 때에 그 말씀을 대언하기 위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자신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많은 고난이 뒤따랐습니다. 유대 전통에 따르면 이사야는 므낫세에 의해 그의 몸이 톱으로 잘려져 순교를 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말씀 사역은 결코 헛되이 되지 않았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사 40:8)고 하신 말씀처럼 말입니다. 말씀의 사역은 결코 헛되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Here I Am)/묘동교회 시온 성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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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선지자 이사야 > 교과토의 자료

본문

제13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선지자 이사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시작하며

창12장에서 시작된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둘로 찢어지고 국력은 약해져 결국 앗수르와

바벨론 같은 강대국의 침략을 받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하나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받들어야 할 유대는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과 죽음의 길로 가고 있었다

그 때 이사야는 위기를 직감하고 깊은 기도를 하다

환상가운데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그 환상을 통해 하나님은 유다의 미래를 보이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가 될 찌라도 끝까지 붙들고 개입 하실 것이며

결국 택한 하나님나라가 승리 할 것을 알리셨다

이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으로

이시대의 이사야 들이 감당해야 할일이다

일) “화로다. 나여!”(사 6:1-6)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 치세

동안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선지자이다

유다는 웃시야 때 쇠퇴했던 국력을 회복하여

태평성대의 외적인 번영을 누리긴 했지만

점점 영적 부패가 심해져 캄캄해 졌다

이때 신실한 이사야는 위기를 직감하고

성전에 올라가 엎드려 기도 하는 자리에서

특별한 영적체험으로 환상을 보게 된다

세상의 그 어느 왕좌 보다 아주 높은 보좌에

주님이 앉아 계시고 주님이 입으신 왕복의

옷자락이 끝없이 길어 성전을 가득 채웠고

오직 스랍(천사)들이 주님을 찬미하고 있었다

이사야는 장엄하고 웅장한 주님의 영광에 압도되었다

주님은 찬란한 영광을 긴 옷자락으로 감추었지만

죄 많은 인간이 그 영광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커서 그 영광 앞에 감히 설 수 없었다

그 영광 앞에 이사야는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의 완전무결하신 거룩과 영광 앞에서

죄인 인 자신과 백성의 죄악이 그를 눌렀다

하나님의 거룩은 죄악을 삼키는 불과 같아서

부패한 인간이 그 앞에 설 수 없고

죄 있는 자는 누구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월)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 6:6-7)

환상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을 목도한 이사야는

실제로는 죽지 않았지만 그의 의식 속에서

그는 이미 죽은 것처럼 느꼈다

이사야는 그 많은 죄 중에 부정한 입술을 지목했는데

정결한 입술로 여호와를 찬양하는 스랍들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대조할 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고

마음으로 범죄한 것이 입으로 표출됨을 깨달고

죄악을 총체적으로 나타낸 곳이 입술이라 느꼈다

죄 때문에 죽은 것 처럼 엎드러진 이사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의식을 받게 된다

스랍 중 하나가 정금으로 만든 불집게로

단에 피워진 숯을 취하여 이사야의

입술에 댐으로서 죄 사함 의식을 받았다

그러나 이 의식은 죄 용서를 확신시키려는 의도이지

숯 자체에 죄용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으로 이사야의 죄와 악이 사하여지고

깨끗하게 되어 하나님의 동역자로 준비 되었다

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

이사야는 죄로 더러워진 자신의 누추함을

특별한 의식을 통해 용서를 경험한 후

그의 영적 귀가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 말은 이사야에게 직접 한 말이 아니고

하늘 어전회의에 참여한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이사야의 귀에 들린 것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음성이 들리자

그 가슴이 뜨거워져 불타는 것 같이 견딜 수 없어

내가 여기 있어요 나를 보내세요 라고 외쳤다

이사야는 죄 씻음을 받은 감격으로

헌신에 대한 열정이 속에서 부터 터져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속에서 솟구치는 찬양이고 구원의 기쁨이다

이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하게 되고

주님 일에 헌신하게 되며 봉사하게 되고

이 기쁨으로 다른 사람을 전염 시키는 것이 전도다

수) 이사야의 호소(사 6:9-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당시 백성들은 죄로 목이 곧고 강팍해져

영적 무감각상태 영적 불감증상태에 빠졌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배반하여 백성 되기를 포기한 상태 였다

죽음으로 달려가는 백성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자비로 기다리고 계실 수 없기에

이사야에게 강력하게 말씀 하셨다

눈이 어두운 사람은 빛을 볼 수 없다

귀가 막힌 사람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지각이 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돌아오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으로 심판의 1차적인 원인은 죄인에게 있다

끝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2차적 심판으로

하나님의 손이 거둬지고 버려둠을 당한다

그래서 눈이 어둡기 전에 귀가 막히기 전에

지각이 둔해 지기 전에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목) 이방의 빛(사 42:6-7)

예수님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사람은

그 아버지하나님을 선전할 책임이 있다

세상에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누가 알려야 하겠는가?

예수님을 만난 우리가 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전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예수복음은 희미해 질것이다

복음을 받은 자들이 외쳐야

복음의 빛이 타올라 세상이 밝아진다

내가 밝히지 않으면 세상은 그만큼 어두워진다

복음의 빛이 여기저기서 자꾸 비추어 질 때

세상이 복음으로 환해지고 하늘지경이 넓혀지며

구원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자녀가 많아진다

그 일에 나부터 내 주위부터 시작해서

우리가족이 복음화 되고 동내가 복음화 되고

우리나라가 복음화 되고 세계가 복음화 되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의 결실을 맺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며 3기 교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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