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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과 에서 | [슈퍼북 시즌1] 야곱과 에서 (한국어) 7550 좋은 평가 이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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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이삭과 리브가에게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어요. 에서는 장자권을 야곱에게 팔았어요. 이삭이 축복을 줄 시간이 되었을 때 야곱은 에서처럼 옷을 입었고 장자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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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churchofjesuschrist.org

Date Published: 6/1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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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야곱과 에서의 형제갈등 – 아틀라스뉴스

성경 창세기에 형제 갈등은 카인과 아벨에 이어 이삭(Isaac)의 쌍둥이 아들 에서(Esau)와 야곱(Jacob)에서 재현된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카인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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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tlasnews.co.kr

Date Published: 9/2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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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 네이버 블로그

야곱은 떡과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 곧 장자권을 회복한 것이다. 참고로 붉은 팥죽과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한다. 말세에는 예수 그리스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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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m.blog.naver.com

Date Published: 12/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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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와 야곱, 왜 하나님은 에서를 버렸는가?

창세기 25장,야곱과 에서, 하나님은 왜 에서를 버렸는가? 창세기25장 아브라함이 별세한 후 이삭의 시대가 문을 엽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에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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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koinespirit.tistory.com

Date Published: 5/11/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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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Jacob and Esau) – 아포슬 한인 침례 교회

바로 평생을 움켜잡고 빼앗는 자, ‘야곱’ 에서 ‘이스라엘’ 로.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혹은 ‘하나님의 황태자’ 라는 뜻의 이스라엘로 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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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akbchurch.org

Date Published: 3/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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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거나 교활하거나 – 야곱과 에서 이야기 – 에큐메니안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특별히 에서를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성서는 사냥꾼인 에서가 잡아온 고기를 이삭이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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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www.ecumenian.com

Date Published: 11/23/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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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창세기 25:27-34) – 베델 바이블 하우스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야곱은 미래를 살고 에서는 현재를 산 것입니다. 야곱은 그것이 불확실해 보일지라도 미래를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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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ethelbiblehouse.tistory.com

Date Published: 1/27/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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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 김성수 – 다음블로그

(에서와 야곱을, 누가복음의 맏아들과 탕자로,. 또는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로 연결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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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blog.daum.net

Date Published: 10/2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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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북 시즌1] 야곱과 에서 (한국어)
[슈퍼북 시즌1] 야곱과 에서 (한국어)

주제에 대한 기사 평가 야곱 과 에서

  • Author: 슈퍼북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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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ate Published: 최초 공개: 2022. 2. 11.
  • Video Url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wGDBSdgEl0o

야곱과 에서

“야곱과 에서”, 구약전서 이야기 (2022)

“야곱과 에서”, 구약전서 이야기

이미지 구약전서 이야기: 야곱과 에서

이삭과 리브가에게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이 태어났어요. 에서는 실력 있는 사냥꾼이었어요.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었고 주님을 따랐어요.

창세기 25:20~28

이미지 구약전서 이야기: 야곱과 에서

에서는 맏이였어요. 대부분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가 아버지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았어요. 장자의 명분을 받은 사람은 가족을 이끌고 가족을 부양하는 데 도움이 될 더 많은 땅과 동물을 가지게 되요. 하지만 에서는 가족보다는 자신에게 더 신경을 많이 썼고, 부모와 주님께 순종하지 않았어요.

창세기 25:25, 32; 26:34~35

이미지 구약전서 이야기: 야곱과 에서

어느 날 에서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그는 매우 배가 고파서 야곱에게 음식을 달라고 했어요. 주님께서는 에서가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셨어요. 야곱은 에서에게 장자의 명분과 음식을 서로 바꾸자고 했어요. 에서는 동의하고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주겠다고 했어요.

창세기 25:23, 29~34; 히브리서 11:20

이미지 구약전서 이야기: 야곱과 에서

리브가와 이삭은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었어요. 그들은 에서가 계속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서 슬펐어요.

창세기 26:34~35

이미지 구약전서 이야기: 야곱과 에서

이삭은 나이가 들어 앞이 보이지 않게 되었어요. 그는 죽기 전에 에서에게 동물을 사냥해서 자신이 먹고 즐길 요리를 해달라고 했어요.

창세기 27:1~4

이미지 구약전서 이야기: 야곱과 에서

리브가는 이삭이 장자의 축복을 주려는 것을 알았어요.

창세기 27:5

이미지 구약전서 이야기: 야곱과 에서

리브가는 야곱에게 동물 두 마리를 가져오면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음식을 요리하겠다고 했어요. 그러면 야곱이 축복을 받을 수 있을 터였어요.

창세기 27:6~17

이미지 구약전서 이야기: 야곱과 에서

야곱은 에서처럼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음식을 드렸어요.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어요. 돌아온 에서는 야곱에게 매우 화가 났어요. 하지만 장자의 명분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에서가 아닌 주님의 계명을 지킨 야곱이 받게되었어요.

창세기 27:18~29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야곱과 에서의 형제갈등

장자권, 상속권 놓고 다툼…20년 후에 재회하면서 화해

성경 창세기에 형제 갈등은 카인과 아벨에 이어 이삭(Isaac)의 쌍둥이 아들 에서(Esau)와 야곱(Jacob)에서 재현된다. 에서와 야곱의 갈등은 카인과 아벨과 달리 화해로 끝난다는 점에서 앞의 형제갈등과 다르다.

이삭의 아내 리브가(Rebecca)는 쌍둥이를 임신했는데, 쌍둥이는 태내에서부터 서로 싸웠다. 형 에서는 살결이 붉고 온몸이 털투성이였고, 동생 야곱은 형의 발 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다. (창세기 25:26)

형 에서는 날쎈 사냥꾼이 되었고, 동생 야곱은 차분한 사람이어서 주로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에서를 아꼈고, 어머니는 야곱을 사랑했다.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파는 그림 (James Tissot, 1896–1902) /위키피디아

두 형제의 첫번째 갈등은 장자권(first-birth right)이다.

어느날 야곱이 죽을 끓이는데, 에서가 샤냥에서 돌아와 배가 고프다며 죽을 좀 달라고 했다. 에서는 죽을 주기 앞서 맏아들의 권리를 팔라고 했다. 에서는 맏아들 권리가 무슨 대수냐며 야곱에게 그 권리를 준다.

아버지 이삭에게서 축복을 받는 야곱 (Horst, Gerrit Willemsz) /위키피디아

두 번째 갈등은 상속권이다. 성경에서는 축복(blessing)으로 표현했다.

아버지가 늙어 눈이 어두워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 이삭은 맏아들 에서에게 들에 나가 동물을 잡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오면, 마음껏 축복을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 리브가가 그 말을 듣고 에서가 사냥 나간 틈에 동생 야곱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줄 터이니, 그것을 아버지에게 드리고 축복을 받으라고 했다. 리브가는 집에 기르던 가축을 잡아 음식을 만들고 형이 입던 털옷을 야곱에게 입혔다.

에서가 오기 전에 야곱은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아버지에게 들고 갔다. 아버지는 눈이 침침해 야곱이 입은 털옷을 만지며 에서인줄 알고 속는다. 어머니 리브가와 둘째 야곱이 이삭과 에서를 속인 것이다.

이 속임수를 모른채 아버지는 야곱이 건네준 음식을 맛있게 먹고 둘째에게 축복을 내린다. 그 축복은 야곱이 가장이 되어 집안을 다스리고, 모든 곡식과 포도주 등 재산을 상속받는 내용이다.

뒤늦게 돌아온 에서는 어머니와 야곱에 속은 것을 알고 아버지에게 축복을 내려달라고 요구한다. 아버지는 뒤늦게 속은 사실을 알게 되지만 한번 내린 축복을 번복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에서에게 말하기를,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은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겨야 한다.”고 했다.

에서와 야곱의 화해 (Francesco Hayez, 1844) /위키피디아

에서와 야곱의 대립은 무릇 인간세계의 형제갈등을 대변한다. 장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가부장제도에서 야곱은 어머니와 공모해 태생적 장자와 아버지에게 거짓 행위를 한다. 하나님은 야곱과 어머니의 사기적 행동에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는다.

에돔 왕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두 형제의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지시로 외삼촌 라반(Laban)이 사는 하란으로 가서 지내다가 아내 넷을 얻고 아들 열하나를 낳아 20년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그는 형 에서가 자신과 가족을 죽일 것을 두려워 한다.

야곱은 자신의 재산 가운데 큰 부분을 떼어 형에게 주며 화해를 모색했다. 암염소 200마리, 숫염소 20마리, 암양 200마리, 숫양 20마리, 낙타 30마리, 암소 40마리, 황소 10마리, 암나귀 20마리, 새끼 나귀 10마리…. 여기에다 종들을 나눠 에서에게 상납하기로 하고 먼저 보냈다.

뜻밖에 에서는 쾌히 야곱을 용서한다. 동생이 주는 선물도 받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동생의 간곡한 부탁에 형은 동생의 선물을 받았다. 두 사람은 마침내 화해한다.

야곱은 유인인의 조상이다. 주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Israel)이란 이름을 준다. 에서는 에돔 왕국의 한 종파가 된다. 에돔은 이스라엘 남부에 있던 고대 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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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스톰 마티아스 작품 : 야곱과 에서 >

<태중에서 싸운 야곱과 에서> 창세기 25장

1. 스토리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40세에 결혼한 리브가로부터 에서와 야곱이라는 두 아들을 낳는다. 그 때 야곱의 나이 60세였다(창25:20, 26). 창세기 25장 21절을 볼 때, 이삭은 잉태하지 못하는 리브가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드렸고,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리브가로 하여금 잉태케 하셨다.

그런데 리브가의 태 속에 있는 두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하나님은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다”며,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고 얘기하고 있다(창25:23). 이와 함께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을 덧붙이고 있다.

결국 해산날에 쌍둥이가 태어났는데,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붉음을 뜻하는 ‘에서’(에싸브)라 지었다.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의미의 ‘야곱’(야아코브)이라 지었다(창25:22-26).

2. 야곱과 에서의 장자권 다툼

‘야곱이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이 쌍둥이가 복중에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벌였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태어나기도 전인 복중에서부터 쌍둥이가 싸웠던 이유는 바로 ‘장자권’을 먼저 취하려는 것 때문이다. 야곱과 에서는 ‘누가 장자가 될 것인가’를 두고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표면적으로 볼 때, 에서가 장자이고 야곱이 차자이다. 하지만 창세기 25장 23절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은 ‘맏아들인 에서가 아우인 야곱을 섬기게 된다’는 뜻이다. 이는 이면적으로 볼 때, 에서보다는 야곱이 장자의 권한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과 관련해 사도바울은 로마서 9장 10~13절에서 야곱과 에서에 대해 하나님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야곱은 사랑하시는 자인 장자 격이며, 에서는 미워하시는 자인 차자 격이라는 얘기다.

3. 장자의 명분을 회복한 야곱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것은 참 진리인 말씀에 속한 자를 가리키며, 미워하시는 자라는 것은 거짓인 어두움에 속한 자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쌍태 속에서 먼저 난 자였던 에서는 거짓 진리의 상징인 차자였으며, 나중에 태어난 자인 야곱은 참 말씀의 상징인 장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장자와 차자의 순서가 뒤바뀌면서 에서가 먼저 나옴으로 이를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 복중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 싸움은 결국 ‘팥죽’ 때문에 결론이 난다. 익숙한 사냥꾼이었던 에서가 들에서 돌아와 피곤해 있을 때, 조용한 성격의 야곱은 팥죽을 쑤고 있었다. 피곤했던 에서가 팥죽을 먹고자 했을 때,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자신에게 팔라’고 요구한다. 이때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긴 에서는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며,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팔아넘겼다(창25:27-33).

창세기 25장 34절에 야곱이 에서에게 건네준 것은 ‘떡과 팥죽’이다. 야곱은 떡과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 곧 장자권을 회복한 것이다. 참고로 붉은 팥죽과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상징한다. 말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통해서만이 완전한 장자권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캄캄한 밤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야곱은 밤새 그와 씨름을 한다. 얼마나 야곱이 죽을힘을 다했는지, 천사는 이길 수 없는 것을 알고 야곱의 엉덩이를 치게 되고, 야곱은 환도 뼈에 상처를 입는다.(내포 의미는 무엇일까? 환도 뼈의 상처는 어쩌다 입었을까?)

4.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던 에서의 행동은 결국 아비인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할 때에,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삭에게 줄 별미를 만들기 위해 사냥하러 간 틈을 타서 야곱이 그 축복을 대신 받게 된다(창27:1-40).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한 내용에는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창27:29)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반면 에서에게는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는 차자의 복을 이삭은 빌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예언했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예언을 이삭은 다시 한번 확인한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야곱은 장자권을 회복하게 된다는 예언과 축복인 것이다.

5. 승리자가 회복하는 참 장자권

야곱이 참 장자권을 회복하게 된 시점은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간 종노릇을 하고 난 뒤였다고 볼 수 있다. 라반에게서 벗어난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시작된 씨름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이름을 얻음으로 회복됐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창32:27-28).

일반적으로 사람은 영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씨름하고 있다. 이 씨름에서 영의 소욕이 야곱처럼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창세기 32장은 보여준다. 그러나 육의 소욕이 이기면 육이 장자가 되고 영이 차자가 되어 타락한 인간이 된고 만다. 영의 소욕이 야곱처럼 승리하면 이는 곧 내 마음 안에서 생명나무의 말씀이 승리하였음을 뜻한다. 이처럼 넉넉히 이기는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참 승리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완전히 믿는 것으로 가능하다(요16:33, 롬8:37, 요일5:3~4, 계3:21).

6. 제주도 구전 신화 <천지왕 본풀이>와 비교해보자

대별왕과 소별왕의 인세 다툼에서 결국 소별왕이 거짓말과 술수로 대별왕을 이긴다. 저승을 차지하게 된 대별왕과 이승을 차지하게 된 소별왕 이야기에서의 꽃가꾸기 경쟁과 더불어 야곱의 지략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동양적 희생과 양보의 사고와 달리, 구약시대의 보편 윤리는 무엇을 강조하고 있었는가? 왜 신은 장자인 에서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는가? 나가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에서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인세 경쟁에서 진 대별왕은 사실 져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신화적 상징 체계는 인간세의 사이즈를 초월한다. 대별왕의 저 자애로운 양보심은 어쩌면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행위의 강력한 내적 모티프와 연계선 상에서 이해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닐까?

7. 이스라엘의 신민의식

야곱은 선택받은 민족의 시조인가. 인용한 성경의 스토리에 따르면 그렇다. 하느님은 야곱을 이미 이스라엘의 시조로 점지해두지 않았는가. 그 역시 자신의 죄를 괴로워하면서 광야를 떠도는 벌을 감래한다. 아니 자청해서 떠돈다고 해야할까? 그러다 그 괴로움은 꿈으로 드러나고, 꿈속에서 천사를 만나 신의 음성을 듣게 되면서 보속을 받게 된다. 성경은 말하고 있다. 태중에서 이미 야곱이 장자권을 받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 에서의 힘에 의해 그 순위가 바뀌게 되었다고. 그렇다면 신은 자신의 예정대로 모든 것이 이뤄지길 바란 바, 에서에게 가혹하게 군다. 성경의 구절에 의하면 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믿음직한 힘 좋은 아들이요, 그에 비하자면 차자인 야곱은 약골로 나온다. 약골인 만큼 어머니의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나, 그 어머니는 왜 야곱이 형을 내치게 되도록 공조했을까? 나로서는 이부분이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남편이 장자 에서에게 주는 사랑이 못마땅했을까? 이건 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설명도 불가능하고. 큰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이유 불명의 미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손가락도 물면 특별히 아픈 손가락이 있다면, 막내 아들(쌍둥이인데 막내아들이라니 이상하다)에 대한 자신의 편애를 통해, 그녀가 얻는 것은 뭐가 될까? 그녀야말로 어떤 조력자일까? 나는 이 성경의 스토리를 읽고 혼란에 빠졌다.

두 아들, 야곱과 에서의 친모는 어째서 낳은 자식 중 유독 한 자식을 편애했을까? 왜 그녀는 자신의 편애를 받고 있는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남편과 큰 아이를 감쪽 같이 속이도록 했을까? 그녀는 인간 남자의 아내라기 보다, 신의 아내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짓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그녀는 그러니까, 천상과 지상계를 이어주는 천사 같은 존재. 혹은 신화적으로 환원해서 보자면, 무당 같은 존재. 예언의 실행에 반드시 개입해야 하는 절대적 조력자 아닐까?

성경에 대해 이렇게 평하면 기독교 광신자들이 파르르 들고 일어나겠지만, 난 이스라엘의 선민의식을 납득할 수 없다. 그 자폐적인 우월감과 기만적 행위들. 그들에게 종교는 곧 정치이다. 이번 가자에서의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어머니의 존재를 규명해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이 미친 이스라엘아, 너희들의 어머니는 과연 누구이기에?

에서와 야곱, 왜 하나님은 에서를 버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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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5장,야곱과 에서, 하나님은 왜 에서를 버렸는가?

창세기25장

아브라함이 별세한 후 이삭의 시대가 문을 엽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에게서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큰 아들의 이름은 에서, 작은아들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쌍둥이면서도 외모와 성격 모두 완전 다른 이란성입니다.

큰 아들 에서는 몸이 붉고 털이 많은 사람입니다. 기질이 호탕하고, 성격이 급하며, 사냥을 좋아하는 그야말로 사나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야곱은 집안에 있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세밀하며 말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 저보고 둘 중 누구와 친구가 되려는가 묻는다면 당연히 에서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단순하며 기분파이기 때문에 잘만 비위를 맞춰주면 덕볼 일이 많고, 또 의리파입니다. 자기가 손해볼지언정 배신하지는 않는 그런 성격이죠. 물론 단점도 있긴해도 친구가 손해볼 단점은 아닙니다. 하지만 야곱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계산적이기 때문에 쉽게 손해를 보질 않습니다. 친구를 잘 믿어주지도 않고, 뒤끝이 있습니다. 속을 알 수 없어서 잘못하다가는 뒤통수 얻어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들의 성격이 그들의 이름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에서는 몸이 붉다는 뜻이고, 야곱은 남의 뒷다리를 잡은 자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나님은 에서보다는 야곱을 더 좋아하십니다. 심지어 에서를 버렸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작은 에피소드에서 그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팥죽 사건이죠.

사냥을 좋아하는 에서가 집에 돌아오니 야곱이 시간을 맞춰 붉은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지역에서는 적갈색의 콩에다 파와 각종 양념을 넣어 끓인 수프가 있다고 합니다. 붉은 색의 스프를 우리식으로 팥죽으로 번역한 것이지만 우리의 팥죽은 아닙니다. 원어에는 붉은을 두번 반복하고 있습니다. 에서가 이 죽을 보았을 때 얼마나 먹고 싶어했는가 그 마음이 죽 이름에 담겨 있는 것이죠. 이런 점을 보면 야곱은 의도적으로 에서가 돌아올 때를 맞춰 이렇게 하였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에서는 야곱에게 죽 좀 달라했지만 야곱은 매정하게 거절하고는 형의 장자의 권리와 죽을 바꾸자고 합니다. 에서는 정말 아무 생각없이 덜렁 이것을 바꾸고 맙니다. 배고파 죽게 생겼는데 장자 권리가 뭐 소용 있냐는 것이죠. 그리고 장자의 권리는 나중에 아버지 돌아가실 때 재산을 나눌 때나 좀 덕을 보지만 그건 나중일이고 지금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 성경은 이런 에서의 생각을 장자의 권리를 경홀히 여겼다고 합니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장자의 권리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권리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권리와 집안의 대를 이어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소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받는 축복의 권리를 팥죽 한 그릇보다 못하다고 생각하였기에 하나님은 그런 에서를 버렸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 제임스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 종류의 선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살아있는 선택과 죽은 선택, 둘째는 피할 수 있는 선택과 피할 수 없는 선택, 셋째는 중요한 선택과 사소한 선택입니다. 죽은 선택은 이미 정해진 것이어서 사람의 노력으로 바꿀 수 없지만 살아있는 선택은 사람의 선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머지는 설명 안해도 아시겠죠. 에서는 자신의 삶의 순간에 자기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살아있는 선택을 거부하였고, 중요한 것 대신에 사소한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에서의 가장 큰 불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야고보서 4장 8절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엘리제사장을 꾸짖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삼상2:30)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십니까? 그럼 지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 존중받고 싶다면 하나님을 존중하십시오. 하나님을 최고로 여길 때 하나님은 역시 당신을 최고로 여겨주신답니다.

by 코이네 소토교회 박동진 목사

남편을 속인 어머니와 아들 그리고 방조하는 하나님

처가살이 하는 야곱 부자가 된 비결

처가와의 갈등 야곱은 어떻게 풀어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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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디거나 교활하거나

< 1 >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특별히 에서를 더 사랑했다고 합니다. 성서는 사냥꾼인 에서가 잡아온 고기를 이삭이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남을 더 귀하게 여기는 관습이나, 고기를 좋아하는 그의 특별한 취향 외에도 어쩌면 숨은 이유가 있었을지 모릅니다.

송봉모 신부는 이삭의 그런 특별한 편애의 배경에는 이삭의 열등감을 두 아들에게 투사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삭과 그가 편애하는 에서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100세 낳은 유일한 적자라는 이유로 어쩌면 지극한 보호와 사랑 속에서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며, 갈등을 피하는 성격을 갖게 되었고, 집 안에만 있는 야곱보다 사냥꾼인 에서의 대범하고 외향적인 기질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삭이 이런 내향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갖게 된 것은 그가 모리야 산에서 가졌던 공포와 아버지 아브라함에 대한 혼돈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삭이 몇 살 때에 이런 경험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모리야 산으로 이삭과 함께 갈 때, ‘불과 장작은 여기에 있습니다마는, 번제로 바칠 어린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은 것으로 보아 아주 어린 아기가 아닌, 소년이었으리라 추측합니다. 그런데 제단을 쌓고 제단 위에 장작을 벌려놓은 아버지가 갑자기 날카로운 칼을 빼들고 자기를 잡으려고 했을 때, 이삭은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성서는 이삭의 반응을 전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삭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어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진정한 장자이자 하나님의 약속의 상속자인 자신을 그동안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변한 것을 어떻게 받아드려야 했을까요? 아버지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 야훼는 장자를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는 신(神)인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과연 이런 일을 하는 것이 믿음 있는 사람이 할 짓인가?

물론 결과는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해피 앤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숫양 한 마리를 예비해 두셨고, 아브라함은 아들 대신 숫양을 희생 제물로 바치고, 행복하게 모리야 산을 내려왔습니다.

우리는 성서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들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요청을 듣고 그 일을 그의 아내 사라와 상의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합니다. 만일 그랬다면 사라의 반응은 어떠했을지도 우리는 단지 상상해볼 수 있을 뿐이지요. 아마 기절했을지 모릅니다. 아니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하나님에게 대들고 저항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몰래 이삭을 데리고 도망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마음 아닐까요?

그런데 성서는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일 후에 곧바로 ‘사라는 백 년 하고도 스물일곱 해를 더 살았다. 이것이 그가 누린 햇수이다. 그는 가나안 땅 기럇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눈을 감았다. 아브라함이 가서, 사라를 생각하면서, 곡을 하며 울었다.’(창 23,1-2)고 합니다.

그리고 이삭은 어땠을까요? 아버지를 이전처럼 대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로 마음이 향하게 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삭은 마마보이로 자랐을지 모릅니다. 이삭이 리브가와 혼인한 것이 마흔 살이었다는 성서의 보도로 미루어, 그리고 혼인할 여자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브라함이 고향 하란에서 구해와 연애결혼이 아니라 일종의 중매결혼을 하게 된 것도, 이삭의 성격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삭이 왜 쌍둥이 아들들 가운데 특별히 에서를 더 사랑했는지, 그 이유를 심리적으로 설명하는데 그쳐야 할 것 같습니다.

< 2 >

에서와 야곱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사십 세에 맞이한 아내 리브가에게서 60세에 얻은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이미 태속에서부터 서로 싸웠다고 합니다. 우리 말 ‘싸우다’로 번역된 히브리 동사는 ‘두개골을 부수다’(판관기 9,53; 시편 74,14) 또는 ‘갈대를 찢다’(이사야 36,6)는 매우 거칠고 잔인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속에서부터 이렇게 에서와 야곱이 싸웠으니, 리브가는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하면서, 이 일을 알아보기 위해 주님께로 나아갔다고 합니다(창 25,22).

▲ Jan Victors(1619-1679), 「Jacob blessing Isaac」 ⓒGetty Image

그러자 야훼 하나님은 ‘두 민족이 너의 태 안에 들어있다. 너의 태 안에서 두 백성이 나뉠 것이다. 한 백성이 다른 백성보다 강할 것이다.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창 25,23)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장자가 아니라 차남인 야곱이 야훼의 구원사의 주역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십니다.

어쨌든 리브가는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큰 아들은 몸이 붉고 전신이 털 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에사오: 털이 있는)라고 했고, 후에 나온 동생은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야곱’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창 25,25-26). 그러나 에서의 신체적 특징을 가리키는 단어들은 에서라는 이름과 사실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살결이 붉다’에서 ‘붉다’를 가리키는 ‘아드모니’는 에서의 왕국 ‘에돔’을 준비시키고, ‘온몸이 털투성이다’에서 ‘털투성이’를 가리키는 ‘세아르’는 에돔 땅에 있는 산악지역 ‘세이르’를 준비시킵니다. 그러므로 에서라는 이름은 아마도 에돔과 세이르를 합성 축약시키면서 생겨난 이름일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민중적 어원에 의하면 야곱이라는 이름을 ‘발 뒤꿈치를 잡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아켑’에서 유추하기도 하지만, 사실 ‘야곱’은 ‘야아코벨’의 약자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장성한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 되었고, 조용한 성격의 야곱은 장막에 거주했다고 합니다(창 25,27). 송봉모 신부에 의하면, 야곱이 천막 안에 살면서 팥죽을 끓이고 있었다는 것은 야곱이 ‘마마 보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천막은 여성의 세계, 어머니의 세계를 표현한다면, 들판은 남성의 세계, 아버지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것이지요. 성경은 성격이 차분하고 주로 집에서 살았던 야곱을 어머니 리브가가 사랑했고,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에 맛을 들인 이삭은 에서를 사랑했다고 합니다(창 25,28).

사냥꾼인 에서와 목자인 야곱의 삶은 오랫동안 병존한 두 삶의 방식이었지만 언제나 긴장관계에 있었습니다. 방랑하는 야성적인 사냥꾼은 정착하여 보다 개화된 거주상태에서 사는 목자에게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야곱을 차분하고 얌전하다고 평가하는 시각은 정착한 농부와 목자의 시각입니다. 목자와 농부는 사냥꾼보다 잘 짜여진 도덕적 규율을 지닌 공동체적 삶을 산 것이지요. 이 이야기가 전해진 시대는 떠돌아다니는 수렵생활보다는 정주해서 가축을 치거나 농사를 짓는 것에 더 가치를 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죽을 정도로 허기져서 들어온 에서는 동생 야곱이 요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에서는 그 붉은 죽이 선지국인 줄 착각합니다. 나중에 그것이 선지국이 아니고 불콩죽이라는 것을 알게 된 에서가 속았다고 생각했지만(창 27,36), 그 때는 따질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배고픈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불콩죽에 팔 것을 요청하고 야곱은 형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 것을 맹세하게 합니다.

에서가 왜 장자의 직분을 불콩죽과 떡과 교환했는지 그 이유가 한 문장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그것은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는 것입니다(창 25,34). 맹세는 맹세하는 당사자에게 절대적인 구속력을 갖는다는 것을(여호수아 9,19 참조) 에서가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흔쾌하게 맹세하고, 죽과 떡을 ‘먹고 마신 후 나갔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에서의 성급하면서도 무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야곱이 왜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사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장자상속권 때문이었는지, 선조들의 약속이 장자에게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장자 상속권을 팔고 살 수 있었던 당시 풍습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장자를 통해서 상속되는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장자권에 집착했다는 것은 히브리 성경 원문에서 드러납니다. 허기진 에서가 팥죽을 요구했을 때, 새번역 성경은 야곱이 ‘형이 먼저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파시오’(창 25,31)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히브리 성경에 의하면, ‘형이 오늘 나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파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33절도 새번역은 ‘나에게 맹세부터 하시오’라고 했는데, 히브리 성경은 ‘오늘 나에게 맹세하시오’라고 하여, 야곱이 오랫동안 장자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야곱 이야기에서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에서와 야곱의 어머니인 리브가의 편애입니다. 왜 같은 배 속에서 그것도 쌍둥이로 태어난 두 아들 가운데 장남인 에서보다 차남인 야곱을 리브가가 더 사랑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거친 사냥꾼으로서 집을 거의 떠나 사는 에서보다 목축과 농업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야곱을 더 사랑했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에서가 사십 세에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창 26,34-35).

마찬가지로 이삭도 에서를 편애했습니다. 성서는 이삭이 에서가 사냥해 온 고기 맛을 들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이삭의 아버지 컴플렉스가 작용했을지 모릅니다. 자기를 희생 제물로 바치려던 아버지 아브라함을 이삭은 어떻게 이해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 후, 어쩌면 이삭은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약하고 소심한 성격의 이삭이었기에 어쩌면 자기의 반대 모습, 자기가 되고 싶었던 모습을, 거칠고 통이 큰 사냥꾼인 에서에게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마마보이 같은 야곱보다 더 사랑했을지 모릅니다.

< 3 >

그런데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장자권을 산 야곱과 장자권을 판 에서의 그 이후의 삶입니다. 형에게서 장자권을 샀다고,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다고, 마치 큰 일이라도 벌인 양 호들갑을 떠는데도, 야곱은 현실에선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평생을 험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반면에 동생에게 두 번이나 속임을 당한 듯이 보였던 에서는 사실상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고,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땅에 삽니다. 아버지의 귀중한 유산인 우물들 덕분에 그는 더 이상 족속을 이끌고 유랑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에서의 성격을 우리는 더 잘 파악하게 되는데, 그는 동생에게 속임 당한 것을 곧바로 잊어버립니다.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에게 유화의 제스처를 보이기 위해 재산을 미리 보내고, 만난 후에도 재산을 주겠다고 하지만, 에서는 전혀 야곱의 재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형제가 만났을 때 껴안고 우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오히려 에서가 통이 크고, 장남으로서의 기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에서’가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를 놀라고 당황스럽게 합니다. 장자이며 사냥꾼으로서 건장한 체격에 선한 마음을 가진 에서가 아니라, 인격적으로 모순덩어리이고 교활하고 매우 이기적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잔머리를 굴리는 비열한 야곱을 왜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 약속의 계승자로 증언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비밀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저 성경이 참으로 비열하고 교활하며 이기적이고 매우 현실적이며 모순으로 가득 찬 야곱의 인격을 전혀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품이나 인격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관심은 누가 하나님을 찾느냐는 데 있습니다. 누가 과연 자신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하나님과 씨름하느냐는 것입니다.

에서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이유를 성경은 그가 장자의 권리를 가볍게 여긴데서 찾지만(창 25,34), 우리는 에서가 꼭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서는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장자직이라는 것이 도대체 판다고 팔아지는 것인가? 또 판다고 약속했다고 해서 팔려지는 것인가? 장자직이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질서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변경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닌가!’ 장자로서의 기득권은 생득적으로 결정된 운명이었고, 에서는 그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으며, 굳이 지켜야 할 것으로, 또는 쟁취되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운명으로 보장된 자신의 삶을 위해 그가 해야 할 일은 사실 아무 것도 없으며, 단지 주어진 기득권 안에 머물러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드리는 사람, 세상이 나를 바꾸는 대로 순응하기는 하지만, 내가 세상을 바꾸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 운명에 도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세상이 물결치는 대로 휩쓸려 떠내려가기는 해도, 결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에서가 축복의 계승자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선하게 인격적으로 산다는 것이 아무 쓸모없는 일이란 말일까요? 야곱처럼 교활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스럽게 이기적으로 살아도, 마지막에 하나님만 찾고 믿으면 결과적으로 복 받은 삶을 사는 것이 된단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은 인격적으로 흠이 많은 사람이었고, 야곱은 그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떨면서 야곱은 기도 합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주신 하나님 …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이 모든 은총과 온갖 진실을, 이 종은 감히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창 32,9-10).

그리고 야곱은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과에 대한 벌을 죽을 때까지 받았습니다. 야곱은 외삼촌의 속임수에 빠져 7년의 노동 착취와 20여 년의 종살이를 감수해야 했고, 천사와 씨름하다가 불구가 되었습니다. 세겜에게 자기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하는 것을 보아야 했고(창 34,2), 베냐민을 낳다가 자기 아내 라헬은 목숨을 잃었으며(창 35,18),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노예상인에게 잃고(창 37,28), 기근 때문에 굶어죽게 되자 이집트로 식량을 구하러 자식들을 보내야 하는(창 42,1-2), 실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는 이집트 왕 바로 앞에서 한 고백에서 드러납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 묻는 바로 왕에게 야곱은 이렇게 말 합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 년 하고도 삼십 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창 47,9).

그렇습니다. 야곱은 130여 년 동안 진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죄에 대한 보응을 그는 충분히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그의 불안하고 왜곡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그의 인격의 심층부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했고, 그의 삶의 깊이에서부터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자기에게 호소하는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번뇌에 몸부림치며, 불안해하고, 도피하고 싶어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살아야만 하는 생의 과제를 부둥켜안고 고민하는 사람,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와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 하나님의 은총 없이도 스스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야곱 이야기의 숨은 뜻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이 야곱의 얼룩진 인격을 전혀 감추지 않고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은 도덕적 완전과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자기 삶을 사는 인간,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운명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도전하여 운명을 바꾸는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사가 계승된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야곱의 인격은 그의 생애의 가장 위기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변화됩니다. 그 변화는 환도 뼈가 위골되는, 그리하여 절름발이가 되고, 남자로서의 힘의 근원이 무너지는 것을 대가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습니다. 야곱은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닙니다. 새 이름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듯이, 야곱을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근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운명 같은 현실에 도전한 것은 야곱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도저히 바뀔 수 없는 것 같은 현실, 운명을 변화시킨 것은 야곱 자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기도할 때, 옷을 찢고 재를 뿌리면서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시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야곱은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기도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을 만나 그 곳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일찍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었고, 또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죽었지만,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목숨을 잃지 않은 사람이 되었습니다(창 32,30). 그래서 그 곳 이름을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붙였고, 야곱이 절뚝거리며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솟아올라 그를 비춥니다(창 32,31). 천사와 목숨을 건 투쟁에서 바뀐 것은 야곱 자신만이 아닙니다. 해가 솟아올라 밝아진 세상도 이미 옛 세상이 아닙니다. 운명을 이긴 사람에게 현재는 과거의 연장이 아닙니다. 현재는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된 가능성입니다. 이 약속을 의지하여 자신의 삶과 현실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야곱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뵙게 될 것입니다.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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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에서 (창세기 25:27-34)

야곱과 에서

창세기 25:27-34

성경에는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사람들에 관한 것들입니다 .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이 , 우리가 흔히 옛날 얘기들에서 보는 좋은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을 구분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 옛날 얘기들에서는 보통 주인공이 좋은 사람이고 또 그 주인공을 대적하는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 하지만 성경에서의 주인공은 좋은 사람이기보다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 그리고 그 옆에는 우리와 비슷한 보통 사람이 있습니다 . 그리고 그 주인공의 특별함이 , 보통 사람의 평범함으로 인해 더욱 두드러지는 것입니다 . 오늘 말씀에서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

야곱과 에서는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가 늦은 나이에 얻은 두 아들입니다 . 이 둘은 같은 태에서 나온 쌍둥이 형제입니다 . 그런데도 둘은 서로 매우 달랐습니다 . 에서는 매우 솜씨가 좋은 사냥꾼이었습니다 . 그래서 그는 주로 들판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 하지만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어서 주로 집에서 즉 장막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더 사랑했는데 이는 그가 사냥해온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하지만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 흥미롭게도 야곱에 대한 리브가의 사랑에 대해서는 “ 왜 사랑했는지에 관한 이유 ” 가 없습니다 . 아마도 야곱은 장막에 거하면서 어머니 리브가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고 서로 얘기도 많이 나누었을 것입니다 . 리브가의 사랑은 아마도 “ 사냥한 고기 ” 와 같은 것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라 , 야곱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

하루는 야곱이 장막에서 죽을 쑤고 있는 동안 에서가 들에서부터 돌아왔습니다 . 심히 배가 고팠던 에서는 야곱이 무엇인가 만들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 “ 그 붉은 것을 나로 먹게 하라 .” 배가 고픈 나머지 에서는 야곱이 무엇을 끓이고 있는지조차 물어볼 틈이 없었습니다 . 그저 무엇인가 붉은 것이 눈에 들어오자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 그 붉은 것 ” 을 자기한테 주어 먹게 하라고 요청했습니다 . 그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눈이 멀었습니다 . 그리고 마음이 급했습니다 . 무엇이든 뱃속에 넣어야 했습니다 . 무엇인지도 모를 “ 붉은 그것 ” 이 그에게 생명과 같이 보였습니다 .

형 에서의 급한 요청을 들은 야곱은 급히 그 “ 붉은 것 ” 을 퍼서 형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 그는 으레 하듯 그 조용하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 “ 형의 장자의 명분을 오늘 내게 팔라 .” 이 말을 들은 에서는 “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 하며 야곱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 야곱은 이에서 멈추지 않고 형에게 “ 맹세하라 ” 요구했습니다 . 이에 에서는 또 맹세했습니다 .” 그제서야 야곱은 떡과 그 “ 붉은 것 ” 곧 팥죽을 형에게 주었습니다 . 이렇게 해서 야곱은 형의 장자의 명분을 사들였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야곱을 비난합니다 . 교활한 술책으로 형의 장자의 명분을 헐값에 사들였기 때문입니다 . 뒤에 보면 그는 다시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 장자가 받을 축복 ” 을 받아냅니다 . 그는 정말 나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오히려 형 에서가 순진하고 마음도 넓어 보입니다 . 하지만 이 이야기의 결론 부분인 34 절에서는 야곱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형 에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 “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

야곱과 에서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 간단히 말하면 , 야곱은 미래를 살고 에서는 현재를 산 것입니다 . 야곱은 그것이 불확실해 보일지라도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했지만 , 에서는 당장의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미래를 포기했습니다 . 야곱은 명분을 위해 살았지만 , 에서는 육체를 위해 살았습니다 . 이것이 야곱과 에서의 차이입니다 . 이것은 작은 차이가 아닙니다 . 이것은 매우 큰 차이이며 매우 다른 삶입니다 . 그리고 성경 말씀은 우리를 야곱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재의 순간의 만족을 희생하여 , 더 영광스러운 미래를 추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

보통 사람들은 대개 불확실한 미래의 약속보다는 , 확실할 현재의 만족을 더 선호합니다 . 이런 삶이 우리에게 만족을 줄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 봄이 되면 농부는 소중히 간직해 놓았던 씨를 꺼내 들판에 뿌립니다 . 언뜻 생각하면 소중한 씨를 땅에 버리는 것입니다 . 하지만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 이렇게 씨를 뿌림으로써 가을의 수확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농부는 그 씨를 당장 먹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 그러면 몇 끼의 양식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 하지만 이는 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 지혜로운 농부는 당장 배가 고프더라도 씨가 될 양식을 먹지 않고 밭에 뿌립니다 .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서 농사를 망칠지도 모를 일입니다 . 또 뜨거운 여름 내내 밭에 나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 그렇게 하고도 가을이 되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 오직 그 때가 되어서만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수고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농부는 소망 가운데 씨를 심습니다 . 아까운 씨를 땅에 뿌립니다 . 미래의 약속을 위해 현재를 포기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단 한번도 자신의 현재의 만족을 위해 사신 적이 없습니다 . 심지어 40 일을 금식하신 후에도 한 조각 떡을 얻기 위해 “ 하나님의 아들 ” 로서의 자신의 신분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 예수님은 늘 “ 하나님의 아들 ” 로 사시고 , 또 장차 자신의 몸을 드려 이룰 “ 하나님 나라 ” 를 위해 사셨습니다 . 예수님처럼 우리도 “ 하나님의 자녀 ” 로 살아야 합니다 . 에서가 죽도록 배가 고팠던 것처럼 , 우리에게도 늘 절박하게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 이런 것들은 자주 우리가 “ 하나님의 자녀 ” 이기를 포기하고 믿음으로 사는 대신 육체를 따라 살도록 요구합니다 . 하지만 우리의 삶은 우리의 현재에 있지 않고 , 우리의 미래에 있습니다 . 우리의 소망이 앞 날에 있고 더 멀리는 우리가 장차 들어갈 하나님 나라와 영생에 있습니다 .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 야곱이 미래를 위해 팥죽을 포기하고 “ 장자의 명분 ” 을 사들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날만을 생각하며 허송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 사실 야곱은 조용한 사람이지만 매우 성실하게 일하는 일꾼이었습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4 장 11,12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야곱은 특히 형에 대해서 얄미울 정도로 침착하고 단정했습니다 . 이는 그가 교활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 그가 조용히 그리고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 그는 열심히 일을 해서 가정을 세우고 , 열심히 일을 해서 열두 자녀를 키우고 , 열심히 일을 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일으켰습니다 . 야곱처럼 , 농부처럼 , 예수님처럼 먼 앞날을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오늘 열심히 일을 하면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 힘들어도 힘이 나고 , 슬퍼도 기쁘고 , 아파도 즐겁습니다 . 이것이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신자의 삶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특별한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냉수 한 그릇

www.youtube.com/watch?v=C3OjEijZx2M&feature=youtu.be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 창27:1~30 인터넷설교일부녹취

김성수 목사님 로마서 5강 1:00~끝까지 녹취

◑큰 자를 버리시고, 작은 자 야곱을 택하신다.

창세기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 보면, 구원의 그림이 확실히 그려져 있다.

▲야곱이 어떻게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가?

거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결과적으로 축복을 받은 야곱은 성도를 상징하고

에서는 이 세상에서 힘의 논리 속에서 살아가는 자연인들을 상징한다.

(에서와 야곱을, 누가복음의 맏아들과 탕자로,

또는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로 연결해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창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가 반드시 있다.

그 별미가 무엇인가?

야곱에게는, 그 아버지가 요구하는 별미를 만들어낼 힘과 능력이 없었다.

에서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활을 들고 나갔다. 별미를 만들 짐승을 잡겠다고,

그런데 그 과정에 어머니 리브가가 개입한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다. ↙

롬9:10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

▲여기에 ‘큰 자’, ‘작은 자’가 나오는데,

세상에서 ‘큰 자’는 천국에서 ‘작은 자’로

세상에서 ‘작은 자’는 천국에서 ‘큰 자’로.. 성경에 항상 이렇게 나온다.

하나님이 차남만 편애하시는가? .. 아니다.

사냥 잘하는 에서, 집에서 성실한 맏아들(눅), 동생을 쳐 죽일 만큼 용맹했던 가인..

하나님은 이들을 버리시고, 즉 택하지 않으시고,

사냥 못하는 무능한 야곱, 이름 뜻은 사기꾼

집에서도 말썽피워 인정받지 못하는 탕자,

자기 방어도 못하는 아벨.. 이름 뜻은 nothing

하나님은 왜 이런 루저loser들만 택하시고 부르시는가?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루저가 되어야 한다는 뜻인가? – 아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으려면, 이 세상에서는 성공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아니다.

위에서 인용한 롬9장에서 말하는 바,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라고 했는데,

그 말은 – 인간은 자기 공로를 자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유능함, 선함, 자기 의, 자기 능력으로 구원 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자도,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으면.. 택함 받은 자요,

세상에서 실패한 자도, 자기 의를 강력히 주장하고 나오면.. 버림받은 자이다.

에서, 가인, 맏아들은.. 자기 의를 주장할 만큼 유능, 똑똑, 탁월, 용맹했고,

야곱, 아벨, 탕자는..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무능, 문제, 유약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본문의 야곱은, 무능해서 형 에서처럼 사냥을 못 하니까,

도와주는 도우미가 등장하는데, 어머니 리브가이다.

우리의 구원은, 자기의 유능함과 능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무능하고, 누군가의 도우심이 필요하다가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이 세상에서 자기업적과 공로를 쌓고,

자기를 계발하고 성숙하여 큰 자가 되려고 한다. 상징적으로 ‘장자’가 되려고 한다.

자기 생각에는 그래야 아버지(하나님)가 기뻐하실 것 같으니까,

그래서 다 장자 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그런 사람을 유기시켜 버리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기꾼 (야곱의 이름 자체가 사기꾼)

그에게 구원의 축복을 주신다.

인간의 공로는, 그게 노벨상이든지, 효행상이든지, 뭐든지..

그게 구원을 받을 만큼 자격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 들고 나와서 구원 받으려 하다가는.. 실패한다는 뜻이다.

오직 사기꾼처럼, 도저히 자기 공로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인간,

그 처절한 바닥에 떨어져서,

그런 자신의 상태를 철저하게 자각하고,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이(이것이 회개)

하나님께 택함 받고, 구원함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이스라엘 12지파가 이 사기꾼에게서부터 나온다.

아버지 별미를 만들러 열심히 사냥 나간 사람은 유기시켜 버린다.

이게 바로 구원의 도리다.

▲하나님께서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을 잉태한 리브가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언약을 주신다.

요만한 행위를 하나 하기도 전에,

그 이유를 하나님의 택하심이 인간의 행함에 있지 않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라고

명확히 가르쳐 주신다. 롬9:11

다시 살펴보면,

하나님이 작정, 택하시고, 구원하실 자는,

세상에서 점점 ‘어린 자, 작은 자, 야곱’을 만들어 가신다. 섭리로!

실패케 하시고, 좌절케 하시고, 벽에 부딪히게 하시고, 낮아지게 하신다.

자기 실상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의만 간절히 붙들라고!

▲이것은 이삭도 마찬가지다.

아브라함 집안의 존재들의 존재 양태가 다 마찬가지다.

아브라함이 벌써 자기 능력으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다.

자기가 완전히 죽었을 때, 백세나 되었을 때, 그때 후손을 얻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삭을 주심을 통해 표현되었다.)

아버지 이삭 자신도,

그런 하나님의 연약한 자를 택하시는 역사가 없었더라면, 태어나지 않았을 사람이다.

이 택하심 받은 이삭의 집안은,

이 세상의 힘이나, 어떤 강함을, 그걸 근거로, 기준으로 흘러가면 안 되는데,

그 이삭은, 사람의 눈으로 봐서 강하고 힘 있는 자에게 유업을 물려주려고 하고 있다.

(이게 인간의 본능이다.)

그 때 언약이 개입한다. ‘그거 아니잖아’ 하고 이삭을 방해한다.

그 하나님의 개입이, 리브가를 통해 나타났다.

리브가가 연약한 야곱을 위해서, 이삭에게 드릴 별미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리브가가 에서라는 장남이 미웠을까? 아니라고 본다.

둘 다 쌍둥이다. 지금 리브가는 언약의 수행자로 나타난다.

아버지가 요구하는 별미를 만들 능력이 없는 연약한 야곱 대신에,

어머니가 별미를 만든다.

▲이때 야곱이 한 일은, 멍하니 가만히 있은 것밖에 없다.

엄마가 아버지 별미 만들어 주었고,

(예수가 아버지가 좋아하는 제물이 되셔서 별미를 예수님이 만들어 주셨다.)

옷도 야곱이 스스로 입은 옷이 아니었다.

(이삭의 축복을 받을 때) 리브가가 에서의 옷을 가져다가 야곱에게 입혀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왜 옷을 벗어서 제비 뽑아 가지라고 하셨나?

‘내가 벗은 옷, 너희들이 입고 와야,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있다’ 이 교훈 주신 것이다.

여기서 ‘에서의 옷’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다만 야곱은, 자기 옷(자기 공로)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옷 입고, 예수 라는 별미 아버지 앞에 들고 가는 사람이 성도다.

거기에 자기가 만든 옷 조금이라고 입고 들어가면, 그 사람은 천국 못 들어간다.

▲그래서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주인이 준 옷 안 입고 있던,

멋진 자기 옷 입고 있던 사람 잔치 자리에서 쫓아냈다.

그들이 쫓겨나서 바깥 어두운 데서 왜 자기 이를 갈까?

(어두운데 쫓겨나더라도, 이를 갈 필요까지는 없을 터인데.. 뭔가 분한 게 있다는 뜻이다.)

‘내 옷도 괜찮은데, 왜 나를 내쫓아?’

만약에 자기가 누더기 옷을 입고 왔더라면 ‘내가 쫓겨나도 당연하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갈았다는 것은 꽤나 자기가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옷을 입고 간 사람들, 다 쫓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야곱이 그때 위장을 해서 형의 옷을 입고, (자기 옷, 자기 공로가 아니라는 뜻)

아버지 앞에 섰을 때 이삭이 뭐라고 그러냐 하면,

22 야곱이 그 아비 이삭에게 가까이 가니 이삭이 만지며 가로되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하며..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아버지 이삭은.. 그가 야곱인줄 알았다는 것이다.

(눈을 못 보는 사람은, 특히 귀가 더 발달된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예수의 옷을 입고 선다.

그리고 뭐라 그래야 되느냐 하면,

‘나는 예수 안에서 구원 받은 예수의 동생, 작은 예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속으실까? (안 속으신다.)

하나님은 아신다. 내가 누구인지..

그런데 그 목소리보다, 옷에 관심 가지신다.

‘우리 아들 예수의 옷 입고 왔네? 합격, 구원!’

이것이 구원의 도리다.

아버지는, 아들의 옷보고 구원하신다. 소름끼치지 않으신가?

저는 설교를 준비하다가 ‘할렐루야!’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입고 온 옷을 보고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내 옷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

▲그런데 형의 옷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그 옷 속의 알맹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걸 우리 인생 살 동안에 겪는다.

그래서 우리가 왜 인생을 살 동안에, 자기 옷이 아니라,

예수님의 옷을 입고 가야하는지.. 우리가 배우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가 인생 살 동안, 절벽아래로 계속 우리를 밀어 버리신다.

깨어져서 ‘자기 옷'(자기 의)을 버리라는 것이다. 자기 옷(자기 공로)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기 옷이 뭔가 좀 있는 사람은.. 그것을 못 버린다.

더 꾸미려고 치장한다.

그래서 임금님의 잔치자리에, 그는 자기 옷을 입고 갔던 것이다.

▲그러나 나락으로 떨어져서, 자기 옷이 완전히 누더기가 된 사람은,

비로소 형의 옷을 대신 입으려고 스스로 원하게 된다.

‘나는 사기꾼 야곱이야. 내 옷으로는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없어!’

우리가 만들어 놓은, 무화과나무 잎사귀 치마는 아무 소용없다.

하나님이 다 찢어버리신다.

◑축복 받은 야곱, 그 이후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와 얍복강 가에 도달했을 때,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과 씨름하게 된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와 씨름하시는데,

야곱이 하나님께 지지 않는다.

이것이 ‘나’라는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의 고집이다.

나는 절대 나를 포기 못 한다. 하나님도 그런 사람을 못 이기신다.

결국 그를 죽이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환도뼈를 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져 주셨다.

▲그에게 주어진 이름이 ‘이스라엘-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

이것은 오명이다. 좋은 이름이 아니다.

이 고집불통, 나쁜 놈이란 뜻이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성도)의 이름을 ‘영적 이스라엘’이라 일컫는다.

그 오명을 그대로 갖다 쓴다.

왜 그 이름이 우리에게 붙여져 있나?

성도들은 뭐 잘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서 교회로 불러진 것이 아니라,

나와 싸워서도 이기려고 하는 자들 중에,

그 나쁜 사람들 중에.. 내가 은혜로 택해서 교회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구원하지 못할 자는 없으시다. 다만 자기가 선하고 훌륭하다는

즉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만 빼고는..)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나쁜 사람들, 고집불통)이다.

그 신이 되어버린 나, 하나님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그 나,

그 나를 죽이러(야곱과 씨름하러) 내 안에 성령이 들어오신다.

그리고는 나에게 전쟁(씨름)을 선포하신다.

그리고는 이 사람 육의 사람, 이것을 죽여 버리고

예수 안에서 몸과 몸이 하나가 되어 새 몸으로 나를 만들어 내신다.

그래서 필요하면 나의 환도뼈를 쳐 버리신다.

이것을 신앙생활이라 한다.

▲야곱이 이제 형을 만나서 형 앞에 가서 무릎 꿇는다.

그리고 ‘내 주여’ 라고 부른다. 어떻게 된 것인가?

예언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고 그랬는데, 왜 야곱이 에서에게 절하나?

하나님 나라의 진짜 큰 자는, 이 세상에서 ‘작은 자’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에서같이 세상에서 멋지게 안 살아도 된다.

진짜 하나님 나라의 큰 자는, 이 땅에서 낮은 자리에서, 보잘 것 없이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에서가 야곱을 섬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을 장자로 택한 이상, 그는 장자, 하나님의 아들들,

즉 ‘장자들의 총회’의 일원이 된다. 히12:23

▲그래서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손을 어긋나게 축복한 것이다.

요셉이 야곱을 제지하자

‘나도 안다. 그러나 놔 둬라. 이게 맞는 거야’

야곱이 왜 그랬을까? (또는 성경이 무슨 메시지를 주려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큰 자는, 하늘에서 작은 자이다.

이 세상에서 작은 자가, 하늘에서 큰 자이다.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에서

‘큰 자, 맏아들’이 아버지의 말 잘 듣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송 받으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자기 행위를 갖고 아버지를 탄핵한다.

‘아버지 내가 이렇게 잘 했는데, 왜 나을 위해 잔치 한 번 안 해 주시나요?’

그러나 둘째는 아버지 재산 다 탕진하고 돌아왔다.

돼지를 치면서(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동물) 세상 밑바닥까지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가 아버지의 노예가 되어 돌아온다.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는 것이다.

‘아버지 나 죽여도 괜찮아요.’ 라는 뜻이다. 죽으러 집에 돌아온 것이다.

둘째는, 내가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바로 이 ‘작은 자’가 천국에서 큰 사람이요,

‘장자들의 총회’에 참석할 진짜 장자(맏아들)이다.

아버지 말 잘 들었다고 하는 그 사람들에게..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래서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셨다.

그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한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요, 기독교다.

기독교인은 예수만 믿으면 된다.

예수 안에서 예수 옷 입은 자로 그 복음을 누리면 된다.

‘아니, 그러면 방종하며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탕자의 논리를 옹호한다고 질문하실 것이다.

인간의 행위는 인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온 탕자, 그래서 구원 받은 탕자는,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방종이 조장되지 않는다.

빌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인간의 행위가 뭐가 그리 대단한가?

사도바울이 자기가 율법의 모든 규례를 흠이 없이 행한 것을 가지고 배설물이라고 했다.

그게 진짜 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외식적으로 흠이 없었다는 것이지..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배설물이다.

그 개똥 같은 선행 몇 개 내놓고 자랑하면 안 된다. 함부로 위장하면 안 된다.

선행은 내 속에서 주님이 이루어 가신다. 거기에 순종하며 살면 된다. ▣ 복음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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